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로 씻어 거룩하게 하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세상에 충만해질 거라고 예언했다. 물론 예슈아께서 이 세상에 오신이유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마5:17). '완성하다'의 의미는 '중만하다'이다. 즉 선지자의 예언처럼 예슈아께서도 율법이 충만해지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면 물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고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말씀을 상징하고 바다는 세상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11:9) 또한 말씀에 의해서 물로 깨끗하게 씻어 거룩하게 하여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신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말씀을 물로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다. 즉 우리를 씻는 것은 말씀이다(엡5:26,27). 그리고 아버지는 농부시고 예슈아께서는 참포도나무시다. 예슈아께 붙어 열매를 맺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지만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면서 말씀으로 이미 깨끗해졌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도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으로 깨끗해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다음 구절에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셔야 한다고 말한다. 이말은 곧 아버지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말씀이라는 물로 우리가 깨끗하게 씻겨지면 즉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 마다 이루어지고 많은 열매로 돌아온다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이 내 안에 있으면 물론 말씀대로(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요15:1-8).
2 말씀을 흩어 놓으셔서 제대로 듣지 않으면 함정에 빠진다
여호와께서 말씀을 여기 저기 흩어놓으신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오만한 자들 때문이다. 오만한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지만 이들이 뒤로 넘어져 부러지고 걸리고 붙잡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오만한 마음으로는 불가능하다(사28:13). 사람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따라갈 수 없다(고전1:25). 하나님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는 자에게 자신을 보이신다(렘29:13,14). 그러므로 우린 말씀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분명 진리는 숨어 있고 흩어져 있다. 오직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은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고 찾는 마음이다. 오늘 내가 구하는 것이 의식주라면 그는 우상 숭배자인 이교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라면 그때 그분을 만날 수 있다(마6:31-33).
오만한 자들은 말씀을 깨닫지 못하여 발목이 약해져 넘어지고 흔들리고 마음이 상심하고 산산히 부서지고 함정에 빠지고 덫에 걸린 거 처럼 포위되어 버린다. 이것이 오만한 자들이 당하는 '뒤로 넘어지고 부러지고 걸리며 붙잡히게 된다'는 단어적인 의미이다. 우리의 영적 상태는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이들을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낮추시고 낮추셔서 하나님을 찾게하고 진정으로 말씀을 듣게하시려는 것이다(사28:13,14).
3 오만한 자들이 거짓을 피난처로 삼고 허위 아래 숨는다.
오만한 자들은 어떠한 재앙도 그들에게 미치지 못할거라고 믿는다. 스스로 피난처에 있고 숨겨져 있으므로 샬롬할거라 믿는다. 사망도 지옥도 이들과 상관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이들이 피난처로 삼은 것은 허무한 거짓말이고 조작된 가짜 아래 숨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들이 확신하는 평안의 언약은 결코 이들을 사망으로 부터 지옥으로 부터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작된 거짓이기 때문이다(사28:15).
4 정의와 공의로 측량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보호를 받지 못하고 샬롬할 수 없을까? 이유는 우리를 측량하시고 심판하시는 기준이 정의와 공의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거짓 가르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믿고 구원을 확신한다 해도 우린 결코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우박이 거짓의 피난처를 소탕하고 물이 그 숨는 곳에 넘칠 때 모든 거짓에 속은 자들이 함께 멸망할 것이다. 그래서 사망과 지옥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정의'의 히브리어 뜻은 '법률적으로 선언된 판결, 특히 거룩한 율법'을 의미하고 '정의'는 공의, 의로움, 의롭게 행함을 의미한다(사28:16-18). 그러므로 우리가 피난처로 삼고 있는 것이 언약인지 아닌지 정검해야 할 것이다. 몇년전에 한 유대인 랍비가 한국에 온 적이 있다. 그때 한 청년이 이렇게 물어봤다. "우리는 일요일에 예배를 드려야하나요? 샤밧에 예배를 드려야하나요? 어떤 날이 중요한가요?" 그때 그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느 날 예배해도 하나님께서는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두 날에는 차이가 있다. 샤밧은 언약이 있다 그러나 일요일은 언약이 없다." 만약 "날이 뭐가 중요하냐 진정으로 예배하는 게 중요하지"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계명을 믿지 않는 것이다. 믿지 않기 때문에 행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당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는다면 샤밧에 예배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 즉 믿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사도 바울이 날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실까? 당신이 바울을 오해한 것이라면... 그러므로 우리가 미혹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말씀을 찾고 찾아 진짜 피난처에 숨겨져야 할 것이다.
5 성령은 행위로 받는가? 믿음으로 받는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일까 듣고 믿었기 때문일까? 이것에 대해 바울은 질문하고 있다. 만약 행위로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믿었기 때문에 받았다면 그것은 전적한 하나님의 주권이고 은혜이다. 당시 할례파가 주장하듯이 할례를 행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교리는 육체를 통해 의로와진다는 교리이므로 바울이 경고하는 것처럼 헛된 가르침이다. 듣고 믿는 것이 성령에 속한 것이라면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것은 육체에 속한 믿음이다. 그러나 이 말씀을 가지고 진정한 믿음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해서는 결코 안된다(갈3:1-4). 율법은 여호와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손가락으로 써주신 영원한 법도이다(출24:12). 어느 누구도 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예슈아께서도 폐하지 못하신다. 폐하시려 한다고 오해하지 말라고 예슈아께서도 경고하셨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오해할 것을 이미 아셨다. 오히려 폐하려 하심이 아니라 완전(충만)하게 하시려고 오셨다(마5:17).
6 듣고 순종하는 믿음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81참조)
바울은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듣고 믿는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듣다’는 히브리어로 שמע(쉐마)이다. 쉐마는 듣다(listen), 순종하다(obey)의 두가지 뜻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고 ‘듣다’는 ‘hear’보다는 ‘listen’에 가깝다. 왜냐하면, hear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리는 것으로 수동적인 의미라면, ‘listen’은 주의 깊게 듣는, 능동적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즉, ‘듣다’는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행함(순종)을 포함하는 ‘청종’의 뜻이다.
우린 바울이 유대인임을 기억해야 한다. 유대인에게 청종(쉐마)은 너무나 중요한 가치이다(신6:4). 심지어 홀로코스트에서 죽임을 당할때도 쉐마를 암송했다. 그것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영원한 삶을 주실 것을 믿는 절대적인 믿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기에 사망의 골짜기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행함이 없이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믿음 없는 행동에는(율법에서 나온 행위일지라도) 성령이 부어지지 않지만, 믿음으로 율법에 청종하는(쉐마) 자발적인 순종에는 성령이 부어진다는 것을 의미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는 순종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믿음으로 예배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예물을 드리는 믿음의 순종 위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을 부어주신다. 그러므로 ‘행함이냐? 믿음이냐?’ 의 양자택일이 아니다.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믿음 없는 행함이냐? 믿음으로 하는 행함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아무리 율법에서 비롯된 행위일 지라도 다른 율법을 지키지 않게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당시 할례파는 할례로 육체를 자랑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었다(갈6:13). 할례로 아브라함의 유업을 잇는 자라는 생각은 그들이 육체에 속한 자들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도 육체에 속한 일이다.
7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치려느냐(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82-84 참조)
이 말씀은 쉽게 말해 성령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중엔 육체로만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석한 대로 ‘성령으로 시작했는데 왜 다시 율법을 지키느냐?’라는 ‘율법 폐기론’을 의미하는 것일까? 예슈아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라고 말씀하셨는데,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율법을 육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성경은 율법을 육신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바울은 율법은 영적이지만 자신이 육신적이라고 탄식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롬7:14) (신령한: 육체적이지 않은, 영적인..)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예슈아께서는 율법에 두 가지 차원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는 육신에 속한 육적인 차원이고, 또 하나는 마음에 속한 영적인 차원이다. 말씀에서 예슈아께서는 믿음이 율법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정의와 사랑도 율법에 속한 것이고 율법 중에서도 더욱 중요한 가치라고 말씀하신다. 예를 들어 십일조는 육체로 순종하는 눈에 보이는 가치이다. 그러나 의로움과 사랑과 믿음은 마음에 속한 보이지 않는 가치이다. 이처럼 율법에는 더 중요한 율법이 있고 덜 중요한 율법이 있다. 눈에 보이는 육체로 행하는 가치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속한 가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앞서 말했듯이 더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에 속한 율법이다. 이처럼 율법은 몸과 마음을 모두 포함한 영적인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둘 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단지 덜 중요할 뿐이고 모두 다 중요하다(마23:23).
만약 육체에 속한 율법만 행한다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겉으로만 순종하는 가식적인 사람일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 없이 사역할 수 있고, 공의(거룩함) 없이 사역할 수 있고, 사랑 없이 사역할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진 사역자들이 많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믿음으로 말씀을 청종하고 성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후에는 마음을 지키지 못해 육적인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즉 육체로 마치는 것은 결국 마음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은 하나도 없이 눈에 보이는 율법만 지키는 사람이 거룩함이 없이 사역하는 자와 같다면, 더 중요한 마음에 속한 율법만 지키는 사람은 어떠할까? 행함은 없지만, 마음이 바르다면 영적인 사역자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항상 영적인 것을 추구하고 육체로 행하는 것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마음만 있고 행함이 없다면, 행함만 있고 마음이 없는 위선적인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다를 것이 없다. 마치 추운 날에 입을 옷을 주지 않고 “너의 몸을 따듯하게 하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헛될 것이다.
예슈아께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19-20)고 경고하셨다. 행함만 있는 이들에게 더 나은 의는, 행함이 없는 믿음일까? 당연히 아니다! 안타깝게도 과거 유대인은 마음에 속한 율법을 무시했다면, 오늘날 이방 성도들은 육체로 행하는 율법을 무시한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육체와 같이 죽은 믿음’이라고 증언했다(약2:26). 이처럼 마음의 율법만 따르는 자들은 영적인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이다. 사실, 육체만 있든, 영혼만 있든 하나만 있다면 죽은 자이다. 그러므로 예슈아께서 온전함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결국 반쪽만으로는 결코 거룩함에(완전함) 이를 수 없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는 말씀은 마음을 지키고 행위를 옳게 하는 것을 모두 포함한다.
그렇다면 성령으로 시작하여 육체로 마친다는 것은 믿음으로 토라에 순종하는 삶으로 시작했지만 다시 할례파에게 미혹되어 할례만 행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다는 육체의 할례에 의존하고 율법에 불순종하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한 것이다. 할례가 율법의 행위이기 때문에 마치 율법을 반대한 것 같지만 할례파는 율법 준행자들이 아니었다(갈6:13).
8 경건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은 교만한가?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85 참조)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잠28:4,9)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게 교만하다고 비난한다. 만약 당신이 율법의 진정한 준행자가 아니라면 분명 의인을 정죄할 것이다. 그렇게 성경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불의함과 상관없이 예슈아의 의로움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만약 예슈아의 의로움만 필요하다면, 우리의 거룩함은 필요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로움이 없이 예슈아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는 전혀 성경적이지 않다. 분명 예슈아께서는 외식하는 바리새인 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셨다(마5:20). 겉으로 지키는 척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진실은 율법 준행자가 아니었기에 그토록 책망하신 것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언약은 변함이 없다. 진정한 준행자이냐 아니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토록 헷갈리는 것은 율법을 가르치던 종교 지도자들이 위선자였기 때문에 마치 율법이 판단받고 버려야할 오물처럼 취급받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이다(롬2:23). 위선자들은 안식일을 더럽혔고 율법을 더럽힘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멸시했다. 그래서 오해가 생겨 지금까지도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안식일을 더럽히고 율법을 더럽히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율법 준행자들에게 오히려 교만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성경 그대로이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당시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같다. 그들은 지키는 척 하면서 안지키는 자였고 우리는 당연히 안지키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둘다 불법한 자들임은 동일하다.
9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라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87 참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움으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모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길래 의롭게 되고 복을 받는 것일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잠시 살펴보자.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시작했지만 놀랍게도 순종의 삶을 살았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이들의 공통점은 믿음과 함께 순종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통해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언약을 성취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기 때문이며, 그 말씀은 여호와의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였다(출26:4).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대에 이르는 축복에 참여하기 원한다면 그들의 믿음과 순종의 삶을 배워야 할 것이다. 다윗이 그랬고, 심지어 다윗의 자손 예슈아께서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셨다. 그래서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순종의 유업을 예슈아께서 모든 이방인에게 확장시켜 주실 수 있었다(히5:8,9).
행함만 있던 유대인에게 믿음이 필요했다면, 믿음만 있는 이방인에게는 순종이 필요하다. 믿음이 순종(행함)과 함께 갈 때 마침내, 하늘의 유업을 얻는 자가 된다(히4:2~6). 우리는 이렇게 오해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율법과 상관없는 믿음이라고,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율법을 행하지 않는 믿음이라고... 그러나 구약만 봐도 율법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믿음있다고 말하지 않고 교만하다고 말하고 있다면 우린 신약을 오해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율법을 순종하는 믿음은 유대인의 것이고 우린 율법에서 자유한 믿음이라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율법에 순종했다. 그렇다면 우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주셨음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사람이 휴거받기를 소망한다고 말한다. 그럼 에녹은 어떻게 휴거를 받았을까? 에녹은 율법학자로서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던 자였다. 그것은 '에녹서'에 나온다. 그 사실을 믿든 안믿든 우린 여호와의 율법을 폐할 수 없다. 우리가 말씀을 폐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교만하다면 하나님은 거꾸로 우리를 폐하실 것이다.
10 헬라적 사고 vs 히브리적 사고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88-89 참조)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헬라인이다. 즉 이방인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무엇이 헬라적 사고인지 무엇이 히브리적 사고인지를 안다면 이방인이기 때문에 빠지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더욱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바르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헬라적 사고가 모두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헬라적 사고는 이교도의 사고로서 인본주의, 우상숭배에 뿌리를 둔 사고적 체계이기 때문에 분별하고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헬라적 사고는 이원론으로 마음과 행동을 나눈다.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는 악하고 천하며 결국 망할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선하고 귀하며 구원받을 대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음을 행함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이해한다. 즉 악한 육체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헬라적으로 구원은, 우리의 행함과 상관없이 육체로 죄를 지어도 마음으로 믿으면 육체는 멸망하나 영혼은 구원받는다고 믿는다. 이것은 마음과 육체를 분리하는 사고에서 생긴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은 죄를 이기지 못하게 하고 수많은 죄의 열매를 거둘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반면, 히브리적 사고는 마음과 육체를 분리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이해한다. ‘믿음’은 히브리어로 אמונה(에무나)이다. אמן(아멘)의 어원이기도 하다. ‘아멘’은 히브리어를 직접 음역한 것으로,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예배시에 자주 사용한다. 뜻은 ‘믿을 만한 가치가 있다, 믿을 만하며, 견고하며, 안정되며, 영원하며, 지속적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란다’ 등의 고백과 같다. 그러므로 히브리적으로 믿음이란 내적 확신을 넘어선다. 무언가를 믿는 사람은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믿음에 근거한 행동을 한다. 확신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믿음있는 자의 삶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믿음은 그저 하나의 이론이 아니다. 그저 믿으면 천국 간다는 그런 이론이 아니다. 믿음의 선조들은 자신을 하나님께 철저히 위임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과감히 미지의 세계,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다. 심지어 아내를 누이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두려운 땅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했다. 유대인 아브라함 헤쉘은, “믿음은 생각의 도약보다는 행위의 도약을 요구한다. 믿음은 수동의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불활동이 아니라 모험이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성경적으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사고의 수준에서 벗어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히브리적, 성경적 정의이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으며 그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명시하고 있다(약2:14). 이것은 히브리적 관점에서 말하는 믿음과 일치한다. 심지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귀신의 믿음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헬라적인 믿음의 개념은 귀신의 가르침인 것을 알 수 있다(약2:18,19). 왜냐하면 죽은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11 교리에 종이 되지 마라 (히브리적 관점으로 읽는 갈라디아서 p91 참조)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세상 어느 누구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모두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문제는 불 활동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냐?'에 있다.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사람에게 순종하는가?와 같이 누구의 명령을 지키느냐!에 있다. 사도 바울은 당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키던 전통(교리)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사람의 종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 순종과 책임감은 좋은 감정이지만, 때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사람들을 자신의 종으로 삼는 자들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사람의 교리로 하나님의 양 떼를 종으로 삼는 삯꾼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되고 싶어한다. 자신이 존경받고 높임을 받기 원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분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모두 자기와 같은 자를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우상 숭배를 회개한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안타깝지만 모든 문제는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답이다. 그래서 해답을 찾는 것은 더 쉽다(호4:4-6).
그러나 어떤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처럼 되었음이니라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4-6)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사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사람의 교리와 전통에 종 되기를 거절할 때, 마침내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하게 된다. 우린 많은 전통에 종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롭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힘이 없고 오히려 지켜야 하는 명령이 추가되어 화가 나기까지 한다. 사람의 교리를 거절하고 자유로워졌을 때만이 말씀에 순종할 힘이 생긴다. 전통은 우리를 종으로 삼지만, 말씀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진리는 모든 사람이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yes’라고 말하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용기 있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no’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가? 율법은 자유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주려는 것임을 믿는가?(약1:25) 하나님의 나라를 마음 중심에 이루려면 먼저 거짓 사랑, 거짓 믿음, 거짓 소망, 거짓 자유를 버려야 할 것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1:25)
첫댓글
글이 작고 흐려서....내용이 잘 안들어와요..ㅜ.ㅜ
PPT글이 작은가요?
@자유하라
폰으로 바서 그런지... 작고 흐려요.
좋은 내용이 묻힐까 아쉽네요..
@jwha 폰의 해상도를 높게 바꾸시면 좀 더 선명해질거 같아요
저도 폰의 해상도가 낮으면 흐려지더라구요
한번 알아보세요~~^^♡
그리고 격려 고맙습니다
오늘도 말씀 연구가 기쁘고 즐거울거 같습니다
할렐루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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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도 높이니 좀 나으네요
그래도 전엔 선명했는데 요번글은 흐려요.
좋은 글인데...어려운건 사실이잖아요~
글이 어두워서 내용도 어려워질까 걱정이 되서요.
담엔 다시 진~~한 글을 기대할께요!
평안하십시요~^^
네 알겠습니다
이번에 글자가 좀 작아지고 얇아진 면도 있네요
예전처럼 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하루되세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