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우 요셉 신부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루카 10,1-12
복음 선포, 세상 것들, 하느님께 의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마음으로 제자들을 보내셨을까요?
주님께서 당부하는 말씀들입니다. ‘떠나가시오. 지금 있는 곳에서 떠나가시오. 매여 있는 곳에서
떠나가시오.
사람이나 돈, 어떤 것에도 매이지 마시오. 그래야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돈주머니를 가지고 가지 마시오. 돈주머니에 매여 있으면 하느님보다 돈을 더 믿게 됩니다.
그럴 때 돈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은 밀려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돈에 끌려 돈을 따라가게 됩니다.
복음은 퇴색되어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복음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다른 이들도 돈으로 보게 되고, 사람은 보이지 않고 돈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아라.”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말고 아버지이신 하느님만 의지하라는 주님의 당부이십니다.
그럴 때 우리 안에 성령은 가장 크게 작용하실 수 있고,
나를 통해 나오는 복음은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되어 다른 이들을 살리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는 말씀은 ‘우리의 여정에서 사람에게 연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것, 즉 복음을 놓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가장 중요한 자리에 하느님을 두고 세상의 것들
(돈, 자루, 신발, 사람)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더 큰 선물, 즉 복음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나오는 복음은 다른 이를 살리는 진정한 복음이 될 수 있습니다.
서울대교구 이성우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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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루카 10,1-12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일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장면”과 “당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를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말씀하십니다.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루카 10, 2)
이 말씀은 추수할 때가 되었음을, 곧 복음 선포의 시급성을 알려줍니다. 동시에, 먼저 필요한 것이
기도임을 알려줍니다. 왜냐하면 추수는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하기를 명하십니다. 이어서,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루카 10, 3)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이리 떼’가 없는 곳이나 ‘이리 떼’를 제거해 준 다음에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낸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우리는 평화로운 곳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이 있는 곳으로 평화를
이루는 일꾼으로서 보내졌습니다.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루는 이로,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이루는 이로 보내졌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그곳이요,
내가 파견된 곳이요, 이 세상이 바로 그곳입니다.
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게 용기와 각오를 불러일으키신 다음, ‘하지 말 것’ 세 가지와
‘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고,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함은 걱정에 빠지지 말고, 오직 목자이신
당신께만 의탁하라는 말씀이요,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도 말라” 함은 머뭇거리거나
다른 곳에 신경 쓰지 말고, 오직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말라” 함은 좀 더 좋은 집과 대우를 위해 찾아 나서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해야 할 것’ 세 가지는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며,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을 먹으며,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
“어떤 집에 들어가든 먼저 평화를 빌어주라” 함은 빈부귀천 없이 어느 집에든지 평화를
빌어주되, 인사를 받으려하지 말고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나눌 것이요,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빌어주라 하심입니다,
“받아들여 차려주는 음식은 먹어라” 함은 음식물에 대한 유다적 관습에 매여서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방해 받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이요,
동시에 일꾼으로서 삯을 받음이 정당하다 하심입니다.
“병자를 고쳐주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심을 전파하고
증거 하는 것이 소명임을 알라 하심입니다. 사실, 우리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파견의 본질과 당부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무엇이 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하지 말아야 될 일인지’ 말입니다.
주님의 밭에서 당신께서 맡기신 일에 충실한 일꾼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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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훈모 알렉시오 신부
연중 제26주간 목요일
루카 10,1-12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우리는 매일 주님의 성전에 나아가 묵은 자신을, 집착의 자신을, 갈등의 자신을 끊어버리고자 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수난과 고통, 부활을 통해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사제의 권고 말씀에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함으로써
이 같은 주님 사랑의 복음을 전하고 실천할 것을 또한 약속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처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시며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씀하셨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흔 두 제자들인 우리들을 뽑아 세상에 보내시며
'하느님의 평화'를 전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아니 우리 신앙인들이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얼마나 기여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를 부르짖는 교회와 절간이 날로 많아져 가고,
신자들과 성직자들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지만, 우리가 바라고 부르짖는 평화보다는
불화와 불신이 팽배한 오늘의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오늘의 현실은 이렇게 암울하기만 한 것일까요!
정치적 신념없이 오직 권력을 잡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혼탁한 정치인들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의 축적에만 정열을 쏟는 그릇된 기업가들 때문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제 종교가 그릇된 사랑과 평화와 자비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과연 무엇이 오늘의 현실을 이렇듯 암울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까!
그에 대한 책임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평화롭습니까! 평화를 체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평화를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이가 어떻게 평화를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평화를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알지 못한, 체험하지 못한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그들이 전하는 평화는 헛된 것입니다.
평화를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이 오늘의 현실을 만든 당사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찾고자 하는 평화는 과연 어떠한 것입니까!
하느님의 평화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평화입니까! 성서의 세상과 실제 세상사는 다르다고
하면서 재물과 명예, 지위와 권세를 찾고 쫓는, 이로 인해 울고 웃는 우리 자신이지는 않습니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발도 들고 다니지 말 것이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시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우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시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평화의 사도로서 우리가 진정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가르침이며,
"당신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를 / 당신들한테 털어놓습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평화를 구한다고 하면서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화를 갈구하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가 잠깐 동안의 안식과 위안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소멸하며 잠시뿐이나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한 안식과 위안, 평화를 가져 줄 수 있습니다.
평화를 구하고자, 평화 속에 머물고자하는 여러분!
평화를 빌어주기에 앞서 평화를 체험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자신이 됩시다.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나 자신 안에 평화가 함께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항상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그가 바로 평화의 사도입니다
부산교구 경훈모 알렉시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