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더스 [8]
기사에 어급된 원고 중 한 명인 박영자 씨에 따르면 "아파 죽어가도 의사 하나 안 내려다보고 오로지 성병 검진만 했습니다. 성병 검진은 미군을 위해서, 미군의 요청에 의해서 해준 거지 우리를 위해서 해준 거 아니잖아요," 또한 박영자 씨는 기지촌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자발적인" 매춘이라는 대중적 인식에 반론을 제기했다. 직업소개소에 속아서 온 여성들도 있었지만, 어떤 종류의 일을 하게 될지 알고 온 여성들이라도 폭력적인 조건에 동의한 적은 없다는 지적이었다.
"10대임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상대하는 미군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다섯 명 이상입니다. 이런 것이 너무 무섭고 싫어서 도망가면 찾아 잡아 오고 때리고, 도와달라고 이야기하면 포주한테 일러서 빚을 올려 다른 곳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를 읽으며 나는 엄마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일월칠일일월칠일일월칠일일월칠일일월칠일........나는 이 날짜가 내 생일과 관련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엄마는 미래를 엿보고 기지촌 여성 원고들에 연대하는 목소리를 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에 제니가 나를 보러 왔다,제니는 내 과거에 있어서 반석 같은 존재였고, 성인이 된 후 만나는 친구들 중에 엄마를 아는 유일한 친구였다., 하루는, 밤에 우리 집 길 끝에 있는 오래된 창고를 개조한 제너레이션X라는 게이 클럽에 갔다. 불과 한 블록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내리막길이라 덩어리진 눈과 얼음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서 우린 넘어질까 봐 조심조심했다. 바에 앉아 칵테일로 몸을 녹인 후, 나는 제니에게 엄마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을 얘기했다.
제니는 입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지만, 내게서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껴 울면서, 제니는 컬이 느슨하게 풀린 금발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보았다. 마침내 입을 열 수 있게되자, 제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무 불공평하네." 친구들이 보인 반응 중 가장 힘이 되는 말이었다.아마도 여느 친구들과 다르게, 제니는 우리 엄마를 정신질환 뒤에 숨은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한때 사랑을 주었던 진짜 인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리라
몇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내가 엄마를 위해 요리하게 되었을 때,제니는 전화로 이렇게 얘기했다. "오, 그레이시, 모든 게 끝났을 때, 네가 어머님을 위해 최선을 대했다는 걸 알았으면 해."
엄마가 처음 정신건강 관리 체계에 포함되었던 1990년대에는 조현병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많았다.
"제3세계에서 발병지속 시간이 더 짧다" 는 것이나 비서구 국가 사람들은 "거의 완전한 완화"를 경험할 확률이 열 배 더 높다는 것. 또는 "미국 문화에서 조현병 치료 방식은 반복적으로 환자의 사기를 꺾고 절망적인 상태로 만들어 상황을 심각하게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세계 어딘가에서는 조현병에서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미국은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엄마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단순히 운이 나빠 생긴 유전자 결함이나 불치병에 걸린 뇌가 아니었다.,엄마의 불운은 미국에서 조현병을 앓았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행운을 가져다주리라고 그토록 꿈꾸었던 바로 그곳에서,
그해 겨울 마지막으로 폭설이 내린 것은 3월이었다. 내게 처음으로 의미 있는 장기 연애가 시작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