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덕행으로 이 공양을 받기가 부끄럽네
등록 2021-08-12 07:59
수정 2022-06-26 21:21
저녁 예불을 마치고 법당 문을 잠그려고 하는데 남녀 두 분이 손에 상자를 들고 급히 들어온다. 여느 참배객이려니 했다. “다행히 부처님께 공양 올릴 수 있겠네요” 그 분들은 과일 상자를 불단에 놓고 정성스레 절을 올렸다. 절이 끝나자 어디서 오신 분들이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실상사 절 앞 농장에서 일하시는 우리 동네 분들이다. “오늘 첫 수확한 포도를 부처님께 공양 올렸습니다.” “아, 그래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내일 사시 기도 때 축원하고 점심 때 절의 대중들과 함께 공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덕담을 들은 부부는 매우 흡족한 얼굴이다. 다음 날 알아보니 그분들은 해마다 토마토, 포도 등 첫 수확한 과일을 부처님께 공양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참 기분이 좋았다.
경전에는 주고받는 모두에게 의미 있고 감동을 주는 공양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했는데, 이런 공양이 바로 그런 공양이다. 무엇보다도 도시에 사는 불자들이 돈을 주고 가게에서 사온 공양물이 아니라, 우리 동네 사람이 몸소 땀 흘려 지은 생산물을 공양 받으니 더없이 값지고 소중하다. 그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나의 합장이 어느 때보다 경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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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포도 두 상자를 받고 새삼 공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공양이란 그저 물건을 주고받는 행위가 아니다. 공양은 ‘그 어떤 사람’에게 건네는 ‘그 어떤 마음’이다. 그럼, 왜 주는가? 그 이유인즉 단순하다. 그저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굳이 왜 주고 싶으냐고 묻지 말라. ‘그냥’이다. 그냥 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냥 주고 싶다는 그 속마음을 헤아려 보면 그저 그런 그냥이 아니다. 그가 좋기 때문이다. 그에게 뭐라도 주면 내 마음이 좋은, 그냥 그런 그냥이다. 마치 어느 중학생 아들이 어느 겨울 날 집 앞 가게에서 아버지가 유난히 좋아하는 호떡을 사왔다. 아버지가 묻는다. “어인 호떡?” 아들이 말한다. “뭐 그냥.”
그동안 내가 받은 이런저런 공양이 생각난다. 신심 깊은 불자들에게 옷, 빵, 과일, 차, 음반, 책 등을 받았다. 그리고 더러 얼마간의 돈도 받았다. 올 초에 어느 분은 ‘다동이 간식 값’이라고 적은 봉투를 내게 건넸다. 5만원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아마도 10만 원 정도는 공양해야 하는데 약소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마음이 보여 빙그레 웃었다. “아, 요즘은 내가 다동이에게 늘 밀리고 삽니다. 하하.” 다동이는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견이다. 이렇게 정성스런 공양을 받을 때마다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부끄럽고 경건한 마음이 든다. 과연 내가, 땀 흘려 번 돈으로 사온 이웃들의 공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내가 지금 밥값을 하고 있는가?
저자에서 직접 인연이 없는 분들의 공양을 받을 때도 더러 있다.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밥값을 내려고 하면 이미 누가 계산을 하고 갔다. 다른 스님들에 비해 이런 사례가 좀 많은 편이다. 음식이 나오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사이 시간을 메꾸는 대신 책을 읽는데, 이럴 때 누가 음식 값을 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간혹 대중교통 안에서도 이름 모를 분들이 “이것 밖에 드릴 게 없네요” 하며, 생수나 음료수를 건넨다. 그럴 때 옹달샘에 고요히 번지는 물결 같은 미소가 내 마음에 일어난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열 개의 명호가 있다. 부처, 여래, 세존이 우리에게 익숙하다. 부처님에게 ‘응공(應供)’이라는 별칭이 있다. 마땅히 대접받을 만한 분이라는 뜻이다. 진리를 체득하고, 중생의 미망을 깨우는 법을 설하고, 그 법과 언행에 감화 받은 당시의 사람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번뇌를 소멸하고 마음의 평온을 얻었기 때문에, 존경과 신뢰의 의미로 그렇게 불렀고, 음식과 의복 등을 공양했던 것이다. 부처의 제자들 또한 그러한 대접을 받았다. 반면 제자들이 서로 싸우고 화합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던 코삼비 마을에서는 신자들이 부처의 제자들에게 공양을 올리지 안했다. “당신들은 대접 받을 자격이 없어” 이런 선고를 신자들이 내린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공양의 풍속도 많이 변하고 있다. 소박하고 정성스런 공양이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느 불자님은 염불과 법문을 많이 하는 스님들을 염려하여 유기농 도라지를 홍삼과 함께 절여서 가져온다. 맛있다고 전국적으로 소문난 과일, 건강 음료 등의 공양물이 택배로 온다. 귀농한 사람들이 곱게 물들인 수건과 목도리도 인기 공양물이다. 때로는 과분하게 넘친다. 이런 공양물을 받을 때마다 내게 묻는다. 내가 뭐라고, 단지 수행자라는 이유만으로 이런 공양을 받아도 되는가. “내게 이 공양이 어떻게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깨달음을 이루고 몸을 치료하는 약으로 알고, 이 공양을 받습니다.”라는 공양게를 떠올리지만, 늘 고맙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과연 내가 밥값하고 있는가?”
이웃들이 공양을 가져오면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그 자리에서 표현한다. 그 또한 그분들에게 건네는 공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분에 넘치는 고가품의 공양이 오는 경우에는 일단 잘 받는다. 그리고 어느 때를 기다려 조용히 말한다. 단순소박하게 살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을 지키는 공양물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절과 스님들에게 공양도 하면서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일 또한 불보살님께 공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중생에게 공양하는 일이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일이다.’라는 화엄경의 말씀을 인용한다. 얼마 전 백일기도 입재 때, 그 자리에 참석한 불자들에게 색다른 공양을 권했다. “지금 미얀마 사람들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현재 한국에 머물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는 미얀마 청년들을 돕는 일입니다. 실상사도 그 청년들을 위하여 모금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얼마간의 성금을 보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약이 곧 공양이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돈이 곧 공양입니다.” 그렇게 공양의 의미를 설명했다. 현재 정성이 깃든 돈이 십시일반으로 모이고 있다. 이렇게 지극한 마음을 전하면 돈이든 밥이든 모든 것이 ‘법(진리)’이 되고 공양이 된다.
그날 우리 동네 사람이 직접 농사 지은 포도 공양을 받고 생각했다. 나는 세상의 이웃들에게 어떤 공양을 해야 하나? 나도 때로는 밥을 사주어야 하나? 뭐 염주나 책들 같은 것을 주어야 하나? 생각해 보니 굳이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공양이 있을 것 같다. 받는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면 뭐든 공양물이 된다. 그러니 그분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내가 언제든 쉽게 할 수 있는 공양은 동네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게 나누는 인사공양이다.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고, 때로는 일하는 밭에서 잠시 농사 얘기를 나눈다. 말을 주고받으며 정이 오고가니 이 또한 공양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安心)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立命) 도와주는 일이다. 그런 거라면 뭐 거창하고 무거울 필요가 없겠다. 오는 손님 흔연하고 정성스레 맞아 주면 될 것이다. 편안하게 잠 잘 수 있도록 안내하고, 함께 밥 먹고 차 마시면 좋을 것이다. 때로는 함께 걸으며 대화하면 최고의 공양이 되겠다. 살아가다 힘들면 언제든 찾아오시라고, 이곳이 생각나면 머뭇거리지 말고 오시라고, 진심으로 말을 건넨다. 벗들이 원하면 실상사 농장에서 함께 일을 하며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 참 좋아한다. 맘 편히 웃을 수 있어 매우 행복하다고 말한다. ‘맘 편히 웃을 수 있다’라는 말에 마음이 쏠린다. 세상살이 이리 힘들겠구나. 그러니 부디 맘 편히 웃을 수 있게 내가 도와주어야겠구나. 이게 공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확실해진다.
선가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도가 무엇인가? ‘밥이 오면 입을 벌리고 잠이 오면 눈을 감는다’고. 그러면 이 말을 변주해 보자. 공양이 무엇인가? 하소연하고 싶은 사람이 오면 진심으로 귀를 열고, 외로운 사람이 오면 진심으로 손을 잡는 일이다. 기꺼이 마음만 내면 어려울 게 없는 공양이 처처에 있다.
글 법인 스님/실상사 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