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승 李熙昇 (1899~1989)】
「"딸깍발이 선비,우리말 지킴이 이희승(李熙昇) 선생」
1897년 4월 28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의곡면(義谷面) 포일리(浦一里, 현 의왕시 포일동) 양지말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호는 일석(一石)이다. 1900년 5세 때에 상경하였으나, 1902년 7세 때에 누대의 선영이 있는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한면(臨漢面) 상조강리(上祖江里)로 낙향하였다. 고향 개풍군은 현재 북한의 황해북도에 소속되어 있다.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였다. 이 학교에 오쿠라 신페이(小倉進平)라는 일본인 교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고향의 일가인 이한룡(李漢龍)으로부터 주시경(周時經)의 『소리갈』을 빌려 읽고 국어를 연구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주시경의 저술을 통해 사숙하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정리과 고원으로 근무하였다. 1916년 중앙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고, 1918년 졸업하였다.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는데, 동기생으로 이효석(李孝石)·이강국(李康國) 등이 있었다.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뒤, 같은 해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조선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타카하시 토오루(高橋亨)와 오쿠라로부터 문학과 어학을 공부하였다. 재학시절인 1928년 최현배(崔鉉培)를 찾아갔고, 최현배의 소개로 조선어연구회의 동지가 될 것을 함께 맹약하였다.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4월에 조선어연구회 정회원으로 입회하였다. 다카하시의 주선으로 경성사범학교의 교유(敎諭)가 되었다. 1930년 11월 이극로(李克魯)의 권유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회원이 되었고, 1931년 1월 6일 편찬위원에 선임되었다.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연구회 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의결할 때, 12인의 제정위원 가운데 한 명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 1월 24일 조선어학회가 중심이 되어 외래어표기법 통일문제협의회를 조직하였을 때, 이극로·정인섭(鄭寅燮)과 함께 책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조선어학회가 추진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차 토의와 2차 토의에 참여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3년 한글날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고 책자로 간행하였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어학회가 후원한 제2회 조선어강습회의 강사로 활동하였다. 1933년 조선어학회가 주최한 하기한글강습회와 1934년 제3회 조선어강습회에서 강사로 참여하였다. 1934년 조선연무관이 주최한 강습회와 같은 해 7월 만주 교포를 위한 강습회에 참여하여 강연하였다. 4대(1934~1935)와 5대(1935~1936)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6대(1936~1937)와 7대(1937~1938) 조선어학회 간사를 역임하였다. 1934년에 국사와 국어국문을 중심으로 한 진단학회(震檀學會)창립의 발기인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서 1936년까지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과 수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회의 제1독회에서 제3독회까지 모두 참여하였다. 1935년에서 1936년에 걸쳐 조선말 표준어 사정을 위해 열린 제1독회 장소인 온양(溫陽)과 제2독회 장소인 우이동(牛耳洞), 제3독회 장소인 인천(仁川) 회의에 대해 주관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36년 한글날에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고, 이를 책자로 발간하였다. 1937년 조선어학회가 학회 회관에서 개최한 한글 강습회에서 「철자법 원리」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38년 1월부터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한글』 52)를 연재하기 시작하여 1940년 4월(『한글』 76)까지 총 20회를 게재하여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어떻게 해서든 보급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글은 1946년 11월 단행본으로 발간되어 민족어 규범 수립 운동에 기여하였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문화적 민족운동이고 심모원려(深謀遠慮)한 민족독립운동의 점진 형태로 규정하여 1942년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조선어학회 관련자를 검거하여 탄압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같은 해 10월 1일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함남의 홍원(洪原)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
1944년 9월 30일 일제는 개정 치안유지법 제1조의 결사(結社) 조직죄를 적용하여 공판에 회부하였다. 일제는 예심종결문에서 이극로·최현배·신명균(申明均)·이윤재(李允宰) 등과 한국 독립의 목적을 가진 조선어학회라는 결사를 조직한 점, 한글철자법 통일안과 표준어 사정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과 한글강습회와 한글반포 기념식에 참여한 점, 기관지 『한글』 발행에 협의한 점, 조선어학회가 한국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인계받는 문제를 협의한 점, 이극로가 조직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 찬동한 점, 한국어사전에 사용할 문법술어에 대해 최현배·정인승과 협의한 점 등이 조선어학회의 목적 실현을 위한 행위를 한 것으로 서술하였다. 1945년 1월 16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약 3년간 옥고를 겪었고 광복 후 풀려났다.
광복 뒤에도 조선어학회 재건에 참여하였다. 13대(1945. 8. 26 ~ 1946. 2. 3) 조선어학회 간사를, 14대(1946. 2. 4 ~ 9. 8)와 15대(1946. 9. 9 ~ 1949. 9. 25) 조선어학회 이사를 맡았다. 1945년 12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였다. 1946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임명된 이래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1947년 『조선어학논고』를 발행하였다.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9년 10월 한글학회로 개명된 뒤, 한글학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53년 한글학회 감사에 재선임되었다. 1955년 3월 한글학회 이사에 다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국어학개설』을 발간하였다. 1958년 12월 중고등학교에서 학교문법 용어를 ‘한자어’ 용어로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1956년 5월 7일부터 국어사전 편찬에 착수하여 100여 명의 인원의 협력을 얻어 6년이 걸려 1961년 12월 28일 『국어대사전』을 편저하여 발행하였다.
1969년 7월 31일 창립한 한국어문교육연구회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 학술단체는 모든 교과서에서 한글과 한자의 병용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는 단체였다. 1974년 한국어문교육연구회의 학술지인 『어문연구』 4호의 「권두언」에서 학교교육에서 국한문혼용으로 교육하고, 국민의 일상 생활에서도 국한문혼용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에도 일관되게 국한문 혼용의 문장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조선어학논고』(1947), 『국어학개설』(1955),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강의』(1953)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