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 금관가야는 부여족들이 세운 나라인가
"이게 내가 평생 갈구하던 그것이다. 마침내 미싱 링크(잃어버린 고리)를 찾았다. 나의 학설은 드디어 완벽하게 증명됐다."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銅복·기마민족들이 갖고 다니던 이동식 밥솥)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에가미 나미오(1906~2002) 도쿄대 명예교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뇌었다. 1991년 3월 어느날이었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주창자인 일본의 대표 적인 고고학자 에가미 교수는 대성동고분군 2차 발굴(90년 9월 3일~91년 4월 14일) 중에 동복이 나왔다는 한국 언론의 기사를 보곤 8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온 길이었다. 그는 1948년 한 좌담회에서 '북방의 부여계 기마민족이 마한과 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복 왕조를 건설했다'는 내용의 기마민족설을 제기해 황국사관 신화에 젖어있던 일본을 뒤흔들어 놓은 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기마민족이 김해지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유물을 찾지 못해 늘 허전해 하던 터였다.
3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29호분에서 남부지방 최초로 북방계 유물인 동복이 나옴에 따라 조사원들은 이 고분이 북방 세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발굴에 힘을 쏟았다. 묘광 길이만 무려 10m인 29호분에서 도질토기와 100개 이상의 판상철부 등이, 그리고 도굴갱(도굴꾼이 무덤안 물건 훔쳐낸 구멍)에선 부서진 금동관이 나왔다. 이에 따라 발굴단인 경성대 박물관은 29호분을 금관가야 최초의 왕묘로 규정지었다. 경성대 박물관은 2차 발굴 7개월 간 3호분에서 39호분까지 36개의 고분을 조사했다. 이중 29호분을 발굴하는데만 꼬박 4개월이 걸렸다.
그해 겨울 날씨는 매우 추웠다. 게다가 대성동고분군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29호분 발굴에 매달렸던 조사원들은 머리 위의 비닐하우스가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만큼 작업에 열중했다. 비닐하우스가 완전히 내려앉아 더 이상 조사를 할 수 없게 돼서야 밖으로 탈출(?)한 그들은 "야, 너 에베레스트 정복하고 왔냐? 얼굴이 왜 그리 새까매?"라며 비로소 서로의 꾀죄죄한 몰골을 두고 웃음을 터뜨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고.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순장, 그리고 앞선 무덤을 파괴하고 겹쳐 무덤을 쓰는 묘제 양식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금관가야를 건설한 집단은 부여족입니다." 발굴단장인 신경철 경성대 박물관장은 91년 2월 현장설명회에서 이처럼 대담한 학설을 펼쳤다. 서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족의 지배집단이 옥저로 피신한 후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史實)을 두고 신 교수는 "이들이 바다를 통해 김해로 건너와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 이 주장은 우리나라 고대사학계와 고고학계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현재의 수로왕릉이 아니라 대성동고분군 29호분이 김수로왕의 묘"라고 단정하는 학자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경성대 박물관 김재우 학예사는 "29호분이 금관가야의 출현을 알려주는 최초의 왕묘라면 1호분(5세기 초)은 금관가야의 종말을 알려주는 최후의 왕묘"라고 설명한다. 13호, 2호, 3호분 등이 그 사이의 왕묘로 추정되고 있다. 김 학예사는 "하지만 4세기 초(1/4반기) 왕묘가 아직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시기의 무덤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대상지까지 잡아놓고 있지요. 소원이라면 그 지역을 발굴해 금관가야의 공백 시기를 메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대성동고분군 관련 학술 세미나가 열리면 학자들은 '금관가야는 부여족이 세웠다'는 신교수의 화두(?)를 놓고 치열한 찬반 양론을 거듭하고 있다.
![]() | |
1991년 3월 25일 '기미민족 정복 왕조설' 주창자인 일본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에가미(왼쪽) 선생과 신경철(오른쪽) 교수가 동복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토론을 하고 있다. | |
경남 김해 대성동고분군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銅복·기마민족들이 갖고 다니던 이동식 밥솥)을 한참 동안 살펴보던 에가미 나미오(1906~2002) 도쿄대 명예교수는 혼잣말처럼 이렇게 뇌었다. 1991년 3월 어느날이었다.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주창자인 일본의 대표 적인 고고학자 에가미 교수는 대성동고분군 2차 발굴(90년 9월 3일~91년 4월 14일) 중에 동복이 나왔다는 한국 언론의 기사를 보곤 80대 후반의 노구를 이끌고 현해탄을 건너온 길이었다. 그는 1948년 한 좌담회에서 '북방의 부여계 기마민족이 마한과 가야를 거쳐 일본 열도에 정복 왕조를 건설했다'는 내용의 기마민족설을 제기해 황국사관 신화에 젖어있던 일본을 뒤흔들어 놓은 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 기마민족이 김해지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사실을 입증할 결정적인 유물을 찾지 못해 늘 허전해 하던 터였다.
3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29호분에서 남부지방 최초로 북방계 유물인 동복이 나옴에 따라 조사원들은 이 고분이 북방 세력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발굴에 힘을 쏟았다. 묘광 길이만 무려 10m인 29호분에서 도질토기와 100개 이상의 판상철부 등이, 그리고 도굴갱(도굴꾼이 무덤안 물건 훔쳐낸 구멍)에선 부서진 금동관이 나왔다. 이에 따라 발굴단인 경성대 박물관은 29호분을 금관가야 최초의 왕묘로 규정지었다. 경성대 박물관은 2차 발굴 7개월 간 3호분에서 39호분까지 36개의 고분을 조사했다. 이중 29호분을 발굴하는데만 꼬박 4개월이 걸렸다.
그해 겨울 날씨는 매우 추웠다. 게다가 대성동고분군은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29호분 발굴에 매달렸던 조사원들은 머리 위의 비닐하우스가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무너지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을 만큼 작업에 열중했다. 비닐하우스가 완전히 내려앉아 더 이상 조사를 할 수 없게 돼서야 밖으로 탈출(?)한 그들은 "야, 너 에베레스트 정복하고 왔냐? 얼굴이 왜 그리 새까매?"라며 비로소 서로의 꾀죄죄한 몰골을 두고 웃음을 터뜨릴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고.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과 순장, 그리고 앞선 무덤을 파괴하고 겹쳐 무덤을 쓰는 묘제 양식 등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금관가야를 건설한 집단은 부여족입니다." 발굴단장인 신경철 경성대 박물관장은 91년 2월 현장설명회에서 이처럼 대담한 학설을 펼쳤다. 서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으로 부여족의 지배집단이 옥저로 피신한 후 행방이 묘연해진 사실(史實)을 두고 신 교수는 "이들이 바다를 통해 김해로 건너와 금관가야를 세웠다"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 이 주장은 우리나라 고대사학계와 고고학계에 소용돌이를 몰고 왔다. "현재의 수로왕릉이 아니라 대성동고분군 29호분이 김수로왕의 묘"라고 단정하는 학자까지 나타났을 정도였다.
경성대 박물관 김재우 학예사는 "29호분이 금관가야의 출현을 알려주는 최초의 왕묘라면 1호분(5세기 초)은 금관가야의 종말을 알려주는 최후의 왕묘"라고 설명한다. 13호, 2호, 3호분 등이 그 사이의 왕묘로 추정되고 있다. 김 학예사는 "하지만 4세기 초(1/4반기) 왕묘가 아직 확인이 안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시기의 무덤이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발굴 대상지까지 잡아놓고 있지요. 소원이라면 그 지역을 발굴해 금관가야의 공백 시기를 메우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도 대성동고분군 관련 학술 세미나가 열리면 학자들은 '금관가야는 부여족이 세웠다'는 신교수의 화두(?)를 놓고 치열한 찬반 양론을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