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이 깊은 집
이관묵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내다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뒤돌아 허공에 큰 울음 던지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그로부터 매일 달덩이 만한 소 울음이 몸이 되고 밤이 되는,
마당 넓이의 누런 가을을 종일 도리깨로 털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애지}, 2024년 가을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서럽고 원통한 사람은 고향이 없는 사람이고, 그보다 더 서럽고 원통한 사람은 나라가 없는 백성들일 것이다. 남자는 짐을 지고 여자는 보퉁이를 이고 문전걸식을 하며 떠돌던 시절도 있었고, 나라를 잃고 쫓겨나 일엽편주와도 같은 조각배에 올라타 동포들의 살과 뼈를 발라먹고 살아남은 ‘보트 피플들’도 있었다. 이 세상의 행복의 척도는 고향(집)과 나라이며, 이 고향과 나라 없는 사람들은 달콤한 잠과 행복한 꿈은 커녕, 그 어떤 안전장치와 보호장치도 없는 ‘떠돌이-나그네들의 신세’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향이 없는 자도 인간이 아니고, 나라가 없는 자도 인간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모르고, 부모형제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언제, 어느 때, 어디서, 어느 누구의 자손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새해 첫날이나 추석명절에도 오고 갈 곳이 없다. 이민족의 말발굽에 조국의 산과 들이 짓밟히고 그의 부모형제들과 그의 동포들이 뿔뿔이 흩어져 이역만리로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부랑자들과 난민들의 신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집은 존재의 근거이며, 그의 행복이 자라나는 곳이고, 고향과 조국은 그의 존재의 뿌리이며, 그가 반드시 그의 형제와 동포들과 함께 되돌아가야 할 곳이다. 집과 고향과 조국이 있는 자는 추억이 있는 자이며, 추억이 있는 자는 이관묵 시인처럼 [마당이 깊은 집]에서 자나깨나 지난날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의 행복을 연주해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농촌공동체가 자연 그대로 살아 있었고, 산업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이전의 세대인 이관묵 시인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짐승이 하나가 되는 ‘삼원일치의 시대’에 살았던 것이다.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내다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에서 나는 살았던 것이고,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 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에서 나는 살았던 것이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뒤돌아 허공에 큰 울음 던지던” 그런 집에서 나는 살았던 것이고, “그로부터 매일 달덩이 만한 소 울음이 몸이 되고 밤이 되는/ 마당 넓이의 누런 가을을 종일 도리깨로 털던” 그런 집에서 나는 살았던 것이다.
정든 주인과 정든 집을 떠나기 싫었던 소와 정든 소와 정든 소와 함께 영원히 살고 싶었던 소망이 이관묵 시인의 [마당이 깊은 집]에는 배어 있는 것이고, 그 이별의 안타까움이 서정시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별은 모든 인연의 끝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가슴 아픈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이별의 아픔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와 나는 그처럼 잠 못 이루며 슬퍼했던 것이고, 그 반면교사로서의 이 세상 사람들과의 인연을 더욱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도 정이 있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정이 있으며, 인간과 짐승 사이에도 정이 있다. 정이란 믿음이고 사랑이며, 모두가 이 우주 속의 한 가족임을 의심하지 않을 때 피어나는 ‘인간 사랑의 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추억이 없고 악몽만 있는 ‘떠돌이-나그네들’은 모든 것을 은폐하지만, 악몽이 없고 추억만 있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미화시킨다. 추억의 본고장은 고향이고 집이고 조국이며, 그곳에서 나는 전설, 또는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나는 시인이고 화가이며, 나는 나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시를 쓰고, 그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그림으로 그린다. 이관묵 시인의 [마당이 깊은 집]의 주인공은 ‘나’이며, [마당이 깊은 집]은 나와 소와 우리 가족이 하나가 되는 그런 삶을 살았던 지상낙원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추억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이란 되돌릴 수 없는 사건과 인연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심리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가 있다. 되돌릴 수 없는 사건과 인연을 되돌리고 싶어하니까, 그 간절한 마음은 더욱더 애틋해지고, 이 더욱더 애틋해지는 마음이 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불가능은 없다. [마당이 깊은 집]은 ‘마당이 깊은 집’으로서의 시인의 마음과 시 속에 사실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 어느 때나 되돌아가 외양간의 누런 소와 함께 살며,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이 깊은 집]----.
언어는 시인의 육체이자 영혼이고, 언어는 시인의 고향이자 영원한 조국이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시인은 영원하다.
첫댓글 어릴 적 방학 때마다 갔던 외갓집 풍경이
또렷한 그림으로 살아나는 시
따뜻하고 아름다운 시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