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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 柳 마 을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이해와 음주문화*
**김준혁
1. 서론
2. 선인들의 술[酒]의 이해
3. 조선시대 탁주(濁酒) 인식
4. 자연과 벗 삼는 선비의 술, 탁주
5 마음을 치료하는 술, 탁주
6 노동의 술, 탁주
7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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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이 논문은 한신대학교 학술연구비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국문요약]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시는 술은 크게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 나뉜다. 술의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와 탁주로 나뉘며 자연스럽게 고급술과 대중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소주인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이라 하고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 초기 ‘청주’, 즉 소주(燒酒)는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런
고급주로 인식되었다. 그 이유는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곡식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소주는 양반사대부가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사용되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시는 술인 탁주를 즐겨하였다. 당연히 탁주는 가장 대중적으로 유통되는 술이었다.
그렇다고 탁주를 일반 백성들만 마신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대부분 탁주를 즐겨하
였다. 그리고 탁주에 대한 다양한 글을 남겨놓았다. 백성들이 문자를 통해 탁주에 대한 다양한 생
각들을 남겨 놓지 못하는 현실이었기에, 선비들이 남겨 놓은 탁주에 대한 많지 않은 기록은 매우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탁주를 여러 의미에서 받아들였다. 모든 술이 다 그러하지만 탁주를 통해 자
신의 내면을 승화시키고, 여러 지인들과 호주가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술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자
신의 울분을 탁주를 통해 승화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명망가들이 밤을 새워 술을 마시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선비들의 술자리가 단순히 의례를 갖춘 향음주례만이 아닌 호쾌한 술자리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탁주는 더불어 금주령 시대에도 금하지 않는 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주령의 술이 청주
이고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 노동을 위한 술이었기에 금주령을 내리지 않은 영조의 정책을 통해
탁주가 갖는 조선시대 백성들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탁주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민속 자료이자 유산이다. 탁주를 만드는 제조법
은 뛰어난 무형유산이며 문화콘텐츠이다. 그럼에도 탁주에 대한 역사학 혹은 민속학과 관련된 논문
은 금주령과 조선 초기 양반들의 음주문화에 대한 몇몇 논문을 제외하고는 거의 연구 성과가 없다.
역사민속학계에서도 음주문화 특히 우리 전통의 탁주에 대한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은 탁주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위한 출발이다. 본 논문을 시작으로 탁주에 대한
여러 분야의 연구가 진행되기를 기대하며, 탁주 연구를 통해 탁주의 민속족 가치를 밝히고 문화콘
텐츠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기를 바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33
1. 서론
술은 전 세계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한 이루 줄곧 인류와 함께 해온 음식
이다. 술은 인간의 의식에 신성함을 더해 주고 축제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해
주며, 사람 사이의 소통에 윤활유 역할을 한다.1)
술은 먹는 이에 따라 좋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약이 될 수도 있다. 술로
인해 건강을 얻는 경우도 있으며, 질병을 얻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다.
술에 대한 옛 사람들의 생각 역시 오늘 우리와 다르지 않을 것이고, 현재
의 술에 대한 인식 역시 옛 사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옛 사람들은
술을 자주 빚어 먹을 정도로 곡식이 풍부하지 않았고, 현재의 우리는 약간의
재화만 들인다면 일단 저가의 소주와 탁주는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동질적으로 술은 신분고하의 차이 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은 부족국가가 형성될 때부터 술을 좋아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濊]의 무천(舞天) 등 고대의 제천행사를 통한 국
중대회(國中大會)에도 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보면 술은 우리 민
족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2) 당시에는 새해를 시작하면서 춤과 노래
를 부르고 술을 마치며 제천행사를 했다.3)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
1) 김학민, 태초에 술이 있었네, 서해문집, 2004. 김학민은 술을 단순히 기호식품이 아니라 여러 음
식중의 하나라고 강조한다.
2) 後漢書東夷列傳. 후한서 동이열전에 우리 민족의 술문화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東夷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
3) 三國志 魏書東夷傳, 夫餘. 삼국지 위서동이전 부여조에 연초의 제천행사에 대해 부여인들의 술
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殷曆 正月에 지내는 祭天行事는 國中大會로 날마다 술을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이름을 迎鼓라 하였다. 이때에는 刑獄을 중지하고 죄수를 풀어주었다.” 三
國志 魏書東夷傳, 高句麗條에도 고구려인들의 술 문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
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桴京이라고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
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三國志 魏書東夷傳 濊條에 동예의 술문화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
니 이를 舞天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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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들에게 축제는 삶의 일부였으며, 이 과정에서 더욱 자신들을 기쁘고 즐
겁게 하는 것이 바로 술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신분질서가 생기고 생산경제의 발
전에 따라 술의 형태도 달라졌다. 상류층이 먹는 ‘고급술’과 하층민이 먹는
‘대중술’로 나뉘어졌다. 전근대사회의 상류층에 해당하는 지배계층은 소수에
불과했다. 따라서 국왕과 지배층에 의해 통제됐던 백성들은 대중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고 그 양 또한 풍족하게 마시기는 어려웠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술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어떤 술을 마셨
는지 알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서민들이 주로 마셨던 술은 탁주(濁酒), 즉 막
걸리였다. 그럼에도 당시 조선의 백성들이 탁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하였
는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마셨는지까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일반 백성들이
탁주에 대한 글을 남겨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글을 익힌 선비들만이 자
신들이 마신 탁주에 대한 생각을 일부 정리해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탁주에
대한 조선 백성들의 생각을 온전히 복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현재 학계에는 조선시대 탁주 문화에 대한 논문은 없고, 조선시대 금주령
에 대한 논문4)과 조선 초기 양반들의 술 문화에 대한 논문이 일부 있다.5)
이 외에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선인들의 음주 모습을 연구한 논문이 있
다.6) 회화를 통해 본 선비들의 음주문화를 연구한 논문에는 조선의 음주 문
화에 대한 소개가 있지만, 그림에 나타난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한 회화
사적 의미를 연구한 것이기에 본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탁주를 마시는 조
선시대 사람들의 정서적 이해와 문화를 대변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조선시대 여러 선비들이 남긴 문헌을 통해 탁주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당시 선비들의 탁주에 대한 인식과 음
주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같은 연구는 역사민속학을 기반으로 하는
4) 배진아, 조선후기 음주문화와 금주령,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박소영, 「조선시대 금주령의 법제화 과정과 시행양상」, 전북사학 42, 전북사학회, 2013.
5) 류정월, 「조선초기 양반의 술 문화-조선 초기 잡록의 술 관련 일화를 중심으로-」, 동방학 19,
한서대학교 동방학연구소, 2010.
6) 유옥경, 조선시대 회화에 나타난 飮酒像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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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21세기형 문화기반 구축에 도움이 될것이라고 생각된다. 탁주는 우
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민속자료이자 유산이다. 탁주를 만드는 제조
법은 뛰어난 무형유산이며 문화콘텐츠이다. 이를 장기적으로 발전시켜 탁주
의 민속성을 강조함과 더불어 세계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논문의 한계는 다양하고도 명확한 문헌을 통한 일반 백성들의 탁
주 문화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 제조와
관리 등에 대한 내용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향후 지속적
인 연구 과제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다.
본 논문을 시작으로 조선시대 선비들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탁주에
대한 이해와 음주문화가 새롭게 조명을 받아 음주문화에 대한 새로운 연구
영역으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
2. 선인들의 술[酒]의 이해
7) 공자의 주역을 새롭게 정리한 김석진은 대산주역강의에서 스스로의 약속을 어기고 술을 계속
마시는 것은 신의를 잃어버린 것이고, 이는 올바름을 어긴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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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지만, 너무 많이 먹고 취해 이성을 잃으면 잘못된 행동으로 오히려 신
뢰를 깬다는 것이다.
공자가 주역 마지막 괘에서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라”고 한 것은 그 당시
에도 잘못된 음주문화가 많았고, 그로 인해 역사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에서 “몸가짐에 부끄러움이 없으며,
곳곳에 사신으로 가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이를 선비라 부를
만하다”며 바른 처신을 하는 관료를 칭송했다.
고려시대 이규보는 술을 ‘국성(麴聖)’이라고 표현했다. ‘국성(麴聖, 맑은술)
의 자는 중지(中之 곤드레)이니, 주천(酒泉) 고을 사람’이라며 술을 의인화하
고 술의 미덕을 강조했다.8)
술은 조선 건국과정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선의 군왕들은 백성들이 흠
뻑 술을 먹고 기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이름을 지을 때 시경(詩經에 나오는 구절 중 하나인 “이미 술에 취하고 덕
(德)에 배부르니 군자만년(君子萬年) 그대의 덕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
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왔다.9) 술에 취하고 군왕의 덕에
배부른 것이 가장 이상적이 사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 재해 등을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금주령(禁酒令)
이 수시로 내려졌다. 그렇지만 금주령은 시간이 지나면서 희미해졌고, 해지
한다는 명(命) 또한 분명하지 않았다.10) 세종은 “태종께서 말씀하시길 ‘술을
금하는 것은 무익한 짓이다. 부호(富豪)들은 금망(禁網)에서 벗어나고, 빈약
한 자들만이 죄에 걸려든다’고 하셨는데, 내가 직접 당해보니 과연 태종의
말씀과 똑 같다”11)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시대 사람들은 신분 가릴
것 없이 술을 무척 좋아했으며, 태종은 금주령이 무의미하다고 했고, 세종
역시 이를 인정했던 것이다.
8) 東文選 卷100, 傳, 麴先生傳.
9) 정도전, 삼봉집, 심경호 역, 한국고전번역원, 2013, 340쪽.
10) 배진아, 조선후기 음주문화와 금주령,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역사교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12쪽.
11) 世宗實錄 卷67, 17年 3月 丙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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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술이 마냥 좋을 수만은 없다. 음주로 인한 폐단을
싫어하는 사람도 상당수 존재했다. 조선의 22대 국왕 정조(正祖)는 술에 대
한 적극적인 지지와 그에 따른 책임의식을 강조했고, 술의 폐단을 예방하고
자 했다.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신료들과의
화합을 위해 술을 자주 마신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경연에서 신하들과 다음과 같이 술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예기악기(樂記)에 “선왕(先王)이 주례(酒禮)를 만들 때에 일헌(一獻)의 예법
을 빈(賓)과 주(主)가 백배(百拜)를 하도록 하여 종일토록 마셔도 취하지 않게 하였
다.”고 했으니, 술을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예에서도 깊이 경계한 바인데, 이 장에
서는 “술은 정량이 없었다[惟酒無量]”라고 하고, 주자가 풀이하기를, “양을 정해
놓지 않고,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고 하여 마치 취하지 않으면 그치지 않는
것처럼 하였으니, 어째서인가?
이 같은 정조의 질문에 이익운(李益運)은 “정량이 없었다[無量]는 두 글자
는 외면만 얼른 보면 마치 사람을 취하도록 유도한다는 혐의가 있을 듯하지
만, ‘어지러운 데에까지는 이르지 않았다[不及亂]’는 세 글자를 보면 정량이
없는 가운데에 절로 정량을 둔 뜻이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
의 주량이 같지 않으니 다만 얼근히 마시는 것일 뿐입니다. ‘취하는 것으로
절도를 삼는다[以醉爲節]’의 취(醉) 자가 어찌 얼근히 마신다는 뜻이 아니겠
습니까.”12)라고 대답했다.
이는 술을 마심에 있어 절도를 가지고 마셔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옛 사람
들은 술을 마심에 있어 양껏 마시되 절도가 있어야 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조는 술을 마시는 태도에 대해 독특한 사고를 갖고 있었다.
12) 弘齋全書 卷71, 經史講義8, 論語1, 鄕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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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들이 말하는 ‘주량(酒量)이 있다는 자’가 술에 의해 부림을 당하여서
절주를 하고자 하면서도 절주를 하지 못하니, 참으로 가소로운 일 중에서도 심한
경우가 아닌가. 절주를 해야 할 때는 절주는 해서 비록 반잔의 술이라 할지라도
입에 가까이 대지 않고, 마시고 싶을 때는 마시되 비록 열 말의 술이라 할지라도
마치 고래가 바닷물을 들이키듯 마신다면, 이러한 경우를 두고 비로소 주량이 있다
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술에는 한량이 없다[酒無
量]’고 하셨으니, 여기에 비로소 ‘한량이 없는 술’은 곧 ‘한량이 있게 마신다’고 이를
수 있음을 알 수 있다13)
즉 중요한 일이 있어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아야 할 상황이면 주변 유혹을
극복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고, 중요한 일이 마무리
돼 기쁜 자리를 축하를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함께 즐거워하며 기쁘게 마시
되, 난잡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조는 기쁜 일이 있으면 신하들과 흠뻑 취하는 술자리를 마련했
다. 그는 1792년(정조 16) 3월 2일 성균관 제술 시험의 합격자들과 희정당에
서 연회를 벌였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합격자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
는 한시에서 짝을 맞춘 글귀인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했다.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
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不醉無歸]’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
라. 우부승지 신기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
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14)
이를 통해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온 것을 기뻐하는 정조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조선 최고의
13) 弘齋全書 卷178, 日得錄 18, 訓語5.
14) 正祖實錄 卷34, 16年 3月 辛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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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이라고 평가받는 규장각 각신들이 사용하는 팔환은배를 사용하도록
한 것은 국왕이 술자리를 통해 최고의 격려를 해준 것으로, 술에 대한 정조
의 철학을 현실적으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술좌석에 익숙한 사람으로 하여금 술잔을 돌리게 하여 술을
마시는 음주문화가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음주문화에 잔
을 돌리는 문화가 있었고, 이러한 음주문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반면 술에 대해서 부정적 인식을 가졌던 인물 역시 존재한다.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술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자신의 제자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술은 바로 사람을 죽이는 독약이다. 지금 다행히 병 때문에 술을 끊었는데, 이는
정신을 잘 길러서 편히 장수(長壽)할 징조이다. 아주 통렬하게 술을 끊어서 누룩이
나 술잔, 술동이 따위를 일절 집 안에 두지 말 것이니, 출전(出戰)할 때에 가마솥을
부수고 집을 태우거나 하수(河水)를 건넌 뒤 배를 불살라 버리듯이 단호한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점점 기욕(嗜欲)에 뜻을 빼앗겨 한번 입 언저리에
대면 옛 맛을 참지 못하게 될 것이니, 매우 경계해야 한다.15)
이 글을 쓴 정경세는 젊은 날 과음을 했는데 그것이 화가 돼 몸이 몹시
상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술의 폐단을 늘 강조했다. 남인의 영수 유성룡(柳成
龍)의 문인이었던 그는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권이 수립되자 정치에서 소외되
고,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나라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했다. 따라서 그는 더
욱 더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술에 대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동시에 지적한 이도 있다. 규장각 검서관
을 지낸 이덕무(李德懋)는 “술은 기형을 순환시키고[導氣], 감정을 펴고[布
情], 예를 행하는[行禮] 세 가지 의의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마셔 혼
미한 지경에 이르면 인간의 도리를 해한다”16) 라고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15) 林下筆記 卷8, 近悅, 飮食.
16) 靑莊館全書 卷30, 耳目口鼻心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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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을 모두 이야기 했다. 이는 곧 정조가 주장하던 올바른 음주문화를 이야
기한 것이다.
한편 술을 좋아하고 즐기는 음주대가들의 기이한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서 회자되기도 했다.
희곡(希谷) 이공(李公), 춘산(春山) 김공(金公), 상서(尙書) 조봉진(曺鳳振), 상서
홍기섭(洪起燮)은 성품이 모두 술을 좋아하여 돌아가면서 술자리를 만들었다. 모여
앉아 건(巾)과 버선을 벗어 놓고, 각각 한 모퉁이를 등지고 앉아 잔을 돌리고 안주
를 바꿔 가며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려고 할 때에야 함께 죽을
먹고는 흩어졌다. 술자리가 끝나도록 주고받는 말이 없었으므로 비난하는 말을 듣
지 않았다. 그중에서 이공은 더욱 주량에 한도가 없었다. 젊었을 때 과거에 합격하
였는데, 응시하기 전날에도 절친한 친구와 밤이 새도록 술을 마셨다. 날이 밝아
그 친구가 대궐에 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그는 아직도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였
다. 공과 같은 사람은 ‘바다 같은 주량[海量]’이라고 일컬을 만하다.17)
희곡 이공은 순조 대 정승에 오른 이지연(李止淵)을 말한다. 그는 실학자
담헌 홍대용을 외삼촌으로 두었으며, 정조 대에 세상을 풍미했던 박지원, 박
제가, 백동수, 이덕무, 홍대용 등 이용후생(利用厚生)을 강조한 노론 청류계
의 실학자들의 모임인 ‘백탑파(白塔派)’를 흠모했던 인물이다. 고종 대 영의
정을 지낸 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를 저술하면서 자신이 만났거나
들었던 선비들의 음주문화를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호주가(好酒家) 선비들의 음주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문헌상 나오는 우리 민족의 술에 대한 인식은 매우 우호적이다. 한
해를 마무리할 때도 술과 함께 풍류를 즐기면서 하고, 나라를 세우고 다스릴
때도 역시 술은 빠질 수 없는 존재다. 더불어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단호
하게 술을 끊고 자신을 정진하는 단호함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우
17) 林下筆記 卷28, 春明逸史, 海量會酌.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41
리 민족에게 지속적으로 함께한 민속 음식이다.
3. 조선시대 탁주(濁酒) 인식
우리 민족이 즐겨 마시는 술은 크게 청주(淸酒)와 탁주(濁酒)로 나뉜다. 술
은 거른 형태에 따라 청주와 탁주로 나뉘며, 또 이를 기준으로 자연스럽게
고급술과 대중술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탁주는 거르지 않아 누런 색깔을
띤다고 해서 황주(黃酒)라고도 불렀다.18) 황주라는 말은 청나라에서도 사용
되기도 했다. 옛 사람들은 술꾼들의 은어를 빌어 소주(燒酒)인 청주(淸酒)를
‘성인(聖人)’으로,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으로 표현하기도 했다.19)
이백(李白)은 공자의 수제자로 아성(亞聖)으로 불렸던 안회(顔回)가 밥을
짓던 중에 티끌이 묻은 밥이 아까워서 먹다가 동료들에게 의심을 받았던 고
사와 현인으로 일컬어졌던 윤길보(尹吉甫)의 아들 백기(伯奇)가 계모의 옷에
붙은 독벌(毒蜂)을 떼어 내려다가 참소를 받은 고사를 소재로, “티끌이 묻은
밥을 걷어 내고 독벌을 떼어 내려고 하였건만, 사람들은 성인을 의심하고 현
인을 시기했네.[拾塵掇蜂 疑聖猜賢]”라는 시구를 지었다. 그는 이를 통해 청
주를 성인으로, 탁주를 현인으로 표현했다.20)
물론 이러한 중국 고사는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에도 전해졌는데, 당대 지식
인이었던 목은 이색(李穡)에 의해 전파된 듯하다. 이색이 공민왕 시기 잠시
내린 금주령 때문에 술을 마시지 못했던 시절에 쓴 시를 보면 그러한 내용이
나온다.
술을 금한 금년은 예년과 사뭇 달라 / 酒禁今年異昔年
도성 가득 성현을 의심하고 시기하네 / 滿城疑聖又猜賢
18) 湛軒書外集 卷10, 燕記, 飮食.
19) 三國志 魏志 徐邈傳.
20) 李太白集 卷8, 雪讒詩 贈友人
142 역사민속학 제46호
흰머리로 난파에 다시 숙직을 하다 보니 / 白頭更向鑾坡直
휘영청 달빛에 뼛골은 오싹 정신은 청량 / 骨冷魂淸月照天21)
이를 통해 볼 때 고려시대부터 ‘청주는 성인’이요, ‘탁주는 현인’이라는 인
식이 정립된 듯하다. 하지만 조선 초기 청주(淸酒), 즉 소주(燒酒)는 특정계
급인 양반들에게만 접근 가능한 기호품이었고, 사치스런 고급주로 인식됐
다.22) 그 이유는 곡식을 발효시켜 증류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곡식이 필요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곡식 낭비를 이유로 소주를 금지하자는
간언이 있기도 했다.
조선 성종 대 조효동(趙孝同)은 “세종 대에는 사대부들이 집에서 소주를
드물게 썼는데, 지금 연회에서 모두 쓰므로 낭비가 심하니 금지하자”고 국왕
에게 요청했고, 실제로 성종은 이를 받아들였다.23) 또한 소주는 너무 많이
마시면 중독(中毒)이 되어 얼굴이 파랗게 되고 말을 못하는 구금(口噤)이 되
며, 혼미(昏迷)하여 의식을 잃게 되기도 하는 폐단이 있기도 했다.24)
이처럼 소주는 독하기도 하여 건강에 폐단을 주기도 하였지만 양반사대부
가를 중심으로 빚어지고 사용되었기에 조선의 백성들은 주로 탁주를 즐겨마
셨다. 탁주는 백성의 술로, 거르지도 짜지도 않고 그대로 마시는 술이다. 그
래서 조선시대 문인 정희량(鄭希良)은 이를 ‘혼돈주(渾沌酒)’라고 불렀다.
혼돈주가(渾沌酒歌)
내 막걸리 내 마시고 / 我飮我濁
내 천성을 내 보전하네 / 我全我天
내가 스승 삼는 술은 / 我迺師酒
성인도 아니고, 현인도 아니네 / 非聖非賢25)
21) 牧隱詩攷 卷31, 詩, 史官皆有他故 代宿館中 五更而起 日色正明 用諸公韻, 時方酒禁.
22) 류정월, 앞의 책, 338쪽.
23) 成宗實錄, 卷239, 21年 4月 壬辰.
24) 山林經濟, 卷3, 救急, 燒酒毒.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43
정희량은 비운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조정의 관료
들과 기득권층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무오사화(戊午士禍)로 인해 김
해로 유배간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산책 간다고 하고는 사라져 신선으
로 화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가 세상을 한탄하며 탁주인 막걸리를 혼돈
주라 이름 한 것은 어쩌면 백성들의 한(恨)이 그 술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누가 나의 이 술을 즐기는 뜻을 알 것인가”라며 혼돈주를
마셨다.26)
이처럼 혼돈주, 즉 탁주는 백성들의 술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그 숱한
금주령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 경제의 안정을 위해 수시로 금주령(禁酒令)을 선포한
임금도 있다. 바로 21대 국왕 영조(英祖)였다. 영조는 1755년(영조 31) 9월
25) 東文選, 續東文選 卷5, 七言古詩, 渾沌酒歌.
26) 긴 밧줄로 가는 해를 잡아매려 하고 / 長繩欲縶白日飛
큰 돌로 하늘을 기우려 하여 / 大石擬補靑天空
허튼 생각, 오산으로 허공에 빠져 / 狂圖謬算坐濩落
반 세상에 문득 늙은이가 되었네 / 半世倏忽成老翁
두어라, 혼돈주나 흠뻑 마시고 / 豈如飮我渾沌酒
담소중에 당우 시절을 대하여 보자 / 坐對唐虞談笑中
혼돈의 도를 내 처음 시작함은 / 渾沌有道人未試
이 법이 부구공(선인(仙人))에서 권하여 왔네 / 此法遠自浮丘公
백이도 아니, 유하혜도 아니 / 不夷不惠全其天
성인도 아니, 현인도 아니 / 非聖非賢將無同
누룩 군을 불러다가 독에 가두니 / 招呼麯君囚甕底
밤낮으로 숨소리가 꼬록꼬록 하더니 / 日夜噫氣聲蓬蓬
이윽고 봄강에 비가 와 흐뭇하듯이 / 俄頃春流帶雨渾
빚어진 색깔이 맑고도 무르익었네 / 醞釀古色淸而濃
바가지에 따라서 부구에게 인사하고 / 酌以巨瓢揖浮丘
가슴속 만고의 불평을 씻어 버리네 / 澆下萬古崔巍胷
한 번 마시니 신령과 통하여 / 一飮通神靈
우주가 개벽하는 듯, 아직 몽롱하고 / 宇宙欲闢猶蒙矓
두 번 마시니 자연과 합하여 / 再飮合自然
혼돈을 도주하여 초자연으로 / 陶鑄渾沌超鴻濛
손으로 혼돈 세상을 어루만지고 / 手撫渾沌世
귀로 혼돈 바람을 들으니 / 耳聽渾沌風
넓고 큰 취향에 내가 주인 / 醉鄕廣大我廼主
이 벼슬은 천작이라 인작 아닐세 / 此爵天爵非人封
구구한 두건을 무엇에 쓰리 / 何用區區頭上巾
도연명도 역시 다사스러운 사람이었네 / 淵明亦是支離人
144 역사민속학 제46호
11일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와 상의하며 금주령을 선포했다.27) 하지만 이때
도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기 위해 술을 하사하는 호궤(犒饋)와 백성들이 마
시는 탁주인 농주(農酒) 등을 제외하고 금주하라는 전교를 내렸다. 즉 농주
(農酒)는 금주령에서 제외했던 것이다.
영조는 금주의 필요성에 대해 인정하면서도 “성인도 술을 맛있어하는데
어찌 중인 이하라고 맛이 없어하겠느냐”며 술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꿰뚫었
고, 서민들이 마시는 농주는 금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하교를 했다.
옛날 하(夏)나라 우(禹) 임금은 의적(儀狄)을 멀리 하였으나 그 술은 버리지 않았
기에 비록 지주(旨酒)를 즐겨 마시지 말라는 훈계가 있었으나 하나라 말엽에 걸(桀)
이라는 임금이 있게 되었다. 아, 성인(聖人)도 오히려 맛이 있게 여겼거늘 중인(中
人) 이하가 어떻게 맛이 있게 여기지 않았겠는가? 본성(本性)을 해치는 도끼요 몸을
해치는 물건임은 전철(前轍)이 소소(昭昭)하고 후세를 경계함이 뚜렷하였지만 어
찌 이뿐이겠는가? 경외의 곡물 소비와 싸움하고 살인하는 것이 모두 이것으로 연유
하였다. 금주(禁酒)하자는 전후의 청을 내가 어찌 옳게 여기지 않아서이겠는가마는
매번 우활(迂闊)하다고 칭하고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금하자는 청을 막았던 것은
대체로 뜻한 바가 있어서이다. 왜냐하면 모든 일은 본(本)이 있고 말(末)이 있는데
나라에서는 사용하면서 백성에게는 금하는 것이 어찌 본(本)을 먼저하고 말(末)을
뒤에 하는[先本後末] 뜻이겠는가? 국내에서 술을 쓰게 된 것은 당초에 금령(禁令)이
엄하지 않아서이나 유사(有司)의 늦추고 죄임[弛張]으로 인하여 늦추는 자는 너무
늦추고 죄는 자는 너무 죄어서 봄․여름의 영(令)이 다하기도 전에 가을․겨울의
영을 갑자기 행하게 되었으니 많이 빚어 놓은 자는 그 허물이 저에게 있다 하겠다.
술은 무상(無狀)한 것이지만 그 근본은 알알이 나의 백성들이 고생하여 얻은 곡식인
데 갑자기 금령을 행하면 소민이 법을 두려워하여 항아리의 술과 단지의 술을 시냇
물에 쏟는다면 이는 하늘이 낸 물건이 아니던가? 이뿐만이 아니다. …(중략)… 군문
(軍門)의 호궤주는 청주(淸酒)를 금하고 탁주를 빚어 쓰고 농민의 맥주(麥酒: 보리로
27) 英祖實錄 卷85, 31年 9月 壬午.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45
빚은 술)와 탁주는 아울러 금하지 말라. 이 윤음(綸音)을 어제(御製)에 실어 후왕(後
王)에게 가르침을 전하고 중외(中外)에 반포하여 금령을 범하지 않게 하라.28)
이처럼 영조는 농사짓는 백성들이 먹는 탁주를 중요시 여겼고, 이는 조선
시대 국왕들의 전반적인 생각이기도 했다. 또 국왕뿐 아니라 백성들이 가진
탁주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다.
영조 때에는 술과 관련해 벌어진 재미있는 현상도 있다. 임금이 말을 하사
하는 ‘어사마(御賜馬)’ 첩문을 막걸리 한 되와 바꿔 주었다는 것이다. 제주에
서는 날이 갈수록 말의 수량이 적어져 임금이 말을 하사한다고 첩문을 내려
도 백년을 기다려야 되는 상황 때문에 ‘사마(賜馬)’라는 첩문만 받고 수 십
년 기다리는 사람들이 허다했다. 이 첩문을 가진 많은 사람들은 말을 포기하
고 홧김에 막걸리 한 되와 바꿔 마셨으니 참으로 탁주의 흥미로운 풍속이라
고 할 수 있겠다.29)
마지막으로 탁주의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조
선후기 정조 시대에는 탁주 10잔이 1푼이었다.30) 푼은 分으로 숙종 대 상평
통보를 만들 당시 최하 단위였다. 10푼이 1전(錢)이고, 10전이 1냥(兩)이 된
다. 그리고 1000냥은 1민(緡)이 된다.
1789년(정조 13) 7월 수원 신읍치 건설 당시 3칸짜리 초가집의 보상비용
이 15냥, 5칸 초가집은 21냥, 9칸 초가집에는 30냥을 준 것을 보면 1냥의
가치를 대략 이해할 수 있다.31) 당시 1냥이 쌀 2석, 즉 4가마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으니, 1냥의 백분의 1 가치가 농주 한잔의 가격이라고 볼 수 있다.
28) 備邊司謄錄, 英祖 31年, 9月11日.
29) 星湖塞說 卷6, 萬物文, 馬價貴.
30) 備邊司謄錄, 正祖 20년 1月29日, 華城外別庫節目.
31) 水原下旨抄錄 卷2, 己酉(1789) 7月19日.
146 역사민속학 제46호
4. 자연과 벗 삼는 선비의 술, 탁주
탁주는 인간을 자연과 벗하게 만든다. 술이 가지고 있는 매우 뛰어난 효용
성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옛 사람들은 자연과 인간이 술을 매개로 하나
가 되는 시를 남겼다. 그러한 시를 통해 탁주의 가치를 살펴 볼 수 있다.
박효백을 찾아서〔歷訪朴孝伯〕
그대를 만나 옛이야기 하면서 / 逢君話疇昔
애오라지 막걸리를 스스로 따르네 / 濁酒聊自斟
미풍이 새 죽림에 일어나자 / 微風動新竹
때때로 매미 소리 들리누나 / 時有一蟬吟32)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으로 유명한 고봉 기대승이 박효백을 찾아가는 내
용의 시를 남겼다. 그가 홀로 막걸리를 자작하며 옛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다.
늦여름 대나무 숲에 앉아 간간히 들려오는 매미 소리와 미풍에 흔들리는 대
숲의 소리에 고봉은 스스로 감동을 받고 있다. 그는 박효백과 천고(千古)의
장엄한 이야기에 취하고 자연의 소리에 취하여 서로 술잔을 권하고 나누어
먹는 것을 뛰어넘어 스스로 잔을 따라 먹는 멋진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 속
에 나타나는 탁주는 그 어떤 고금의 미주(美酒)보다 자연과 일치하는 술이라
는 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눈 오는 날 서쪽에 사는 이웃을 방문했다가 취해서 돌아온 뒤 감사의 뜻을 붙여
보내다[雪中過西鄰 醉歸寄謝]
32) 孤峰集 卷1, 詩, 歷訪朴孝伯.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47
탁주는 물론이요 거기에 청주까지 / 濁酒兼淸酒
그대의 집 어쩜 그리 내 집 같은지 / 君家似我家
술잔 깊숙이 눈 조각 녹아들고 / 深盃融雪片
등불 꽃에 좋은 시구 떠올랐노라 / 好句入燈花
슬픔 기쁨 넉넉히 맛본 부평초 인생 / 浮世悲歡足
막다른 길목 접어들자 의기가 더욱 솟아나네 / 窮途意氣加
멀리 전송받고 취해서 돌아온 길 / 醉歸煩遠送
싸느라니 반달이 떠 있더이다 / 寒月半輪斜33)
계곡(谿谷) 장유(張維)는 조선시대 효종의 장인이자 대시인이다. 그가 눈
오는 날 서쪽 마을에 사는 이웃을 방문했다가 주인이 내주는 탁주를 한잔
마셨다. 당시 장유는 광해군 시절에 무옥(誣獄)으로 고통을 겪던 시절로 보
인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시에서 ‘슬픔과 기쁨을 넉넉히 맛본 부평초 인생’
이이라고 본인을 묘사하고 있다. 장유는 이 당시 백성들의 술이었던 탁주를
자신의 최고의 술로 삼았던 모양이다.
계곡이라는 호가 말해주듯 장유는 자연을 벗 삼았던 인물이다. 세속의 화
려함과 달리 자 연 속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즐기면서 사는 인물이었기에 그
가 좋아하였던 술은 시에 나오듯 탁주였다. 막걸리를 마시다보니 거나하게
취하게 되었고, 집주인은 이제 자신이 아끼는 술을 꺼내어 들고 나온다. 그것
이 바로 청주이다. 이에 장유는 주인이 가지고 온 청주를 칭찬하며 즐겁게
술을 마신다. 이 한편의 시를 통해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던 장유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서민들이 마셨던 탁주를 좋아했으며, 청주 또한 즐겼음을 잘
알 수 있다.
33) 溪谷先生集 卷27, 五言律詩, 雪中過西鄰 醉歸寄謝.
148 역사민속학 제46호
국화를 심고 나서 이장에게 증정하다[種菊呈李丈]
이웃에서 국화 얻어 울에 이식(移植)했나니 / 南鄰乞菊蒔東籬
가랑비는 부슬부슬 초록색 가지 늘씬늘씬 / 煙雨冥冥長綠枝
무서리 속에 국화꽃 활짝 필적에 / 待到霜天開爛熳
탁주 잔 기울이며 시 한번 지읍시다 / 濁醪相對賦新詩
도연명(陶淵明)은 울 가에서 너를 보며 술 취했고 / 籬邊對酒陶潛醉
굴자는 택반에서 낙영(落英) 주워 배 채웠지 / 澤畔餐英屈子飢
뭇 꽃들과 겉모양을 다투려 하랴 / 肯與衆芳爭物色
천 년토록 그래서 지기(知己)로 사랑받았어라 / 獨憐千載愜心期34)
장유의 또 다른 시를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탁주를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웃에서 국화를 얻어 울타리에 새로 심고 나니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
했다. 장유는 이 꽃이 활짝 피면 주변의 벗들을 불러 탁주를 한잔 하고 시를
짓고 싶어 했다. 도연명도 울타리에 있는 국화를 보고 술 취했고, 굴원(屈原)
역시 초나라에서 쫓겨나 아침에 이슬로 배를 채우고 저녁에 국화꽃을 따서
배를 채웠으니 국화란 바로 지사이자 시인들의 꽃이요, 그 꽃이 새롭게 피어
나는 것을 보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그 어찌 시인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장유의 생각이었다. 이처럼 역사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으로 숨
어 들어간 천고의 기인들이 즐겼던 술은 바로 가장 평범한 탁주였던 것이다.
탁주에서 그들은 인생을 발견했다. 거꾸로 그들의 인생이 탁주를 찾았다고도
할 수 있다.
34) 溪谷先生集 卷33, 七言絶句, 種菊呈李丈.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49
5 마음을 치료하는 술, 탁주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탁주는 마음을 치료하는 뛰어난 명약이기도 했다. 탁
주는 당시 선비들이나 백성들이나 세상살이의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는 약으
로도 사용됐다. 지금도 고통 받으면 술로 마음을 풀 듯이 선인들도 술로 마
음을 정리했다.
태수에게 답하다
엉성한 사립문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니 / 北風吹雪打疏扉
찬 기운이 싸늘하게 얇은 옷을 파고든다오 / 寒氣凌凌透薄衣
누가 탁주를 보내어 병든 나그네 치료하는가 / 誰送濁醪療病客
돌아보니 관청 나무가 비낀 석양에 서 있구료 / 首回官樹依斜暉35)
이 시의 지은이는 정온(鄭蘊)이다. 그는 광해임금 시절 영창대군 폐위에
반대하다가 제주도로 10년간 유배를 가 있었는데, 아마도 이 시는 그 당시
지은 것으로 보여 진다. 제주도로의 유배는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제주
도로 유배 가서 살아남은 이들은 당대 최고의 명문거족 밖에 없었다. 그들은
경제력으로 그나마 버티는 것이지 그렇지 않은 유배객들은 제주도 바다 건너
뭍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만큼 제주도는 천형(天刑)의 땅이었다.
그런 제주도에 유배가 있는 정온이 얼마나 가족들과 벗들을 그리워했겠는
가. 찬 겨울 바닷바람이 오두막을 쓸어버릴 것만 같고, 그 추위에 누가 보내
주는 탁주 한사발이라도 마셨으면 좋겠지만 끝내 탁주는 오지 않았다. 병든
유배자인 정온은 탁주 한사발이면 마음과 육신의 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고
믿었는데 말이다. 막걸리 한 사발이 사람을 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35) 桐溪集 續集 卷1, 詩, 七言絶句, 答太守.
150 역사민속학 제46호
팔월 십구일 꿈에 시 한 수를 읊었는데, 일곱째 여덟째 구가 아슴푸레하여 꿈을
깨고 나서 채워 넣었다.[八月十九日 夢得一詩 唯第七第八句未瑩 覺而足之]
오는 수심 어이하며 오는 늙음 어이하리 / 爭奈愁何奈老何
구슬픈 가을 하늘 물결만 더 일렁이네 / 秋天憭慄水增波
탁주와 사귀면서 소주 점점 멀리하고 / 漸交濁酒排燒酒
장가를 혼자 지어 단가와 섞어 불지 / 自作長歌和短歌
흰머리가 아직은 검은머리보단 적고 / 白髮尙於玄髮少
악인보단 아무래도 호인이 더 많데그려 / 好人終比惡人多
들창 가득 풍월이 맑기가 저러한데 / 一窓風月淸如許36)
강진에 유배가 있던 다산 정약용의 시다. 아비로서 가슴 절절한 아픔을 느
낄 수 있다. 다산은 자식을 9명이나 뒀지만 아들 2명과 딸 1명만 남기고 모
두 어린 시절에 죽었다. 그렇게 죽은 일곱째와 여덟째가 꿈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막걸리를 한 잔 했다. 그리고는
이 시를 남겼다.
정조 재위시절 다산은 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궁중의 미주를 마셨
었는데, 유배 시절부터 그는 더 이상 소주를 마시지 않았다. 그가 유배지에서
마신 술은 국왕 정조가 따라주는 소주가 아니라 바닷가의 어부들이 긴 그물
질에 지쳐 돌아와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 마시던 막걸리였다. 그는 이 막걸리
를 마시며 멀리 떨어진 가족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신유사옥으로 죽은 동지
들을 떠올리며 500여 권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를 남겼다. 막걸리는
다산의 마음병을 치유하면서 그를 단련시켰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악
인보다 호인이 많은 세상이라는 여유로운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36) 茶山詩文集 卷5, 詩, 八月十九日 夢得一詩 唯第七第八句未瑩 覺而足之.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51
세배(世培) 형에 대한 제문(祭文)
유세차 임술년(1682, 숙종 8) 9월 3일 정미일에 반남(潘南) 박세당(朴世堂)은
재종(再從) 서형(庶兄) 박군(朴君)의 널을 길에서 맞이하여 한 병의 탁주와 한 찬합
의 제수(祭需)를 올리며 곡(哭)합니다.
아! 형이여 / 嘻乎兄乎
예전에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 舊由此途
언제나 우리 집에 찾아왔는데 / 常過我室
지금 이 길을 지나시면서 / 今由此途
어인 일로 우리 집에 들어오지 않으시오 / 又奚不入我室
아! 형이여 / 嘻乎兄乎
지금 이 길을 지나는 분이 / 今之由此者
예전에 이 길을 지나던 분이 아닙니까 / 其非昔之由此者乎
아아! / 嘻乎嘻乎
이제 영결하오니 / 從玆訣矣
형은 다시 이 길을 지나며 / 兄不復由此途
다시 우리 집에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 而復過乎我室矣
상향 / 尙饗37)
이 시에서 보듯이 박세당은 재종 서형을 위한 제사에 탁주를 올리고 제사
를 지냈다. 막걸리가 바로 슬프게 죽은 형에 대한 제주(祭酒)였던 것이다. 막
걸리는 결국 제주로까지 나아가 마음의 병을 치유하고 사람과 영혼의 존재를
연결시키는 도구가 된 것이다.
37) 西溪集 卷8, 祭文三首, 世培兄祭文
152 역사민속학 제46호
6 노동의 술, 탁주
술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도 하지만 육체를 더욱 강건하게 해서 노동의
즐거움을 주게 만든다. 노동이 즐거우면 일의 성과도 커지는 것은 너무도 당
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노동을 하는 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독한 청주는 노동의 효과를 약하게 한다.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술이기도 하
다.38) 백성들에게 노동을 위해 도움을 주는 술은 당연히 탁주였다.
보리타작 노래[打麥行]
새로 거른 막걸리 빛 우유처럼 뿌옇고 / 新篘濁酒如湩白
큰 사발에 보리밥 높이가 한 자로세 / 大碗麥飯高一尺
밥 먹고는 도리깨 들고 타작마당 나가서니 / 飯罷取耞登場立
검게 탄 두 어깨가 햇볕 아래 번들번들 / 雙肩漆澤翻日赤
호야호야 소리 내며 발맞추어 두드리니 / 呼邪作聲擧趾齊
금방사이 보리 이삭 질펀하게 널려 있다 / 須臾麥穗都狼藉
주고받는 잡가소리 갈수록 높아지고 / 雜歌互答聲轉高
보이느니 지붕까지 튀어 오르는 보리인데 / 但見屋角紛飛麥
기색들을 살펴보니 뭐가 그리 즐거운지 / 觀其氣色樂莫樂
육신의 노예가 된 마음들이 아니로세 / 了不以心爲形役
낙원과 낙교가 멀리 있는 게 아니거늘 / 樂園樂郊不遠有
뭐가 괴로워 고향 떠나 풍진객이 될 것인가 / 何苦去作風塵客39)
탁주는 노동하는 백성들의 술이다. 보리타작하는 봄날 사내 한명이 윗도리
를 벗고 어깨를 드러내며 호야호야 소리 지르며 도리깨질을 하고 있다. 이
시는 노동을 하는 이들의 강인하면서 잔잔한 모습을 보여준다.
38) 山林經濟 卷3, 救急, 燒酒毒.
39) 茶山詩文集 卷4, 詩, 打麥行.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53
다산은 바로 백성들의 삶속에서 막걸리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가 원한 세
상이 바로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보릿고개 시절에
큰 사발에 가득 밥을 한자로 쌓아 올리고 새로 빛은 우유빛깔 나는 막걸리는
마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군주의 덕에 배부르고 술에 취하며 경복이 찾아
오는 세상인 것이다. 시경의 ‘주아’편에 나오는 경복은 기득권층들의 이야기
기 아니라 바로 백성들이 꿈꾸는 삶인 것이다.
탁주(濁酒)
막걸리 석 잔에 이미 호기가 발동하여 / 濁酒三杯已發豪
노랫소리 격렬하고 칼 소리도 높아라 / 高謌激烈鋏聲高
가슴속엔 하고많은 계책이 쌓여 있거니 / 胸中籌策能多少
술자리에서 반백 머리를 말하지 말아야지 / 莫向樽前說二毛40)
조선 초기 최고의 시인이었던 서거정은 탁주의 의미를 이렇게 전하고 있
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수많은 일들을 술 한 잔 마시고 더욱 멋지게 풀어보자
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서거정은 시인인 동시에 정치인이었다. 정치란 백성을 위한 바른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는 정(政)을 정(正)이라 하였다. 서거정은 조선 초기 혼란
스러운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한 계책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이미 반
백을 넘은 초로의 관료가 됐다. 신진 인사들에게 밀리는 그는 세월의 흐름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젊은이들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술 마시는
능력도 그렇고 백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능력 모두에 대한 자신이었다. 그
래서 막걸리 3잔을 크게 마시고 호기가 발동해 ‘내가 선두에 서겠다’는 호기
로움을 터뜨렸다. 이 시에 그런 마음이 너무나도 잘 담겨있다.
40) 四佳詩集 卷29, 詩類, 濁酒.
154 역사민속학 제46호
결국 막걸리는 노동과 백성, 그리고 정치에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이다. 탁주가 갖는 문화가 바로 이것이다.
7 결론
지금까지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서 본 선비들의 탁주문화를 살펴봤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술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이 술의 대부
분은 고급 소주(청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탁주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은 편
이 아니다. 따라서 현재 역사학과 민속학 분야에서 탁주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부터 우리 민족과 함께 해왔던 술에 대해
학술적 연구의 접근이 없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연구는 술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도 청주와 함께 탁주를 즐겨하였다. 산림경제 및 조선
왕조실록에도 나타나듯이 청주는 고가의 제조 비용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과하게 마시면 건강을 해치기 때문에 탁주에 대한 선호도 높았다. 또한 조선
후기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몰락한 양반이 급증하고 토지를 소유한 평민들
이 늘어나면서 술을 마시는 문화도 변화됐다. 그렇기 때문에 몰락 양반, 혹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양반들은 탁주를 마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지만
그들이 탁주에 대해 남긴 기록은 많지 않다. 아마도 성리학의 철학적 담론을
중시하는 당대의 분위기로 인하여 술에 대한 본인의 회고를 남기지 않은 것
이 주요 요인이 아닐까 한다.
문자를 통해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선비들조차 탁주에 대한 기록을 남기
지 않았기에 당시 글에 어두웠던 백성들의 탁주와 관련된 기록은 더욱더 찾
아보기 힘들다. 다만 탁주를 만드는 기술이 구전으로 남아 있거나 가문의 전
승을 통해 가양주(家釀酒)가 남아 있는 정도다.
이러한 현실이다 보니 선인들이 즐겼던 탁주에 대해 후대인들이 어렴풋이
알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것을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몇 건의 문학작품과 당대 관찬 기록을 통해 조선시대 선비들이 탁
조선시대 선비들의 탁주(濁酒) 이해와 음주문화 155
주를 여러 의미에서 받아들였다는 점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모든 술이 다 그
러하겠지만 선비들은 특히 탁주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승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매개로 사용했다. 또 여러 지인들과 밤을 새워 술을 마시며
대화하는 모습을 통해 당시 선비들의 술자리가 단순히 의례를 갖춘 향음주례
만이 아닌 진정한 소통의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탁주는 금주령 시대에도 살아남았던 술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금주령 당시 진짜 금지됐던 술은 청주이고, 탁주는 노동을 위한 술이었기에
금주령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백성들에게 상징적이었던 탁주는
영조의 정책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향후 탁주(막걸리)는 세계적인 술로 발전할 것이다. 지금도 대중들의 탁주
소비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탁주의 발전에 따라 탁주 제조 기술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탁주의 문화사적 의미를 찾는 역사민속학의 연구가 더
욱 필요할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본 연구를 시작으로 향후 탁주에 대한 다
양한 각도의 연구를 진행되어 조선시대 탁주문화에 대한 전반적 연구가 진행
되기를 기대한다.
[주제어]
탁주(濁酒), 청주(淸酒), 선비, 금주령(禁酒令), 음주문화(飮酒文化),
조선시대(朝鮮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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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1차 사료
世宗實錄, 成宗實錄, 正祖實錄, 弘齋全書, 備邊司謄錄, 水原下旨抄錄, 東文選,
湛軒書, 靑莊館全書, 林下筆記, 山林經濟, 三國志, 李太白集, 牧隱詩稿, 星湖塞說,
孤峰集, 溪谷先生集, 桐溪集, 茶山詩文集, 西溪集, 四佳詩集, 林園經濟誌
2. 단행본 및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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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standing of Takju Liquor & drinking culture
of the classical scholars during the Lee Dynasty
Kim, Jun-hyuk
(Jeongjo Liberal Department of Hanshin University)
Drinking alcohol our people imbibe is largely classified into Cheongju
(refined rice wine) and Takju (aka, Makgeolli; rice-based sweet wine)
depending upon the filtering method, which defines them as premium or
general public liquor. By ancient people, Cheongju was otherwise called as
saint, and Takju sage. But until the first of Lee Dyansty, Cheongju, aka soju,
was affordable by nobilities of certain class that was considered as high-class
liquor. The reason was that it consumed lots of grains to distill from
fermentation.
Since the Soju(Cheongju) was brewed and loved by the high officials, rank
and file loved the Takju that need not distill or filter, which naturally led to
the popular wine for the general people.
Hence, Takju was loved not only by the rank and file, but most of the
classical scholars who left lots of writings on it. In reality, most people could
not write well about thoughts to Takju so it is very significant of the scholars
to leave few meaningful writings on it.
The scholars of Lee Dynasty gave Takju several meanings. Like most
liquors, they sublimed their internal aspect through drinking it and used to have
such gatherings with their close companions and heavy drinkers. Even they
논문투고일: 2014년 10월 17일 / 논문수정일: 2014년 11월 14일 / 게재확정일: 201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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