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욥기 38,1.12-21; 40,3-5 루카 10,13-16
예수님께서 호되게 꾸짖으신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의 북쪽에 자리한
성읍들로, 그분께서 공생활 시작부터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시고 마귀 들린 이들과
수많은 병자를 기적으로 치유하신 곳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곳 주민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기를 바라셨지만, 그들은 무심하게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돌밭과 가시덤불에 떨어져 말라 버린 씨앗처럼 죄와 불신 속에 변화를
거부한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심판 때 받게 될 혹독한 징벌을 예고하십니다.
그 징벌이 사치와 교만과 우상 숭배로 타락하였던 이방 도시 티로와 시돈에 내려진 죽음과
멸망의 심판(이사 23장; 에제 26─28장 참조)보다 훨씬 무겁다고 하신 것은,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과 기적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데 비하여 이 세 성읍의 주민들은
그것을 다 알면서도 제 의지로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좋은 것이라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다릅니다. 신앙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 무엇도, 지킬지 버릴지 판단할 대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실천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일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정하신 질서입니다. 신앙은 하느님 앞에서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론적 응답입니다.
마치 까닭 없는 극한의 고난 속에 하느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강하게 주장하며 끈질기게
답변을 요구하던 욥이, 창조주이신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앞에서 입을 가리고 침묵하며 승복함으로써
완성한 그 믿음처럼 말입니다(제1독서 참조).
“너희 말을 듣는 이는 내 말을 듣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이야말로 당신과
그리고 성부와 영원한 일치에 동참하는 가장 존엄하고 영광스러운 존재라고 단언하셨습니다.
복음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세상에 파견된 주님의 제자로서 그 진리를 주위에 증언하는 삶으로,
모든 순간 하느님 앞에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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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루카 10,13-16
불행하여라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마치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바라시는 것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탄하시는 말씀이다.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회개를 위해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도 전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은 마치 부모가 매일 술이나 마시고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식에게 "이제 제발 정신차려라. 너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불행해진다."
라고 야단치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모님의 이 말은 야단이 아니라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자식에 대한 한탄이요,
안타까움이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음으로써 괴로워하고 속상해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이듯이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고통을 겪고
괴로워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자식의 불행은 곧 부모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도 그 화를 끼친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
(창세 2, 16-17)라고 말씀했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 말을 듣지 과일을 따 먹었다.
그 결과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고통을 겪고 죽어야 했다.
하느님은 이런 고통을 겪고 죽어야 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루시고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런 희생을 치루시면서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을 들었더라면 불행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지 않으셔도 되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 내가 회개하지 않으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나의 부모가
더 나아가 하느님에게까지 불행해진다. 즉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내가 회개하면 나만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회개로 받는 축복이 나만 아니라
나의 가족이 내 주위에 있는 분들 더 나아가 하느님까지도 복을 받는다.
다음 글은 예전 서울 주보에 실린 신달자 시인의 글이다.
"나의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쓰게 하자 학생들은 당혹해 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적어도 대학생인데 주제가 너무 평이하다는 기색도 보였지만 아버지라는 말에 긴장의 표정이
비치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가까우면서 멀고 잘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모르는 관계가 아버지일 것입니다. 시를 가르치는 저는
적어도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족이 누구인가를 아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아들을 속 깊이 알고 있다는 것은 부자간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을 알아 가는 것은 문학의 출발입니다.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아버지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게 하는 일이 제 역할이어서 좀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대부분의 학생들이 진솔하면서도 눈물겹게 고백을 해 주었습니다.
학생들의 글 속에는 좌절한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눈물 많은 아버지, 병든 아버지, 꿈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속 시원히 풀어 본 적이 없는
초라한 아버지, 직장에서 물러나 가족의 눈치만 살피는 비겁한 아버지,
그리고 50대에 기가 꺾여 열등감으로 불화를 만들어 내는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일으켜 주세요.' 하나같이 학생들은 아버지를 부담스러워 하고 미워하면서도
깊은 애정으로 흐느끼며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서슬 퍼런 위엄을 지니고 아버지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과 가족을 압도하던 사나이는
어디 있는지... 아닙니다. 어느 때고 이 땅의 남자와 아버지는 고독하고 슬펐습니다.
중학생 때 저의 아버지는 누가 봐도 아쉬울 것 없고 더 그리울 게 없는 당당한 남자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일기장을 보고 충격에 몸을 떨었습니다.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행복한 남자는 아예 없었습니다.
무엇인가 허전하고 늘 아쉽게 기다리고 때때로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허약한 남자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것과 실제의 인물이 다르다는 것은 어린 나에게 소름 돋는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내 문학의 출발이 되기도 했습니다.
정신의 척추가 허물어진 이 땅의 아버지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일으켜 주시기를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의 계속이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받을 사람이 있으면 너희의 평화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고,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되돌아 올 것이다.
어떤 고을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곳의 길 거리에 나가 말하여라.
'여러분의 고을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까지 여러분에게 털어 버리고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4번이나 "나를 물리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즉 물리침으로써 정말 내가 불행해지는지
그리고 그 불행이 나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불행하게 되는지
어디 한 번 4 번 말씀을 물리쳐 보라.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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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6주간 금요일
욥기 38,1.12-21; 40,3-5 루카 10,13-16
우리 인간이 하느님 앞에 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 “우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감추거나 합리화할 수 있지만, 내 양심의 거울을 비추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고, 온전히 자신의 부족한 면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자신의 허물을 그대로 고백하고 용서를 청할 수 있는 것이 하느님 백성이 가진 특권이고
기쁨입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새로운 회개의 삶을
살아간다면, 주님께서는 늘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앞에 금방 보이는 죄와 허물보다 더 큰 잘못은, 자신의 죄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고서도 그것을 덮어 버리고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도
바로 이러한 교만, 곧 하느님에 대한 교만의 죄 때문에 예수님께 심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반대로 예루살렘이 칼데아인들에게 점령당하여 불탄 지 5년이 지난 뒤 쓰인 바룩의 참회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만, 가난한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온전히 자신을 고백하는
신앙인의 참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세상이 보여 주는 성공과 화려함은 세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는 진실함과
하늘 나라의 영광은, 비록 죄가 크고 허물이 많지만, 자신의 영혼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겸손하게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소박한 영혼에게 돌아갑니다.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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