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갈라티아 1,13-24 루카 10,38-42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두 자매 가운데 누가 이야기의 중심인물로 보이십니까?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가 칭송을 받지만, 사실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가는
중심인물은 그녀의 언니 마르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 속에서 마르타가 겪는
마음의 동요와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여기서 ‘분주함’이란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움직인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마음이 흩어지고 어지러운 상태도 포함합니다.
사실 마르타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그분을 집에 초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귀한 손님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해야만 하였고, 마르타가 그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그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속 편하게 말씀을 듣고 있는
철없는 동생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언니 입장에서 화가 날 법도 합니다. 참다못한 마르타는 동생이 자신을 거들게 해 주십사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언니가 동생에게 직접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집에 온 손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큰 결례이지요. 그러나 마음이 복잡해진 마르타는
그런 요청이 실례가 되는지조차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 초대되신 예수님께서 사소한 집안싸움의
중재자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는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질투심에 사로잡힌
인간의 전형을 비추기도 합니다. 마르타는 그분 말씀이 듣고 싶어서 예수님을 집에
초대하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동생이 말씀을 들을 기회마저 박탈하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 안에도 그런 옹졸함이 숨어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리지 못할 바에는
남도 누리지 못하길 바라는 질투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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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갈라티아 1,13-24 루카 10,38-42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께서는 방학이 되어 본당으로 돌아오면 신학생들에게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동창 신학생에게는 성당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하였고, 첫영성체 교리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제게는 주일학교 여름행사를 도와주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답사를 다녀왔고, 여름행사에 함께 했습니다. 처음에는 친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여름에도 시원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귀여운 초등학생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저는 땀을 흘리면서 산을 오르기도 했고, 캠프파이어를 위해서 장작을
쌓기도 했고, 텐트에서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저와 동창 신학생의 성격을
아셨던 본당 신부님의 배려였습니다.
저는 활동적이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본당 여름행사를 도와주도록
배려하셨습니다. 동창 신학생은 과묵하고, 술도 잘 마시지 않고, 차분하기 때문에
사무실 업무를 맡겨 주셨습니다. 제가 사무실 업무를 맡았다면 저는 실수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동창 신학생이 여름행사를 도와주었다면 저보다는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제서품을 받고서 저는 주로 강북에서만 지냈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이 많았던 본당이었습니다.
강남 본당에서 지내는 동창 신부들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보좌신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돼서 간 곳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 있는 적성 성당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의정부교구가 분할되기 전이었기에 경기도 지역의 본당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처음 부임해서 미사를 봉헌 할 때는 신자들이 5명 나왔습니다.
주일에도 100여명이 나왔습니다. 헌금도 300,000원 정도 나왔습니다.
서울의 본당에서 사목하는 동창신부들과는 사목의 환경이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제가 있던 적성 성당에는 서울의 본당에는 없던 것들이 있었습니다.
조금만 나가면 임진강이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교우들은 싱싱하고 신선한 농산물을
가져왔습니다. 양계장, 목장, 인삼밭이 있었습니다. 임진강의 매운탕도 쉽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들과 함께 지내셨지만 저는 그래도 100명이 넘는 신자들과
함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적성 성당에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했던 시간들입니다.
시골의 맑은 공기, 신선한 먹거리, 가족과 같은 본당 공동체는 저의 건강을 위한
삼위일체였습니다. 혈압이 있었지만 그곳에 있으면서 혈압도 정상이 되었습니다.
도시에서는 하기 힘든 일들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본당에서 여름 농촌 봉사활동을 오면 기꺼이 성당에서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마당이 넓었기 때문입니다. 전신자가 매년 가족 수련회를 다녔습니다.
그래도 버스 2대면 충분했습니다. 농산물 직거래도 했었고,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31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보람 있고,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건강과 성격을 배려해서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보내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닙니다.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과거에 무엇을 했느냐로 하느님께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했었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불행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남의 떡은 단지 커 보일 뿐입니다. 마르타처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불평하기 보다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감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크고 맛있는 떡이 될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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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중관 베드로 신부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루카 10,38-42
하느님 일이 아닌 하느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언니인 마르타는 예수님의 식사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동생인 마리아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으니 조금은
화가 나서 예수님께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두 여인, 마르타와 마리아는 활동가와 관상가의 모범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식사 대접은 당연하고 지당한 일입니다.
그러나 손님으로 모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더욱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홀로 방 안에
계시고, 두 자매가 식사 준비에만 정신이 없다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쓸쓸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집에 오신 이유는 두 자매와 정담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마태4장4절]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의미이며, 목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마음과 마음, 혼과 혼이 통해야 살 수 있듯이,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소통이 없다면 무슨 의미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장42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시중드는 일을 나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아의 몫을 빼앗으려고 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의 몫도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생전에 ‘살아있는 성녀’라는 칭송을 들었던 고 마더 데레사 수녀는 ‘관상에서 넘쳐
흘러나온 것이 활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기도하고 활동하였습니다.
그녀에겐 기도와 일이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활동하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는 많은데 기도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란 무엇입니까? 기도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호흡하는 숨결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없는 삶은 생기 없는 삶이며,
메마른 삶에 불과합니다.
기도를 잃어버린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그곳은 생명력이 없는 곳이며, 삭막한 사막과 같은 곳입니다.
오늘날 냉담자가 많은 이유도 교회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도
활동에만 치우치고 기도의 삶이 부족한 때문이 아닐까요?
‘활동이 기도를 삼켜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칫 활동에만 열중하다보면 기도는 점점 하기 싫고 고리타분한 것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한다면서 하느님은 잊어버린 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이 이룰 수없는 일까지도 설계하고 밀고 나가면서 한없이 쫓기게 되고,
설계한 것을 이루지 못해서 초조해하고 실망하고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 속엔 허무함과 공허함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나는 누구입니까? 기도가 없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그것은 마치 노래를 잃은 카나리아 새와 흡사한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10장42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하나 필요한 것은 하느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속엔 기쁨과 평화가 강물처럼 흘러넘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에 다시 한 번 귀기우려 봅시다.
‘ 마리아 너는 오직 하나 필요한 것,
하느님의 일이 아닌 하느님’ 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 몫을 택했으니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결코 그 몫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아멘.
부산교구 표중관 베드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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