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페이 여행7 - 이홍장 고가에서 북양대신 이홍장과 부하 장군 원세개를 회상하다!

10월 24일 안휘성 의 성도 허페이 (合肥 합비)의 화이허루 淮河路(회하로)
에서 천천히 걸어서 청나라 북양 대신으로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기도 했던 이홍장 생가 (李鸿章生家) 인 李部(이부) 를 봅니다.

이홍장 은 이 도시 허페이 (合肥 합비) 사람으로 청(清) 나라 말기에 양무운동 (洋務運動)
을 제창한 사람 중에 하나인데...... 벼슬은 직례총독겸 북양통상대신 이었습니다.

일찍이 중국의 첫 해군 을 창설하고 증국번, 장지동, 좌종당 과 더불어 “중흥사대명신”
으로 일컬어지는데.... 시모노세키 조약 에 조인했고, 베이징 조약 등에 관여했습니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한림원 에 들어가 수학했는데 베이징으로 이주한
이홍장 은 증국번 에게서 유교와 학문을 배우며 제자 가 되었습니다.

안휘성 순무 푸지를 지원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 중에 한산현과 차오현 을
점령하는 공을 세웠으며 증국번 의 휘하에 들어가 군사전략에 대한 지식 을 쌓았습니다.

아홍장은 1862년 장쑤순무 로 발탁되어 안휘성 합비등 회군(淮軍) 을 거느리고 상하이를 방위하는등
태평천국군을 진압 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던 중에 1863년 쑤저우성을 공격해 회복 합니다.

1864년 태평천국의 근거지인 난징 을 공략하여 마침내 12년 동안 이어졌던 태평천국의 난 을
완전히 진압하는데 공훈 을 세웠으며 그후 염군의 반란 을 진압하는데도 공적을 세웠습니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평정 하면서 휘하에 두었던 회군(淮軍) 을 배경으로 영국과 러시아의
지지를 받으면서 군사공업등 근대공업의 건설 을 추진하는 양무운동 을 전개했습니다.

군사무기를 개발 하고 서양의 문물 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 를 앞당기고자
노력했으며 군사강국을 이루기 위해 북양해군 (北洋海軍) 을 창설했습니다.

독일, 영국 등 외국에서 파견된 장교들 이 이홍장의 북양군 을 훈련시켰으며 서양에서
들어온 무기와 기술 을 이용하여 이홍장은 강력한 군사력 을 손에 쥐게 됩니다.

무기와 탄약을 만드는 군수공장 을 설립하고 여러 회사와 공장 을 세웠으며 각종 서적을
번역 하고 신식 학교 를 설립하였으며 미국과 유럽에 많은 유학생 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양무파 관료 를 육성했으며 청말의 외교문제를 혼자서 장악 하였는데
1882년 조선 에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 를 파견하여 일본의 진출을 견제 합니다.

묄렌도르프 등 외국인 고문을 보내어 조선의 내정과 외교 에 깊이 관여 하였으며 이이제이
(以夷制夷) 라는 전통적 수단에 의하여 열강들을 서로 견제 시키면서 타협 합니다.

하지만 양무 운동 은 청나라의 기존 정치 제도 를 그대로 유지한 채
추진된 것으로... 근본적인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 하였습니다.

1894년 동학군 이 전주를 점령하자 진압할 힘은 없고 동학당에 기득권을 양보하기는 죽기
보다 싫었던 조선은 종주국인 청나라에 원군을 요청 하니, 전보를 도청해 미리 알았던
일본군도 조선에 출병 하는데 충청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가까운 제물포(인천)에 상륙합니다.

6월 인천에 상륙한 오시마 요시마사 의 일본군 4천명은 겁에 질린 조선군이 도주 하는
바람에 서울에 무혈 입성 해, 그후 7월 23일 30분 전투 끝에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 임금을 포로 로 잡아 친일 내각 을 세운후 아산만에 상륙한 청군을 공격 합니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오시마 는 4천명 병사로 엽지초군 3,500명을 공격하니 청군은
5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고 평양으로 달아나는데 일본군 피해는 불과 80명 이라?

또 일본 함대는 7월 25일 풍도의 청나라 군함을 공격해 광을호를 격침시키는데 이때 전공을
세운 도고 헤이하찌로 는 1904년 러일전쟁 대마도해전에서 러시아 함대를 전멸 시킵니다!

일본군은 평양 으로 진격해 9월 15일 이홍장의 안휘성 합비 출신 회군(淮軍) 15,000명을
공격하니 성은 함락되고 청군은 2,000명 전사자와 600명 포로를 내고 만주로 달아납니다.

일본 해군 도 북상해 9월 17일 황해 해전 이 일어나니 12척의 일본군함은 이홍장이 양성한
14척의 청나라 북양함대 를 속사포로 공격해 북양함대는 5척이 침몰하고 6척이 파손 됩니다.

잔여 북양함대는 여순으로 달아나는데 일본 함대는 침몰은 없고 단지...
4척만 파손 되었을 뿐이니 청일간에 전투력의 차이 를 실감합니다.

야마가타 가 지휘하는 1군은 압록강을 도하하고 오오야마 2군은 여순반도에 상륙하여 금주
를 점령하고 여순 으로 쇄도하여 공격을 시작한지 불과 하루 만에 여순 을 함락합니다.

한편 일본 해군도 산둥반도의 위해위 를 점령해 북양함대를 전멸 시키고 정여창의 항복 을
받는데 천진과 북경을 위협 하고 복건성 팽호도를 점령하니 중국 본토를 점령할 기세라...

청일전쟁 패배는 곧 이홍장의 패배 이니 그는 1895년 전권 대사로서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토 히로부미 와 협상해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 하는 시모노세키조약 에 조인합니다.

이후 1896년 청 · 러 밀약과 프랑스와 독일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할양된 랴오둥 반도 를
반환 받았으나 러시아에게는 만주철도 부설권 으로 만주 지배권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이홍장은 1896년 청나라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러시아를 방문하여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에 참석하였고 유럽과 미국을 순방하고 중국으로 돌아왔습니다.

1900년 의화단 의 궐기가 서양 및 일본등 8개국 엽합군의 베이징 점령 으로 진압
된후 베이징 조약 에서 외교 책임자 로 노력했으나... 다음 해에 죽었습니다.
이홍장의 유산 은 회군 과 북양군의 장교 원세개와 단기서, 서수쟁 등에게 계승됩니다.

단기서등은 청나라의 멸망 후에는 군벌 을 형성하였으며 중국의 북방을 장악 하였습니다.
이홍장의 후계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위안스카이(원세개) 로 그는 쑨원 과
함께 중화민국을 창설 하지만 곧 배신하고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오르지만 쫃겨나 죽습니다.

그전에 이홍장 은 원세개에게 3천 군대를 주어 조선에 파견해 일본에 대항하는 한편 강화도
조약이 체결 되자 김윤식에게 일본 견제를 위해 조미 통상조약 체결 을 적극 권합니다.

이홍장은 조선의 사대당 사람들과 결탁해 친일파(?) 김옥균(金玉均) 을 암살한 홍종우(洪鍾宇)
행동을 칭찬하는 동시에 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여 무사히 조선에 돌려 보냈습니다.
조선의 대신들은 자주독립파는 없었고 모두 친청파 였었는데,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이완용등은 친미파 가 되었다가 3국 간섭후 친러파 가 되고 러일전쟁후 친일파 로 변신합니다!

이상재등 선각자와 친러파 관리들 주도로 설립된 독립협회 에서 세운 독립문 현판 글씨 는 친러파로
독립협회 회장이던 명필 이완용 이 썼는데, 이후 윤치호, 서재필, 남궁등 회원들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자주파의 기상 을 보이며 정부를 비난 하자 황국협회 를 시켜 보부상 수천명 을 동원해
습격하니 고종은 소란을 빌미로 설립된지 2년만인 1898년 12월에 독립협회를 해산 하기에 이릅니다.

그 전인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 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원세개를 조선에 파견해 임오군란
을 일으킨 조선군과 전투를 벌여 제압하고 흥선대원군을 납치 하여 청나라로 압송 합니다.

2년후인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개화파 김옥균이 주도하는 갑신정변 이
일어나는데 고종이 개화당에 납치 되자 원세개 는 1,500명을 인솔해
150명 일본군 및 조선 개화당군과의 전투에서 승리 하여 고종을 구출 합니다.

1884년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베트남 을 둘러싸고 전쟁의 조짐이 보이자 청국은 5월에
서울에 주둔시켰던 3,000명의 청군 중에서 1,500명을 베트남 전선 으로 이동시킵니다.

그후 8월에 발발한 청불전쟁에서 프랑스 함대 가 청국의 푸젠함대를 격파 하자 개화파 는
청국이 베트남과 조선 2개 전선 을 유지하기는 힘들다고 보아 거사를 준비 합니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개화파는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을 계기로 군사를 일으켜
창덕궁을 점거해 고종을 손에 넣고는 민비파를 처단 하고 새 정부를 수립합니다.

12월 6일 원세개 는 1,500명의 병력으로 창덕궁을 공격 하자 외곽 방어를 맡은 조선군
친군영과 전군영 1천명 병사 는 수십명의 전사자 가 발생하자 모두 도망쳐 버립니다.

제2선의 일본군 150명 은 10배인 청군 1,500명과 대치한채 전투가 벌어지자 후퇴해 버리니
제3선 개화당의 장사와 서재필등 사관생도 합계 50명 으로 청군 1,500명과 전투 라....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제1선의 조선군 천명이 사력을 다해 전투를 해서 청군의 병력이
다수 손상 되면 전투에 임할 생각이었으나, 전투 시작 반시간도 안되어 도망치니
청군은 병력손실이 없는지라 10배가 넘는 청군의 상승 기세를 감당할수 없었던 것이지요?

개화파는 전투가 불리해지자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달아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치니
원세개 는 1882년 임오군란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 에서도 민씨정권 을 구해낸 것입니다.

그는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1885년 석방된 흥선대원군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 왔는데...
이홍장 의 명을 받아 조선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 에 취임하여 서울에 주재 하게 됩니다.

원세개는 조선의 내정과 외교를 장악 하고 일본, 러시아와 경쟁하였으나 1894년 청일전쟁 에 패퇴한
후에는 천진에서 서양식 군대 를 훈련시켜 단기서와 풍국장등 북양 군벌 의 기초를 마련합니다.

이홍장 생가 가장 안쪽인 4번째 건물이 아마도.... 주인이 거처하던 내정(內底) 인
정방(正房) 인 모양인데 2층으로 올라가니 그림이며 장식과 가구 들이 볼만합니다.


그런데 직원이 나와 갑자기 통제 를 하더니 관광객들이 모여들기로 잠시 기다리니....
청나라 당시 복장 을 한 사회자와 대인 그리고 딸 이 나와 간단한 단막극 을 하네요?


그러고는 옆 건물로 나와서는 정원 을 지나 다시 입구 와는 다른 대문으로 해서 밖으로
나오는데 이제 여행계획서 상으로는 청황먀오 城隍庙 (성황묘) 로 가야 하는데...


그러고는 다시 “판관 包靑天(포청천)”으로 유명한 포하공원 호숫가 에 자리한 바오궁츠
包公伺(포공사) 로 가야 하는데..... 시간이 늦었으니 입장 마감시간 이 어떻게 될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