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욥기 42,1-3.5-6.12-17 루카 10,17-24
오늘 <복음>은 파견 받았던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드리는 감사기도요 찬미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20장 21절)
이는 마치 예수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처럼, “아버지의 뜻”과의 친교와 일치를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니에서의 기도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마태오 복음 26장 42절)라는
수난의 길을 앞두고 드리는 순명과 의탁의 기도라면, 여기서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습니다.”(마태오 복음 11장 26절)라는 확신에 찬 감사와 찬미의 기도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기도는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복음 1장 47절)
라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파견된 제자들에게 곧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주심에 “감사를 드리십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와, 감격스런 고백과,
탄성은 ‘히브리인들의 축복기도의 전형적인 방식인 ‘감사’(berakah)를 통해 표현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잘난 체하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받아들이며 기뻐하고 돌아온 철부지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께 넘겨주셨다.”(루카 복음 10장 22절)는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만이 당신이 누구신지를 알고, 동시에 당신과 당신이 드러내
보여주려는 이들만이 아버지를 알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루카 복음 10장 22절).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를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복음 10장 23절)
오늘 우리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며,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곧 구원과 자비를 입은 경험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찬가”(마니피캇)을 불러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기도할 일입니다.
“아버지, 저희에게서 일어난 모든 것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저희가 응답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모든 일에 있어 하느님께서 영광을 받으소서.’
(Ut in omnibus glorificetur Deus. 베네딕도 규칙서 58,9)”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복음 10장 21절)
--------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루카 10,17-24
선교의 참된 기쁨
오늘 복음은 확연히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고,
둘째 부분(21-24절)은 결과보고에 대한 예수님의 감사기도를 담고 있다.
첫 부분은 루카복음의 고유사료로서
앞서 파견된 12제자의 귀환 때에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9,10)
예수께서 일흔 두 제자들을 파견하는 대목을 보면, 12제자의 파견 때와는 달리,
다만 병자들을 고쳐주고 하느님나라가 다가왔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10,9)
그런데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두 가지 일에다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는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자들이 기뻐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계시말씀,
그리고 제자들의 행복선언에 관한 내용으로서
마태오복음(11,25-27; 13,16-17)에도 병행절이 발견된다.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지혜를
똑똑하다는 사람들보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드러내 보이신 것 때문이다.(21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복음이 당대의 똑똑한 바리사이들과 율사들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은 처지의 제자들만이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두루 다니며 선포한 것을 기뻐하는 하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배척한 대가는 결국 하느님에 대한 무지로 이어진다. 무지는 곧 죄이다.
하느님과 일치하신 예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 택하신 사람들에게만 하느님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허락된다.(22절)
그러니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귀와,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보는 눈은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당신 제자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볼 때 세상의 어떤 누구도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은 없는 셈이다.(23-24절)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
김웅태 요셉 신부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루카 10,17-24
겸손한 자에게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 오늘 복음(루카 10, 17-24)은 앞 부분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에 대한 결과를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복음서의 드문 표현인 예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신 제자들을 파견 하실 때 그들은 문자 그대로 빈 털털이의 모습이었다.
단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란 선포의 말씀과 "병자들을 고쳐 주어라"란 치유의
명령만을 그들 스승에게서 부여받았다.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제자들의 앞길은 암담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을 따랐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기뻐하며 돌아온 제자들의 결과 보고를 듣고 예수도 큰 기쁨에 가득차 환희의
찬가를 부른다.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란 이방 칼데아 지방의 현인과 점성사,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인과 율법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없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 내신다.
이것은 복음서의 중심 사상 중 가장 중요한 하나이며, 바로 진복팔단의 정신이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본 모습이다.
구약 묵시 문학에도 이와 비슷한 찬가가 있다.
다니엘 2장으로 지혜와 능력은 하느님의 것이니 이것을 주신 하느님께
찬미 드린다 (2:20-23). 하느님께서는 당시의 유명한 마술가나 점성가를 물리 치시고
포로 출신인 다니엘에게 당신의 계시를 밝힌다.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뜻한다.
이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바로 겸손하고 못난이들을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지상 생애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는 예수 자신뿐 아니라 제자들(못난 사람들, 철부지들)에게도
실현 되는 것을 보고 예수는 아버지의 이 응답에 기뻐 감사한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결국 같은 본성을 지니신다는 것이다.
즉, 예수의 신성을 나타낸다.
동양적 사고 방식에 의하면 본성 자체의 탐구보다도 관계를 통해서 그 정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요약해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본성을 인간들에게 알맞게 계시하시는데,
이것은 아들이 택한 바로 그런 사람들 즉, 미소한 이들에게서 이루어진다.
이 모든 것이 마침내는 십자가의 어리석음으로 절정에 달한다.
예수는 참 모습을 볼 수 있고 하느님의 원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로 당신을 드러내시는 놀라운 기쁨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은
바로 예수와 같은 겸손하고 가난한 자세이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