[기고] 임영호 상임감사위원의 「유라시아 친선특급 동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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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대륙의 동단에서 첫 발을 떼다
7월 14일 김포공항 출발.
# 출발하기 2시간 전에야 비로소 여행가방을 완성했다. 곤히 자는 마누라를 깨웠는데 잔소리가 없었다면 성인이 아니겠는가? 7시까지 김포공항에 도착하기 위해 새벽 4시 10분쯤 대전에서 출발했다. 서울의 한강은 조용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무서워서인지, 안개인 듯 구름인 듯 알 수 없는 이불을 덮고 조용히 자고 있는 듯했다.
7월 14일 9시 20분 KE2851 점보 비행기는 2시간 정도 걸리는 북경을 향해 이륙했다. 유라시아 횡단 친선 특급열차의 서막이 시작되는 것이다.
유라시아 친선열차 원정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작해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가는 1만 4400km 북선 노선과, 북경에서 출발해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 중간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북선과 합류하는 남선 노선이 있다. 나는 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2500km 남선행을 택했다.
# 우리나라는 섬 아닌 섬나라이다. 남북 간 철길이 끊긴 상황에서 유라시아를 관통하는 대륙철도망에 한반도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소망이다. 한반도 종단철도(TKR)인 경의선과 경원선, 동해선을 북한 종착역과 연결하여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중국횡단철도(TCR)를 잇는 실크로드 익스프레스(SRX)가 대한민국의 미래 그림이다.
이번 행사는 세계 GDP의 60%를 차지하지만 이념적·지리적으로 단절됐던 유라시아 대륙을 교통·물류·에너지망으로 연결해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어 통일의 초석을 마련하고자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의 일환이다.
사실 남북철도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하면 부산에서 모스크바까지 14일의 운송기간이 걸리지만, 현재와 같이 바닷길을 이용하면 30일 이상이 걸린다.
1896년 5월 고종의 특명전권대사인 민영환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다시 대서양을 거쳐 네덜란드에 도착한 후 유럽을 가로질러 한 달 반 만에 모스크바에 도착한 바 있다.
# 2시간이 지나자 북경의 하늘이 보였다. 뿌연 스모그가 낮게 깔렸으나 북경거리를 걸어보니 생각보다는 공기는 훨씬 깨끗했다.
오후에는 짬을 내 중국고속철도를 타보고 싶었다. 북경에서 117km 떨어진 천진까지 셔틀처럼 운행하는 고속열차를 탔다. 겉모양은 우리나라의 KTX산천처럼 생겼다.
중국의 고속열차는 우리나라보다 늦은 2008년 처음 운행을 시작했지만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의해 중국의 새로운 성장동력이자 핵심경제가치로 추진하며 세계 제일의 고속철도 건설국가가 되었다.
우리나라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지금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국가가 된 것이다. 속도만 해도 시속 600km를 달리는 고속열차 개발에 성공했으며, 선진국들의 2분의 1에서 3분의 1 가격으로 아프리카·남미·동남아시아에 수출도 하고 있다.
# 35분은 금방 지나갔다. 직선화된 선로 덕분인지 승차감이 굉장히 좋았다. 객실도 빡빡한 느낌을 주지 않았다. 중국 고속열차의 현재 최고 운행속도는 시속 350km이다. 우리의 305km보다 빠르다.
북경에는 세계 각국, 전국 각지로 가는 열차가 있어 출발하는 역이 각기 달랐다. 북경역, 북경남역, 북경서역, 북경동역, 북경북역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천진방향은 북경이남지방으로 가는 북경남역에서 탄다.중국의 고속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지참해야 한다. 승차권에 이름이 써 있고 표를 살 때도 우리 같은 외국인은 여권을 가지고 가야한다.
보안도 꽤 까다롭다. 가방은 검색대를 거쳐야하고 한 사람 한 사람 검색을 한다. 공항보다 철저하지는 않았지만 공항 입국절차를 밟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 고속열차를 내리면서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중국은 2008년 국제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4조 위안 이라는 큰돈을 고속철도건설에 투자하며 경기를 부양시켰다. 중국의 고속철도망은 1만 3000km이다. 우리는 경부선·호남선을 합해 600km 정도이니 중국의 내수시장이 부럽다.
흠이 있다면 우리보다는 싸지만 서민들이 타기에는 요금이 비싸다는 느낌이다. 1등석, 2등석, 일반석이 있는데 일반석이 50위안이다.
② 대륙을 달린 열차는 어느덧 몽골 초원에
# 7월 15일이 밝아왔다. 호텔에서 1박을 한 후 여유 있게 밥을 먹었다. 다만 열차 안에 화장실이 적어서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마음껏 먹기는 부담스러웠다.
아침 10시가 조금 못 되어 호텔에서 나왔다. 거리에 나오자 오토바이와 전기자전거의 행렬이 줄을 이어 달리고 있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오토바이보다 전기자전거가 부쩍 많아졌다는 것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시내를 주행하는 택시의 대부분이 북경 현대차였는데, 중국에서 오랫동안 산 분에게 물어보니 “한국의 현대차는 3년이 지나도 고장이 잘 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서 이미지가 무척 좋다”고 한다.
# 내 침대칸은 9호실 6번이었다. 열차는 11시 25분에 출발했다. 50여 명의 일행도 한껏 마음이 들뜬 표정이었다. 출발역에는 김장수 중국대사도 나와서 직접 환송해 주었다. 개인적으로 김 대사와는 국회의원 시절 함께 출장을 갔던 기억이 있어서 특히 반가움이 컸다.
우리가 출발한 북경역에서는 만주, 산동, 몽골, 상하이 등지로 가는 열차가 출발하는데, 우리가 타는 열차는 모스크바를 종점으로 1주일에 한 번 운행된다고 한다.
중국철도는 정부부처의 하나인 철도부에서 운영하다가 2013부터 우리나라 공사형태인 ‘중국철도총공사’가 운영하고 있다. 중국철도총공사는 우리나라와 달리 건설분야도 직접 총괄 관리하고 있다. 중국철도가 세계 고속철도 건설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중국 철도공사의 영업거리는 약 11만 2000km인데 반해, 우리나라 철도의 영업거리는 3825km에 불과하다. 종사하는 직원 수도 우리나라는 3만 명 수준인데, 중국은 214만 명 수준으로 약 70배에 달하고 있다. 다만 우리 코레일이 작년 말 약 1000억 원의 영업흑자를 기록한데 반해, 중국철도는 2011년 기준 약 5000억 원의 적자를 봤다는 점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다.
고속철도 후발주자지만 중국은 철도 선진국이다. 이에 우리 코레일도 올 가을에 북경 현지에 코레일 중국주재를 설립하고 철도부품 공급과 열차를 이용한 관광상품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다. # 하늘에는 구름이 깔려 있다. 내가 타고 있는 열차는 2인실, 4인실, 일반실로 구성 되어있다. 나는 2인실로 내부에 2층 침대가 있고, 세면대도 함께 있어 마음이 놓였다.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까지의 여정은 27시간 거리다. 열차 안에서 꼬박 하루 밤을 자면서 다섯 끼 식사를 해결해야 한다.
열차속도는 시속 80m~100km에 불과하지만 흔들림이 심했다. 중국철도의 레일은 약 25m 간격으로 연결되어 있어 열차가 이음매를 지날 때마다 ‘철커덕 철커덕’ 소리가 컸다. 우리나라 철도는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선로가 긴 장대레일을 사용하고 있어 승차감에 있어서는 훨씬 뛰어나다.
처음에는 풍광이 좋은 곳이 보이다가 갈수록 평야와 사막이 나타났다. 얼마 후 같이 탄 일행들도 풍경에 질린 탓이었을까 오후엔 누군가의 제안으로 철도문화재단 이사장인 김동건 교수를 초청해 우리나라 철도정책에 대한 설명과 토론을 시작했다. 논란이 있을 것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좀 비켜간 토론이었지만, 여행길의 대화는 이왕이면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것이 좋으니 아쉬움은 없다.
열차는 중국의 4개역을 거쳐야 몽골로 간다. 중국에서의 첫 번 째 역을 지나 오후 5시쯤 두 번째 역인 지닝역에서 10여 분 간 정차하면서 전기기관차를 디젤기관차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중국의 철도 전철화율은 50% 정도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2015년 현재 70% 수준에 이른다. 몽골은 전철화 된 구간이 없이 디젤로만 철도를 운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드디어 저녁 9시 50분쯤 중국에서의 마지막 역인 얼리엔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출국수속이 이루어졌다. 출국 신고서와 물품신고서를 작성해서 냈다. 출입국관리소는 공항과 같았다. 다만 출입국 관리직원이 열차에 올라와서 사람을 직접 확인하고 여권을 걷어가 일괄적으로 도장을 찍어서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이곳에서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기차바퀴를 교체하는 작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궤도 폭이 서로 다른 국가를 통과할 때 기차 바퀴를 교체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는데 오늘 그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궤도가 다른 국가를 이동할 때 여행객들은 원래 국경에서 가고자 하는 국가의 열차로 환승하고, 화물은 환적을 하는 것이 원칙이다. 환승과 환적 없이 타고오던 기차를 그대로 가지고 운행하려면 가고자 하는 철로의 궤간 폭에 맞추어 기차바퀴를 교체해야 한다. 이 작업을 대차교환이라고 하는데, 이 작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매우 기뻤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은 폭이 1435mm인 표준궤를 사용하고, 러시아와 몽골 및 러시아의 위성국가들은 폭 1524mm의 광궤를 사용한다. 왜 러시아는 광궤를 사용했을까? 옆에 탄 러시아 전문 교수가 “러시아는 서방의 침략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국방상 이유로 서방과 다른 철도궤도를 택했다”고 말해주었다.
열차는 우리 코레일의 철도차량정비단에 있는 모양과 비슷한 큰 창고 내부로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우리나라 KTX 고속열차를 정비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수도권철도차량정비단에 갔을 때 보았던 것과 비슷한 크레인으로 열차 하나하나를 직접 들어 올려 기차 바퀴를 직접 교체하고 있었다.
한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그 역에서 객차도 몽골사람이 운영하는 식당 칸으로 교체했고, 기관사도 몽골인으로 바꾸었다. 기차는 그 노선을 잘 아는 기관사가 운행해야 한다. 우리나라도 구간별로 지정된 기관사가 운영하고 있다. 아마도 지형지물과 신호를 잘 알아야 안전운행이 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 하루 밤을 국경에서 보내고 이제 몽골로 넘어간다. 몽골은 썸머타임을 실시하고 있어 우리나라와 시간이 같다. 7월 16일 새벽 2시 30분쯤 몽골 자민우드역에 도착했다. 입국신고를 했다. 몽골횡단철도(TMGR)의 시작이다. 몽골은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다. 그래서 철도를 이용해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한다. 철도의 화물수송분담율이 무려 73%라고 한다. 자민우드역에서 바다로 나가려면 수도인 울란바토르와 북경, 천진을 거치는 약 1963km 노선이 최단거리이다.
긴 여행 탓에 피곤한지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새벽 녁에 잠들었다 깨어보니 7시 30분이었다. 꿀 같은 단잠이었다. 일어나 밖을 보니 드넓은 초원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날씨도 좋았다. 멀리 뭉게구름이 보이고, 가끔씩 양떼들도 보였다.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무지개가 저 멀리서 아치 형태로 버티고 서 있었다. 기차는 운행 중 간간히 역도 아닌 곳에서 멈춰 섰다. 단선이기 때문에 마주 오는 기차를 비켜주기 위함이다. 몽골철도는 디젤로 운행되고 있었고, 시설은 낙후되어 있었다. 침목은 대부분 나무로 되고, 간간히 시멘트로 된 침목도 보였다. 열차는 몹시 흔들렸다. 헉헉거리며 힘겹게 달리는 이 기차도 오후 3시가 넘으면 울란바토르에 도착할 것이다.
7월 16일 오후 3시 20분 예정된 시각에 맞추어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철로가 단선이라 운행 중 정차가 잦았지만 다행히 예정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울란바토르는 1350미터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여름에도 그다지 덥지 않고 밤에는 춥기까지 한 도시이다.
역에 가까울수록 눈앞에 들어오는 풍경이 달라지며 점점 푸른빛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도시 형태가 조금씩 눈에 보이며 눈앞에 빌딩과 아파트가 우뚝 서 있었다.
③ 몽골의 심장 울란바토르에 입성
# 환영행사는 성대했다. 멀리서 오랜만에 들어본 악대 연주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울란바토르 시민들이 역에 나왔다고 했다. 흥분이 된 나는 잠시잠깐 내 지저분한 몰골을 잊어버렸지만, 하루 반나절 세수조차 하지 않은 꾀죄죄한 상태로 사람들 앞에 나설 엄두까지는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울란바토르 300만 인구 중 1%가 한국에서 일한다고 한다. 하다못해 이곳 현지 택시 운전기사도 어지간한 한국말은 다 알아듣는다고 한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한국에서 일했고 또 한국에서 번 돈으로 택시를 사서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이들이 중국인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점이다. 농담이기는 할테지만 가이드는 ‘4명이 술을 먹는데 일행 중 중국사람 한 명이 끼어있으면 나머지가 긴장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환영행사와 기념촬영을 끝내고 나서야 몽골철도공사 사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5월 코레일이 서울에서 개최한 OSJD 회의 때 만난 적이 있던 사람이었다. 그의 제의로 차 한 잔을 대접받았다. 그의 이름은 플레바타르인데, ‘플레’는 목요일 ‘바타르’는 용사라는 뜻이다. 아마도 이름에 비추어 목요일에 태어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바타르 몽골철도 사장은 1959년생으로 몽골의 철도학교를 나와 지금까지 철도분야에서만 근무한 철도전문가로 부사장을 거쳐 사장까지 된 사람이다. 얼굴생김은 전형적인 몽골리안 이었다. 그는 내일 우리가 타게 될 열차는 진짜 몽골의 기차로 승무원들이 모두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열차 내 서비스가 최고라고 자랑을 했다.
# 오후 늦게는 몽골 문화체험이 있었다. 활쏘기, 말타기, 몽골 전통민요 등을 소개하는 자리였다. 문화체험 끝부분에는 K-pop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몽골 젊은이들이 나와 공연을 보여주었는데, 신명나게 공연을 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K-pop을 얼마나 좋아하면 저렇게 열심히 춤을 출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우리 일행 중 재능이 있는 몇몇의 사람들은 우리의 전통 악기인 피리, 해금, 거문고 등의 연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곳은 밤 10시가 되어도 어둡지 않았다. 11시가 돼서야 모든 공연은 끝이 났다. 나는 오랜만에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을 보고 싶었지만, 마침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 있어 별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이 못내 아쉬웠다.
# 7월 17일 아침에 일어나니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일까지 날씨가 흐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몽골철도공사 본사를 방문했다. 우리의 수원역과 몽골의 울란바토르역은 이번에 서로 자매결연을 맺는다.
본사에 도착한 우리는 가장 먼저 몽골의 철도역사와 현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몽골철도는 1838년 러시아에 의하여 건설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철도보다 60여 년 빠른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몽골철도는 러시아의 죄수와 군인들이 동원돼 건설이 이루어졌는데, 그래서인지 러시아는 지금도 몽골철도공사의 지분을 40% 가지고 있고, 부사장 6명 중 수석부사장을 포함한 2명이 러시아인이 있었다.
몽골 철도의 총 영업거리는 1815km로 우리나라 철도 영업거리 3605km의 절반 정도이고, 종사하는 직원도 코레일의 절반인 1만 5000명 수준이었다. 철도현황을 들으면서 몽골철도가 러시아와는 굉장히 가까운 사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국민들이 러시아어는 기본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몽골 고유어가 있으면서도 공식적인 문자표기는 러시아문자로 하고 있었다.
# 몽골 내 모든 언론사가 온 것 같은 성황을 이뤘다. 우리 수원역과 울란바토르역이 체결하는 자매결연 행사가 여기서는 대단한 빅 뉴스였나 보다. 우리는 상호간에 자매결연 협약서를 주고받은 후 울란바토르역으로 향했다.
울란바토르역은 하루 2만 명이 오가는 국제역으로 여름 휴가철에는 특히 북경에서 올라오는 외국 관광객이 많다고 한다. 평소에도 이용객의 10% 정도는 외국인이라고 한다.
울란바토르역 역장은 여자였다. 이곳 몽골은 여성의 사회참여 비율이 높은 것 같았다. 역장의 이름은 ‘바트치미고’로 고등학교 졸업 직후인 18살에 입사해 지금까지 30여 년을 근무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앞으로 양 철도공사 간 교환근무와 관광분야에 대해 협력하기로 하였고, 각종 정보도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 올해는 마침 몽골과 우리나라의 수교 25주년이 되는 해로 몽골의 울란바토르역과 우리나라 수원역 간의 자매결연은 매우 뜻 깊은 행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④ 드디어 마주한 태고의 호수 바이칼
# 17일 오후 4시 25분 우리 일행은 러시아 이르쿠츠크를 향해 출발했다. 몽골철도 사장과 간부들이 역까지 나와서 융숭하게 환송해주었다. 몽골의 열차는 얼마 전에 제작했는지 중국의 열차보다 훨씬 안락했다. 특히 2인실 열차는 중국열차와 달리 2층이 아닌 단층으로 구성되어 있어 낮에 잠을 자지 않을 때는 의자로 사용할 수 있고, 피곤할 때는 누워서 낮잠을 잘 수도 있을 정도로 넓고 푹신해서 이용하기가 훨씬 편했다.
또 몽골열차의 승무원은 모두 21명인데 전부 여성이었다. 남성 승무원보다 훨씬 부드럽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이 승무원들이 몽골에서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5일간의 여정동안 여행객들에게 서비스하는 것 같다.
울란바토르 외곽으로 나오니 몽골 전통 주거지인 게르가 있었고, 나무로 된 주택들도 있었다. 소위 우리나라의 달동네를 생각하면 될 듯싶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일반 서민들은 주로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고, 인구의 약 10% 정도는 좀 넉넉한 사람들로 아파트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조금씩 내린 빗방울도 그쳤다. 여기 여름은 비가 자주 내리지만 양은 많지 않다. 기온도 여름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낮은 15도 정도이다. 열차가 고지대로 올라갈수록 나무도 보이고 초원도 더 푸르러졌다. 저 멀리 산중턱에 말무리가 보인다. 비 온 뒤 새싹이 올라와서인지 더 열심히 풀을 뜯는 모습이다. 몽골인들의 시력은 5.0정도라고 하는데, 매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초원을 바라보고 생활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울란바토르를 떠나면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태준 기념공원에 가보지 못한 것이다. 몇 년 전에 가 본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은 2000여 평의 부지에 선생의 가묘와 팔각정이 있었는데, 관리가 허술하다는 느낌이었다. 이번에 그 공원을 정부에서 개보수한다고 한다. 선생의 위명에 걸맞게 관리되기를 바란다.
이태준 선생은 1883년 생으로 세브란스의전을 나와 외국으로 망명한 후 1914년에 울란바토르에서 ‘동의의국’ 이라는 병원을 열고 몽골 국민들을 치료했으며,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로도 활동했다. 또한 독립자금 모집과 항일투쟁에도 참가하신 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21년 38살의 젊은 나이에 일본과 긴밀한 관계였던 러시아 백군에 체포돼 피살되었다.
# 울란바토르를 떠나 6시간 반 만에 몽골의 마지막 역 수흐바타르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러시아로 떠가기 위한 출국수속이 있었다. 1시간 반 정도 정차하는 동안 여성관리자가 열차에 올라와 여권과 얼굴을 자세히 보면서 하나하나 확인했다.
한 가지 불편했던 것은 열차가 정차하기 30분 전부터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분뇨를 수거하지 않고, 운행 중 선로에 그대로 투하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도 과거에는 이와 같은 비산식 이었는데, 80년대 후반부터는 분뇨를 오물수거함에 저장한 후 종착역에서 수거하는 저장식으로 바뀌었다.
몽골종단철도(TMGR)는 북쪽 국경인 수흐바타르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로 연결된다. 한반도 종단열차(TKR)가 복원되어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중국 베이징~몽골 울란바토르~러시아 이르쿠츠크를 지나 유럽으로 이어진다면 이 노선이 유럽으로 가는 최단노선이 될 것이다.
# 몽골을 떠나면서 몽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몽골인은 얼굴 형태만 놓고 보면 세계에서 우리나라 사람과 가장 많이 닮은 민족이다. 국토는 우리나라의 17배에 달하지만, 인구는 3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인천시 인구 정도다.
이렇게 적은 인구로 어떻게 국가경제를 영위해 나갈 수 있을까? 그 답은 풍부한 지하자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계 10대 자원국에 해당하는 몽골은 철도를 이용하여 세계 시장에 자원을 수출하고 있다. 최근 몽골 정부는 북한 나진항을 이용하기 위해 북한, 러시아 등과 협상 중에 있다고 한다. 러시아 국경과 가까운 광산에서 채굴한 석탄을 나진항을 통해 우리나라에 수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밤 12시가 다 되어 간다. 배가 출출하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이 열차에는 식당 칸이 없다. 그래서인지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의 인기가 최고다. 종이 포장된 소주 하나를 꺼내 반주를 하면서 라면을 먹었다.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더 맛이 좋았다.
# 기차가 러시아 영토에 들어오니 스마트폰의 시계가 1시간 정도 뒤로 갔다. 지금부터 한 시간만 더 가면 나오시키역에 도착한다. 그 곳에서 입국수속을 밟게 된다.
드디어 나오시키역에 도착하자 기차가 완전히 정차한 후 러시아인 관리가 올라왔다. 러시아인 특유의 모자와 관복을 입고 들어온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국신고서와 여권을 확인했다. 영어로 신고한 이름을 부르고 여권사진과 얼굴을 자세히 확인했다.
같이 탑승한 또 한 명의 관리는 기차에 수상한 물건이 있는지 침대칸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몽골에서는 여성들이 이 모든 입출국 심사를 진행했는데, 러시아는 남성들이 처리했다. 이들 관리가 하차한 후 열차는 잠시 조용하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는 7월 18일 토요일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피곤했던 탓인지 나는 곧 잠이 들었다.
# 다음날 아침 7시가 되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도시 울란우데에 도착했다. 5시간 정도 잔 것 같다. 몽골과 달리 나무와 농작물이 보였다. 위도가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왜 그럴까 의문이 들었다. 울란우데는 40만 명의 인구를 가진 제법 큰 도시다. ‘붉다’라는 뜻의 ‘울란’과 ‘우다강’을 합친 이름이란다.
시베리아 철도의 전원 공급방식이 몽골과 달라 기관차를 교체했다. 나는 그 동안 구름다리를 올라가 건너편에 있는 역 건물에 가 보았다. 바람이 시원하고 싱그러웠다. 초가을 날씨 같다.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러시아인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동양적인 얼굴에 가깝다고 할까? 물어보니 이 지역이 10세기 이후 몽골의 지배를 받은 때문이란다.
울란우데역은 내 고향역인 대전역과 규모가 비슷해 보였다. 선로는 전체적으로 10여 개가 있고 이 중 6개는 화물열차가 운행되거나 정차하고 있었다. 이 역은 몽골과 시베리아를 잇는 분기역으로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단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시아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과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9200km에 달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노선이다.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로 3세가 1891년 착공한 뒤 구간별로 개통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1916년에 완공됐다.
디젤기관차에서 전기기관차로 바꾼 열차는 7시 40분 울란우데를 떠나 드넓은 시베리아 평야를 향해 달렸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소나무와 같은 침엽수 숲이 나오더니 점차 자작나무 숲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 2시간 가까이 갔을까 드디어 태고의 신비를 버금은 청정호수, 바이칼이 보였다. 누군가 이 호수를 가리켜 시베리아의 진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바다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거대한 호수였다. 바이칼은 ‘풍요로운 호수’를 뜻한다. 크기는 남한 땅의 약 3분의 1 정도이고, 길이는 대략 640km, 너비는 24~79km, 전체 둘레는 2000km나 된다. 전 세계 담수의 20%를 차지한다고 한다. 넉넉한 모습에 신비로움까지 더해지니 그 광경이 가히 장관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이칼에는 20여 개의 섬이 있는데 징기즈칸이 묻혀 있다는 전설이 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여행의 즐거움 중 역시 으뜸은 울란우데에서 이르쿠츠크 구간을 지나는 열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이칼호수의 풍경이다. 물안개 솟는 호수 저 편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고, 열차가 호수 바로 근처까지 갔다가 자작나무 숲에 가려지고 다시 바로 앞에 호수가 나타나기를 5시간 동안이나 반복한다. 간간히 호수 가장자리에 수줍게 피어있는 들꽃이 나를 반기는 듯했다. 캠핑하는 가족들도 눈에 띄었다.
바이칼호수는 수심이 깊어 200m 이하는 거의 온도변화가 없고 미생물도 없다고 한다. 호수의 물은 400~450m 깊이의 물이 가장 깨끗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담아 올린 물을 러시아에서 생수로 판매되는데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나라 기업이 그 페트병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 생수를 마실 수 있는 행운이 있기를 기대해본다.
바이칼 호수의 자작나무는 끝이 없는 듯하다. 이 숲을 보고 있으니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연인을 태운 수레가 달릴 때 끝도 없이 펼쳐지던 그 새 하얀 숲과 혹한을 뚫고 광활한 설원을 달리던 기차가 생각난다. 기회가 되면 순백의 겨울 설경이 펼쳐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면서 ‘닥터 지바고’를 감상하고 싶다. ⑤이르쿠츠크에서 만난 러시아, 그리고 고려인
# 17일 오후 4시 25분 출발한 모스크바행 몽고열차는 거의 하루가 걸려 잠들어 있는 땅으로 일컬어지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는 러시아의 서쪽 모스크바로부터는 약 5000㎞,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는 약 4000㎞ 떨어져 있다. 한마디로 러시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베리아행 횡단철도를 타고 오는 동안 러시아철도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그 규모에 새삼 놀라게 되었다. 러시아철도는 철도연장이 8만 6000km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고, 종업원 수는 약 94만 명, 연간 수송인원 약 9억 5000명, 러시아내 수송분담율은 여객 39%·화물 86%에 달한다고 한다.
지난 5월 서울에서 개최된 OSJD(국제철도협력기구) 사장단회의에서 만난 러시아철도공사 사장 야쿠닌의 위상이 그렇게 높게 여겨졌던 것은 이러한데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싶다.
# 우리가 도착한 이르쿠츠크는 도시의 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다워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린다.
건축물은 서유럽양식에서 느낄 수 있는 단아함이 묻어났다. 역에 도착하니 이르쿠츠크의 부지사가 나와 우리를 맞이해 주었고, 주민들 또한 전통 복장을 입고 민요를 부르면서 웃음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또한 커다란 빵을 한 개 준비하여 우리 모두가 조금씩 떼어 먹도록 했는데,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우리를 환영한다는 의미라 생각한다.
이 아름다운 도시는 죄수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개척한 땅이란다. 그들 중 ‘데카브리스트’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감동적이고 헌신적인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전해 내려온다.
‘데카브리스트’란 개혁을 부르짖으며 혁명을 일으켰던 러시아의 청년 장교들을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이들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가하여 프랑스군을 쫓아 유럽까지 원정을 가게 되는데, 그때 그들은 서유럽의 새로운 흐름과 문물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는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의회 민주주의가 퍼져 나가고 있었으며, 농민들은 더 이상 비참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으로 무장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바로 진압되어 쿠데타에 가담한 사람 중 5명은 처형되고, 106명은 이곳 시베리아로 20㎏짜리 족쇄를 찬 채 유배 길에 오른다. 이들 중 기혼자는 18명이었는데, 러시아 황실에서는 이들의 부인에게 이혼한 후 개가하여 이곳에서 살든지, 귀족의 특권을 버리고 남편과 함께 시베리아로 떠나든지 양자택일하라고 했단다.
놀랍게도 11명의 부인이 시베리아행을 택했다. 찾아오기에는 너무도 먼 곳, 사람 사는 세상과 격리된 시베리아 오지에 설마 사랑하는 아내가 찾아올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이들은 남편을 쫓아 북풍한설의, 길도 없는 얼음판으로 뒤덮인 1만 3000리 머나먼 길을 찾아 나섰다. 귀족의 지위와 영화도 정의나 사랑 앞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이 머문 지 7~8년이 지나자 러시아 황제는 이르쿠츠크 인근 시골마을에서 이들 부부들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된다. 러시아 사회의 엘리트였던 이들은 이곳에서 시낭송회, 토론회, 음악회를 열어 이 지역에 지적인 토양을 심고 가꾸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오늘날 이르쿠츠크가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황실 근위대 장교로 반란에 가담했던 크루베츠코가 살던 집은 현재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고 그의 아내 예카테리나는 1854년 이곳에서 숨진 뒤 즈나멘스키 수도원에 묻혔다.
우리에게 ‘삶이 우리를 속일 지라도’라는 시로 잘 알려진 러시아의 국민 시인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와 그 부인들의 목숨을 건 감동적인 사랑에 헌시를 지었다. 헌시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베리아 깊은 광맥 속에 그대들의 드높은 자존심의 인내를 보존하소서 그대들의 비통한 노력과 높은 정신의 지향은 사라지지 않으리니.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또한 1812년 러시아와 프랑스 간 전쟁과 데카브리스트의 활동상을 소제로 ‘전쟁과 평화’라는 장편소설을 써서 목숨을 건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를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안드레이볼콘스키는 바로 그의 숙부인 볼콘스키를 모델로 했다는 설도 전해지고 있다.
# 7월 19일 일요일에는 러시아 문화를 들여다보는 문화탐방이 있었다. 시내 곳곳에 러시아의 정교회 성당이 보였다. 러시아는 정교회가 국교로 지정되기 전인 988년까지는 자연현상을 신격화한 다신교 사회였다.
당시 러시아의 가장 큰 지역국가인 키에프공국은 여러 갈래의 지역을 정신적으로 통합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민간신앙과 가장 가까우면서 현실 지향적이고 민족 지향적인 종교를 택하여 국교화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러시아 정교회라고 한다. 교권이 세속권에 종속된 셈이라고 할까?
시계를 보니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일요일이라서인지 미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30여명의 교인들이 경건한 모습으로 서서 반주도 없이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성모상이나 예수님상은 보이지 않고 성상화인 그림만 걸려 있었으며, 이십여 개의 촛대에 양초가 환하게 켜져 있었다.
# 시내중심가에는 바이칼호에서 갈라져 내려오는 앙가라강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나라 한강 크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진도의 울돌목처럼 물 흐름이 빨랐다. 강가의 철책에는 사랑의 맹세를 뜻하는 열쇠들이 매달려 있었다. 연인들끼리 죽어도 헤어지지 말고 사랑하자는 의미란다. 나라는 달라도 젊은이들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비슷한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의 이혼율은 80%수준에 이른단다. 결혼시기가 우리보다 훨씬 빠른 18세 정도이고, 사회주의국가의 특성 때문인지 여권이 강하고, 우리처럼 이혼을 백안시하지 않는 풍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앙가라강 주변에 ‘영원의 불'이라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추모하기 위한 횃불이 있었다. 이 불은 단 하루, 단 일초도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 언젠가 가스 취급 부주의로 이 불이 꺼진 적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구속되어 형사처벌까지 받았다고 한다. 바로 옆 주청사 건물 벽에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몽고나 서유럽으로부터 끊임없이 외침을 받아왔다. 따라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국가의 책무였으리라. 이 추모공원은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을 항상 잊지 않겠다는 국가 의지의 표현이다.
우리나라도 그동안 독립운동, 6·25전쟁, 월남전, 북한과의 소규모 전투 등에서 희생된 분들이 많은데, 이 분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주었는지 다시 한 번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주고, 국가가 어려울 때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 그날 오후 늦게 이르쿠츠크시의 인조잔디 축구장에서 유라시아 대축제가 열렸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러시아 횡단철도로 이곳에 도착한 북선 원정대(200명)와 나와 함께 북경에서 출발하여 몽고를 경유하여 올라온 남선 원정대(50명), 그리고 일제시대 때 중국으로 망명한 후 스탈린시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 후손과 이 지역 시베리아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한마당 축제였다. 우리나라 민속놀이인 기차놀이, ○×게임, 이 지역 주민과 급조해 만든 원정대원팀 간의 축구경기, 우리나라 음식 시식회와 함께한 저녁식사 등 이번 축제는 러시아 사람들과 우의를 다지는 뜻 깊은 행사였다.
이 축제의 참가자는 적어도 1000여 명은 되는 것 같다. 행사장에서 60대 중반의 고려인을 만났는데 중앙아시아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르쿠츠크대학건축학부에 유학 와서 고려인을 만나 결혼한 후 정착했다고 한다. 그녀는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의 고향은 포항이고, 몇 년에 한번씩 고향을 방문한다고 한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딸과 같이 왔는데 손자가 슬라브족과 닮은 것 같아 물어보니 러시아 사람과 결혼했단다. 앞으로 순수 고려인을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⑥ 29시간 여행길… 다시 노보시비르스크를 향해
# 7월 21일,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을 시작한 지 7일째 되는 날이다. 이곳 이르쿠츠크의 아침은 조금 쌀쌀한 15도 내외의 온도로 하늘은 청명하고 맑아 마치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를 연상케 했다. 반소매만 입고 산책하노라니 다소 한기가 느껴졌다. 북경에서부터 함께 해 온 50명의 대원들 대부분이 귀국길에 올라서일까 기분마저도 쓸쓸해지는 듯하다.
이르쿠츠크역은 정말 아름다운 역이었다. 1896년 지어진 바로크양식의 건축물로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자 시에서 관리하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역장은 40대로 마음씨 좋은 아저씨 같은 인상이었는데, 이름이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무척 길었다. 풀네임이 ‘도튜트린 블라지미르 아나똘래 비치하루’ 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 정차역인 노보시비르스크역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르쿠츠크역과 우리나라 춘천역 간의 자매결연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 평소보다 오전 일정을 서둘렀다.
이번 자매결연 행사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 나에게도 여러 가지 질문세례가 쏟아졌다. 질문 중 하나는 러시아에 대한 인상이 어떠냐는 것이었다.
나는 “과거 일제치하로부터의 해방시기와 6.25 전쟁 등 우리의 아픈 역사로 인해 양국 간의 사이가 우호적이지 못했던 점과 영화 ‘닥터지바고’에서 본 설원의 풍경 때문에 시베리아의 날씨가 엄청 추울 것이란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러시아 사람들은 매우 아름답고 마음씨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추운 겨울밖에 없을 것 같은 시베리아에 뜨거운 여름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 자매결연 조인식이 끝나자 역장은 직접 역구내를 안내해 주었다. 그는 안내 중 벽면에 붙어있는 표지판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 표지판은 바로 콜 자크 제독(1874~1920)을 기리는 표지판 이었다. 어제 시내 관광할 때 보았던 동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레닌혁명 당시 흑해함대 사령관으로 反볼셰비키 편에서 군대를 이끌며 혁명군에 대항했던 사람으로, 이곳 이르쿠츠크에서 패배해 당시 이르쿠츠크 시장과 함께 총살당한 후 차가운 바이칼호수에 수장된 인물이다. 이 지역에서 영웅시되고 있는 콜 자크 제독은 우리에게는 영화 ‘제독의 연인’ 이라는 작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역 내를 돌아보던 중 또 하나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역 한구석에 매달려 있던 커다란 종이었다. 이 종은 열차의 출발시간을 알려준다고 한다. 많은 관광객들이 이 종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무척이나 이채로웠다.
# 10시 54분, 드디어 다음 목적지인 노보시비르스크를 향해 출발했다. 노보시비르스크까지는 29시간을 가야하는 먼 여행길이다. 오늘도 열차침대에서 자야할 것 같다.
유라시아 원정대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러시아 횡단철도로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북선 원정대와 내가 함께한 북경에서 몽골을 경유해 이르쿠츠크까지 올라온 남선 원정대가 만나 최종 목적지인 베를린까지 총 15량의 열차 전체를 전세 내 함께 움직이게 된다. 내가 묵고 있는 객실은 2인실 침대칸으로 비교적 깨끗하고, 에어컨시설도 잘 되어 있어 약간 춥기까지 했다. 내가 이르쿠츠크까지 타고 왔던 남선열차는 북경에서 몽골을 경유해 움직이는 정기열차여서 현지 승무원들의 안내방송을 잘 알아들을 수 없어 답답했는데, 남선과 북선이 만나 함께 움직이는 이 열차는 차내 모든 상황을 코레일 직원들이 안내하고 공지하고 있어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열차는 동으로, 동으로 쉼 없이 달리고 있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보았던 자작나무 군락도 이제 더 이상 흔하지 않다. 산도 보이지 않는다. 광활한 푸른 대지만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⑦ 열차 안에서 만난 200인의 원정대
# 4시간을 달려 오후 2시 50분경 우리나라의 간이역과 비슷한 지마역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간의 휴식을 위해 정차했다. 신선한 공기를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는데, 뜨거운 열기가 훅하니 불어와 아주 덥게 느껴졌다. 러시아 승무원에게 물어보니 온도가 37도 정도라고 한다. 이곳의 온도는 우리나라보다 높았지만 습도가 아주 낮아 좀 있다 보면 그렇게 덥지는 않을 것이란다. 그늘에 들어가니 정말로 시원하기까지 했다.
열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관련 특강이 시작됐다.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바삐 갔는데도 강의 장소인 식당칸은 이미 만석이었다. 원정대원들의 학습열기가 대단했다. 주제가 우리의 여행지인 러시아와 관련된 것이어서 더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강사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학과 홍완석 교수였다.
# ‘21세기 한국, 왜 러시아인가’ 라는 주제로 러시아와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한 강의가 시작됐다. 그는 러시아를 양파에 비유하면서, 이 나라는 우리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나라이므로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저 보이는 대로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의 영토강국이고, 세계 최대의 자원부국이면서,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이기도 하다. 또한 선진 문화예술의 주요 수입처이기도 하며,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반해 냉장고, TV, 자동차 등 생활 가전제품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그런 국가란다.
특히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대북한 우호국으로써 평화와 안정의 담보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세계 여러 국가 중 우리나라의 브랜드 가치가 가장 높은 나라에 해당한다고 한다.
러시아와 우리나라는 영토분쟁과 같은 적대적인 현안과제가 없는 가까운 이웃국가이다. 양국의 공통분모를 찾아 조화롭게 상호이익을 추구한다면 우리나라의 국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미·중·일과의 관계 속에서 여타의 정치·경제 문제에 있어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는 이러한 주변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나라가 중국이나 미국과의 관계를 넘어 유라시아로 더 넓게 진출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유라시아 친선특급 프로젝트는 유라시아 국가들과의 자연스러운 민간 교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강의는 이렇게 미래 우리와 러시아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마무리되었다.
# 강의가 끝나고 1시간 정도 지나자 열차는 다시 정차했다. 시계는 18시 46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정된 시각에 정확히 도착했다. 정시운행수준은 중국이나 몽골보다 더 잘 관리되고 있는 것 같다.
잠시 정차하는 동안 같이 온 코레일 정현우 차량기술단장에게 ‘우리열차는 정차할 때도 에어컨이 나오는데 왜 이 열차는 나오지 않는지’ 물었다. 그는 “이 열차는 열차바퀴가 회전하면서 생기는 전기로 차내에 필요한 전기를 공급하기 때문” 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우리나라도 80년대 이전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전기를 공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은 별도의 발전차를 연결하거나 전차선을 통해 전기를 공급받기 때문에 열차가 정차해있더라도 차내 전기 공급이 중단되거나 하지는 않는단다.
특히 이 열차는 우리나라 열차에 비해 흔들림이 심해 승차감이 떨어졌는데 이는 차바퀴와 차대 사이에 완충작용을 하는 에어스프링이 없어서 그렇다고 한다. 기차관련 기술은 우리가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것 같다.
# 차내 식사는 식당 칸에서 이루어졌다. 식사시간은 흩어져 있던 대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교의 시간이 되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서로 신상털기가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원정대원은 총 20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중 50명이 언론사를 대표하는 기자들이다. 나머지 대원들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각계각층의 사람들로, 대부분이 국민공모를 통해 선발됐다. 70명 선발에 763명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이 뜨거웠다. 유라시아 대륙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대단한 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국민대표단으로 선발된 대원들은 문화예술이나 언어부문의 재능기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어디든 장소가 정해지면 그 곳에 적합한 퍼포먼스를 연출하곤 해서 여행의 흥을 한껏 북돋았다. 여행은 역시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이르쿠츠크에서의 축제 때 우리나라 경찰 복장을 한 대원이 있었다. 나는 그저 우리의 실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분장한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는 실제 경찰관이었다.
어떤 분은 손기정 선수의 외손자였고, 이준 열사의 후손도 있었다. 교과서에 나오는 분은 아니지만 이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의 자손도 있었다. 그 분은 행동 하나하나를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또한 우리 동네 골목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그런 평범하고 유쾌한 청년들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돌직구를 던졌다. “무슨 재능이 있어서 공모에 당첨되었느냐”고…. “심사위원에게 신나게 잘 논다”고 말했더니 뽑혔단다. 그렇다. 장거리 여행길에는 평범하면서도 그때그때 분위기를 띄워줄 수 있는 이들과 같은 분위기 메이커도 필요하다.
술기운이 돌아서인지 일찍부터 피곤이 엄습한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잠자리에 들었다.
# 창가에 빛이 든다. 깨어보니 새벽 3시다. 다들 잠든 깊은 밤에도 기차는 쉼 없이 달려간다. 힘이 들어서일까? 어느 작은 간이역에 잠시 쉬었다 가는 것 같다. 기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어깨에 수백 명의 생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때문에 장시간의 운전은 그들을 초긴장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일정시간 운전하고 나면 반드시 휴식이 필요하다.
깜깜한 어둠 속으로 간간히 기적소리가 들린다. 듣는 이도 없는데…. 마치 기차가 시베리아 깊은 산속에 사는 신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 같다. 고요한 정적을 깨는 듯하지만 오히려 기차의 또 다른 풍미로 느껴진다.
# 어제 저녁식사 후 강창희 전 국회의장을 만났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베를린까지 전 구간을 여행한다고 한다. 내일이면 귀국길에 오를 나를 위해 송별파티를 해주었다. 아주 찬 보드카 맛이 일품이었다.
러시아에서는 40도 이하의 술은 술로 치지도 않는단다. 빈속에 독주를 한 잔, 한 잔 마실 때마다 온 몸이 떨려오는 듯하다. 보드카는 보통 한 병에 1만 원 정도란다. 큰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가격이다. 가짜도 없단다.
일행에는 대전 KBS PD인 김애란 님과 한복전문가인 권진순 님도 있었다. 김애란 님은 잠시도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고 끈임 없이 무언가를 찍고 있다. 권진순 님도 식사시간조차 손에서 바느질을 놓지 않는다. 누가 시켜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일에 미친다는 것,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두 분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⑧ 대전과 형제처럼 닮은 ‘노보시비르스크’
# 아침 6시가 되자 해가 지평선을 물들이며 천천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강하게 솟아오르는 햇빛 때문인지 저 멀리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지척에는 핑크색 들꽃무리가 소담스럽게 나를 반긴다. 키 큰 자작나무는 맏형처럼 들꽃 주위를 빙 둘러쳐 병풍을 이루고 있고, 그 주변으로는 잔가지마냥 전기 줄들이 어지러이 늘어져 있었지만 위대한 풍경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이제 나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여행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아쉬움 때문일까? 갑자기 진한 커피 한 잔이 생각난다.
한겨울, 이 너른 평원에 눈이불이 소복하게 덮일 즈음, 덜컹대는 침대칸에 배 깔고 누워 흐릿한 전깃불을 벗삼아 ‘닥터지바고’를 읽고 싶다. 그리고 새벽녘 어슴푸레 밝아오는 초원의 햇빛 속에서 밤새 읽었던 내용들을 다시 한 번 반추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끝없이 펼쳐진 평원 위로 커다란 자작나무 숲이 고요한 평원을 시기라도 하는 듯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우리 앞으로 조그마한 건물 한 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마린스크역이었다. 잠시 정차할 모양이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초원 위에 초연히 앉아 있는 역사의 모습이 얼마나 여유롭게 보이던지, 마치 이 역은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이 아니면 이용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직원에게 정차이유를 물으니 이곳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의 구간은 열차의 전기공급 방식이 달라 기관차를 교체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나라의 철도는 대부분 교류방식으로 전기를 공급받고 있으며, 일부 구간만이 직류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전기공급 방식이 전환될 때는 차내의 교직절환장치를 이용하여 통과하고 있다.
낮 시간대의 정차가 오랜만이라서인지 많은 대원들이 열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아래 산책을 즐겼다. 역 구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이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던 꽃들이다. 이곳으로부터 들여온 꽃이었을까?
동으로 갈수록 마을과 도로가 점점 더 많아졌다. 마을 어귀 건널목을 지나노라니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자동차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인사라도 할 냥으로 창문에 고개를 들이밀고 바라보니 건널목 입구에 쇠로된 45도 정도의 경사진 방지 턱이 보인다. 건널목 가로막대가 내려질 때 함께 세워지는 방지턱인가 보다. 우리나라의 건널목은 보통 가로막대 하나로 차단이 이루어지는데, 이곳처럼 방지턱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도 고려해볼만 할 것이다.
# 24시간이 지나고 3시간을 더 가서야 노보시비리스크시에 도착했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오브강 유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1893년 시베리아철도를 건설할 당시 철도가 통과하기 쉽도록 강폭이 좁고 수심이 얕은 지형을 고른 곳이 바로 이 도시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었는데, 20세기 들어서면서 현재의 도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노보시비르스크시는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노보시비르스크시에 도착하니 주지사와 시장이 나와서 환영해주었고, 이르쿠츠크에서와 같이 하나의 커다란 빵을 구워 내놓고 우리를 대접해 주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오던 친한 친구를 맞이하는 냥 반갑게 맞이해 주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러시아에 대한 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 평상시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 때문인지 좀 어둡고 무뚝뚝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서 보고 느껴보니 그 어떤 나라보다도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 이곳 노보시비르스크시는 내가 온 대전과 많은 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구도 150만 명으로 비슷하고, 도시가 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는 역사도 그렇다. 전국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점도 유사하다. 특히 도심에서 30km정도 떨어진 곳에 ‘아카뎀고로도크’ 라는 연구타운이 있는데, 대전의 대덕연구단지를 생각나게 했다.
이 연구타운은 미국에 대응하여 1950년대 흐루시초프 시절 기초과학을 육성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핵물리연구소, 유기화학연구소, 유전자연구소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구소와 연구기관들이 바로 이곳에 유치되어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시에는 러시아철도공사의 서시베리아지사가 위치해 있다. 러시아 내 17개 지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사라고 한다. 이러한 중요도 때문인지 노보시비르스크역사는 기차형태의 건축물로 그 크기나 규모가 굉장했다. 건물의 색깔은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오묘했는데, 청색과 녹색을 혼합하면 이런 색깔이 나오려나? 청록색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역 구내를 둘러보니 선로가 14개 정도 되는 것 같다. 하루 이용객 수를 물어보니 약 4000명 정도란다. 역의 규모에 비해 이용객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는 듯싶다.
# 우리는 이곳에서 대전역과 노보시비르스크역 간의 자매결연 협약을 맺기로 했다. 행사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러시아에서 이번 행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들 입장에서는 그 멀리에서 200여 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찾아와 이런 교류의 장을 함께 한다는 것이 무척 고마웠으리라. 그래서인지 시베리아지사의 간부들과 직원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대전역장이 참석했더라면 노보시비르스크역장과 더 많은 실무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노보시비르스크역장은 키가 굉장히 컸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지사 간부들이 있어서인지 시종 쓴 웃음을 지은 채 오금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건배사를 하면서 삶이 고단할 때마다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를 읊곤 한다고 했더니, 참석자 중 한 명이 이에 대한 답례로 우리나라의 ‘사랑해’ 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모두들 무척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역장은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번 행사가 끝나면 유라시아 특급열차 프로젝트 과정에서 자매결연 관계를 맺은 역의 직원들을 초청해 우리 회사의 현황이나 우리나라의 문화 등을 소개시켜 주고 싶다.
# 우리가 묵을 호텔은 역 근처에 있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러시아의 역은 대부분 도심의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체크인하고 한·러 문화체험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사회주의 국가답게 도심 중앙에는 커다란 광장이 있었고, 광장 옆으로는 시청을 비롯한 주요 관공서들이 들어서 있었다. 레닌상과 노동자, 농민, 사무근로자를 상징하는 동상들이 서 있었다. 이 나라의 핵심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주는 듯했다.
문화체험 행사장에 들어서니 한식코너에 특히 많은 러시아인들이 줄을 서 있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러시아 사람들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우리나라 음식을 맛보고 있었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는 김치를 먹다 말고 얼마나 매운지 연신 물을 찾아댔다. 한 나라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음식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와 러시아 간에는 서로 알아가야 할 많은 과제들이 있는 것 같다.
⑨ 유라시아 친선특급 여정을 마치며...
# 7월23일 6시, 일어나니 부슬부슬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먹구름이 얇게 깔린 하늘을 보니 조금 내리다가 그칠 것 같았다. 오늘은 코레일과 시베리아 교통대학이 공동주관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국제 세미나』가 시베리아 교통대학에서 열리는 날이다. 내가 개회사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조금 일찍 발걸음을 재촉하여 시베리아 교통대학으로 길을 나섰다.
시베리아 교통대학은 철도분야에서 알아주는 대학으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으며, 의왕시에 있는 한국교통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어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에 철도가 개통 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32년에 세운 대학으로 현재 석/박사 과정으로 있는 학생이 무려 1만 3천명, 학사과정인 학생이 6500명이나 재학 중에 있다. 엄청나게 큰 대학이다. 이러한 대규모의 철도분야 전문대학에 남북한 학생이 단 한명도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쉬웠다. 과거에는 북한에서 온 학생이 상당 수 있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북한에 내부사정 때문인지 학생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다고 한다. 남북한 학생들이 이 대학에 함께 다니며 남북철도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연구한다면 통일이 되었을 때 남북철도를 운영하기가 훨씬 수월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우리 학생들이 여기서 교육받을 경우 수업료는 얼마냐고 물으니 1년에 2,000달러(232만원)정도이며 이는 모스크바의 2분의1 정도 수준으로 러시아 내에서도 저렴한 편이라고 한다.
# 나는 세미나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계 물류시장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면 물류 부가가치 창출은 물론 경제규모가 지금보다 훨씬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유라시아 대륙과의 물류 수송의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항공과 해운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철도에 비하여 비용 면이나 효율성면에서 훨씬 떨어진다. 따라서 이 세미나를 통하여 유라시아 익스프레스의 거시적 효과를 분석하고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발전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양국철도 및 운영기관 상호간 협력관계를 한차 원 높이는 계기를 만들자고 말했다
# 곧이어 우리나라의 박은경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였다. 박 교수는 코레일에서 20년 동안 근무하고 러시아 모스크바 교통대학으로 유학해서 공부했으며 지금은 영주에 있는 동양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유라시아 국가의 공동번영을 위해 TKR-TSR 철도연결이 실질적으로 하나의 대륙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을 재확인하면서 구체적인 협력방안의 하나로 EU의 상호교류 프로그램인 에라스무스플랜을 인용하여 제안하였다. * 에라스무스 플랜’이란 EU가 국가 간 이해를 높이기 위해 `87년부터 도입한 대학교류 프로그램으로 네덜란드 인문학자인 데시리우스 에라스무스의 이름에서 유래 그가 제안한 철도 에라스무스 플랜은 한국, 북한, 러시아, 중국, 몽골 등 5개국의 철도 대학생들이 건설기법이나 운송서비스, 차량 정비, 신호체계에 관한 경험과 기술을 상호 교환하는 교육프로그램을 통하여 서로에 대한 이해의 수준을 높이자는 것이다. 나는 이 제안이 당장 실천가능하고 통일의 다리역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참석한 많은 분들도 박 교수의 제안에 호응하였다.
# 세미나가 끝나고 시베리아 교통대학 마나나코프 총장일행과 점심시간을 함께 했다. 그들은 과거 한국에 방문했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었는지 한국 사람과 한국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나는 건배사에서 젊은 시절 방황할 때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과 푸시킨의 시를 읽고 삶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을 성찰할 시간을 가졌었던 옛 경험을 이야기하며 책속에 담긴 글자로만 접했던 스승의 나라 러시아에 오니 기쁘며, 앞으로 남북철도가 연결되어 철도를 통해서 다시 한 번 이곳을 방문하는 그날이 오기를 희망하다며 우리가 통일이 될 수 있도록 러시아가 도와 달라는 것으로 건배사를 맺었다.
# 어느덧 노보시비르스크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5시간을 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서울로 가야하는 시간이 됐다. 노보시비르스크로에서 서울로 가는 직항로도 물론 있지만, 일주일에 한번만 운행하는 노선으로 내 일정 시간과 맞지 않아서 시베리아횡단 철도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서 가야했다. 러시아 국내항공인 시베리아 항공에서 현지시간으로 오후 9시가 다 되서 출발했다. 그간의 여정으로 피곤했는지 곤하게 잠들어 있는데 눈꺼풀에 부딪치는 환한 빛 때문에 눈을 떴다. 창문 사이로 밝은 빛들이 스며들고 있었으며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의 10일간의 일정인 이렇게 끝이 났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정부는 왜 유라시아 특급열차원정대를 추진했을까? 외교부 조태열 차관이 이르쿠즈크 관계자에게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아마 러시아에 대한 한국 관광객이 적어도 10배 정도 늘어날 것이라고 그들은 예측했다. 그렇다. 일단은 러시아가 우리를 중요한 이웃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와 함께 하나의 대륙을 이루고 있다고 여겨야한다. 그래서 우선은 단절된 유라시아와의 물리적 인간적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상호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만들어야한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현재의 침체된 경제를 돌파하는 신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한다.
러시아와의 교류에서 한국의 창의성을 토대로 과학기술과 IT를 융/복합하여 새로운 시장과 일자리를 창출 하여야한다. 이런 경제·문화교류를 바탕으로 한 신뢰형성으로 한반도 평화 통일로 나아가야한다.
# 우리는 중국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 러시아 푸틴의 신동방정책에 발맞추어 우리의 주요 활동 무대의 지평을 유라시아 대륙까지 넓혀나가야 한다. 이번 행사에서 코레일은 그 발판을 만들고 초석을 다지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코레일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고 자부한다. 또한 앞으로의 주요 활동무대인 유라시아 대륙에서 철도의 역할은 더 없이 증대되어 갈 것이며 따라서 모든 분야에서 철도와의 융/복합을 시도한다면 대박을 낼 수 있다고 장담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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