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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6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내 안에 죄에 대한 애통함이 없으며 온전한 회개가 나오지 않음은 어찌 됨인지요?
십자가의 죽음과 장사됨을 통하여 주의 은혜가 현재로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나의 심령은 냉랭하고 차갑기 그지없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도 자신의 비참함을 토로하였건만 나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죄에 대한 비참함이 터져 나오지 않는지 나의 완악함을 심판하소서.
심령이 가난해야 하는데 살이 쪄서 민감하지 못하는 나의 영적 불감증을 치료하여 주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주의 거룩한 신부로 서기 원합니다.
날 받아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전 5:1-9
제목 :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은 아담 군상들의 실상.
1 너는 하나님이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3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4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매한 자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5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더 나으니
6 네 입으로 네 육체가 범죄하게 하지 말라. 천사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께서 네 목소리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7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8 너는 어느 지방에서든지 빈민을 학대하는 것과 정의와 공의를 짓밟는 것을 볼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높은 자는 더 높은 자가 감참하고 또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도 있음이니라.
9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나니 왕도 밭의 소산을 받느니라.
* 나의 묵상
전도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한 금언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발을 삼갈 것이다.
여기서 ‘발을 삼가다’는 말은 ‘말과 행동을 조심하라’는 뜻이다.
이어서 세 가지 금언과 그 이유가 나온다.
첫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쉐마’가 희생제사보다 낫다.
왜냐하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는 악을 행하는 자요, 그러면서 깨닫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일찍이 사무엘이 사울 왕에게 경고한 것이기도 하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입을 함부로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다.
걱정이 많으면 꿈자리가 사납고 말이 많으면 어리석은 소리가 나올 뿐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를 위한 중언부언을 금하고 잠잠할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자기의 말 혹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전도자는 사람들의 망상을 잘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언부언을 그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할 것을 가르치셨다(마 6장).
셋째,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속히 갚을 것이다.
서원하고 갚지 아니한 자는 우매한 자요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서원한 말을 번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로로 그의 수고를 헛되게 하는 일이다.
수많은 꿈들로 인해 헛된 것들도 많아지고 그로 인해 말도 많아지는 법이다.
그러니 오직 하나님을 경외할 것이다.
전도자는 나라에서 일어나는 불공평한 일을 보았다.
어느 지방에서 빈민을 학대하고 정의와 공의가 짓밟히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 것은 나라의 관리를 감찰하는 더 높은 자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땅에는 가장 높은 자가 있다.
땅의 소산물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있는데 이 땅의 소산물을 생산해내는 가장 연약한 자들을 귀히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왕도 땅에서 나는 소산물을 먹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곧 하나님과의 교제가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나음을 일컫는 말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없이 그저 무슨 짐승으로 드렸느냐는 것은 내용 없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 제사장 시대에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1차 전쟁에서 보기 좋게 패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생각에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방 나라 블레셋쯤이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장담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전쟁을 하고 보니까 그들이 블레셋에 패하여 자기 군사들이 4,000명이나 죽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여서 의논한 끝에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아서 졌다고 판단하고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실로에 사람을 보내서 가져오게 하였다.
실로의 언약궤가 진으로 들어올 때 이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땅을 구르는 등 지축이 울릴 정도였다.
그렇게 곧 2차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 전쟁의 승리는 따논 당상이었다.
그런데 막상 2차 전쟁을 치르고 나니 이번에도 그들이 또 패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3만 명이나 죽어 나갔다.
이들은 어찌 되었든 하나님 중심으로 전쟁을 치르고자 해서 언약궤까지 들고 왔는데 왜 이들이 전쟁에서 패했는가?
그것은 그들이 들고 온 언약궤는 껍데기에 불과한 언약궤였기 때문이다.
이 전쟁이 있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패역으로 인하여 실로의 성막을 떠나셨던 것이다.
(시 78:58-60) 자기 산당들로 그의 노여움을 일으키며 그들의 조각한 우상들로 그를 진노하게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이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 곧 언약을 담지한 말씀의 궤를 자기들의 승리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또한 전도자는 한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일어나는 가난한 자들이 당하는 학대와 정의롸 공의를 짓밟는 일을 볼지라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다.
이는 그들을 학대하는 고관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그들을 감찰하며 또한 그들보다 더 높은 자들이 그들 역시 감찰하기 때문이다.
만물 안 곧 이 땅에서는 아무리 높은 자들이 아랫사람들을 관리하고 감찰한다고 해도 부조리와 불평등이 있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불완전하고 어딘가 미성숙한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은 만물 안에 있는 어떤 높은 자들보다 높은 곳에 계시면서 이 땅의 모든 이들을 두루 감찰하시는 분이시다.
(대하 16:9a)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유다의 아사 왕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의 면모를 보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사를 칭찬하셨다.
그런데 그의 통치 말년에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아람 왕을 의지하여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를 지켜보신 하나님은 당시 선지자 하나냐를 아사 왕에게 보내셔서 그를 책망하시는 것이다.
아사의 입장에서는 아주 작은 일처럼 보였을 것이나 이는 하나님을 섭섭하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아사를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냐가 아사 왕에게 이 때 이른 말이 바로 좀전에 했던 말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
하지만 왕이 지금 행한 일은 망령된 일이 되어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아사 왕은 이를 참지 못하고 진노하여 그렇게 말한 하나냐 선지자를 옥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일 후에 아사는 죽음으로 끝난다.
나는 예배할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귐보다는 내가 어떻게 멋지게 예배하는가에 관심을 집중했던 자이다.
그래서 찬양을 보다 멋지게 하기 원했고, 젊었을 때 찬양대 지휘를 할 때는 내가 섬기는 찬양대가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하기보다 많은 성도들 앞에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찬양대가 되기 원하였다.
헌금을 할 때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하여 목사님과 성도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헸던 자이다.
이런 나는 진짜 예배가 아니라 예배의 형식을 빌어 나를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했던 아주 괴악한 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내가 바로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를 드러내기 원하는 자요, 나의 의를 높이고자 했던 나는 다윗이 언약궤를 시온성 곧 다윗성으로 옮길 때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그 옆에서 언약궤를 지키는 자로 섰던 웃사에 다름 아니다.
당시 신문 기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의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 언약궤에 집중했을 터, 다곤의 타작마당에 들어서자 소들이 갑자기 뛰었을 때, 언약궤가 잠시 흔들리자 웃사는 그의 손을 들어서 언약궤를 붙들었다.
소는 말이 아니다.
소가 뛰어봤자 소다.
뛴다고 한들 수레가 잠시 흔들릴 정도지, 수레에 실린 언약궤가 떨어질 리 만무하다.
그런데 수레 곁에 있던 웃사는 자기의 손을 들어 그 언약궤를 붙들었던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의(義)의 손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치셔서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자기를 드러내는 의를 가리켜 ‘자기주장의지’라 한다.
이는 창조 때에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던 그 의다.
이런 자기 의는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으로 행하는 악한 일이며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악이다.
나는 바로 이런 죄악의 중심에 서서 살아온 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으면서 그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신앙의 목적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런 나는 웃사와 같이 마땅히 죽어야 할 자이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나를 그의 십자가 피로 사셨다.
나는 이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참 예배자로 서기 위하여 말씀으로 주님과 함께 교제한다.
이것이 내가 먹을 양식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양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요 4:33-34)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아들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영생이다.
이를 온전히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여전히 이를 행하신다.
나 또한 그분의 뜻과 함께 연합하기 원한다.
나로서는 할 수 없지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선한 뜻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나는 연약하지만 나 자신을 강하게 하려 하지 않는다.
오직 약할 때 강함되시는 우리 주님이 우리실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오늘도 새로운 날을 주시고 주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세상을 접하기 전에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대하게 하시고 이 말씀이 나를 이끌어 주의 나라로 나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만물 안 곧 이 땅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하며 온갖 부조리와 불의가 난무합니다.
정치를 비롯하여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어느 곳 하나라도 온전한 곳이 없는 것은 이 땅은 아담의 군상들이 자기들의 유익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자들 중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비록 이 세상에 부조리하고 불의할지라도 거기에 좌지우지 하지 않고 나를 십자가에 내어주며 그리스도의 피로 연합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이루고자 하는 자기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수용하며 복종하는 자들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곳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영생으로 누리는 주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