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욥기 1,6-22 루카 9,46-50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치유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유(Healing)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몸이 가지고 있는
면역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강력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물리 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치료(Treatment)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약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사와 약사는 병이 든 우리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사와 약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전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몸의 면역력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몸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습관들을 먼저 개선해야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흡연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과도한 업무와 그에 따른 긴장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욕심과 욕망 그리고 분노와 원망 또한 면역력 약하게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운동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나눔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독서와 명상 또한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이 났을 때도
손을 대셨고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와 소녀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치유 될 것을 믿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갈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하혈이 멎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잃어나 걸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도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도 앞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치료하시는 적이 없었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영적인 면역력이 강했던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겸손의 3단계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3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유혹을 굳건하게 뿌리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면역력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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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욥기 1,6-22 루카 9,46-50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시자(루카 9,44-45 참조), 제자들은 그분의 최측근으로
얻어 누릴 영광을 기대한 듯 자기들끼리 서열을 매기려 합니다. 이토록 완고한 모습에
진노하실 만도 한데, 예수님의 교수법은 달랐습니다. 아직 어리석기만 한 제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가장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겸손으로 얻게 될 영광을 다시 한번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처럼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마치 당신인 듯 받아들여 달라는 의미로 들립니다.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선을 넘고 내 감정과 삶을 마구 헤집으며 나를 이기려고만 하는 이를
미워하고 앙갚음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사람,
못난 나보다 더 못나 보이는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참아 내고
용서하는 사람.
그가 당신 눈에는 진정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 속하지 않는 이에게도 이런 겸손과 포용의 마음으로 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제1독서의 주인공 욥은 흠 없는 의인이었지만, 하느님과 사탄의 내기로(의인의 수난을
‘하느님께서 다 아셨고 허락하신 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 자연재해와 약탈자들의 손에 모든
재산과 자식들마저 잃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하고 드렸던
욥의 기도가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욥의 삶이 그분께 영광과 승리가 되었듯이,
일상 속 고난과 시련을 주님의 이름으로, 오직 주님 때문에 기꺼이 받아들이는 우리의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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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욥기 1,6-22 루카 9,46-50
사람마다 문제의 크기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작은 것이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엄청나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 세상의 상대적
논리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굳이 내 편, 네 편을 갈라 세우거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반대나 찬성이 명확해서 도저히 타협할 수 없는 자리에
신앙의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이데거의 제자였던 독일의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악은 평범합니다.
악은 결코 섬뜩한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일 수도, 해맑은 아이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악은 제 모습을 숨기고
나타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선한 것 안에서도 옳은 것 안에서도 얼마간의 부족함과
어긋남으로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세상은 쉬운 답을 원합니다. 사실 쉽다기보다는 편한 답을 원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답, 모두가 그럴 것이라 추정하는 답 말입니다.
그래서 낯설고 불편한 답은 옳더라도 피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래전 어렸을 때, 동네에 서커스단이 오면 그렇게도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문 앞에서 호객하는 서커스단 관계자의 말은 늘 이랬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 말을 다시 고쳐 보면, 애들은 돈이 안 된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는 그 ‘애들’을 당신 곁에 세우십니다.
인간이 덜된 존재로 하찮게 여기던 어린이를 통하여 가장 큰 것을 보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은 불편해했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누가 큰 사람인지 답이 분명한 사회는 죽은 사회입니다.
누구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한 사회는 하느님 나라가 멀지 않은 사회입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선악과 정의를 논하면서 흡족해하는 이들의 편협성을 오늘 복음은 질타합니다.
절대 선과 정의를 좇고 있는 신앙인은
자신의 판단과 식별 안에 아름다운 척하는 섬뜩한 악마가 함께 있음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과 식별을 과신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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