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서른세 개의 부리를 가진 새☆]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 ============
[서른세 개의 부리를 가진 새]
박연숙 시집 / 시작시인선 0283 / 주) 천년의 시작(2019.01.21) / 값 9,000원
================= =================
서른 세 개의 부리를 가진 새
-우아한 관계
빅연숙
구름 한 장을 타자기에 넣고 키보드를 두드리자 당신은
탈옥을 시작한다 검은 새의 말로 내가 말라그는 나와 헤어지는 일,
손가락에서 번져간 허구의 플롯이다 새는 자신을
누설하며 하늘을 풀어놓고 위기의 전반부는 틀에 박힌
지문을 던져 놓는다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각성 상태의 거울,
노크하듯 두드리며 애무하는 키보드A, 새로 태어나는
문자마다 별 볼 일 없는 구름의 일대기에 닿아있다 당신을
인용하다 거들먹거리며 활짝 피어난 문장들을 더 이상 궁금
해하지 않는다 구름을 아주 잘 알게 되자 새는 새가 아니어도
되는 그렇고 그런 기호가 된다
다만 나는 타자기를 두드리다가 날개 접힌 싱싱한 문장을
꺼낼 뿐이다
물의 서랍
박연숙
얼굴을 서랍에 넣어두고 외출하는 사순절
검붉은 무늬들은 저녁 하늘을 물들입니다
둥근 젖은 박애주의자라는 서약
장미 냄새가 나요, 모두 빨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처음 눈을 뜬 꽃망울에게 세상은 처음이듯
아침에 널은 빨래처럼 아이들은 자라면서 주름을 펴는데
희생자들은 무심히 사라지죠
피리 부는 사람이 보였을까요?
눈치 채기 어렵게 계약은 실패하고 구름은 붉어집니다
떠오른 비명을 닦아낼 수 없어요
눈과 눈 사이가 너무 먼, 나는 육식입니다
입안에서 사월의 장미 냄새가 나요
서쪽을 데려오는 바람이 오래 울어서
꽃잎이 모두 서랍 속에 갇혀버린 그날이에요
흰 책 읽기
박연숙
늑골 아래 어둠은 달착지근하게 고여있다 골목을 읽기도 전에 흘깃 넘어가는 페이지, 입을 열면 얼음이 쏟아진다 여백으로 꽉 찬 허공을 건너뛰며 새겨놓은 글씨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히에로클리프, 언제부턴가 고양이는 가르릉대는 별의 무덤을 펼쳐낸다 천둥번개생선뼈목이천리 되는긴짐승거북……의 말들 먼지로 쓰인 얼굴이 해독되지 않는다 문맹이란 모래로 이루어진 페이지를 읽기 위해 손가락에 침을 묻히는 것, 숨을 멈추면 폐기된 글자의 기원에 가닿을 수 있을까 숟가락에 펄떡거리는 심장을 얹었던 마추픽추, 입김과 날개로 데우고 식혔던 로제타의 늑골에 등을 단다 나의 캄캄한 묵독을 위해 고양이들이 불빛 주위로 모여든다 누군가의 가슴에 밑줄을 긋는다 제 몸을 태우는 유성에서 수없이 태어난 골목들이 저마다 깊숙한 곳에 비석을 세우다 사라진다
찌그러진 곳 펴드립니다
박연숙
꽃을 깨우듯 그가
망치를 들고 제 몸을 그늘 속에 찌그러뜨리면서
차의 상처를 펴고 있다
고양이가 넘어가는 담장
박연숙
천천히 유리창을 열었다 닫는다
이것은 고양이에게 배운 고양이의 언어
유리창에 혓바닥을 대어본다
이것은 담장을 넘는 장미에게 배운 언어
장미 꽃잎을 펼쳐본다
고양이 등을 쓰다듬고 온 혀가 뾰족해져 있다
곡선의 등허리로 담장을 넘는 고양이 피 칠갑 되어있다
장미가 담장 밖으로 길을 내는 방식이다
느슨하게 틈을 열어 고양이를 받아준 담장은
오랜만이라는 듯 다시 꼿꼿하게 척추를 세운다
혀에 장미가 놀고 간 자국 한창이다
동백 레토릭
박연숙
꽃이니까요 당신은 거절할 권리가 있습니다 비극의 절정인 양 시를 쓰고 책을 내지만, 비극이란 관객의 서사, 다시 보면 난 떨어진 꽃, 당신 입장에선 잘린 모가지, 크레인, 개구리, 지은 죄도 모르면서 붉기만 했군요 크레인처럼 울어 본 적도 없으면서, 메마른 가슴을 부끄러워할 형편도 못 되면서, 꽃이 뭘 알아 붉겠어요? 정서가 그런 거겠죠 당신은 크레인을 올려 두통거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꿀이 차면 꽃도 필요 없는 법, 어지러운가요? 어디선가 은밀한 피톨들이 날뛰나 보죠 개구리들은 비키니만큼이나 신경질적이죠 그러므로 절정은 햇빛이 칼을 겨누듯, 끝내 당신은 누릴 권리가있습니다 상투적인 봄이니까요
사랑에 관한 견해
박연숙
오스카 와일드를 읽다 뱃사십삼 페이지
사랑은 식상해, 시인들이 싹을 잘라버렸거든, 하도 사랑
타령을 해대는 바람에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어, 적어도 이
런 구절에는 손가락을 베었어야 옳다
사랑은 풀이야, 칼이 수없이 풀을 베지만 지구가 왜 여전
히 푸른색이겠어, 내 사랑을 어쩌려면(순간 당신은 눈을 감
고 혀를 내민다)지구를 들어내야 할 거야
(여기서 ‘보고 싶다’로 꽃피는 달콤한 환절기를 생략한다)
풀이 그랬듯 감춰진 굴곡에 대해서, 눈이 그 많은 털실을 풀
어 지상으로 휘갈기는 시 한 편, 읽기도 전에 사라져버린다
매 순간 옳은 당신을 프라이팬에 올린다 지글지글, 궤
도를 이탈한 빛들이 방울진다 검은 눈물로 뜨거운 뺨을 훔친다
립스틱 바르는 시간
박연숙
팔월에는 한 방향만 바라본다
구석에 놓아둔 고양이 밥그릇이 엎어진다
샐비어 일렬로 서서
서로 등을 쓰다듬다가
코 아래 낯선 이 붉음은 뭐지?
문득 내가 묻고 답한다
한 달을 하루처럼 비 내리는데
벽에 기댄 사다리가 넘어져 다리를 다친다
찢어진 샐비어 얼굴이 뭉개진다
입술을 조금 크게 그린 날은 생리가 시작된 날
미간의 주름이 분명해지고
눈썹 아래 두 개의 검은 점이 폭풍을 불러온다
미안하고나, 립스틱 묻은 잔을 나눠 마시는 것으로
모계사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보는 것만으로 피가 흐른다
화장을 지우고 귀면으로 돌아가는
여덟 시가 지나면 다시 일곱 시, 오늘 다음엔 중음의 시간
피 칠갑을 하고 오는 계절이 있다
고양이들이 쩝쩝 입맛을 다신다
풍선 인형
박연숙
저녁 7시의 페이스 오프
당신의 갈증으로 부풀어 오르는
나는 습습한 공기의 여자
뼈도 관절도 신념도
충분히 꿈꿀 권리도 없었으므로 여자
당신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눈물도 피도 없으니 근원까지도
당신의 농담으로 피둥피둥 살찌는 여자
둥둥 떠오르는 여자
전생이 이해되는 뭉클한 여자
온통 검은 동굴인 여자
바람의 몸짓에 무아지경
다 드러내고 부끄럼 모르는 여자
온통 허벅지인 여자
흐리멍텅한 십자가가 되는 여자
슬픔이 정수리까지 차오른 때를 기다렸다가
뻥 터져 사라져버리는 게 소원인 여자
충치의 감정
박연숙
내가 키우는 사람은 내 안에 있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오늘 아침은 막힌 변기를 뚫느라 치과 예약 시간을 놓쳤다 치과 의사는 입안을 들여다보다 헐레벌떡 입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난 카운슬러, 이를테면
귀를 키우느라 잇몸이 부어터진 여자
회전의자에 앉아 초콜릿 케이크 위에 촛불을 켜고
신물 나
식은 촛농 위에 주저앉은 심지처럼
엎어지고 솟구치면서 녹아내린 음식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
초콜릿으로 흐물대는
케이크를 껴안고 잠들었다 깨어날 때의 기분, 이해할게 그러니 서로 간섭하기로 하자 세상의 충고들로 흔들리는 충치처럼
이 짓거리도 집어쳤음 좋겠어!
치과 의사가 망치를 꺼내 들고 변기 속에서 기어 나온다
아, 벌린 입안에 고이는 독설은 누군가의 선물이고 축가다
그러므로 창문을 열어두는 건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생을 긍정한다는 의미
나는 점점 부풀어 오른다 무서운 꿈을 꾸고 일어난 것처럼
누군가 내 안에서 비만을 완성하고 있다
미생未生
박연숙
1
공터에는
인기척을 먹고 자라는 머리카락, 사방이 뒷모습인 사람
정오를 지나기 전 구름은
맺힐 듯 둥그러지다가 실뱀
버드나무는 기다리는 사람 역할
외면한 잎새들, 녹슬어 가네
2
눈 맞는 일은 피했으면, 쓸모없었으면 해 공터엔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살림들이 손때처럼 묻어 들어, 비가 오면 쓰레기장에서 서랍 속으로 헤엄치고 싶어, 헐어있는 등 뒤를 잡으려다 혼자 남겨졌을 뿐이야
두 눈을 가려줘 등처럼 외로운 건 없거든, 목이 점점 길어져, 핀을 입에 물고 머리를 빗으면 흘려보낸 시간, 휘파람에 누군가 더내려가고 있어
3
나는 어느 피리 소리에 취한 걸까
울지 않는 뻐꾸기시계 위엔 찌그러진 도시락, 알미늄 도시락 위엔 버들잎 하나 버드나무 아래, 공터
봄날의 희망곡
박연숙
양귀비를 뿌리자던 나와
부추를 심자던 당신
고양이를 사자던 당신과
향유고래를 키우자던 나
물빛 피아노 교습소를 지나
커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골목을 돌면
내 얼굴은 지워지고
당신은 사지가 퇴화해 간다
밤하늘엔 부추꽃이 돋고
이마에서 헐떡이는 물고기
접시 위 심지가 말라가는 촛불과
종지에 담긴 바닷물
보랏빛 낯빛의 나와
지느러미가 돋는 당신의 몸
우리는
오지 않는 봄과 지나간 봄 사이 머물러 있다
채식주의자의 부엌
박연숙
앞니가 빠지고 주름이 늘고
벌컥, 문이 열리면
악몽에서 깬 아침
슬픈 이유는 내가 배운 첫 모음이 눌러있었기 때문이죠
대체 엄마는 언제부터 부패하기 시작했을까요?
브로콜 리가 건너오면
콜리플라워가 터지는
초록색 거품투성입니다 얼룩말이 날뛰다가 꺼집니다
고백하자면 입안은 시벨리우스의 협주곡으로 가득해요
식탁을 마주하고 예쁜 바이올린과 귀여운 토마토가 있는데요
토마토 입술을 으깨면 하나의 모음만 반복됩니다 그리고
미리 시들기 시작하죠
혈연이니까
우린 하나의 목구멍을 가졌답니다
물론 거기 식탁 위
얼룩진 식탁보가 드리워진 초원
긴 혀를 끌어내 허리를 싹둑 잘라 갑니다
어제는 죽은 제라늄 화분에 물을 주고 두드러기처럼 부풀어 올랐어요
냉장고에서 조금씩 피가 배어 나왔습니다
양탄자 비블리오테라피
박연숙
가족이란 같은 식탁에 둘러앉는 거야 가장자리가 검어진 램프처럼 소원이 흐려지면 말해 볼까 믿어볼까 닳아빠진 소매엔 근심이 늘어간다 낙타를 입양한 동생은 둥둥, 알비노환자처럼 우린 너무 많은 소원을 말하는 증상이 있나 봐, 검은 발자국을 찍으며 식탁 모서리를 닦고, 도무지 설거지가 끝나지 않는 저녁엔 소매가 먼저 닳아간다 가령 누나, 이 빠진 접시 위에서 엄마의 알칼리성 거품이 둥글게 풀리면 손대고 싶도록 부풀어 오르는 비누, 두근거리는 얼룩을 터뜨리고 싶어 떠도는 구름 아빠는 알코올의 힘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페이즐리 무늬들이 식탁 위를 중얼거리며 날아다닌다 다 들어준 소원의 껍질이 얇다 밤이 퇴장한다
※비블리오테라피: 문학작품을 통한 심리 치료
은이 이모네 집인가요?
박연숙
여기서는 손금 밖으로 눈이 내려요
나는 어항마다 은어를 키우지요
뽀글뽀글 전화벨이 울리고요
은이 이모는 외출을 해요
성큼성큼 마이크를 잡고
네모난 화면 앞에서 탬버린을 흔들어요
도돌이표가 끌어안는 노래 한 소절
찢어진 악보
은이 이모의 후렴은 언제나 젖어있어요
살얼음인 새벽을 꾹꾹 누르며
눈꺼풀이 얇은 은이 이모가
돌아오지요
나는 푸른 모이를 한 줌 떨구고
은이 이모를 바라다보죠
뻐끔거리는 입속을
탬버린처럼 끝없이 박자를 뱉어내는
저 투명한 배 속에 가라앉은 노래 한 가닥을 들여다봐요
살얼음이 든 노래는 은이 이모 배 소겡서도 녹지 않아요
어항 속엔 은어가 살아요
지금 밖엔 눈이 내리고요
나는 손금 안의 전화를 받으러 가요
엄마의 정원
박연숙
1
몸속까지 눈발이 날리는지
수술 중인 엄마, 희끗희끗
엉클어진 머리칼 속으로 송이 눈 쌓이고
수술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나오는 눈사람
2
엄마는 속 빈 것들을 잘 길렀지
찬장 속에서 어깨를 대어주어야만 기어 올라가는
그러나 내부에서 눈송이처럼 깃털처럼 날리는
또 올려다보면 잎새들 웃음 틈틈이 새파랗게
갸우뚱하면, 모서리가 기울어가는 찬장
손잡이를 당기면
어깨 위로 이 빠진 접시가 굴러떨어졌지
새장 속의 새인 우린 주둥이만 뾰족해서
날아간 뒤에는 또 뒤돌아보지 않는
귀가 틀어진 찬장처럼 텅 빈 새장
식어가는 한 줌 깃털
3
엄마의 발꿈치 균열에서 햇빛이 빠져나온다
우묵하게 움켜쥔
내 손바닥 안의 고요
날아오르는 새 떼들
청양
박연숙
아침엔 그림 속의 사람이 된다
하루 한 점의 먹물로 붓 끝에 매달린다
먼 데의 풍경이 다가오기 전 안개로 모습을
바꾸고 사물들이 선명해지지 않은 채 물러난다
안개의 곁을 따라가
나는 댓돌에 놓인 신발의 주인이거나
숨겨진 샛길 외진 초가집 연기 올리는 사람
거기서 나는
나뭇잎, 피로, 분홍, 먼지, 얼룩, 실수
다시 보면 유배 중이거나 오래전에 덧칠된 사람
흐릿한 여백이자 물기 많은 사람
안개와 물빛이 같다
사물의 말조차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드러내는
겨우 재 하나 넘는다
물빛 여백을 지나 혼자 환하고
혼자 무명이다
노란 색에 관한
박연숙
사월에 내리는 눈은 송이가 크다
사뿐히 산수유나무 위에 내려앉는다
자잘한 눈송이를 얹은
벽제의 산수유
여자들 이름에 희가 많은 것처럼
눈송이는 희미하게 사라지는 혈통
영정 사진 속 여자의 눈동자
저만치 산수유
꽃을 바라보고 있다
곰곰, 위치추적기
박연숙
쓸개를 빼 바위에 널어놓고
물오른 고로쇠나무처럼
뚝․뚝․무․뚝․뚝 참 오랜만이야
게릴라처럶
격하고 가쁜 등고선을 따라
웅크린 주먹을 펴면 손가락 끝에 숨어들지
웅크린 당신
뾰족한 귀에 위치추적기를 달고
아직도 겨울, 잠 바깥엔 눈이 내릴까
씀바귀는 아직도 귀가 쓴지
폭포는 여전히 목을 빼고 있는지
왼쪽 가슴 아래에 손을 대보기도 하지
건전지를 갈아야 해
꼬리가 긴 동굴을 따라 지루한 방전 중
가끔 빼놓은 쓸개를 충전하면
초록은 동색이라 하나로 희희낙락
시끄러운 주파수를 타고 묻어 들곤 하지
귀가 커지는 씀바귀로
겨울 바깥으로 쏘아올린 물음에
응응응은 참 쉬운 대답
곰곰은 생각하지 말기로 할까
파쇄기 앞 30분
박연숙
1
아름다운 것에 무감한 지 오래되었다
꽃잎과의 인연으로 위태하게 매달린 민들레 씨앗
사무실 책상 위 선인장은
먼지로도 아프다
아침 아홉 시
땀과 수고를 바꿔온 관성으로
거울을 보고
뾰족한 습성을 버린다
차곡차곡 쌓힌 문서의 비문에 베이며
순치한 물기 많은 시간들
거울에 반사한 초침이 번득 눈을 찌른다
더 멀고 높은 것을 꿈꾼 비겁들은 왜 이리 약한가
2
버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잘근잘근 씹힐 뒤를 남기지 않는 것
손톱 밑을 들여다보지 않는 것
구성한 문서의 비좁은 칸 안에서 꿈이 복사된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버린다
사소한 기록들은 사소하지 않은 먼지가 되어
선인장 가시로 자란다
저녁 아홉 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면의 문장들은 수단이자 결과이기 때문이다
삭제의 흔적들도 아프지 않은 아름다운 어제가
대체 오늘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심드렁하게 사소하게 길게
박연숙
마당가 짚 동가리를 치우다
속에 숨은 그를 만났다
도끼에 머리를 맞듯
그의 실물과 부닥친다는 것
누구냐, 너는?
몇 번은 도망치는 그의 사지를 짓찧고
다시 며칠 밤을 떨며 지샜던가
똬리 튼 몸뚱이에서 스스로 떠오르는 검은 눈, 속에서
돌멩이를 든 채 부르르 몸을 떠는 나
삶처럼 단순한 건 없다는 듯
사지를 달관한 몸은 얼마나 낙관적인가
그는
뜻밖의 대면에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사소하게 길게 마당가를 지나 사라져갔다
.♣.
=================
■ 시인의 말
봄의 면적을 줄이는 자세ㅐ로
포개진 두 개의 손
누군가 모르는 길을 물으며
자꾸만 내 귀에 뜨거운 말을 흘려 놓는다
.♣.
=============== == = == ===============
박연숙 詩集 [※서른세개의부리를가진새※]
[ 해설 ] -
관계의 다차원적 표정과 존재의 환승煥乘
유종인 시인
1.
표정은 모든 숨탄것들의 외피, 문장으로 보자면 그 언어의 개성적인 결속과 생각의 변주에 따른 문체(style)로 감지되는 분위기, 흔히 뉘앙스nuance 라고 하는 내면적 기류의 변화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외부나 표면表面 자체의 변화에 한정(restrict)하지 않고 새로운 내연內燃의 움직임을 포착捕捉하고 발굴하는 심리적 기제(機制mechanism)에 상응한다. 하나의 시편이 하나의 미묘한 표정을 함축하고 담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표정은 그 변화의 뉘앙스로 인해 내부 혹은 내면이 지닌 속종의 변화를 상징한다. 즉 표정은 외면의 변화와 흐름을 극대화하는 내면의 콘텐츠라 할 만하다. 그 내면의 콘텐츠는, 곧 새롭게 얼러내진 표정을 통해 한 사물과 한 대상과의 관계적 변화의 흐름을 수용한 결과들로 존재의 형질形質을 구성하고 외부로 입체화시킨다. 그 변화된 새뜻하고 또 몬존할 수도 있는 표정은 그 뉘앙스nuance 로 인해 다양한 함의含意와 감각적 인상(impression)을 돌올突兀하게 얼러내는데, 그것은 곧 단독자單獨者적인 것만이 아니라 관계적인 호응과 선의의 간섭干涉, 내면적 응시(gaze)등이 복합적으로 조응調應하면서 일어나는 찬란燦爛의 감각이자, 생각의 수승殊勝으로 전개되고 확장될 조짐兆朕을 지닌다. 이 조짐(indication)들은 앞서 말한 뉘앙스와 그 경향이나 성격이 유사할 수 있는데, 뉘앙스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면, ‘어떤 말의 소리, 색조, 감정, 음조 등에서 기본적인 의미 이외에 문맥에 따라 달리 느껴지는 섬세한 의미 차이’ 등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사전적辭典的의미를 개괄하는 이유는, 우리가 생물학적인 신체 변화로서의 미소나 표정이든 관념체계 중의 하나인 언어, 특히 시적 구문構文이 지닌 문체(style)나 감각적 표현 등에서 그 주체가 지닌 영혼의 내밀한 무늬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무늬도 역시 외부와 내부를 결속結束하는 상징적 문양紋樣으로 해석할 여지가 자자하다. 즉 표정의 정치학政治學이라 범박하게 정의하면, 그 세세한 표정의 속내는 심리적 전화轉化가 이뤄낸 새뜻한 관계인식이나 도드라진 인상印象과 정서적 요철凹凸을 담보하는 매우 감각적인 내연內延의 확장이자 번짐으로 도도록하다.
모든 외물外物의 표정은 곧 그걸 표현하는 화자의 속종의 전향적인 반응 체계의 상관물相關物로 돌연해진 것이다. 그래서 미리 선언하자면, 모든 사물의 표정은 존재의 정서적 내관內觀으로부터 시작된 바람인 것이다. 그 바람은 곧 시라는 흠전하지만 나름의 폭발력을 지닌 태풍(typhoon)으로 감응력感應力을 확보하고 진작하기에 이른다.
박연숙의 시편을 태풍颱風으로 비견하지만 우선 그 특징은 그 세찬 바람이나 폭우의 강도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 태풍의 눈과 고요가 지닌 가만하지만 감각적인 응시凝視의 새뜻함에서 이지적理智的으로 흘러나오는 분위기의 엄습이라 할 수 있다. 무거움만이 아닌 청신한 감각의 표정으로 사물들을 짓누른 더께를 거둬내는 발랄한 표정 관리가 존재내부의 온도溫度를 새롭게 개진한다.
미소인가 폭소인가. 이런 물음은 일반화가 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그렇다면 팍팍하고 강퍅한 관계인가 화기애애한 관계인가. 물론 이런 물음도 대상이 될만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부제副題로 달린 아래 시편의 경우처럼, “우아한 관계”가 상정上程하는 관계의 양상이란 어떤 것인가.
행방을 묻는 순간, 얼굴이 사라졌다
오늘 구름의 표정은 붉은 풍문을 건너는 중, 라플레시아의 빨판이 몸을 휘감으며 부재의 알리바이를 증거한다. 오월이 진부한 당신의 주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아무도 듣지 않는 노래를 부른다 라플레시아의 주름진 틈마다 하얗게 덧칠되는 소문에 대하여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을 하고 견고한 한철을 지난다
버-린-당신을 이해하고 무성한 정글을 설득-하지만 그저 농담일 뿐이다 라플레시아, 이 거대한 농담은 무섭도록 황홀하고 역겹다 붉은 풍문의 접힌 주름에서 둘이 함께 썩는 질병, 아무도 알아본 적 없는 놀이를, 기록되지 않는 바람의 행간마다펼쳐본다
나는 농담을 하고 아무도 깃들지 않는 음산한 노래를 부르고 자유를 멸시하느니……우리는 나날이 신랄해진다
-「라플레시아」 전문
너무 우아하다. 라는 표현은 보통은 아부阿附에 가까운 수사(rhetoric)로 쓰일 경우가 자자하다. 그러나 부제(subti-tle)로 여러 차례 드리운 이 “우아한”이란 수식어는 아무래도 반어적(irony)이며 중의적(mojonity opinion)함의가 소슬하게 드리운 나름의 지향적인 시어詩語의 전략이 자자하다. 버릴 수 없는 수사修辭는 이미 심장의 언어에 가까운 절실함을 탐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간단치 않은 시인의 상황 인식은 시의 첫 구절에 “행방을 묻는 순간, 얼굴이 사라졌다”는 문장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분위기다. 이 도착된 듯한 시적 상황은 이 시 전체를 관통하듯 읽어내는 동안 종내는 “행방을 묻는”것이 아니라 ‘행복을 묻는 순간’으로 바꾸어놓아도 무방하단 생각을 심어준다. 실종된 것들과 무화無化된 것들은 그 대상이 정상적인 탐색이 불가능한 상황을 사라진 “얼굴”로 선언적으로 대변하기에 이른 듯하다. 라플레시아Rafflesiales는 시체꽃의 일종이다. 아무리 기괴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해도 여기에 보통의 우아한 관계를 설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화자가 말하는 우아優雅함이란 도대체 어떤 관계relationship적 심리를 포섭하고 섭외涉外하는 경우를 지칭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버-린-당신을 이해하고 무성한 정글을 설득-하지만 그저 농담일 뿐”인 세계에 대한 비유(metaphor)가 아닌 현실을 품는 보다 늡늡하고 품새가 넓은 심리기제心理機制로서의 수사적 언어 대응이라 할 만하다. 그중에 “무섭도록 황홀하고 역”겨우며 “풍문의 접힌 주름에서 둘이 함께 썩는 질병”의 세상 도처에 “바람이 행간”을 통독通讀해 가는 시인의 통각痛覺이 이끌어낸 영혼의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가 아닌가 싶다. 악무한惡無限의 어응한 현실을 내파內波해 가는 화자는 “농담을 하고 아무도 깃들지 않는 음산한 노래를 부르고 자유를 멸시”하는 시니컬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적어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농담”으로 “견고한 한철”을 견뎌내는 내성耐性의 언어적 경지를 개척하고 있는 모양새다.
지뢰가 터지면 어제 먹은 음식들이 쏟아져 나오고 연애는 끝나죠 여기서 믿음이란 불량품, 보이는 거 외엔 믿지 않기로 하죠 발목만으로 당신에게 건너갈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럼 지뢰를 피해 전진해 볼까요? 슬로우슬로우퀵퀵 윙크하듯 깜빡이며 미소를 보내는 당신. 바람은 끊임없이 창문에 얼굴을 새기고 우리는 종종 몸을 잃어버리죠 잘린 손가락이 단단한 눈알을 굴려요 클릭클릭 목발들이 절룩이며 돌아다녀요 무사히 돌아가기엔 늦이 않았을까요 사랑이 몇 개의 부위로 나뉘어져 있는지 알고 싶거든 친절한 지뢰에게 물어보세요 감쪽같은 지뢰가, 입 없는 함정이 곧잘 내 질문을 먹어치우거든요 확률을 믿어볼까요 여기서 폭발할까요. 우연을 가장해 회색 예언이 튀어 나오고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어요 스마일스마일 발아래 내 손가락 아래 우린 내일을 관통할 수 있는 지뢰 하나쯤, 그러니 하눈팔지 말아요
자, 다시 창문을 닫아걸고 시작해 볼까요?
-「지뢰 찾기 게임」 부분
앞선「라플레시아」시편에서 화자는,“음산한 노래를 부르고 자유를 멸시”하다는 도저한 위악적僞惡的인 포즈를 취하는데 그것은 그만큼 “우아한 관계”의 층위層位가 간단치 않음을 보여 주는 일종의 표징表徵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에 등장하는 “신랄辛辣”함은 자유와 바로 연계되는 서술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화자 자신의 외부 세계에 대한 독자적인 심리적 대처나 자세로 읽을 수 있는 여지가 농후하다. 자유가 신랄해지지 않고 오히려 자유마저 멸시한 가운데 독자적인 신랄함에 매료되는 분위기, 여기에 외계外界에 대한 시인의 도저한 부정성否定性과 독자성獨自性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이런 부정성은 단순히 염세(pessimism) 적인 관념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둘러싼 실제와 가상의 세상이 얼마만 한 인간적 믿음의 공고鞏固함을 여투고 있는가를 시험하는, 일종의 시금석試金石 같은 반어적인 언술에 기초한다. 그래서 지뢰를 매개한 게임에서조차 “보이는 것 외엔 믿지 않기로 하죠 발목만으로 당신에게 건너갈 수 있으니까요”라는 시니컬한 판단과 냉소적인 상상을 견지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시인은 이런 무서운 게임 같은 세상의 냉혹한 단면을 “우아한 관계”의 패러다임 속에 넣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쩌면 반어적反語的인 청문聽聞이 아닐까 싶다. 비록 화자가 “사랑이 몇 개의 부위로 나뉘어져 있는지 알고 싶거든 치절한 지뢰에게 물어”보라는 냉혈안冷血漢같은 상상을 펼치지만 그것을 반대로 혹은 다른 측면에서 되짚어 보면 더 새뜻한 정경이 엿보일 수도 있다. 즉 사디스트sadist가 마조히스트masochist를 겸하는 것 같은 지문의 형태, 범박하게 말해 지극한 사랑의 탐구가 어디까지 가능한 가에 대한 일종의 화두話頭가 지뢰 찾기 게임에 투사된 정황으로도 보인다.
늑골 아래 어둠은 달착지근하게 고여있다 골목을 읽기도 전에 흘깃 넘어가는 페이지, 입을 열면 얼음이 쏟아진다 여백으로 꽉 찬 허공을 건너뛰며 새겨놓은 글씨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히에로클리프, 언제부턴가 고양이는 가르릉대는 별의 무덤을 펼쳐낸다 천둥번개생선뼈목이천리나되는긴짐승거북……의 말들 먼지로 쓰인 얼굴이 해독되지 않는다 문맹이란 모래로 이루어진 페이지를 읽기 위해 순가락에 침을 묻히는 것, 숨을 멈추면 폐기된 글자의 기원에 가닿을 수 있을까 숟가락에 펄떡거리는 심장을 얹었던 바추픽추, 입김과 날개로 데우고 식혔던 로제타의 늑골에 등을 단다 나의 캄캄한 묵독을 위해 고양이들이 불빛 주위로 모여든다 누군가의 가슴에 밑줄을 긋는다 제 몸을 태우는 유성에서 수없이 태어난 골목들이 저마다 깊숙한 곳에 비석을 세우다 사라진다
-「흰 책 읽기」 전문
이 시편의 제목에 유의留意할 필요가 있다. 즉 “흰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흰(white)’이라는 수식이 붙은 ‘책 읽기(reading)’라는 점에 착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화자가 읽고자 하는 것들은 불가해한 고고학적 미스터리를 아직도 가지고 있거나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린”것들을 발굴하듯 들여다보는 관심 속에 놓여 있다. 관계의 고전이랄까 관계의 고고학적 관심이라는 말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모두 감추어진 존재와 사물의 표정을 통해 자기 자신의 현존現存의 일부나마 인정받고 추인하듯 “해독”되기를 은연중에 기원한다. 그러나 그런 뭇 존재나 대상들은 심지어 화자 자신조차도 확신에 찬 실존의 전율을 당장 구가하기는 요원하다. 그러기에 “먼지로 쓰인 얼굴이 해독되지 않는” 현재를 무수한 고고학적 기원을 가진 “숟가락에 펄떡거리는 심장을 얹었던 맞추픽추”나 “로제타의 늑골” 혹은 환상의 “별의 무덤”같은 이미지들 속에서 존재의 표정이 어떻게 갈마들어 있는가를 ‘묵독(黙讀, silent reading)’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고고학적 유물의 표정이나 인상, 판타지적 이미지 속에서 화자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 그 “제 몸을 태우는 유성에서 수없이 태어난 골목들”을 창출하는 상상의 발화는 어디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의 늡늡하고 심원한 표정에 대한 기대와 갈급, 미처 체험되지 못한 고대에의 향수鄕愁의 으늑한 번짐이라고 보면 어떨까.
관계되지 않은 표정이란 도드라질 수가 없는 심연(mind)일 수밖에 없다. 앞서의 “우아한 관계”는 비록 위악적이고 시니컬한 냉소적인 세계인식을 거느리고는 있지만 그것은 그런 대상 세계의 현실에 대한 일단 극복과 견제(contain-ment)의 방법론적 대처의 기미機微가 완연하다. 그런 견제와 완충의 실존적 미소를 견지한 상태에서 시인은 새로운 융숭깊고 끌밋한 존재의 미소를 견제가 아닌 견인牽引을 푸구하는 맛이 여실하다. 어웅한 가운데 희미하지만 미세한 고고학적 세계의 틈입闖入으로 인한 모종의 개안開眼같은 게 있다. 상상력의 곁가지를 치며 갓 깨어난 먼지 같은 빛의 미소가 시공간을 떠돈다 할 것이다.
1.
화상은 부끄러움
잡다가 놓쳐 버린 부젓가락이
무릎께에 박혀
함께 자라고 걸어 다녔다
나는 불에 봉인되어 있었다
2.
덕수궁 정문엔 화상의 봉인을 푸는 남자가 있다
주술사처럼 검고 흰 목소리를 쿨렁거리며
결이 고운 나무의 나이테 위에 인두로 글씨를 쓰고 있다
불의 글씨는 나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새기며
짙고 옅은 그을음으로 나무의 신분을 알려 주었다
오래된 약속의 표지였던 전생은
깊은 어둠을 지닌 채 해서체로 꿈틀거렸다
인두가 자니가지 않은 길은 얇은 여백일 뿐
화상으로 기록하는 그의 생애 전부가 경전이 되고 있다
3.
오랫동안 정면을 바라보지 않았다
나는 나의 화살을 들여다보았다
가장 뜨거웠던 한 순간
그 밖은
여백이었다
-「불의 봉인」전문
미소가 그 미소를 짓게 한 연원이 기쁨이나 열락悅樂에 의해서만 조성된 것이라면 앞서의 표정들은 다소 위악적인 제스처와 시니컬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 불가피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생래적으로, 아니 후천적으로나 경험적인 고통을 통해 불가피하게 조성된 미소나 표정 같은 게 있을 수 있다. 이런 표정은 하나의 열과裂果 같아서 대상 존재의 숙성인 동시에 제2의 발현發顯으로서의 예술적 과정에 상응한다. 즉 고통이 고통의 한정적 아픔의 지속과 치유에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전환, 즉 예술적 성과나 존재의 성찰을 담보하는 남다른 표정으로 그윽해지곤 한다. 박연숙의 이런 내밀한 응시(gaze)는 하나의 상황이나 사물이 지닌 단독자적 관계가 여러 상응하는 관계의 경로를 통해서 새롭게 유의미한 표정들을 산출하는 지경을 보여 준다. 결국 절대적인 독자적인 상황이나 흐름이란 게 있는가 하는 근원적인 물음을 포함하면서, 내부적 혹은 외적 고통의 침윤이 존재의 “화상의 봉인을 푸는” 형태로 새로이 갱신되는 고통의 인격화 내지는 예술화를 추동하기에 이른다.
화자가 “나는 불에 봉인되어 있”다라는 고백을 통해 그의 과거가 실존적 상처와 자폐의 그늘을 거느렸다면 2장에서는 “덕수궁 정문” 옆에서 불 인두로 나무판에 글자나 그림을 새겨내는 서각書刻장인을 목도하기에 이른다. 앞서의 화자가 지녔던 고통의 기억이 다분히 자폐적인 그리고 방어적인 상흔(scar)을 담지하고 있다면, 그 다음 연聯에서는 상처나 고통이 가지고 있는 이면裏面과 그 고통의 과정을 통한 예술적 갱신과 환생이라는 윤리적인 덕목을 체현해 보여 주고 있다. 그러면서 종장 격인 3장에 이르러, 시인은 “나는 나의 화상을 들여다보”는 용기와 더불어 전에 없던 마음의 기운을 갖게 된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표정이자 희미하지만 점차 또렷해지는 실존의 미소가 아닌가 싶다. 더불어 고통의 봉인封印을 해제해 풀어버리고 “가장 뜨거웠던 한 순간” 바깥을 내다보고 관조할 수 있는 모종의 시선을 갖기에 이른다. 그런데 그 고통과 자폐와 견제의 바깥은 뜻밖에도 “여백이었다”. 이 여백餘白의 발견이야말로 화자의 실존이 얼핏 엿보듯이 똥기게 된 그윽한 존재의 미소를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여운이자 여유餘裕의 선처(tide over)인 지점이다.
스스로의 상처의 경험과의 자폐적 관계와 상처나 상흔을 통한 예술적 승화의 대상물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는 좀 더 늡늡한 심정과 생각을 진척하기에 이른다.
2.
다양한 사회적 혹은 내면적 관계에 대한 대처와 대내외적 포즈와 형식을 일정하게 완숙했다면 그런 존재는 이미 완성된 존재일까. 여전히 치유 중이거나 지연되는 고통의 현황現況이 있고 이 현황은 때로 “행방”을 모른 채 혹은 수수방관한 채 지리멸렬을 반복하기도 한다. 위악적인 혹은 결기어린 대처를 통해 간악한 혹은 황폐함과 모략을 덧입히는 상대와 일정 거리를 뒀음에도 존재는 긴 휴전休戰 중의 간헐적인 게릴라전을 치르고 있는 것만 같다.
앞서 말한 존재의 표정은 정말 진화(evolution)하고 있는 것일까. 무의식 중에 진화進化와 진볼(advancement)를 진행하는 속에서도 우리의 퇴보나 정체를 답습하는 건 아닐까하고 되돌아보는 성찰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를 끌밋하게 갱신하고 길어올리는 일종의 마중물일 수도 있겠다.
아침엔 그림 속의 사람이 된다
하루 한 점의 먹물로 붓 끝에 매달린다
먼 데의 풍경이 다가오기 전 안개로 모습을
바꾸고 사물들이 선명해지지 않은 채 물러난다
안개의 결을 따라가
나는 댓돌에 놓인 신발의 주인이거나
숨겨진 샛길 외진 초가집 연기 올리는 사람
거기서 나는
나뭇잎, 피로, 분홍, 먼지, 얼룩, 실수
다시 보면 유배 중이거나 오래전에 덧칠된 사람
흐릿한 여백이자 물기 많은 사람
안개와 물빛이 같다
사물의 말조차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드러내는
겨우 재 하나 넘는다
물빛 여백을 지나 혼자 환하고
혼자 무명이다
-「청양」 전문
다양한 그리고 때론 위악적인 관계의 표정을 짓지만, 존재는 그런 시니컬한 태도만으로 견실히 유지되고 심적으로 풍성해지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을 유지하고 지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정신적 육체적 소모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일종의 존재의 생활적 기초대사(basal metabolism)수준 이상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화자가 자신을 좀 더 끌밋하고 훤칠한 존재, 자신이 지향하는 실존적 위상을 암묵적으로나마 바라고 있다면, 그는 그 선망의 존재에 직입直入할 수는 없기에 거기에 따른 전제가 필요할 부분이다.
그런 좀 더 나은 자기 갱신을 위한 몸부림이나 고양高揚을 위한 그윽한 전제란 바로 자기 자신을 새롭게 들여다보기, 즉 또 다른 측면에서 자신을 읽어내는 새로운 시공간에의 체험과 섭렵涉獵이 아닐까 싶다. “청양”이라는 도시적 시공간과 대별되는 곳에서의 존재의 내밀한 시간은 시인에게 전혀 다른 측면의 자아(ego)를 조망하고 느끼게 되는 지경일 듯 싶다. 그곳에선 “아침엔 그림 속의 사람”이 되기에 족하고 “하루 한 점의 먹물로 붓 끝에 매달”리는 그윽하고 담백한 여백의 심정을 여투기에 낙락해질 수도 있다. “안개와 물빛이 같”은 그곳에서는 “안개의 결을 따라가/나는 댓돌에 놓인 신발의 주인”으로 호젓해질 수도 있고 “숨겨진 샛길 외진 초가집 연기 올리는 사람”으로 도시적 삶의 정체성을 찾기에 급급한 소비사회의 소시민적 자아와 거리를 둘 수 있어도 좋다. 강퍅하고 사막한 도시에서의 생활과 생각의 패턴을 벗어나 여러 존재와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변화를 새삼 읽고 경청하며 너나들이같이 호흡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화자를 둘러싼 자연의 풍광 속에 묵묵한 “사물의 말조차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언술은 자못 의미심장한 에지몽을 대하는 소슬함이 있다. 즉 변화된 시공간과 시적 자아의 만남과 거기에 따른 내밀한 조응照應은 시인이 항차 갱신하고자 하는 자신의 추구와도 면밀한 관련성을 지닌다. 이런 자연 속에서의 소박하고 웅숭깊은 성찰(instrospection)은 곧 “물빛 여백을 지나 혼자 환”하게 밝히는 시인이 자기 스스로에게 내린 시인의 존명尊命을 받들고 열어가는 길일 터이다.
햇볕은 맹렬하고 나는, 이 무성한 고요를 함께 나눌 그림자가 간절하다 방금 토실토실한 문자를 보내온 너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울음이 없는 토끼고 너는 사족이 많은 뱀인데, 내가 와인을 준비하고 너는 싱싱한 물고기를 잡아오면 우리 식탁은 찰랑대겠지 나는 자주 혀를 씹고 붉어질 거야 콧잔등에 태양이 뜰 때까지, 나는 어린 토마토고 너는 눈이 빨간 토낀데 너를 위한 선글라스를 준비하고 네 입맛에 어울리지 않는 비린내를 선물하면서 친구가 된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지 내가 가진 입술은 두 개, 하나씩 나눌 수 있다면 나이프는 차갑게 우리의 우정을 빛내줄 거야 친구인 네게 잘 익은 내 혀를 선물할 수 있다면, 넌 보채기 좋아하는 아홉 개의 서랍이고 난 그 틈에 숨어 어두울수록 물컹거리는 심장을 지녔는데
-「토마토끼를 찾아서」 전문
관계는 그 상대성과 절대성이라는 두 개의 축軸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에 따라 그 진면목이 새로이 창출되기도 하고 갈등의 국면만을 이어가다 파국을 초래하기도 한다. 물론 무심하고 무관심한 절연과도 같은 관계의 정황이 지속되기도 한다. 관계라는 우연偶然, 관계라는 인연因緣을 한 존재의 외연外延으로만 치부하는 걸 넘어서 그 존재를 새롭게 구성하는 일종의 실존적 갱신(renewal)의 근거지로 삼는 것은 일종의 가열찬 냅뜰성이다. 그러기 위해선 존재 내부의 발원이 도사려야 하는데, “이 무성한 고요를 함께 나눌 그림자가” 필요함을 환기하는 마음, 그 발심發心이야말로 한 존재 내부의 변화와 흐름을 주도하는 가만한 견인차가 될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존재에의 개진은 의외의 환상적 결합이나 조화를 꾀하는 관계를 상정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대와의 적극적인 교류의 물꼬를 틈으로써 “나는 어린 토마토고 너는 눈이 빨간 토낀데”라는 서로 두동질 것만 같은 관계가 모종의 획기적인 전환의 심리를 가지기에 이른다. 서로 화합하거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관계를 또 다른 차원의 조화와 통섭의 무대(stage)로 이끄는 생각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이 시편의 제목을 구성하는 “토마토끼”는 토마토(tomato)와 토끼(rabbit)의 혼종(hybrid)이라는 일종의 합성어인데 화자의 관계적 상상력은 급기야 토마토라는 식물과 토끼라는 포유류 동물의 혼종混種이라는 훤칠한 상상력을 낳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다른 구절에서는 “나는 울음이 없는 토끼고 너는 사족이 많은 뱀”으로 변주하기에 이른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혼성을 이루는 전제 조건으로 각 개체의 장점만을 상정하는 게 보편적인데 이 시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단점과 약점을 과감히 관계적 결합의 전면부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즉 일반적인 장점의 선호가 아니라 존재의 내밀한 곳에 붙박여 있는 핸디캡을 오히려 상호 보완과 개선의 항목을 대체한 점이 재미있다. 존재 상호간의 관계적 표정이 근원적으로 상승되고 소위 업up이 되는 경우는 바로 이런 인간의 취약점이 조금씩 긍정적 흐름을 탈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질 때가 아닌가 싶다. 비록 현실적인 단계의 생물학적인 혼종적 변화의 기미가 요원하다고 하더라도 화자가 바라보는 정신의 이런 오지랖은 시적 자아를 비롯 인간의 정서적 폭을 어느 정도까지 넓힐 수 있는가에 대한 훤칠한 게다를 모으기에 족하다.
흐린 날, 나무는 눈을 질끈 감고, 여기 이쁜 거 있어 장난기 많은 어린애처럼, 불쑥 분홍색 구름 주머니를 보여 준다 이집트에서 여자들이 발랐다는 밀랍은 비릿한 아이 몸내를 풍겼다지 숲에서 들고양이가 제 새끼를 물고 사라진다 몸 뒤집는 나비를 따라가 홀연 난쟁이들이 사는 마을에 가 닿는다면? 나무옹이가 막 태어난 포유류의 태지처럼 번들댄다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미라들이 꿈꾸는 다른 영혼처럼
-「후박나무」 부분
새로운 사물에의 호기심과 미지의 시공간에 대한 관심은 단순히 외계外界에 대한 궁금증뿐 아니라 현재의 자아가 지닌 모종의 정체성을 본능적으로 의식한 심적 추동의 과정일 수도 있다. 미리 준비하거나 치밀하게 예비하지 않아도 존재는 “장난기 많은 어린애처럼” 자신을 둘러싼 여러 새로운 기미機微들에 반응하기를 즐겨한다. 어떤 숲의 나무가 “불쑥 분홍색 구름 주머니를 보여 준다”든가 옛 애급埃及의 여인들이 몸에 발랐다는 “밀랍은 비릿한 아이 몸내를 풍겼다”는 대목들은 단순히 신기한 것에 대한 시적 호기심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소위 존재의 확장을 위한 실존적 상상의 지평을 냅뜰성 있게 품고 있다. 그리하여 “몸 뒤집는 나비를 따라가 홀연 난쟁이들이 사는 마을”에 닿는다는 것은 동화적 호기심과 상상에 머무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의 추동과 연관된 사려라고 볼 수도 있다.
범박한 존재가 깨어있음에 드는 것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연계連繫를 생각과 정서적으로 확장하는 상상의 모듈을 만드는 것이다. 기계적인 상상이나 계산만이 아니라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미라들이 꿈꾸는 다른 영혼”을 아프게 그리고 갈급하게 생각하는 순간, 존재는 가만히 그러나 웅숭깊게 새로움의 행보를 먼동트듯이 열어나갈 심정에 고무될 수도 있겠다.
담쟁이덩굴에 붙어 궁리에 빠진 자벌레, 긴 막대를 세워 주위를 둘러보는 중이다 담쟁이 잎을 뜯어 머리 가까이 대어준다 머리를 옮기고 몸이 건너온다 먼저 걸쳐놓은 몸에 생각이 스프링을 얹느라 한발 늦․었․다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쯤, 지금 디딘 잎사귀는 예전에 알던 잎사귀일까 마치 네모난 지구의 수평선에서 올라오는 돛을 궁금해하는 16세 사람들처럼
흔들리는 잎사귀에서 한 발도 떼지 못하는 폭풍
자벌레는 신중하다 잘못 디딘 한 발 때문에 생긴 기압풍이 여전히 스프링을 흔든다 머리를 나뭇가지에 대고 몸은 담쟁이 잎에서 아직, 생각 중이시다 머리에게 좀 더 신중하라는 몸, 폭풍의 눈에 들었는지 미동 없다
-「담쟁이덩굴 속의 폭풍」 전문
생존하는 모든 숨탄것들은 언제나 주변과 더불어 자신을 살핀다. 그 살핌은 본능적인 것에서부터 병적인 것과 철학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layer)를 거느린다. 확신과 의심, 불안(anxiety)과 신중愼重, 불멸과 소멸 같은 대칭적인 요소 혹은 대척적對擲的관계의 심리 양상이 발생하는 원인은 무얼까. 그것은 존재의 외부(extenior)와 존재의 내부(interior)가 일시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상충相衝하는 기류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외부의 상황이나 환경 혹은 조건(condition)은 늘 유동적이기 때문에 거기에 상응하는 심리적 상태는 요철凹凸이 있고 거기에 따른 생각의 “스프링”을 적절히 완충장치로 쓰느라 때론 “천동설과 지동설 사이쯤”의 격절隔絶을 노정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자벌레는 자신의 신중함이 머리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본능적인 감각에 따른 몸의 생각에서 도드라지기도 한다. 하여 담쟁이덩굴을 옮겨 다니는 자벌레는 뒤미처 오는 미급한 생각의 상징인 “머리에게 좀 더 신중하라는 몸”의 충고를 지니기에 이른다.
생각이 몸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난숙한 몸의 노련함이 생각의 현실을 가만히 질타하고 이끄는 형국, 이것은 어쩌면 존재의 일반론 즉 형이상학形而上學에 대한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반격이나 역전적 사고思考로 볼 수도 있다. 이 시편이 갖는 상황적인 묘사는 단순히 자벌레라는 숨탄것의 생존 본능과 환경 적응이라는 문제에만 기초하지 않고 보다 궁극적으로는 존재의 변화를 꾀하는 일의 지난至難함을 비유하는 우의(寓意,Allegory)로 읽어도 좋은 가능성을 지닌다. 신중함과 경쾌함, 심사숙고와 결단력이 서로 상충하듯 상보相補하는 상황 속의 숨탄것마냥 우리는 모두한통속으로 여실하다. 이런 알레고리의 가능성 속에 한 존재가 또 다른 존재로 점증點增해 가는 파란과 곡적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통과해 나가는가에 대한 유머러스한 경과의 언술이 자벌레 시편에 담겼다 할 것이다.
시간을 계량할 수 있다면, 커피를 빠져나가는 날개에 손ㅂ닥을 델 수 있다면,“스승에게 한 번쯤 ‘뒈져라’라고 욕하지 않는 제자는 믿을 수 없다”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티벳의, 아름다워서 들르지 않을 수 없는 마을에 팔지 않는 주전자를 만드는 노인이 산다 주인은 살포시 내려앉는 커피를 휘젓는다 문지를수록 주전자는이마를 찡그린다
파란색에서 빨간색을 순례하기 시작하는 커피콩, 나무늘보처럼 매달려 익어가는 중이다 나를 아스피린으로 익히며 티벳을 지나는 중이다
어떤 이가 책에 낙서를 남겼다. 밑줄을 긋는다 엘리벨리라마삼약 삼보리다라니
누군가 붉게 익은 내 손가락을 딴다 외로워 죽을 수도 있다고 주전자가 가르릉거린다
-「주전자의 손가락」 전문
한 지점에 또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은 단순한 거리의 확보만이 아니라, 시적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향한 일상적 고난의 자처自處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일상적 혹은 특별한 존재의 행보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을 순례”하듯 존재의 변이와 거듭남이라는 현황을 우리는 살아가는 중인 것이다. 그런 변화 속의 사람은 “팔지 않는 주전자를 만드는 노인”의 고집과 삶에 경도돼 보기도 하고 “외로워 죽을 수도 있다고 주전자가 가르릉거”리는 것을 읽어내기도 한다. 이는 앞서「청양」이라는 시편에서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드러내는”대상의 진면목을 보아내는 눈이 돌올해지는 존재, 그런 웅숭깊은 존재를 획득하는 여행이자 순례(pilgrimage)속에 “사물의 말조차 다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영혼의 발견자로 진입하는 경계에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종의 시적 개안開眼은 “팔지 않는 주전자”라는 심미적(aesthetic)대상과 신체말단인 손가락(finger)이라는 감각기관은 서로 두동진 듯 접촉하고 조화로운 듯 격절隔絶된 채 묘한 긴장 관계의 표정을 풍기고 있는 것이다.
양귀비를 뿌리자던 나와
부추를 심자던 당신
고양이를 사자던 당신과
향유고래를 키우자던 나
물빛 피아노 교습소를 지나
커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골목을 돌면
내 얼굴은 지워지고
당신은 사지가 퇴화해 간다
밤하늘엔 부추꽃이 돋고
이마에서 헐떡이는 물고기
접시 위 심지가 말라가는 촛불과
종지에 담긴 바닷물
보랏빛 낯빛의 나와
지느러미가 돋는 당신의 몸
우리는
오지 않는 봄과 지나간 봄 사이 머물러있다
-「봄날의 희망곡」 전문
외적 혹은 내부적인 심층의 우여곡절의 계절을 지나 우리가 짓는 존재의 표정은 어느 일상까지 도달해 있는가. 그것은 다분히 유동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시인은 진정한 관계의 형성에 대한 모멘텀momentum을 제공하는 듯하다. 그런데 시인이 풍성한 이미지와 인상으로 제공하는 모멘템은 관계에 있어서의 획일적인 일치一致가 아니라 차이(distinction)을 개진하고 그 차이의 리스트를 풍성하게 하는 것으로 오히려 관계의 영역을 넓히고 심화시킨다. 상대적인 기호嗜好의 차이는 “양귀비를 뿌리자던 나와/부추를 심자던 당신”을 개관하고 “고양이를 사자던 당신과/향유고래를 키우자던 나”로 대별되는 관계 양상으로 취향에 따른 갈등이 심화되는 듯하다. 그러나 “물빛 피아노 교습소를 지나/ 커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골목을 돌면” 돌연히 “나”와 “당신”은 “얼굴은 지워지고” 급기야는 “사지가 퇴화해”가는 이상한 경험에 놓이게 된다. 이런 일견 불온한 해체의 경험은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나와 당신으로 이분화된 관계의 갈등이 새로운 국면을 보인다. 그런데 어느 사이 “밤하늘엔 부추꽃이 돋”으면서 당신의 취향이 별로 돋고 또 “이마에서 헐떡이는 물고기”의 여운이 감돌면서 “나”의 바람이 생체험적인 감각으로 도드라지는 환각과도 같은 경험에 이르게 된다. 급기야 “보랏빛 낯빛의 나와/지느러미가 돋는 당신의 몸”으로 관계의 상대는 서로 분별할 사이도 없이 혼종적(hybrid)인 조화와 너나들이의 즐거움, 그 판타지의 가만한 열락(delight)에 이르게 된다. 발전적 관계의 지향이 일방적인 통일이 아닌 이런 차이差異의 보존과 수용을 통한 어우러짐에 있다는 전언이 이 시에서 아주 일상적 아름다움과 내밀한 시각과 끌밋한 상상력의 융화融和를 통해 시인의 자연스런 육성을 통해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 여실하다. 물론 시인은 섣부른 상투적인 희망곡을 신파조로 읊조리지도 않는다. “오지 않는 봄과 지나간 봄 사이 머물러 있”음에 주목해야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의 세상을 향한 냉정한 눈길을 보여 줌으로써 여전히 미완未完의 현실과 부조리한 관계의 기미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여전히 희망을 의심하고 시니컬하게 관조함으로써 그 진정한 봄에 닿기를 에둘러 열망한다. 그것이 어쩌면 생동하는 목숨의 표정이자 시인의 포에지가 아닌가 싶다.
마당가 짚 동가리를 치우다
속에 숨은 그를 만났다
도끼에 머리를 맞듯
그의 실물과 부닥친다는 것
누구냐, 너는?
몇 번은 도망치는 그의 사지를 짓찧고
다시 며칠 밤을 떨며 지냈던가
똬리 튼 몸뚱이에서 스스로 떠오르는 검은 눈, 속에서
돌멩이를 든 채 부르르 몸을 떠는 나
삶처럼 단순한 건 없다는 듯
사지를 달관한 몸은 얼마나 낙관적인가
그는
뜻밖의 대면에
자신을 과장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사소하게 길게 마당가를 지나 사라져갔다
-「심드렁하게 사소하게 길게」 전문
전지구적인 소통과 매체의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발달에도 불구하고 관계의 진정성이나 풍류적인 인간성의 교류는 그다지 진보적이지 않은 회의를 갖게 하는 회의를 갖게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박연숙의 시를 통해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관계의 진정한 끈을 놓지 않는 끌밋한 눈길과 불온하고 불확정성의 세계에 대한 시인의 온정적이며 투명한 응시는 여전히 사랑의 기미를 감득하게 한다. 위의 시편은 그런 여전히 불온하고 시인이 생각하는 세상에 미온적微溫的이고 답보적인 현실을 헤쳐나가는 마음의 표정이랄까, 세상의 모든 관계망을 열어나가는 실존적 자세랄까. 급진적(radical)인 변화를 갈망하는 재가수행자在家修行者처럼 한소식 얻게 되는 경지랄까. 난관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이 관계의 딜레마를 여는 마음의 초식과도 같은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시가 품은 사실적 맥락은 단순하다. 우연히 “짚 동가리를 치우다/속에 숨은 그를 만”난 것이 전부다. 물론 놀라움과 공포로 “그의 사지를 짓찧”는 것과 또 하나는 그것이 하나의 환영이나 상상 속의 해코지로 그치고 현황은 뱀을 놓아주듯 제가 알아서 도망가게 했다는 다소 싱거운 해프닝을 갖고 있다. 실제로 뱀을 해코지해 죽였든 아니면 그런 공포에 다른 상상만 품은 채 뱀을 방기放棄했든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그런 뱀과의 섬뜩한 대면과 관계의 주도권을 보는 시선에 있다. 한마디로 언술의 주체는 화자이지만, 그 공포와 경악의 관계 심리를 압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뱀이다. 그야말로 뱀이다. 하는 트로트 유행가 가사의 반복처럼 뱀이 이 시의 의미적 전언을 탄생시킨 주역인 것이다. 물론 그런 뱀의 형태를 아주 유의미有意味한 것으로 보아내는 박연숙의 생득적生得的인 통찰과 직관적直觀的인 에스프리는 뱀처럼 서늘하고 공교롭고 때론 담담하고 소슬한 듯 끌밋하다.
앞서 인간 존재의 번다하고 복잡다단複雜多端한 관계를 위한 여러 실존적 표정 관리랄까 심리적 대처와 거기에 따른 존재의 성숙과 개안開眼을 말했지만, 이 뱀과의 우연한 만남이 주는 존재의 허상이 오히려 더 유난스레 뇌리腦裡를 친다. 그것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꾸리려는 전략도 속셈도 욕망마저도 다 허망한 것으로 돌리는 기미가 역력하다. 즉 “뜻밖의 대면에/자신을 과장하지 않고/심드렁하게” 온몸과 마음으로 제 본능으로 사라지는 뱀의 처세(conduct of life)를 직관하는 화자의 메시지는 “사지를 단관한 몸은 얼마나 낙관적인가”하는 통찰에 기인한다.
어쩌면 적지 않은 삶의 시공간을 경유經由하는 동안 시인이 숱한 관계를ㄹ 고통과 우울에만 함몰시키지 않고 새뜻한 존재의 환승煥乘을 위한 모종의 내관內觀의 여줄가리로 삼을 게 이런 것이 아닐까. 마음 바탕을 새롭게 하고 번다한 정신을 새롭게 똥기는 것은 어떤 지식적 체계만이 아니라 달아나는 뱀의 그 자연스러운 체위 같은 “사소하게”혹은 나른한 듯 “길게” 더불어 초연하고 초탈한 듯 “심드렁하게” 서로를 다치지 않고 배려하듯 사라질 줄 아는 무심함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은 그것에 자연스레 마음이 동참하고 생각이 골똘해지고 몸이 가붓해지도록 선선해지는 마련이 들지 않았을까. 관계의 그늘이 아니라 관계의 밝기, 그 마음의 조명과 각도를 달리하며 실존적 고투를 하나씩 기꺼움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이 “누구냐, 너는?”하고 재장구치듯 존재를 밝히는 일종의 화두話頭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심드렁함이나 사소함 같은 일상의 부정어否定語들의 뉘앙스를 하나하나 내파內破하듯 새롭게 긍정肯定의 여줄가리로 돌려세우는 일은 일생 관계 속을 사는 존재들에게 어쩌면 영혼의 비타민을 투약하듯, 심리적 처방이자 생각의 환승(tranfer)으로 실존적 활기를 도모하는 힘일 것이다. 거기에 기꺼이 동요하고 동조하는 마음이면 시인은 무수한 뱀을 놓치고도 훤칠한 정신의 관망을 담보한 채 번다한 뱀의 다리 대신 자유로운 뱀의 날개를 얻었다 할 것이다.★.
.♣.
=================
◆ 표4의 글 ◆
어쩌면 적지 않은 삶의 시공간을 경유經由하는 동안 시인이 숱한 관계를ㄹ 고통과 우울에만 함몰시키지 않고 새뜻한 존재의 환승煥乘을 위한 모종의 내관內觀의 여줄가리로 삼을 게 이런 것이 아닐까. 마음 바탕을 새롭게 하고 번다한 정신을 새롭게 똥기는 것은 어떤 지식적 체계만이 아니라 달아나는 뱀의 그 자연스러운 체위 같은 “사소하게”혹은 나른한 듯 “길게” 더불어 초연하고 초탈한 듯 “심드렁하게” 서로를 다치지 않고 배려하듯 사라질 줄 아는 무심함 같은 것이 아닐까. 시인은 그것에 자연스레 마음이 동참하고 생각이 골똘해지고 몸이 가붓해지도록 선선해지는 마련이 들지 않았을까. 관계의 그늘이 아니라 관계의 밝기, 그 마음의 조명과 각도를 달리하며 실존적 고투를 하나씩 기꺼움으로 바꿔나가는 작업이 “누구냐, 너는?”하고 재장구치듯 존재를 밝히는 일종의 화두話頭가 된 것이 아닐까 싶다. 심드렁함이나 사소함 같은 일상의 부정어否定語들의 뉘앙스를 하나하나 내파內破하듯 새롭게 긍정肯定의 여줄가리로 돌려세우는 일은 일생 관계 속을 사는 존재들에게 어쩌면 영혼의 비타민을 투약하듯, 심리적 처방이자 생각의 환승tranfer으로 실존적 활기를 도모하는 힘일 것이다. 거기에 기꺼이 동요하고 동조하는 마음이면 시인은 무수한 뱀을 놓치고도 훤칠한 정신의 관망을 담보한 채 번다한 뱀의 다리 대신 자유로운 뱀의 날개를 얻었다 할 것이다.
― 해설 중에서
.♣.
=================
▶박연숙 시인∥
∙ 2006년 《서시》로 등단
∙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졸업
.♣.
=================+++++ ★ +++++ =================
The Thorn Birds Theme - Henry Mancini / 가시나무새(TV) The Thorn Birds(1983)
제작 1983년 (Mini), 미국 // 감독: Daryl Duke // 음악 : 헨리 맨시니 (Henry Mancini)
#출처: 관악산의 추억( http://cafe.daum.net/e8853/MVDb/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