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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유적 답사
그 일백마흔일곱 번째 이야기...
2008년 1월에 시작하여 2009년 12월까지,
2년에 걸친 가야 흔적 탐방(가야의 흔적을 찾아서)를 마치고,
2010년 1월부터 2년 계획으로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 유적 답사>를 시작합니다.
경주는 아직도 살아있는 신라 천년의 노천박물관이며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 자랑할 위대한 문화유적의 보고입니다.
우리는 다들 경주를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경주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탐방으로 신라를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욕망이 저에게는 있습니다.
신라의 문화가 왜, 어떻게 찬란했는지 자세히 알아보고
천년 전에 이땅에 살며 불멸의 문화유적을 남긴 사람들과도 교감해보려 합니다.
우리들의 발걸음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저 합니다.
우리가 정한 경주 답사의 길라잡이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가 엮은 '답사여행의길잡이'
이재호의 '천년 古都를 걷는 즐거움' 과 '삼국유사를 걷는 즐거움',
그리고 이상인 편역 삼국유사입니다.
오늘은 그 일백마흔일곱 번째로
포석정지(鮑石亭址))입니다.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 제1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이 포석정은 신라 임금의 놀이터로 만들어진 별궁으로서 건물은 없어졌으나
역대 임금들이 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이한 것으로 생각되는 전복 모양의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다.
이 구조물은 만든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폭은 약 35cm, 깊이는 평균 26cm, 전체 길이는 약 10m이다.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과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하여 이루어진 조화미는
신라 궁원 기술의 독특한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원래는 남산 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 모양의 큰 돌이 있었고,
그 입에서 물이 나오도록 만들어졌다고 하나 지금은 없어져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는 신라 헌강왕이 포석정에서 놀이하고 있을 때,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자 왕도 따라 추게되어
이 춤으로 어무상심무라 하는 신라춤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오고도 있다.
927년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이하고 있다가
후백제 견훤의 습겨을 받아 붙잡히게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신라 천년 역사에 치욕을 남긴 장소이기도 하다.
입구
입구를 들어서면 나오는 멋진 소나무들
포석정(鮑石亭)
나정에서 언양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 1km 쯤 내려오면
신라 시대 가장 아름다운 이궁지였던 포석정이 사적 제1호로 지정 되어 있다.
작은 공원처럼 꾸며진 현재의 포석정터에서는 그런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으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 전복 모양의 돌홈(곡수거)만 남아 있다.
그리고 정자에 오르던 섬돌이 하나 있다.
유상 곡수연이란 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로, 그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曲水渠)라 한다.
이 놀이의 유래는 천년 전 중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에도 남아 있는 유적이 거의 없어,
이곳 포석정의 곡수거가 매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다.
포석정과 곡수거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나 축조연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에,
"헌강왕대(875~885)의 태평스러운 시절에,
왕이 포석정에 들러 좌우와 함게 술잔을 나누며 흥에 겨워 춤추고 즐겼다."는 내용이 있다.
또 동국통람에는,
"경애왕 4년(927) 10월에 왕이 신하와 궁녀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견훤군이 입성했다는 말을 듣고, 왕비와 함게 황급히 빠져나가 성남의 이궁에 숨었다.
그러나 곧 견훤에게 잡힌 경애왕은 자결을 하여 신라의 패망을 재촉하였다."라고 씌어 있다.
곡수거는 가장 긴 세로축이 10.3m, 가로축이 약 5m 크기로, 깊이 50cm가량 되는 도랑이 나 있다.
모두 63개의 석재로 조립되었다.
포석정터 옆으로 남산의 포석계곡에서는 맑은 게곡물이 흐르고 있고,
주위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숲이 남산의 기암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포석계곡의 물을 곡수거에 끌어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답사여행의 길잡이'중에서)
포석정의 삼국유사 기록
신라가 멸망하다
후당 명종 2년 정해년(927), 그러니까 경애왕(景哀王) 즉위 4년 9월의 일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해 고울부(高鬱府, 경북 영천 임고면 일대)에 들어오자, 경애와은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태조는 날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가서 신라를 구원해 주도록 장수에게 명했다.
하지만 구원병이 채 이르지도 전에 견훤이 서울로 쳐들어갔다.
이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에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애왕과 비는 후궁에 숨고 종척이나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그리고 잡힌 이들은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당에 엎드려 노비가 되기를 애원하며 빌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그런 후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경애와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잡아가니 견훤은 왕을 자결케 하고 왕비를 겁탈했으며, 부하들을 풀어 왕의 빈첩까지 욕보였다.
그러고는 경애왕의 아우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가 바로 제56대 경순왕(敬順王)으로 견훤이 왕을 세운 셈이었다.
부는 왕위에 오르자 선왕의 시신을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때 고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문했다.
(삼국유사 '신기한 일이 일어나다' 편에서)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불국사와 석굴암, 천마총과 첨성대, 안압지와 박물관, 계림과 반월성,
그리고 빠지지 않고 들러는 곳이 포석정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놓고 술잔이 반대편에 닿기 전에 시 한 수 읊었다는 이야기와
술 마시고 놀던 경애왕이 후백제 진훤(견훤)의 습격을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는 슬픈 사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 와보고 너무 작은 것에 실망하고, 물이 고여 있지도 흐르지도 않아 대단히 실망하고 돌아들간다.
삼국사기와 산국유사의 일치된 기록만 살펴보아도 경애왕은 슬픔을 넘어 비극과 치욕의 왕이다.
경애왕 5년(927) 9월에 견훤의 군사가 고울부(영천)에 침입하자 신라에서는 왕건에게 도움을 청한다.
왕건은 날랜 군사 1만 명을 보냈으나 경주에 도착하기전에 견훤이 급습하였다.
이 포석정에서 술 마시고 연회를 베풀어 모두들 혼비백산 달아나고,
잡혀온 경애왕은 살려달라 애원하다 자진했고, 도망 가던 왕비는 견훤이, 비첩들은 부하 장수들이 겁탈했다 하니,
인간의 성(性)이 어디까지가 성(性)인지 모르겠다.
사랑도 감정도 없이 아우성치는 여인들을 겁탈하면 무엇이 그리 좋을까.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만 남고, 패자는 말이 없다.
후세에서는 기록에 의지하지 않고는 과거를 달리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기록을 기준으로 삼되 여러 정황을 잘 그려내어 균형 잡힌 역사관을 지닐 수 있다.
의문이 남는 것은 이미 9월에 영천까지 적군(견훤)이 왔다면 나머지 2개월이 문제가 된다.
이미 약 100년 전(839)에 민애왕을 치기 위해 청해진 장보고의 군대가 밤낮으로 달려 4일 만에 대구까지 왔는데,
9월에 청병을 했음에도 11월에야 왕건의 날랜 군사 1만이 대구 팔공산까지 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발명한 동래관노 출신의 장영실이 세종의 부름을 받고 동래서 서울까지 한걸음에 달려 20일이 걸렸고,
회재 이언적이 강계에서 죽자 아들 전인이 수천리 경주까지 시신을운구 하는데 2개월이 걸렸기 때문이다.
또 겨울인 음력 11월에 미쳤다고 술잔을 띄우고 술 마시겠는가.
더구나 영천까지 적군이 왔고, 구원병까지 청한 상태에서...
사실 이곳은 술 마시고 놀던 곳이 아니다.
신라의 별궁으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포석사(鮑石祠)였던 것이다.
(이재오의 '천년 고도를 걷는 즐거움'중에서)
십이영가(十二詠歌)
서거정
포석정 앞에 말을 세울 때
생각에 잠겨 옛일을 돌이켜보네
유상 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일은 이미 옳지 못하네
함부로 음탕하고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쏜가
강개한 심정 어찌 견딜까
가며가며 오릉의 길 읊조리며 지나노니
금성의 돌무지가 모두 떨어져버렸네
유상곡수(流觴曲水)
옛날 도인들은 ‘풍류(風流)로써 세상을 건지리라!’고 하였다.
고대의 풍류 가운데 여러 가지 풍류가 있지만,
필자가 해보지 못한 풍류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상곡수’(流觴曲水)라는 풍류이다.
흐르는 물에다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은 사람마다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가 유상곡수이다.
경주의 포석정이 그러한 유상곡수의 풍류가 행해졌던 유적이다.
통일신라시대 정읍 태인에 태수로 부임했던 고운 최치원도
칠보 시산리에 유상대(流觴臺)를 만들어놓고 유상곡수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대개 이 유상곡수의 풍류는 음력 3월 3일에 많이 행해졌다.
마음에 맞는 친지들이 둘러앉아
물에다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둥둥 떠서 자기 앞에 온다.
물이 곡수(曲水)로 굽어서 돌기 때문에
앉아 있는 사람의 앞에 머물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물에 둥둥 떠오는 술잔을 받는다는 것은 이 얼마나 낭만적인가!
흐르는 물가에서 이 놀이를 하는 이유는
상서롭지 못한 액운을 씻어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유상곡수’ 하면 생각나는 인물이 진(晋)나라의 왕희지(王羲之)이다.
그는 절강성 소흥현 회계산 북쪽에 있는 난정(蘭亭)에서 이루어졌던
유상곡수의 풍류모임에 관한 내용을 ‘난정기’(蘭亭記)라는 기록으로 남겼다.
‘난정기’는 내용 자체도 명문이지만,
그 서체가 또한 절세의 명필인 왕희지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한자문화권에서 서예를 하는 사람치고 이 ‘난정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유명한 필첩(筆帖)이 ‘난정기’인 것이다.
왕희지 글씨의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그 모든 요체가 여기에 들어 있다.
필자는 평소 왕희지를 흠모한 나머지
10년 전쯤에 왕희지의 유적지를 찾아갔던 적이 있다.
왕희지가 살았던 거처는 중국의 역대 은자(隱者)들이
가장 많이 선호하였던 여산(廬山) 자락에 있었다.
계곡물이 저 위쪽에서부터 굽이굽이 휘감아 돌아오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절경에서 왕희지는 살았다.
그 옆의 바위 절벽에는 옥룡폭포(玉龍瀑布)라고 하는
폭포가 뿌연 물안개를 품으며 물길을 내리꽂고 있었다.
이번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왕희지 글씨 모사본이
무려 45억원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외신을 보면서,
왕희지의 유상곡수가 생각난다.
이글의 출처입니다
http://cafe.daum.net/damju19/EwZF/33
포석정지에 관한 다른 의견입니다
좋은 의견이라는 생각에 올려 봅니다.
경주시 배동에 있는 사적1호 鮑石亭址 입니다
流盃渠(유배거) 가운데 있는 동그란 모양이 전복을 닮았다고 하여 鮑石亭이라고 하며
건물은 없어지고 流盃渠만 남아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포석정은 신라55대 경애왕이 이곳에서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에 침략을 맞아 최후를 마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에도
왕은(경애왕) 9월 견훤이 고을부(지금의 경북영천시) 까지 침략한것을 알고
태조(왕건)에게 날랜군사1만을 구원 요청하여 놓고 태조의 군사가 도착하기전 11월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견훤이 침략하여 궁녀와 왕비를 욕보이고 왕을 자진케 하였으며
많은 신하와 기술자 그리고 보물을 가지고 돌아갔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 경애왕은 국가의 존망이 위급하여 외국에 구원병까지 요청하여놓고 있는 위급한 상황에서
당시의 9월과 11월이라면 음력인데 엄동설한 11월에 얼음이 얼어 물도 흐르지 않는곳에서 유상곡수연을 즐겼을까요?
하지만 고대 역사란 기록과 유물이나 유적으로 짐작하고 있을뿐인데 기록이 그렇다면 그렇게 알아야지요
1980년대중반 부산에서 신라말 김대문이 저술한 화랑세기 필사본내용이 공개되면서
포석정에대한 의문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포석정에는 砲石祠라고 하는 사당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포석사에서는 호국영령과충신들 그리고 화랑들과 많은 백성들로부터 추앙받던
화랑의8세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문노의 화상을 걸어 놓고 남산신에게 國泰民安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이 머룰수있는 별궁과 화랑의 심신수련장소와함께 남산성을 지키던 군사들의 휴게소도
있었다고 하며 이곳에서는 길례 가례 흉례 재례등 여러 의식이 행하여 젔다고 합니다
김춘추와 문희도 이곳에서 가례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김춘추와 문희가 만났을때 김춘추는 이미 딸하나를둔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정식 결혼식은 못올리고
여러사람들에게 부부로써 인연을 맺는 가례를 올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포석사는 국가적으로 매우 신성시 되던곳이란걸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신성한 장소에서 국가의 존망이 위급한 상황에서 경애왕이 연회를 하고 놀았던것이 아니고
국가의 안위를 비는 재를 포석사에서 올리다 견훤의 피습으로 최후를 맞이 했을것이라고 많은 사학자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삼국사기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을까요?
삼국사기는 고려인 김부식 이하 여러사람들 의 힘으로 국가적 사업으로 기록된것이라고 합니다
역사기록은 항상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되어 왔다고 볼수 있습니다
역사의 기록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하겠지만
그렇치를 못하고 승자의 입장에서 고려건국의 당연성을 강조하려다보면 누를 범하지 않을수 없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위의 사진에 나와있는 流盃渠는 무엇이냐? 하는 반론이 나올수도 있겠지요
위의 유배거는 재사가 끝난후 왕이 신하들과 가볍게 음복을 하면서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유배거의 물은 지금도 남아 있는 포석정위 남산에 있는 배상지라는 연못에서 끌어다 사용한것으로 짐작이 되며
曲水渠의 물이 맴돌이 현상이 일어나면 물위에 띄운 잔이 신하앞에서 머물면 시를 한수 읆고
못 읆으면 벌주가 석잔이라고 했다는데 정확한것은......
그런데 과연 물이 맴돌았을까? 에 대하여는
현재의 포석정 유배거에서는 원형이 파괴되어 맴돌이 현상이 일어나지 않지만
보문관광단지의 현대호텔내의 드림센터에 있는 포석정 유배거의 원형을 본떠 만든 유배거에서는
맴돌이 현상이 일어 난다고 합니다
한때 많은 사학자들 사이에서 화랑세기의 필사본 진위여부를 두고 논쟁이 많았으나
1998년 포석정지의 담장을 수리하면서 발견된 많은 재기조각들과 삼국시대의 기와조각들 가운데
砲石이란 명문이 새겨진 삼국시대의 기와조각이 발견 됨으로 진위여부의 논쟁은 종식 되었다고 합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포석정에 대하여 알아보아도 통일신라시대 만들어 졌다고 나오더군요
하지만 삼국이 통일되기 이전 김춘추와 문희 가례도 포석사에서 올렸다고 기록된것으로 보아
정확한 연대야 알수 없지만 신라가 불교도입이후가 아닐까 하고 짐작을 해 봅니다
천년사직의 종말을 고한 포석정에 대한 식민지교육의 한가지 방편으로 일본이 포석정지를 사적1호로 정하였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고 일제시대 정한 그대로를 생각없이 받아들인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 또한 鮑石亭址 입니다
927년 견훤에 의하여 억울하게 자결하고만 경애왕께서 잘못된 여러 역사적사실에 대하여
천년을 넘게 얼마나 억울해 하셨을까요?
얕은 역사상식으로 많은분들이 鮑石亭址는 신라시대 왕들의 놀이터 이다 라고 알고 있는거 같아
두서없이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이글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cafe.daum.net/loveyou3040/4gYj/9200)
포석정에 흐르는 낭만
김우영 <소설가>
신라의 고도 경주 교동에 자리 잡은 '법주'가 있다.
신라인의 긍지가 서린 경주 법주는 현재 최씨 종가 댁(일명 최 부자 집)에서 대대로 빚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수되어 오는 술이다.
맑고 투명한 미황색을 낀 곡주 특유의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연한 단맛과 신맛을 함께 지닌 찐득찐득한 명주 중의 명주이다.
예로부터 승려들도 이 술을 곡차(穀茶)라 하여 애음해 왔다고 전해지는데 무려 2천년을 이어온 전통 있는 술이다.
술을 빚는 방법과 더불어 마시는 데도 까다로운 법도가 따랐기 때문에 법주(法酒)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통과 예의범절을 중시했던 신라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경주의 또 다른 명물은 포석정이다.
신라 경애왕이 포석정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여흥을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견훤의 군사가 쳐들어 왔다.
마침내 왕비는 적장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욕을 보았던 비애가 서린 곳이기도 하다.
포석정의 형상은 마치 전복을 뒤집어 놓은 꼴이다.
가장자리에 물이 흐르도록 하였다.
그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잔대와 함께 놓으면 흐르는 물을 따라 술잔이 흐르게 되어 있다.
전복을 뒤집어 놓은 형상으로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민속학자들은 이를 남녀의 성(性) 신앙을 숭배했던 신라 사회의 유물로 보고 있다.
큰 느티나무는 남자의 성기를 뜻하고 꼬불꼬불한 포석정 유배지(流配地)는 번성의 뜻을 지닌 여성의 성기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포석정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자기 앞으로 떠오는 잔을 마시는데 약 8분 정도 걸린다.
이 정도면 사언시(四言詩)나 오언시(五言詩) 정도는 충분히 지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 안에 시를 지어 읊조리지 못한 사람은 벌주로 술 3잔을 마셨다고 한다.
신라 선덕여왕은 백제군이 신라 영토를 침범해 왔을 때
여근곡에 남근인 백제군을 몰아넣고 치면 남근이 여근 속에 들어가 살아나오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 여근곡은 꼭 여자의 음부처럼 생긴 지형인데,
푹 들어간 중심지점에 샘이 있고 주위 언덕에는 솔밭이 우거져 있는 경주시 신평동의 산자락이다.
지금도 이곳 마을 사람들은 여근곡을 신성시하여 보호하고 있다.
중국에도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라는 것이 있었다.
궁중이나 선비들의 가정에 만들어 놓고 꼬불꼬불한 홈 따라 흐르는 물 위에 자기 술잔을 띄어 놓고
시를 한 수 지으며 여흥을 즐기곤 했다고 한다.
이것이 통일신라 때에 건너와 포석정(鮑石亭)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곳 포석정에서 여자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베 짜기 경기를 하여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장만해서 춤추고 노래하며 즐겼다.
신라시대에는 왕과 신하, 궁녀들이 수시로 이곳에 와서 술을 즐기며 연회를 열었다고 한다.
한잔의 술과 더불어 시를 읊조리는 낭만이 있던 유상곡수연.
오늘날 현대 문명의 이기 속에서 급하게만 살며 폭탄주니, 속사포주니 하면서 마시는 음주 풍경과 비교해 볼 때
격세지감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술은 최고의 음식이며 최고의 문화라는데.
옛 우물터
한공주님
구한말 때 찍은 포석정의 옛 사진
* 이 사진은 2011년 10월 16일 찍은 것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ohyh45님의 블로그에사 가져온 것입니다
http://blog.naver.com/ohyh45/20143822542
포석정을 이루는 돌의 갯수이다
?
아랫의 짙은 색은 땅속에 묻혀있는 부분을 나타낸 것이다
?
KAIST 항공우주공학과 장근식 교수의 연구실에서 포석정을 1/6 크기로 줄인 모형을 만들고 이 모형에 물을 흘려 보냈더니 16군데에서 수로의 벽면을 따라 작은 소용돌이가 생기는 와류현상(渦流現狀)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명 회돌이라고 하는 이 와류현상은 물이 관이나 수로를 따라가다 떨어져 나올 때 생긴다.
구전에 의하면 포석정에서 신라의 왕과 신하들은 흐르는 수로에 술잔을 띄워놓고 자기 자리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짓지 못하면 석 잔의 벌주를 마시는 놀이를 했다고 하는데 술잔은 물이 흐를 때 생기는 회돌이 때문에 천천히 돌았던 것이다.?
?
98년 10월 경주문화엑스포 위원회에서 포석정에 술잔을 띄워 보기로 실험을 하기로 정하고 인간문화재인 어느 석공의 도움으로 절반 크기의 포석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물을 흐르게 한 뒤 술잔을 띄워보았더니 술잔이 물을 따라 흐르지 않고 정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포석정 기념관 건립를 위해 주변을 발굴하던 중 포석이라고 새겨진 명문기와 여러 점과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
포석정주변출토 암기와막새
계욕장
포석정 바로 옆 동편 계곡에는 계욕장(제사를 올리기 전,몸를 깨끗이 하기 위해 목욕을 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 있다 계곡 바닥에 있는 높고 큰 바위에 한 명의 사람이 들어가서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돌을 쪼아내어 판 흔적이 있으며 동편 산쪽에서 물이 들어오고 계욕장의 물은 서편 개울로 빠져나갈 수 있게 홈을 파 놓은 흔적이 남아있다 뒷쪽에 보이는 산이 남산이며 이 계곡은 포석계곡이다.
?
계욕장에서 바라본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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