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망치 - 니체와 프로이트, 래퍼와, 여성 아이돌
니체가 망치를 들어 올린다.
저 추운 동네, 북유럽의 신이라도 된 것 마냥
거대하고 둔탁한 천둥의 망치질
뚱. 땅. 뚱. 땅.
그가 거칠게 내려칠 때마다
수백 년을 지배하던 사상의 세계가 갈라지고 흩어진다.
라그나로크, 신들의 황혼을 시작하려
신의 세계를 무너뜨려 인간의 땅을 돌려받으려
찬연히 흩어져 가는 사상의 조각들
관중들의 공포와 또한 경외감.
마침내 일을 마친 그가 일어서 외친다.
“거 봐, 신은 죽었잖아!”
그러나 정작
무너진 것은 그의 정신
분노에 가득찬 손오공의 탈출기
그 조차 신의 손바닥 안이었던 것을
약함에서 비롯된 분노의 달음질
그의 두뇌조차 벗어날 수 없던 것을
화학물질 흐르는 단백질 덩어리는
신을 때리는 망치가 되지는 못하고
신에 대한 대결이 되지 못한 망치는 사실
신에 대한 하소연의 페르소나
그 가면을 벗겨냈던 어느 불쌍한 말의 고통.
약하디 약하고, 약하고만 싶었던 자신을 못내 마주한다
둑이 터지는 수압으로 터져나오는 울음
저 상상 속 차라투스투라처럼 강할 수는 없었기에
무너지는 찬란했던 정신, crucified one을 위하여
또 강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키리에 엘레이손
니체의 사상이 요새 다시 인기란다. 20년 전에 인기 있다 시들해 졌던 것 같은데 대체 왜? 아마 내가 조망이 없어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냥 양극화로 기존 체계가 못마땅한 이들이 많아지고 그 속도를 가늠할 수 없는 변화의 압력에 눌린 것일지도.
니힐리즘을 처음부터 그리 좋아하진 않았지만, 굳이 신은 죽었다고 외치게 된 것만은 그의 삶을 들여다 보면 공감이 간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뇌질환으로 돌아가셨다. 후에 살펴보니 뇌가 4분의 1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로 끔찍한 질병이었다고. 거인이었을 아버지의 끔찍한 고통을 지켜봤을 아이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또한 먼저 돌아가신 부모를 둔 아이는 유기에 대한 불안을 가진다. 무력한 신, 고통속에 방치된 기분, 이런것들이 모여 결국 저 오랜 고등종교의 시작, 조로아스터교의 선지자 차라투스트라를 소환한 것이리라. 니체는 그의 입을 빌어 말한다. 신은 죽었다고. 여기까지의 니체는 강인하고 멋있었다. 무대 위에서 거침없는 랩을 내뱉는 래퍼같달까.
그랬던 그는 말년에 나날히 정신적으로 불안해져 갔다.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무너져 내린다. 길에서 학대당하던 말을 보고 갑자기 달려가 끌어안고 운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 헤메이다 생을 마감한다. 홀로 서는 강함을 추구했던 그의 정신은 사실, 홀로 삶의 고통이란 채찍을 맞고 있는 그 말의 모습이었나보다. 보듬어 주는 대신 하염없이 단단해지는 것을 선택했기에 부러질 수밖에 없었던 게지.
심리학자로서, 니체는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랑했던 부모와의 이별, 강압적인 종교, 학문에 두곽을 나타낸 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는 종교에 가까이 다가갔던 점, 그리고 단일한 종교체계에 도전했던 것까지도. 그런 프로이트는 신앙을 채워지지 않은 부성애에 대한 투사로 이해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잘못 이해한 것이었던 셈이다. 인간은 윤리나 계명이 아닌 리비도(성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이 다운 설명이다. 더욱 비슷한 점은 이토록 자신감 넘치고 도전적인 것 같은 그의 정신이 말년에 쇠약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말년에 인간은 리비도(성욕)가 아닌 에로스(관계욕구)를 따라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자신이 설립한 학회의 후계자 융으로부터 버림받고, 모든 친한 학자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뒤였다.
프로이트의 종교논의에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프로이트는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버지와의 부정적 관계를 보상받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프로이트 자신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매우 나빴다. 사실 프로이트가 신앙을 버리게 된 것은 신에게 아버지와의 부정적 관계를 투사한 것은 아닐까? 버트만의 아이디어이다. 이런 논리 속에서 프로이트는 버려지고 신앙과 이론은 함께 남겨지게 된다.
이 이야기를 들고 니체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어떤가? 니체가 끌어안았던 말이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 더 들어맞아 보인다. 사실 그는 신이 아닌 삶의 문제 앞에서 지나치게 무력한 자신을 혐오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니힐리즘은 절망이란 골리앗 앞에 선 작은 소년의 물맷돌이었던 셈. 그러나 얻어맞는 말의 모습 속에서 자신을 발견했을 때, 강하려던 노력은 다 벗겨지고 눈물로써 골리앗과의 투쟁에 지친 약한 자신을 끌어안게 되었다. 그것이 카타르시스요 치유적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러기에는 이미 많이 늦었었나 보다. 초인을 꿈꾸던 이의 종말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한 저항은 내마음 속에서는 정말 래퍼의 모습으로 느껴진다. 락도 제법 반항적인 구석이 있다지만, 락스피릿은 자고로 세상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반면 힙합은 개인적 서사를 중요시 한다. 개인을 강조한 니체는 락커라기보단 래퍼에 가깝다. 래퍼틀의 가사속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이렇게 취약한 환경에서 자란 내가 이렇게 떵떵거린다. 세상이 어떻든 나는 신경 하나도 안 써. 나는 나고 나대로 살거야.’ 뭐 그런 메시지를 담는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니체의 메시지이다. 그러고 보면 힙합이 인기 있는 시대에는 니체가 유행할 만도 하네.
최근에는 의외의 장르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중요하게 다뤄진다. 4세대 여성 아이돌들의 가사이다. 한국 여성 아이돌들은 늘 사랑스러움의 대상이, 그리고 매우 자주 성적 대상이 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4세대라고 불리는 여자 아이돌들의 가사는 조금 다르다. 르세라핌은 언포기븐에서 금기를 넘어서 가겠다고 같이 가자고 촉구하며 이브, 프시케, 푸른 수염의 아내에서 금기를 깨는 화신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아이브는 아이엠에서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이 되었노라고 선언한다. 마치 초인이 되었다는 선언. 이들이 저항하는 것은 여자는 할 수 없다는 메시지에 저항하는 것이 아닐지. 물론 기획사의 기획이고, 그것이 문화적으로 먹히는 시대이기에 대중문화로 소비되는 것이지만,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강함들을 노래하는 이들의 가사에 나는 깊이 공감도 하고 응원도 보낸다. 그들 모두가 어떤 단일 체제의 피해자들로 이해되기 때문. 그것이 자본주의든, 인종차별이든, 남성우월주의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그들의 힘있는 목소리가 듣기 좋다. 그리고 또한 걱정도 함께 보낸다. 그 모든 것에서 자립할 수 있는 강함만을 추구하다가 니체처럼 무너지지 않기를, 프로이트처럼 혼자 남겨지지 않기를.
변화를 원하는 이들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져 내린 니체도 정신적 순교자처럼 느끼기도 한다. 나는 그저 슬라보예 지젝의 말을 떠올릴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 것도 파괴하지 않는다. 다만 체제가 어떻게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는지를 목도할 뿐이다.” 그 속을 헤쳐나가는 이들의 목소리, 그들이 이 시대에 니체를 지지하나보다. 그렇게 보면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작은 니체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느날 문득 말을 끌어안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 마음으로 시를 적었다. 강하고 싶지만 약한 우리 모두를 위해. 키리에 엘레이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