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우 루카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욥기 3,1-3.11-17.20-23 루카 9,51-56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루카9,53)
'예수님을 맞아들이자!'
오늘 복음(루카9,51-56)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말씀'입니다. 유다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구원에서 배제되어 이방인 취급당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주님으로 모시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주님의 삶을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우리들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진리의 길입니다.
우리의 영과 육을 건강하게 하는 길이고, 죽음 저 너머에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게 하는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사마리아인들처럼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죽음의 길을 걸어갈
때가 많습니다.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주님의 뜻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내 좋을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일(섭리)에 불만과 불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임을 깨닫고, 일생을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헌신하신, '모든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신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를 기억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죄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님을 맞아들이면서
그분의 뒤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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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욥기 3,1-3.11-17.20-23 루카 9,51-56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 복음(9,51절)에서부터 시작되는 '예루살렘 상경기'는 19장 27절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지막 시각이 가까워진 것을 감지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로 결심하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그 수난과
죽음의 길을 자발적으로 작정하시고 출발하십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그것은 그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의 길이요, 하늘로 올라가는 완성의 길임을 말해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올라간다'(αναλημψεωσ)는 말씀은 승천을 암시하고, '때가 차자'라는 말은
완성(συμπληροω)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요 영광임을
암시해줍니다. 또한 이는 이미 ‘첫 번째 수난예고’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 지방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마리아사람들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서로 대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721년 아시리아에 의해 북부 이스라엘이 멸망할 당시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쫓아내고 이방인들을 살게 하였는데, 훗날에 쫓겨난 이스라엘인들이 돌아와
그들과 같이 살게 되어 혼종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민족으로
취급하지 않고 이방인으로 멸시하게 되면서 서로 적대시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열왕 17,24-41 참조).
또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유일한 중앙 성소로 여기고 있는(신명 12,4-14 참조)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하여 가시는데,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치려했던
그리짐산의 중앙 성전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천둥의 아들’(마르코 3,9)이라
불린 야고보와 요한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9.54)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제자들의 못난 마음을 봅니다.
사실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루카 9,47)라고 하셨건만, 그들은 자신들을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을 대적하여 보복하고 응징하려 한 것입니다.
혹 우리도 오늘 자신을 맞아들여주지 않는 이들에게 보복하고 응징하고 단죄하는 못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걷는 길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꺼이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할 일입니다.
또한 몸은 예수님과 함께 가면서도 실상은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하소서.
응징이 아니라 끌어안게 하시고, 보복이 아니라 감싸 안게 하소서.
파괴가 아니라 건설을 도모하게 하시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선을 더하여 갚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 마음에 들게 하시고,
당신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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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욥기 3,1-3.11-17.20-23 루카 9,51-56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실 때”, 곧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위한 마지막 때가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십니다. 여정의 첫 순간에 마주한 사람들의 외면과 배척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들어 올려지실 여정의 마지막까지도 이어질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은 것은 유다인들을 향한 오랜 반감과 더불어, 그분께서
그리짐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그런 사마리아인들을 두고 ‘하늘에서 불을 내려 살라 버리겠다.’고 한 것은,
지난날 엘리야 예언자가 자신을 잡으러 사마리아에서 온 이들을 하늘에서 내린 불로
살라 버린 일을(2열왕 1,10.12 참조) 떠올렸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냉대와 무시에 분개하여 복수를 떠올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는데,
몇몇 수사본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목숨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고 왔다.”
(루카 9,56, 『성경』 각주 참조)라는 말씀을 덧붙여 그분의 속마음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시기 전에 제자들도 장차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외면과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 그들의
선의가 짓밟힐 때가 오면, 증오와 원망이 아닌 온유와 겸손으로 그 사명을 이어 갈
힘을 지니도록 미리 단련시키셨습니다.
제1독서에 따르면 욥과 같은 의인도 까닭 없는 고통과 지독한 시련 앞에서 자신의 처지를
처량히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사도임을 기억합시다.
내 진심을 왜곡하는 이들이나 거룩함을 간직하는 데 방해가 되는 일들을 만날 때,
흔들림 없는 내적 평화와 온유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필요한 힘과 지혜를 주님께 청합시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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