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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 산해만리 펼쳐지고 – 북한산(영봉,백운대,남장대,의상봉)
1. 백운대에서 조망, 멀리 가운데는 국망봉, 그 오른쪽은 화악산, 명지산
試攀崎嶇石徑斜 험한 산길 더위잡고 오르니 비탈진 돌길이요
漸出濛籠巖嶺隔 점차 몽롱한 곳 벗어나니 바위산이 막혀 있네
俯臨絶谷但蒼茫 깊은 골짝을 굽어보니 아득하기만 하고
上到危巓增跼蹐 높은 정상에 올라 보니 더욱 오그라드네
晴峯距日纔數尋 청명한 봉우리는 하늘과 겨우 두어 길이요
雲棧凌虛幾千尺 허공에 걸친 구름다리는 몇 천척이라
一回徙倚獨嗟咨 한번 올라 배회하며 홀로 탄식하나니
八極須臾可揮斥 잠시나마 팔방을 멋대로 휘저을 만하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성애 (역) | 2019
—— 이장용(李藏用, 1201~1272, 고려 후기 문신)
주) 반계 유형원(磻溪 柳馨遠, 1622~1673)이 편찬한『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서 삼각산을 설명하는 대목에,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아들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와 한산(漢山)에 이르러서 부아악(負兒岳)에
올라 거주할 만한 땅을 살펴본 것이 바로 이 산이다. 그 가장 높은 봉우리를 백운봉(白雲峯)이라고 하고, 그 옆에 또
국망봉(國望峯)과 인수봉(仁壽峯)이 있는데 우뚝이 높이 솟아서 운무가 그 위에 있는 경우가 많다.”라고 하며, 고려
문신인 이장용(李藏用)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 산행일시 : 2024년 2월 18일(일) 오전에는 맑음, 오후에는 흐리고 비
▶ 산행코스 : 북한산우이역,육모정공원지킴터,육모정고개,503m봉(작은시루떡바위),영봉,하루재,백운대,용암문,
일출봉(618m),반룡봉(584m),동장대(시단봉, 601m),대동문,복덕봉(591m),보국문,성덕봉(623m),화룡봉(638m),
대성문,693m봉,대남문,남장대(△716m),청수동암문,나한봉(683m),부왕동암문,증취봉,용혈봉,용출봉,가사당암문,
의상봉,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북한산성 입구 버스승강장,구파발역
▶ 산행거리 : 도상 14.2km
▶ 산행시간 : 7시간 21분(06 : 42 ~ 14 : 03)
▶ 갈 때 : 우이신설선 북한산우이역에 내려 산행시작 함
▶ 올 때 : 북한산성 입구 버스승강장에서 버스 타고 3호선 구파발역으로 옴
▶ 구간별 시간
06 : 42 – 북한산우이역, 산행시작
07 : 00 – 육모정공원지킴터
07 : 30 – 육모정고개
07 : 50 – 503m봉(작은시루떡바위)
08 : 09 – 영봉(靈峯, 597m)
08 : 17 – 하루재
08 : 40 – 백운산장, 아침요기( ~ 08 : 50)
09 : 10 – 백운대(白雲臺, 836m), 휴식( ~ 09 : 20)
09 : 30 – 백운대암문(위문 衛門)
09 : 59 – 일출봉(618m)
10 : 20 – 대동문
10 : 28 – 복덕봉(福德峰, 591m), 칼바위 갈림길
11 : 05 – 대남문
11 : 20 – 남장대(△716m)
11 : 32 – 나한봉(羅漢峰, 683m)
12 : 08 – 증취봉(蒸炊峰, 589m)
12 : 33 – 용출봉(龍出峰, 509m)
12 : 50 – 의상봉(義相峯, 502m), 점심( ~ 13 : 10)
13 : 50 –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14 : 03 – 북한산성 입구 버스승강장, 산행종료
2. 산행 그래프
3. 인수봉
▶ 영봉(靈峯, 597m)
그간 설산 찾아다니느라 올 겨울 내내 잊고 있었던 북한산이 불현듯 생각이 났다. 거기에 겨울이 아직 남아 있을까?
이른 아침 인수봉은 어떤 모습일까? 인수봉을 바라보기는 아무래도 영봉이 최적지다. 그것도 하루재에서 영봉을
올라 한꺼번에 바라보기보다는 약간 더 멀지만 육모정고개에서 오르면서 앞 산릉에 둥두렷이 떠오르는 모습부터
보는 것이 좋다.
05시 34분 첫 전철을 타고 북한산을 향한다. 2량짜리 경전철인 우이신설선이 신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언제까
지 우이신설선이라고 할까 의아해 했는데, 알고 보니 우이동에서 신설동을 오가는 전철이었다. 육모정고개 가는
우이령길이 어슴푸레하지만 헤드램프를 밝힐 정도는 아니다. 짧고 허름한 소귀천을 지나면 아스팔트 포장한 대로는
비포장 흙길로 이어진다. 예전에는 진창길이기 일쑤였는데 흙은 갉아냈는지 매끈하다.
육모정공원지킴터는 예전에는 철조망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언제부터인가 왼쪽 데크로드로 돌아 화장실 앞을 지난
다. 탐방객 계수기를 통과하면 곧바로 좁은 울퉁불퉁한 돌길이다.
이곳에 올 때마다 육모정고개의 육모정(六茅亭)은 대체 어디에 위치했던 정자일까 궁금했다. 2016년 12월 22일자
오마이뉴스에 이종헌이 ‘강남 말고 북한산 깊숙이 숨은 청담동을 아시나요’라는 기사가 육모정의 위치를 어림짐작
하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날 청담동이라는 지명은 더 이상 찾아보기가 어렵다. 본래 청담동이라 함은 솔고개 아래를
흐르는 창릉천의 상류를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이곳은 사기막골, 또는 효자리계곡으로 불릴 뿐이
다. (…) 이곳 청담동에 와운루(臥雲樓)와 청담초당이 있었다. 조선 영조 때 기원 어유봉은 그의 <청담동부기>에,
인수봉과 천령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곳에 야트막한 동부가 있으며 그곳 물가 흰 바위 위에 와운루
를 지었다고 적고 있다.”
“(…) 여러 유산기 검토 결과 와운루는 대략 1850년을 전후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데 안타까운 것은
와운루의 퇴장과 함께 청담동이라는 지명마저도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제강점기 때 이곳
에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였고 그들이 와운루의 옛 터에 세운 육모정이 한동안 남아 있었기에 지금껏 이곳을 육모
정 터로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 본래의 좋은 이름이 있음에도 굳이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이름을 사용하
는 이유를 모르겠다.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육모정 터는 와운루 터로, 육모정 고개는 와운루 고개로 바꿔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신검사(神劍寺) 입구 지나고 용덕사(龍德寺) 뒤쪽 길을 간다. 용덕사의 우람한 바위가 용덕(龍德)이 아닌가 한다.
용덕사 앞 계류는 여태 겨울잠을 자는 중이다. 아무런 법문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더욱 고적하다. 출입금지 팻말
앞세운 흐릿한 산길이 잠깐이나마 발걸음을 망설이게 한다. 해골바위와 거북바위, 코끼리바위로 가는 암릉이리라.
눈길이다. 고개 돌린다. 높다란 직벽인 암장 지나고 그 옆 육모정깔딱샘은 볼품없이 말랐다. 나중에 물이 고인다
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육모정깔딱샘을 지나면 숨이 깔딱 넘어갈 듯한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된다. 돌계단이 더러 빙판이다. 땅 굽어보다
고개 들 때마다 날이 부쩍부쩍 환해진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뒤돌아 발로 수렴 걷고 동녘 붉은 기운 위로 솟는
해를 목도한다. 용문산 너머가 부상(扶桑)이다. 해가 뜨자마자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게 눈부시다. 아울러 주변은 온
통 황금색으로 도색된다. 데크계단 올라 육모정고개다. 곧장 영봉을 향한다. 햇살이 익기 전에 인수봉을 보련 하고.
조망 트일 바위는 꼬박 들른다. 골짜기 건너 우이암 아래 실루엣으로 보이는 상투바위 릿지가 손바닥에 저절로 땀이
괴게 한다. 그 왼쪽 너머 오봉, 자운봉, 만장봉은 아침 첫 햇살 받아 화사하다. 응달진 오르막은 빙판이다. 아무렇지
도 않았던 길에서 발바닥에 느끼는 미끌미끌한 감촉이 재미난다. 암봉 오른쪽 사면 돌아 오르면 503m봉 작은시루
떡바위다. 산릉 위로 둥두렷이 떠오르는 인수봉을 본다. 아름답다 말을 다할까.
503m봉 내리고 헬기장을 지나면서 바라보는 서울시내는 수중도시다. 롯데월드타워가 부표(浮標)다. 혹 달리 보면
속진에 묻힌 사바세계이기도 하다. 하늘 가린 숲속 길 잠시 지나고 슬랩 빙판을 오른다. 쇠난간에 매달려 오른다.
너른 암반인 520m봉이다. 특히 만경대와 용암봉 병풍바위가 잘 보이는 경점이다. 520m봉을 직벽 3m 쇠난간 잡고
내렸다가 한 피치 길게 오르면 영봉이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숨 막히도록 아름다운 모습이다. 햇살은 아직 다 익지
않았다. 황금빛이 감돈다. 나 혼자 보기 차마 아깝다.
4. 육모정고개 오르는 중에 일출, 용문산 너머가 부상이다. 앞 왼쪽은 불암산
5. 도봉산 우이암 아래 상투바위 릿지
6. 도봉산 자운봉, 만장봉
7. 멀리 가운데 오른쪽은 천마산
8.1. 가운데가 상장능선 상장봉
8.2. 503m봉(작은시루떡바위) 오르면서 바라본 인수봉
9. 수락산
10. 앞 왼쪽은 상장능선 왕관봉, 맨 오른쪽에 우이암이 보인다
11. 만경대와 인수봉
12. 인수봉
13. 하루재 지나 산모퉁이 돌면서 바라본 인수봉
▶ 백운대(白雲臺, 836m)
영봉에서 돌길 0.2km 주춤주춤 내리면 하루재다. 여러 등산객들을 만난다. 벌써 백운대를 올랐다가 오는 사람들은
일출을 보고 내려가는 중이다. 모두 얼굴이 환한 것은 백운대에서 멋진 일출을 보며 상기된 탓이리라. 하루재 지나
고 산모퉁이 돌 때 바라보는 인수봉은 또 다른 모습이다. 듬직하다. 귀바위 오버행인 저기를 암벽꾼 저마다 오르려
고 하다니 나로서는 얼른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인수암 지나고 골짜기 오르는 길은 온통 두꺼운 빙판이다.
굳이 아이젠을 매지 않아도 갈만하다. 앞서간 사람들이 아이젠 발걸음으로 무수히 쪼아댔으니 미끄럽지 않아 도리
어 심심하다. 나처럼 아이젠을 매지 않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 길옆 계류는 속삭이듯 졸졸 흐른다. 계류 건널 때
크지 않은 웅덩이가 어찌나 물이 맑던지 함부로 가다가 첨벙하고 빠지고 만다. 숨차게 올라 백운산장이다. 마당
탁자에 햇볕이 가득하다. 한 자리 차지하고 아침밥 먹는다. 빵과 인절미다. 부산한 동고비 한 쌍과 함께 먹는다.
백운산장 화장실을 들렀더니 동절기라고 폐쇄하였다. 그 주변 눈밭이 소변전용 남자화장실이다. 다시 바윗길을
오른다. 백운대암문(위문 衛門) 지나면 돌계단, 데크계단에 이어 슬랩이다. 눈과 얼음은 다 녹았다. 다만 무수한 발
길로 닳고 닳아서 미끄럽다. 쇠난간 꼭 붙들고 오른다. 걸음걸음이 경점이다. 보기 드문 절경이 펼쳐진다. 지척인
만경대와 노적봉이 만년설산이고, 그 너머 산성주능선 북사면 또한 설국이다.
마침내 백운대에 오른다. 바람이 세게 분다. 그렇지만 발아래 펼쳐진 산해만리 바라보느라 추운 줄을 모른다. 운해
위로 솟은 준봉들은 열국을 호령하는 군웅들이다. 동으로는 화악산, 명지산, 연인산, 봉미산, 용문산, 백운봉, 무갑
산이 하늘금이고, 남으로는 광덕산, 백운산, 수리봉이, 서로는 계양산, 철마산이, 북으로는 감악산, 마차산, 소요산,
국사봉, 왕방산이 하늘금이다. 태조 이성계가 백운대에 오른(登白雲峯) 소회는 이해할만하다.
若將眼界爲吾土 눈에 보이는 곳 우리 땅으로 한다면
楚越江南豈不容 초나라 월나라 강남 땅도 그 속에 있으련만
북한산은 고려 때에도 이름이 났다. 다음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 1328~1396)의 「삼각산을 바라보며(望三角山)」
이다. 시 중 “사람들은 뒷모습이 살진 양귀비라 하네(人言背後玉環肥)”라는 구절은 이색이 혹시 노적봉의 푸짐한
암벽을 바라보고 읊은 게 아닐까 한다. 고려 초에 창건되었다는 중흥사까지는 접근이 가능했을 것. 그쪽에서 보면
노적봉이 그러하다.
태초에 세 봉우리 깎은 듯 솟았으니
하늘 향한 선장 천하에 드물도다
내 일찍 이 산의 참된 모습 알았는데
사람들은 뒷모습이 살진 양귀비라 하네
三峯削出太初時
仙掌指天天下稀
自少已知眞面目
人言背後玉環肥
주) 선장(仙掌)은 천자의 몸 뒤를 가로막는 부채로 바람을 막고 해를 차단하는 용도로 쓰인다. 세 개 봉우리가
선장과도 같다는 의미이다.
14. 멀리 가운데는 용문산
15. 앞은 불암산, 그 뒤는 천마산
16. 왼쪽은 예봉산, 그 오른쪽은 검단산, 맨 오른쪽은 무갑산, 앞은 망우산, 아차산 연릉
17. 맨 왼쪽은 천마산, 그 앞은 불암산, 맨 오른쪽은 용문산, 가운데는 봉미산
18. 멀리 가운데 서리산과 축령산이 살짝 보인다
19. 멀리 가운데는 천마산
20. 멀리 가운데는 불곡산, 그 오른쪽 앞은 사패산, 멀리 맨 오른쪽은 국사봉
21. 멀리 뒤쪽은 가운데는 국사봉과 왕방산(오른쪽)
22. 백운대에서 북서쪽 조망
23. 멀리 왼쪽부터, 광덕산과 백운산, 관악산, 안양 수리산, 앞 가운데는 보현봉
24. 원효봉과 염초봉(앞)
북한산의 작명 유래에 대하여는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의 『서울의 산』(1997)이 자세하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 부아악은 문헌에 보이는 북한산의 가장 오랜 이름으로 삼각산의
한 봉우리인 인수봉 뒤에 튀어나온 바위가 꼭 어머니가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인수봉의 모양이 그 밑에서 보면 남근과 비슷하여 불알의 음독이라는 설과 부아는 불뫼(火山)
의 불을 말한다는 설도 있다. 부아가 불의 표기이므로 부아-불-火-華로 바뀌어 화산이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또 북
한산의 순수한 이름은 산을 신처럼 숭배해 온 사람들에 의해 산신령이란 뜻의 ‘부루카모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삼각산이 ‘火山’이기 때문에 ‘火’를 피해서 ‘華’로 썼다고도 하지만 이존오 ㆍ 오순 등의 삼각산을 읊은 시문을
보면 종종 부용이나 연꽃을 연상하여 지은 글들이 많다. 이로 보아 이 산의 세 봉우리가 연꽃이 핀 것과 비슷하다
하여 불교인들이 연화산(蓮華山)의 준말로 ‘華山’이라 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위의 글 중 “이존오 ㆍ 오순 등의 삼각산을 읊은 시문을 보면”에 그 시문을 따로 소개하고 있지 않아 여러 자료를
찾아서 알아냈다. 석탄 이존오(石灘 李存吾, 1341~1371)의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삼각산을 바라보다(還朝路上望
三角山)」가 그 하나이고,
세 떨기 기묘한 봉이 멀리 하늘에 닿았으니
신비한 조화 구름과 이내가 쌓이었네
우러러보면 날카로운 긴 검을 찌른 듯
가로 보면 올망졸망 푸른 연꽃 솟은 양
몇 해 동안 저 산 절에서 글을 읽었지
두 해를 한강가에 묵어 지냈었네
산천이 무정타 그 누가 일렀던고
오늘에 맞 바라보니 가슴 뭉클하구나
三朶奇峯逈接天
虛無元氣積雲煙
仰看廉利攙長劍
橫似參差聳碧蓮
數載讀書蕭寺裏
二年留滯漢江邊
孰云造物無情者
今日相看兩慘然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이존오보다 한 세대 위의 사람인 오순(吳洵, 1306~ ?)의 「삼각산을 바라보며(望三角山)」가 또 그 하나이다.
허공에 우뚝 솟은 세 송이 푸른 부용
아득한 연기와 안개는 몇 만 첩인가
문득 생각하나니 지난 그 때에 다락에 기댔을 때
소사의 두어 번 종소리에 해가 졌었느니
聳空三朶碧芙蓉
縹緲煙霞幾萬重
却憶當年倚樓處
日沈蕭寺數聲鍾
ⓒ 한국고전번역원 | 김달진 (역) | 1968
주) 소사(蕭寺)는 양무제(梁武帝)가 절을 많이 지었는데, 그의 성이 소씨(蕭氏)이므로 절을 소사(蕭寺)라 하였다.
특정한 절이 아니라 절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25. 앞은 노적봉
26. 멀리 맨 왼쪽은 화악산. 그 오른쪽은 명지산, 연인산, 앞은 수락산 주봉
27. 멀리 왼쪽은 용문산, 가운데는 예봉산
28. 오른쪽 멀리는 국사봉과 왕방산, 불곡산 뒤로 소요산이 흐릿하게 보인다
29. 백운대
30. 노적봉
31. 용암봉 병풍바위와 만경대(오른쪽)
32. 가운데는 영봉, 그 뒤는 오봉
33. 앞 왼쪽부터 형제봉, 백악산, 인왕산, 안산. 관악산, 앞 왼쪽은 남산
34. 보현봉
35. 멀리 왼쪽부터 청계산, 광덕산과 백운산, 관악산
▶ 의상봉(義相峯, 502m)
백운대에서 사방 둘러보는 가경을 이대로 두고 가는 것이 퍽 아쉽지만 점점 심하게 불어대는 찬바람을 못이기는 체
하고 발길 돌린다. 이다음 볼거리는 만경대 사면을 등로 따라 돌면서 백운대와 염초봉, 노적봉을 지근거리에서 보는
것이고, 이어 용암문 지나 일출봉에서 용암봉 병풍바위와 만경대, 영봉을 보는 것이다. 노적봉에 올라 만경대와
백운봉, 인수봉을 보는 것 또한 북한산에서 손꼽히는 가경이지만 노적봉은 오르지 못하게 막았다.
하늘은 점점 흐려지지만 시계는 맑다. 용암문 가는 길은 백운대를 오르내릴 때와는 다르게 한갓지다. 노적봉은 사시
사철 각각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다. 눈 덮인 푸짐한 모습이 포근한 느낌이 든다. 노적봉 안부 지나 숲속 길 돌 때 잠
시 눈을 휴식한다. 용암문 지나고 성곽 길로 일출봉을 오른다. 눈길이다. 성곽 여장에 불어오는 바람이 세다. 만경대
와 용암문은 언제나 정색하여 꼿꼿하다. 도무지 농담이 끼어들 틈을 보이지 않는다.
작년 봄날 이곳을 지날 때 성곽 돌 틈에서 앙증한 알록제비꽃을 보았다. 지금은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일출봉
을 길게 내렸다가 반룡봉(盤龍峰, 584m) 잠깐 넘으면 동장대 시단봉(柴丹峰, 601m)이다. 대동문은 공사를 마쳤다.
날씨가 을씨년스럽게 변한다. 그래서인지 여느 때는 북적이던 대동문 주변이 썰렁하다. 이다음 경치는 보국문 지나
성덕봉(聖德峯, 623m)에 올라 보현봉과 그 시원스런 자락과 형제봉, 백악산, 인왕산, 안산 등 연봉을 보는 것이다.
소백산 신선봉 자락의 구봉팔문을 떠올리게 한다.
대성문에서 오른쪽 사면 돌아 대남문으로 가는 편이 수월하지만 보현봉 능선과 만나는 693m봉을 오른다. 가파른
돌계단은 설벽으로 변했다. 693m봉 석문을 지나 보현봉 오르는 릿지와 그 남벽을 내려 사자봉을 가는 릿지가 그립
다. 대남문이 바람골이다. 삼삼오오 등산객들은 대남문 바깥 양지쪽에 모여 휴식하고 있다. 문수봉은 오른쪽 사면을
돌아 넘는다. 청수동암문 지나 슬랩 섞인 오르막 끄트머리는 △716m봉 남장대다. 삼각점은 서울 22, 1998 재설이다.
전에는 남장대에서 바라보는 나한봉이 더벅머리로 그 나름대로 멋있었는데 북한산성 시절의 모습을 복원한다 하여
정상을 깎아 영 볼품없이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슬랩 쇠난간 붙잡고 내려 성랑지 지나 나한봉을 오른다. 여기서
보는 문수봉 암릉과 그 너머 백악산, 인왕산, 안산이 또 다른 모습이다. 나월봉 능선 오르는 길은 진작부터 막았다.
오른쪽 사면을 길게 돌아 넘는다. 이어지는 가파른 내리막은 데크계단으로 덮었다. 어째 의상능선을 간다는 게 손
안 대고 코푸는 격이다.
부왕동암문 지나 암벽 연습장 옆으로 슬랩 오르고 좁은 바윗길 지나면 철모바위 증취봉이다. 너른 암반이 오늘은
한가하다. 이다음 경치는 용혈봉에서 건너편 용출봉의 단아한 모습을 보는 것이다. 내가 의상능선을 즐겨 찾는 이유
이기도 하다. 의상능선 봉봉이 그렇듯이 용혈봉도 암봉이다, 어느 해 여름 장마철에 여러 사람이 이곳에서 낙뢰로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용출봉은 야속하도록 무심하다. 용혈봉 내리는 슬랩도 데크계단으
로 덮었다. 도대체 손맛 볼 데가 없다.
용출봉 오르는 등로 옆 암장에 세로로 새긴 ‘紫明海印臺’ 각자가 선명하다. 산자수명(山紫水明) 해인삼매(海印三昧)
대(臺)의 줄임말로 ‘산은 단풍이 들어 붉으며 물은 맑고, 바다와 같은 부처의 지혜를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부언하자면 해인삼매는 바다에 풍랑이 쉬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도장 찍히듯 그대로 바닷물에 비쳐 보인다는 뜻으
로 모든 번뇌가 사라진 부처의 마음속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업이 똑똑하게 보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슬랩 철계단 올라 용출봉이다. 용출봉 내리는 슬랩 덮은 데크계단마다 또 경점이다. 삼각산의 진경을 본다. 가랑비
로 흐릿해졌다. 가사당암문과 국녕사 갈림길 지나고 바윗길 잠깐 오르면 의상봉이다. 바람이 거세게 분다. 의상봉
암반에서 가부좌 틀고 삼각산의 진경(나는 여기가 북한산 제1경이라고 주장한다)을 바라보며 탁주 마시려던 계획을
수정한다. 그 뒤쪽 소나무 숲 바위벽에 기대어 점심 겸해 탁주 독작한다. 탁주 맛이 쓰다.
의상봉 내리는 길. 예전에 짜릿한 손맛 보던 슬랩이 사라진 지 오래다. 쇠난간을 붙잡거나 철계단 통통 내린다. 급전
직하로 떨어지는 내리막이다. 기어코 발걸음 재촉하는 가랑비 뿌린다. 간혹 빙판에다 이래저래 미끄럽다. 삼천사
갈림길 지나고 가파른 내리막은 수그러든다. 호젓한 숲속 길 이슥하니 지나 북한산성 대로다. 갑자기 환속한 어수선
한 기분이 든다. 버스승강장도 그랬다. 길게 줄서서 간신히 올라 탄 버스가 숨 막힐 듯이 빽빽하다. 저쪽 승객 한 분
이 말씀하기를, 노고산 예비군 훈련하는 날이면 이나마도 탈 수 없다고 한다. 밖은 비가 내린다.
37. 앞 왼쪽부터 족두리봉, 비봉, 문수산 두꺼비바위. 멀리 가운데는 계양산
38. 앞은 문수산 남릉, 멀리 가운데는 관악산
39. 멀리 가운데는 감악산
40. 앞 왼쪽부터 백악산, 인왕산, 안산
41.1. 앞 가운데는 의상능선 용출봉
41.2. 멀리 가운데는 감악산, 그 오른쪽은 마차산, 앞은 원효봉
42. 용출봉
44. 용혈봉에서 북서쪽 조망
45. 용출봉에서 북서쪽 조망
46. 원효봉
47. 북한산성 주차장에서 바라본 의상봉과 용출봉(오른쪽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