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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孝在마리아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연중 제27주일
창세기 2,18-24 히브리 2,9-11 마르코 10,2-16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참여하는 혼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혼인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7~9)
서로 모르는 남녀가 부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놀라운
신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높은 이혼율로 인해 혼인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혼인을 개인적인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사적 지위까지 올려놓은 혼인을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녀의 혼인에 하느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혼인을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혼인의 본질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혼인은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가정을 이루어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께서 배우자를 선물로 주셨고, 사랑하는 아들, 딸들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가정 안에 함께 하시어, 모든 가정이
성가정이 될 수 있도록 이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가정에 하느님의 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 자리는 어떤 물리적인 공간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리는 바로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부부간의 다툼으로 인해 가정에 불화가 생길 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자리를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 자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우리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의
자리를 찾아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아주 사소한 일도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일의 주도권이 바로 하느님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거룩한 가정을 인간의 힘으로 파괴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누구보다 남녀 간의 혼인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신랑에 비유되고, 교회는 신부로 비유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부부의 혼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부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단일한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몸을 바치시어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는 자신의 신랑인 그리스도를 끝까지 사랑하고 증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 하느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며 서로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께 순종하듯이 아내는 남편을
대하고 교회를 사랑하여 당신을 넘겨주신 그리스도처럼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어 교회가 화려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 나아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고 나무랄 데 없는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이처럼 남편도 자기 몸과 같은
아내를 사랑하고 당신의 지체를 돌보는 그리스도처럼 아내를 돌보고 보살피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교회가 둘이 아니라 한 몸인 것처럼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라
한 몸, 한 영이 되게 하소서.”(에페 5,21 이하 ; 서인석)
안동교구 사공균 알로이시오 신부
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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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베드로 신부
연중 제27주일
창세기 2,18-24 히브리 2,9-11 마르코 10,2-16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는 무엇이며, 어떤 것을 기대하고 삽니까?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 이 아이가 장차 커서 무엇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어떤 사람이 되기를 기대합니까? 자기 한 몸 노력해서 여러 사람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공공사업의 봉사자들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또는 세세 대대에 길이 이름을 남길만한 업적을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사상가나 예술가,
문화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돈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앉아
여러 사람을 호령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결혼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배우자가 지금 가진 것보다 앞으로 가질 수
있을 것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결혼하자고도 한답니다. 자기 부모에게 돈 얻어 와서 결혼할 사람이,
혹여 미래에 자신들이 어려워졌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돈을 벌고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과연 행복하고 평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스티븐 코비는 “인간의 네 가지 욕구인 신체적, 사회적, 정신적, 영적 욕구 가운데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삶의 질이 낮아지고 그 공허가 당신의 활력과 관심을 삼켜 버리는
블랙홀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 행태 심리학자인 아브라함 매슬로우는 1943년 ‘인간의 동기와 성격’이라는 책에서
다섯 가지의 단계적 욕구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 욕구의,
첫 단계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하는 생존 욕구의 단계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 욕구’로 신체적 감정적 불안으로부터 보호되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는 ‘소속감과 애정 욕구’로 동료와 친교를 나누기 위해, 집단을 만들거나 집단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단계입니다.
네 번째는 ‘존경 욕구’로 내적인 자존 자율을 성취하여, 다른 동료 구성원들로부터 인정과
존경을 받고 싶어하는 단계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아실현욕구’로 자신을 계발하고 발전시켜,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자아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단계라고 합니다.
2002년 폴 R. 로렌스와 니틴 노리아는 ‘욕구: 인간의 본능, 어떻게 선택을 이끄나’라는 책에서
인간의 ‘네 가지 욕구’를 발표합니다.
그 첫 번째는 ‘성취 욕구’ 즉, 사회적 지위와 같은 무형의 가치 등 희소한 것을 얻는 것이고,
둘째는 ‘결속 욕구’ 즉, 개인이나 집단과 유대를 맺는 것,
셋째는 ‘이해’ 즉,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주변 사물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며,
넷째는 ‘방어’ 즉, 외부의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근의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의 소중한 욕구를 ‘삶’과 ‘사랑’과 ‘배움’과 ‘유산’ 등
네 가지로 나누기도 합니다.
삶의 욕구는 의식주와 경제적 풍요, 건강 같은 신체적 욕구이고,
사랑의 욕구는 인간관계를 맺고 소속감을 갖으며 사랑을 주고받으려고 하는 사회적 욕구이며,
배움의 욕구는 발전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정신적 욕구이고,
유산의 욕구는 의미와 목적, 개인적 적합성을 가지고 공헌하려고 하는 영적 욕구라고 밝히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며 갈구하고 꿈꾸는 욕구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무엇을 기대하며 삽니까?
여러분과 여러분의 배우자가 지금 이 시기에, 최우선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함께 한 평생을 살면서, 무엇을 함께 이루고자 합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와 여러분의 가족과 함께, 이 사회 이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싶습니까?
앞으로 10년, 20년 후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살고 있으리라고 예상합니까?
지금의 배우자와 함께 있겠습니까?
그날 오늘을 되돌아보면서 배우자와 가정 그리고 이웃 친지들과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앞에서, 여러분이 오늘 선택한 결정과 하고 있는 일과 사정 때문에, 뿌듯하고 자랑스러워하며
반갑게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며 회피하시겠습니까?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인생이 기쁨과 보람이겠습니까?
아니면, 슬픔과 수치겠습니까?
단순히 동물적 본능의 먹고 사는 삶. 인간적, 인격적 생존 단계에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
사회생활을 통해 인류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 향상시키며 사는 삶. 한 걸음 더 나아가 주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 희생을 통해,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을 기반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로 합시다.
당장 눈앞에 닥친 결혼과 이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취업과 실직 등의 각박하고 긴박한
전쟁 같은 삶만이 우리 삶의 전부는 아닙니다. 지금 당장 피부로 다가오는 정치적 경제적
긴장과 갈등의 현실 외에도 우리 인간 삶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과 가치들이 엄존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통합적이며 다각적인 삶의 부분과 순간들을 꾸며봅시다.
눈에 보이는 생활 너머에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 그것도
우리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주 예수님의 힘과 이끄심으로,
인간 성취와 완성과 구원이라는 목표가, 마침내 이 땅에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과
그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으로 살아갑시다.
믿음과 희망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희생과 봉사로, 부부와 가정과 사회와 인류와 자연을 향해
기여하며 살아갑시다. 서로를 향한 신뢰와 서로 함께 힘을 모아 일치를 이루리라는 희망과
서로의 사랑에서 피어나는 희생 봉사로 헌신합시다. 그럼으로써 주 그리스도 예수님으로부터
거룩한 삶을 살라고 부름을 받고 그에 응답하여, 주님을 따라, 주님의 힘으로,
온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부부가 됩시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8)
서울대교구 심흥보 베드로 신부
2024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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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만 안젤로 신부
연중 제27주일
창세기 2,18-24 히브리 2,9-11 마르코 10,2-16
최근 ‘혼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변화됐습니다. 혼인을 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비혼주의자도
많이 늘어났고, 혼인보다는 동거를 원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혼인은 원하지만 아이 없이
부부 생활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혼인 후에 이혼을 선택하는 비율도
높아졌습니다. 최근 어느 통계 조사 결과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이혼율이 제일 높은 국가였습니다.
눈부신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속에서 세상은 급변하지만, 거센 풍랑을 만난 교회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혼인에 대한 전통적 입장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혼인의 본질적 특성 중 하나는 ‘단일성’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해소성’입니다.(교회법 제1056조)
‘단일성’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혼인을 통해 전인격적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가해소성은 하느님께서 부부로 맺어주신 남자와 여자를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혼인 서약을 한 부부는 죽음 외에 결코 갈라질 수 없습니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예식을 거행하면서 공동체가 보는 앞에서 본인의 결심을 말하고,
주례사제는 신랑과 신부의 합의를 수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주님께서는 두 분이 교회 앞에서 밝힌 이 합의를 당신 은혜로 확고하게 하시고
두 분에게 복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것을 사람이 풀지 못합니다.”
혼인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기본 가르침을 오늘 주일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혼을 허락해 주어도 되는지 여부를 묻는 바리사이들을 반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마르 10,8-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테오스’)과 ‘사람’(‘안트로포스’)을 서로 맞대어
비교하시는데(마르 7,7-23; 8,33 참조), 이 대조를 통해 이혼이 불가능한 이유를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의 결합을 무효화하려는 시도는
인간적 행위에 속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묶어준’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진 신적 행위이기 때문에, 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후대에 제정된) 이혼장과 관련한 율법 조항(신명 24장, 특별히 1절과 3절)을
반대하시면서 여기에 담긴 하느님의 의도와 목적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혼장과 관련하여 모세가 알려준 법적 조문은 혼인에 대한 하느님의 목적을 진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이 목적이 거부될 때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고 있을
뿐입니다. 모세가 관련 법조문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준 것은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이들의 ‘완고함’, 곧 하느님의 창조적 질서를 벗어나 이혼을 하는 상황에서 유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 앞에서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7절을 인용하십니다.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마르 10,6-7)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를 통해 보여주신 ‘첫 번째 원리’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후대의 법적 조항보다 우선함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혼인 윤리는 인간의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하느님의 창조에서 시작된 원형에 근거합니다.
오늘 주일 제1독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의 창조, 특별히 여자를 창조하시면서 남자와 여자를 결합하여 한 몸으로 만들어 주시는
하느님의 창조 원리를 읽어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은 상호 종속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협력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제르”는 ‘돕는 이’ 또는 ‘지원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알맞은 협력자”(창세 2,18)가 함께 있는 것이
좋다고 보시어, 사람의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원리에 따르면,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어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를 도우며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여자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를 마주 바라볼 수
있는 “그[사람]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여자를 보고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라고 외치는데, 이 말을 통해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정체성),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일의 독서와 복음은 우리에게 혼인의 고귀함을 일깨워줍니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 대한 보도가 성경의 시작, 곧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에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은 사람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결합,
곧 혼인이 결코 인간적 선택에 의해서 좌지우지될 수 없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는 거룩한 사건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을 보시고 협력자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은 사람과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기초 삼아 당신의 구원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혼인의 가치가 세속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 힘을 잃어가는 작금의 시대에 혼인의 거룩함과
고귀함을 다시 한번 마음속에서 되새김질하면서 이 세상에서 창조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원리와 방법을 전파할 수 있는 증인이 되어 봅시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가톨릭신문 2024년 10월 6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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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孝在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