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들여다보기] - 역사학자 백승종
1) ‘세월호’ 사태에서 ‘메르스’ 환란까지 시민들은 위기 속에 내팽개쳐진 느낌이다. 당혹감을 넘어 박탈감이 우리사회의 공기를 지배하고 있다.
2) ‘재벌공화국의 실체란 이런 것이구나.’ 시민들의 신음소리가 들린다. 권력은 애꿎은 시민을 상대로 비밀주의와 권위주의의 무기를 휘두르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하나도 손대지 못한다.
3)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과연 어디 있는가? 역사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현대한국사회의 불행을 상징하는 박정희(1917~1979)를 다시 거론하는 이유다.
4) 일각에서는 그를 역대 최고의 대통령이라고 말한다. 재임 중 공적이 가장 컸다고 주장한다.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문제는 한국현대사회를 근원에서 재검토하는 일이다.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
5) 박정희의 지지자들은 그가 고도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고,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을 혁신했다는 점을 치적으로 손꼽는다. 그러나 그 시대는 빛보다 어둠이 더욱 짙었다.
6)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 우선 박정희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확인해 보자.
▪ 첫째, 지지자들의 주장과 달리 박정희는 피로 쓴 충성맹세를 통해 일제의 군인이 되었다.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은, 박정희가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라고 쓴 혈서를 보도했다.
▪ 둘째, 박정희는 독립군 토벌에도 참가하였다. 1944년 7월부터 그는 열하성(熱河省)에 배치된 보병 제8사단의 장교로 복무하였다. 중국공산당의 토벌이 이 부대의 임무였다. 자연히 좌익계열의 한국독립군도 토벌대상에 포함되었다. 박정희의 일본인 동료들은 증언하였다. “조센징”(한국인)의 토벌계획이 서면 박정희는 “요오시(좋다)! 토벌이다!”라며 쾌재를 불렀단다.
▪ 셋째, 그가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만주군관학교의 졸업앨범과 일본육사의 졸업앨범이 증명한다. 장교가 된 뒤에는 왜색이 한층 짙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개명했다. 이 또한 ‘일본 육ㆍ해군 종합사전’(2판)이 입증한다.
7) 박정희가 친일행위를 일삼았다는 점은 이처럼 명명백백하다. 만주국에서 배운 군국주의 통치술 만주시절은 훗날 박정희에게 인맥을 제공해주었다. 그를 사형의 위기에서 구한 백선엽도 그러했고, 그를 보좌한 이선근, 정일권 및 최규하 등도 만주경력의 소유자였다. 더 중요한 사실은 만주시절 박정희의 견문이 일생을 지배했다는 점이다.
8) 박정희는 20대 후반의 청년시절을 거기서 보냈고, 결과적으로 관동군의 통치술에서 배운 점이 많았다. 최근 강상중, 현무암, 한석정 등이 그 점을 여실히 파헤쳤다.
1-만주국(1932~1945)은 관동군이 만주사변 (1931)을 통해 급조했다. 명목상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지배했으나 실제는 관동군사령관이 통치자였다.
2-관동군 수뇌는 물질주의와 전체주의의 바탕 위에서 강력한 군국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박정희의 정치노선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3-관동군은 만주국의 ‘총무청’ 청장(장관)과 각부 차장(차관)의 임면권을 가졌다. 아울러 ‘내면 지도’라는 비공개적 통치방식을 썼다. 헌병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공포정치도 했다.
4-훗날 박정희는 이러한 통치방식을 재연하였다. 그는 정치적 이해를 공유하는 군 출신과 동향 출신으로 요직을 채웠고, 정보조직을 이용해 감시와 통제의 강도를 높였다. 비밀주의와 권위주의의 특징을 지닌 저들의 강압적 통치방식을 계승한 셈이다.
5-관동군은 만주국에서 일절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다. 정치단체의 조직도 금지했다. 이른바 ‘협화회’라는 관변단체만 존재했다. 이 또한 박정희에게 귀감이 되었다. 민주적 선거, 나아가 대의민주정치 자체를 그는 혐오했다. 유신체제를 선포한 뒤로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을 뽑게 해, 자신의 영구집권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유정회’라는 거수기를 통해 국회를 지배했다.
6-중공업 중심 경제계획도 관동군 방식 관동군이 만주에서 그러했듯, 박정희는 ‘통제경제’와 ‘통제사회’를 목표로 삼았다. 관동군은 매사에 ‘속도’와 ‘획일성’을 주문했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사회간접자본을 확대하고, 수출 위주의 산업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바랐던 계획경제를 달성하려고 5개년 계획도 만들었다.
7-박정희 정권 역시 전후 4차례에 걸쳐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했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대로, 미국의 케네디 정권이 한국의 경제계획에 깊이 간여한 것은 사실이다. 또 박정희의 쿠데타로 붕괴한 장면 정권도 경제계획을 세우기는 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의 경제계획은 근본적으로 만주의 관동군 식이었다.
8-관동군과 박정희는 ‘반자본주의적 정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 군국주의적 성향을 청산하지 못했다. 군사독재정권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이 사실상 전부였다.
9-만주의 군사정권은 중공업분야에 강한 집념을 나타냈다. 관동군은 자신들의 집권에 앞서 이미 현지에서 활약하던 남만주철도회사를 견제하기 위해 ‘닛산 콘체른’이라는 중공업계의 신흥재벌을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1930년대 만주의 철강생산량은 일본을 앞지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10-철강을 비롯한 중공업 분야에 대한 박정희의 집념도 이례적이었다. 그는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포항제철을 창립(1968)하는 등 중공업진흥책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만주의 선례를 따라 박정희는 한국의 신생재벌에게 일정한 활동분야를 배정하고 각종 특권을 보장해주었다. 박정희의 ‘계획경제’는 사회주의 국가를 연상하게 할 정도였고, 그 점은 관동군의 경우도 똑같았다.
11-산업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질식 관동군의 계획경제는 일면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지인들에게 별로 득이 되지 않았다. 성장의 열매는 고스란히 일본인들에게 넘어갔다. 만주는 저들의 군수물자보급창으로 전락했고, 대다수 현지인들은 전통적 생산기반인 토지마저 박탈당했다.
8) 박정희의 산업화도 그 귀결점이 비슷했다. 외화내빈(外華內貧), 겉만 화려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소수의 특권층이 형성되어 부를 독점했다. 박정희에게 충성을 맹세한 소수 신흥재벌과 고급군인, 전문관료집단 등만 성장의 혜택을 누렸다. 그들은 부정부패를 일삼고, 부동산투기를 부추기는 등 서민경제를 혼란에 빠뜨렸다.
9) 그 사이 민주주의는 질식되고, 전통문화와 농촌공동체는 파괴되었다. 박정희가 줄곧 외친 ‘국민총화’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고, 시민들은 성장의 그늘에서 물가고와 주택난에 시달렸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과 ‘오적’(김지하)은 물론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이 그 시대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10) 박정희의 유산 권위주의ㆍ비밀주의 이후 박정희 정권의 수혜자들은 한국사회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그들은 박정희를 추켜세우며 수출과 성장 최우선주의를 대변한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신자유주의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기업친화적인 정권이 연달아 창출되었고, 재벌들의 몸집은 공룡처럼 불어났다. 이제 재벌과 그 협력자들이 이 사회의 모든 분야를 철저히 장악했다.
11) 21세기는 시민의 편에 선 정치권력이 실종되고 무소불위의 자본만 남은 ‘대공위(空位)의 시대’(지그문트 바우만)라 한다. 그 현상이 이 나라보다 심할 수는 없을 것이다.
12) 박정희와 함께 웃자란 권위주의와 비밀주의는 아직도 정치적 일상을 지배한다. 권력분립의 원칙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시민들은 정치적 중립을 상실한 검찰이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양심적인 시민을 ‘유언비어’ 조작 혐의로 몰아갈까 봐 속병을 앓는다.
13) 정치적 책임감도 윤리적 부채의식도 없는 고위층은 유체이탈식 화법을 구사하며 무능을 감춘다고들 한다. 중요 공직자의 적부(適否)를 가리는 청문회는 부패의 악취가 심해 코를 감쌀 지경이다. 속수무책의 좌절을 느끼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힘겹게 지나온 현대사의 뜻을 캐물으며 참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