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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적 장자여! 실패 가운데 주님을 만나라!”
+ 본 문 : 출애굽기 2장 11절 - 15절 (구약성경 83쪽)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던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13 이튿날 다시 나가니, 두 히브리 사람이 서로 싸우는지라.
그 잘못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하매
14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이르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잘 됩니다.” “믿고 기도한 대로 됩니다.”
지금도 텔레비전을 켜면, 2010년 벤쿠버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연아선수 광고가 나옵니다.
그래도 지금은 세월이 좀 지나 좀 뜸한 편입니다만, 2010년 금메달을 딴 이후, 거의 10년 정도는,
도심의 광고판은 물론, 신문, 잡지, 인터넷 등등, 김연아 선수기 나오는 광고가 도배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광고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김연아 선수가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준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서 보면, 지난 밴쿠버 동계올림픽 김연아 선수 곁에는 항상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명예 한국 국민이 된 브라이언 오셔 코치, 안무 코치인 데이비드 윌슨, 그리고 어머니 박미희씨입니다.
김연아 선수의 끼는 넘어져도 웃어주고, 실수해도 안아주는, 오셔 코치에 의해서 다듬어지므로 빛이 났고,
그리고 안무 코치 윌슨은 온갖 재롱까지 피워가며, 김연아 선수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어 갔습니다.
또 한 사람 세계를 누비며 전지훈련을 하면서도 김연아 곁엔 어머니가 있었기에 항상 그곳이 집이었습니다.
이처럼 명선수 뒤에는 명감독과 코치, 뒷바라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혼자서 된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천국의 명선수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자녀 손들이 천국의 명선수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에, 우리를 명선수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명선수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할 때도 웃어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에게 인생을 아름답게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기술이 모자라면, 우리에게 지혜로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혹 실수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는 명감독이십니다.
내 인생을 최고의 인생으로 지금도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신 우리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저는 오늘 모세의 인생을 최고의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최고의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이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어이없게 실수하고 철저하게 실패한 모세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이없게 실수하고 철저하게 실패한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만들어 가시는 명감독,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모세를 이스라엘 지도자로 만든 감독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어이없게 실수하고 철저하게 실패하였어도, 명감독이신 하나님만 만나면 다시 일어섭니다.
넘어져도 웃어주는 브라이언 오셔 감독처럼, 모세의 실수조차도 하나님은 기회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김연아를 행복하게 춤추는 선수로 만들었던 데이비드 윌슨처럼, 하나님은 모세를 사명에 춤추게 하셨습니다.
항상 함께 동행하는 김연아의 엄마처럼,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모세와 늘 함께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명감독이셨고, 코치였고,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도 명감독, 명 코치, 엄마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제 명감독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세를 위대하게 만들어가는 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모세는 고통을 당하는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와보려고 나섭니다.
그런데 그토록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그 백성을 도와보려고 했으나 철저하게 실패하는 모세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 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신약성경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나이가 사십이 되매” 이때의 모세의 나이가 40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태어난 이야기가 기록된 10절, 11절 한 절 사이에 40년이라는 역사가 흘러간 것입니다.
그렇게 모세가 40세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이 말씀에서 보면, 모세가 히브리인을 찾아갔다고 하지 아니하고, 자기 형제들을 찾아갔다고 말씀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바로의 왕궁에 살았지만, 그의 심장 속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 나는 하나님의 백성인 히브리 사람이다.’ 라는 강한 성민의식이, 모세에게 있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본 노동현장에서 한 애굽인 노예 감독관이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여기 “친다.” 는 말은 “쳐 죽인다.” 는 말로도 쓰이는 히브리어입니다. 짐승처럼 일하는 자기 동족,
그렇게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도 맞아 죽는 현장을 보고, 모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았다.” 고 했는데, 여기 “보았다.” 는 히브리어의 표현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구경꾼처럼 보았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매 맞고 죽어 가는 자기 동족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이 억울하게 매 맞고 죽어 가는 것처럼, 심한 아픔과 고통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모세는, 주변에 이 애굽의 감독관 외에 다른 사람이 없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애굽의 감독관을 쳐 죽이고, 모래에 묻어 버렸습니다. 완전 범죄에 성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잘했다. 잘못했다.” 는 도덕적 윤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3절에 보면, 모세는 이튿날 다시 그 처절한 현장, 그리고 어제의 살인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제 자기가 보호해 주었던 히브리 사람과, 다른 히브리 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싸움을 지켜보니 어제 보호를 받았던 사람이 잘못한 것 같은데, 젊고 힘이 세어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그 잘못한 사람에게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 그러자 그 사람이 모세에게 덤빕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합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 그러면서 “죽여! 죽여!” 그러면서 막무가내로 덤빕니다.
이렇듯 충고를 듣지 않는 모습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복할 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 꿇지 못하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
이런 백성들을 보면서 모세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과연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실까?’
‘과연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구원하실까?’ 아마 깊은 회의를 가질만한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완전범죄로 성공한 줄 알았던 이 사건이 이미 세상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바로의 왕궁이 발칵 뒤집혔을 것이고, 히브리인들의 노동현장은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기록한 출애굽기 기자는 이 사건을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15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는 왕궁을 떠나야 했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당시 왕족이 백성 한명을 죽인 사건이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왕이 모세 왕자를 죽이겠다고 덤볐다는 것은, 왕권을 둘러싸고 정치세력 간에 암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도망갈 수밖에 없도록 모든 상황을 조정하시는 분이 누구일까요.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모세의 실패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쓰시기 위해 바로의 궁중에서 광야로 몰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40년이 흐른 후에 이것을 알았던 모세는, 사람들이 광야를 버려진 땅이라 하여 사막이라고 말할 때에도,
모세는 고집스럽게 버려진 땅 광야를 사막이라 말하지 않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말했습니다.
모세뿐만 아니라, 많은 선지자들과 수많은 수도사들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왕국의 지도자였던 성군 다윗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떻든 모세가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것은, 분명 맞아 죽지 않기 위해 도망간 것이었습니다.
바로와 정적들을 피하여 도망가 숨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였고,
모세의 믿음의 결과였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금 다듬고 훈련시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위대한 기회가 되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고통도 기회요. 실패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모세는 120년을 살았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공주의 아들로 40년,
도망자의 신세로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출애굽 여정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D.L 무디는 그의 한 설교에서 모세에 대해 설교를 하면서, 모세의 120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모세의 처음 왕궁 40년은 “I am somebody” - “나는 내가 배운 지식과 주먹과 권력과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고 생각했던, “나는 꽤 괜찮은 존재” 라고 생각했던 기간이었습니다.
두 번째 40년 기간은 “I am nobody” - “나는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라고, 정말로 절망하고 좌절했던 시간이었고, 오직 하나님만을 간절하게 찾는 그런 기간이었습니다.
나머지 40년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출애굽을 하여 보낸 여정으로 “I am God's buddy!”
모세가 하나님의 절친한 친구, 하나님의 절친으로 보냈던 은혜로운 기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생애 중 제 2기 “I am nobody!” 가장 비참했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던, 아주 유익한 믿음의 기간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안에서는 실패도 아름다운 기회요. 믿음이었다는 것이 성경의 주장입니다.
오랜 역사가 흐른 다음, 출애굽기를 바라보는 믿음 장 - 히브리서 11장 24절-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아멘! 아멘입니다.
특별히 24절에서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모세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인 애굽 제국의 통치자가 될 수 있었던 놀라운 명예와 권세를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요. 더 가치 있는 일이요.
더 보람찬 일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고, 그것을 “더 좋아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6절에서, 그는 부요함도 당당히 거절합니다. 더욱 적극적인 비전을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보았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기에, 애굽의 모든 보화도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애써도 보화를 얻기 어려운데, 모세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보화를 누릴 수 있는 위치에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원하고 기대하는 삶이 도대체 어떤 삶일까?” 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잘했다 칭찬해 주시고 상 주실 그 길만을 향하여 당당히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의 이야기가 히브리서의 해석처럼, 여기서 끝났다면 얼마나 근사했을까요?
믿음과 열정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해 보겠다고 나섰던 모세는, 비참하게 깨집니다. 철저히 실패합니다.
자기 동족으로부터도 철저하게 거절을 당하고, 애굽 왕으로부터도 범죄자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 숨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었습니다.
모세가 막다른 골목에서, 이제 나 모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절망과 좌절의 그 순간에도,
모세를 명선수로 만드는 따뜻한 손길이 있었습니다. 실패의 순간, 고통의 순간,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실패의 자리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숨어 있었습니다.
가정적인 큰 어려움을 겪고 개인적인 아픔이 있어서 섬기던 교회를 사임한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마흔이 다된 젊은 목사가 주일이 다가와도 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하는 그 시간에 한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멍하니 천장 쳐다보며 하루 종일 시간을 보냅니다.
“손님 토요일에 이렇게 혼자 앉아 긴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면, 영업에 지장이 많습니다.
죄송하지만 나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카페 주인의 말을 듣고 몰려오는 창피함을 뒤로 한 채,
카페 계단을 터덜터덜 내려오다가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래 내가 카페를 만드는 거야.
내 카페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주는 카페를 만들면 되는 거지 뭐. 오래 앉아 있어도 편안한 카페.
리필이 계속 가능한 카페!” 그래서 그 목사님이 만든 카페가 바로 “민들레 영토!” 라는 카페입니다.
그는 지금 전국에 20개가 넘는 지점을 낸 사장님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장소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하루 종일 찬송을 들을 수 있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장소로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실패하고 도망 다니던 모세, 그렇게 도망자로 미디안에 머물던 어느 날,
우물곁에 앉아 잠깐 쉬는 사이에 모세에게 운명적 만남이 일어납니다. 세속적인 로맨스로 표현하면,
♪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처녀 바람나는 자리, 성경은 바로 그 자리를 우물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와 십보라의 러브스토리가 우물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삭의 종이 장차 이삭의 아내가 될,
리브가를 만난 자리가 우물가였고, 야곱과 라헬의 로맨스가 시작된 자리도 우물가였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여인 십보라와의 만남. 그의 아버지 르우웰 제사장의 사랑과 관심 가운데 40년을 보냅니다.
모세는 아내 십보라와의 사랑이 열매를 맺어 게르솜이란 아들을 낳게 되었고, 그러면서 40년을 보냅니다.
그 사이에 그때의 애굽 왕은 죽었으나, 또 다른 애굽 왕이 더 극심한 아픔과 고통을 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고,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습니다.”(출 2장 23절-25절)
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수는,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향수 생산업자들은 발칸산맥의 장미를 가장 춥고 어두운 깊은 한밤중에 장미향을 채취한답니다.
왜요? 깊은 밤에 찬바람이 몰아치는 그 시간에 장미는 가장 향기로운 향기를 품어내기 때문이랍니다.
성경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기도의 향기가 가장 진하게 쏟아지는 때가 언제였습니까?
자신들의 고통을 느끼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이 고통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비명이 한마디 외마디가 기도가 되어서 “오 하나님 우리를 살려 주시옵소서.” 부르짖을 때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도우시고 돌보시고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적인 성도는 압니다. 고통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고통도 새로운 역사의 기회가 되고 실수도 실패도 아름답기만 합니다.
미국 한센병 환자 재활원의 원장으로 일했던 폴 브랜드 박사가 인도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치료하고,
영국에 가서도 이곳저곳 나병환자들을 방문하여 치료하는 일을 하느라, 긴 시간의 기차여행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호텔에 돌아와 목욕을 하고 발뒤꿈치를 만지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런 일이 별 것 아니겠지만, 인도에서 수많은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던,
폴 브랜드 박사는 섬광처럼 떠오른 무언가에 깊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가 한센병에 걸렸구나.”
그는 기계적으로 일어나서 바늘을 찾아, 그 바늘로 발뒤꿈치를 찔러보았으나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더 깊이 찔렀습니다. 피가 솟아났지만, 아무런 감각이 없었습니다.
‘정말 한센병인가?’ 이제 가족들과 떨어져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외딴 곳에서 살아야 하는,
자기 인생이 너무나 서럽게 다가왔습니다. 하나님 어찌 내게 이런 고통을,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다 잠이 들고, 또 잠이 깨면 흐느껴 울기 시작하기를 반복했습니다.
새벽녘 손에는 아직도 바늘이 들려 있었고, 그 바늘로 다시 발뒤꿈치 복숭아 뼈 밑 부분을 찔렀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아프던지 화들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증세는 다름 아닌 오랜 여행시간의 기차 여행으로,
발 한쪽이 마비되었던 것뿐이었습니다. 새벽에 마비되었던 발이 풀어져, 다시 고통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외쳤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픔과 고통을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나님! 내 인생에 그 어떤 고통이 온다할지라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엔도슈사꾸의 단편 「독약」 이라는 제목의 책에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생체실험을 하던,
“로데” 라는 의사가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간을 자르고 폐를 잘랐을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를 관찰했을 때, 양심의 고통이 얼마나 자기를 아프게 짓누르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100번이 되고 1000번이 되면서 이제는 양심의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결국 미쳐버리고 맙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뛰어다니며 내게 고통을 되돌려 달라고, 양심의 통증을 돌려달라고 부르짖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통 가운데 있으십니까?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외롭고 아픈 고통을 느끼며, 눈물을 닦고 이곳에 오시지는 않았습니까?
여러분이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만 있다면, 그 고통을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기억하시고 돌봐 주실 수만 있다면, 고통도 여러분 인생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세처럼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약점이 있고 너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 넘어질 수 있고 나도 넘어질 수 있으며, 깨질 수도, 실패할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나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내 신앙이 내 기도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실패는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실수와 실패, 힘든 일로 인한 아픔과 고통,
넘어져 다시 일어서기조차 힘들만큼 깨지고 깨진 인생, 만회하기 힘든 약점과 단점들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경건하게 무릎 꿇고 자세를 바르게 하고, 엎드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너무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있는 모습 그대로, 철푸덕 주님 앞에 그냥 어푸러 지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을 만나 주십니다. 있는 그대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로 말하십시오.
그때부터 여러분의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실수는 실수가 아닙니다. 모두가 아름답습니다.
아픔과 고통, 깨진 인생, 약점과 단점들, 이 모든 것들이 오히려 여러분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사정을 아뢰십시오.
그 순간 여러분의 모든 실패와 실수, 아픔과 고통, 약점과 단점, 깨진 인생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잘 되는 복된 성도, 건강하고 행복한 성도, 찬란한 빛이 비추이는 아름다운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