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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륜43회/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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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게 시 판 스크랩 여행스케치 2015.3.4.-3.12 이태리 일주 /폼페이 최후의날 흔적들
구름/최상운 추천 0 조회 176 15.03.29 03:3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15.3.4.-3.12 이태리 일주 /폼페이  최후의날 흔적들

 

 폼페이는 고대 로마의 도시로, 지금은 이탈리아 남부 캄파니아 주 나폴리 인근에 있는 도시다.

지금은 유적지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예전에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이자,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폼페이에는 로마의 상류계급의 별장들이 많이 지어져있던 곳이며 그들이 술을 마시며 음주가무를 즐기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심지어 성매매 업소들도 있었던것으로 알려지고 그 흔적들도 남아있다.

 

그래서 ?폼페이 최후의 날은 타락한 도시의 신의 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나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그 지방 사람들은 이곳의 입장 수입을 포함한 관광 소득으로 잘 살고있다

아이르니.....

 

우린 2,000년 동안의 잠에서 께어난 그 신비를 찾아 로마를 출발 폼페이로 향해 달린다.

?

 

화산 폭발로 멸망한 도시 폼페이(네이버에서 찾아온 자료 요약)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암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내렸다.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소멸한 도시 중 하나다.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내리는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폼페이를 뒤덮어버렸다. 운 좋게 도망친 사람도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늦은 사람들은 지상을 뒤덮은 고온 가스와 열구름에 질식하거나 뜨거운 열에 타 죽었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20,000명의 약 10퍼센트인 약 2,000명이상이 도시와 운명을 함께 했다고 한다.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된 도시였으며,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을 건설했던 인기 있는 휴양지이기도 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6년 뒤 도시 전체는 화산재 밑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폼페이 멸망의 참극에 대해서는 당시 로마의 정치가 소플리니우스가 역사가 타키투스에서 보낸 편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소플리니우스는 베수비오 화산에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나폴리만 입구 미네눔에 머물고 있었다.

폭발 당일 소플리니우스의 어머니가 베수비오 화산 상공에 이상한 모양의 거대한 구름이 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소플리니우스에게 알려주었다.

소플리니우스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재빨리 어머니와 함께 먼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후에 그는 편지 속에서 그때의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구제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피해가 너무나 커서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로마의 도시
역사에 퇴장했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이었다. 폼페이 위를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런 우연한 계기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는 본격적인 발굴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1748년에는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4)가 독점 사업으로 폼페이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발굴은 약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아름다운 출토품만이 중요하게 취급될 뿐 나머지 유물들은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다.

또 모자이크나 벽화 같은 미술품들도 충분한 조사도 없이 모조리 프랑스 왕궁으로 실려가버렸다.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면서 폼페이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에마뉴엘 2세는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를 발굴대장으로 임명하고, 조직적인 발굴을 지시했다.

이렇게 해서 유적에 대한 구획 정리와 함께 본격적인 수리와 보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발굴단은 유적들이 층층이 쌓여 있는 빈 공간에 석고를 부어넣어 당시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했다.
그후에도 폼페이 발굴은 계속되어 현재는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이다.

이곳에서 많은 출토품들은 현재 나폴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간이 멈춰버린 도시
발굴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는 당시 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유적이었다.

화산 폭발로 시간의 흐름이 멈춰버린 도시는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폼페이는 한 변이 약 2킬로미터에 이르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도시 서쪽에는 포럼이라 불리는 광장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신전과 시장, 시청 등이 모여 있었다.

조사를 통해 바로 이 지역이 폼페이의 종교·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도시 곳곳을 이어주는 도로들은 모두 포장되어 있었으며, 차도와 보도로 구분되어 있었다.

또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인 사거리에서는 공동 수도와 각 가정으로 물을 보내기 위한 수도관 시설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밖에 공중 목욕탕과 체육관, 두 개의 극장, 1만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원형 경기장도 발굴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발견한 빵집과 술집에서는 화산 폭발이 갑자기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남아 있었다.

화덕에 그대로 남아 있는 불에 구운 빵과 술집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작은 잔 등이 바로 그 증거다.

한가로운 일상을 한순간에 참극으로 몰아넣은 급작스런 화산 폭발과 그로 인한 도시의 파괴가 단지 이야기만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폼페이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일으킨 베수비오화산 ?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인데 1944년에 분출을 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베수비오화산 인근에는

    3백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산의 하나로 여겨진다고 한다. 

 

  영화 최후의 날중 한장면 들

?

  이제 우리는 폼페이의 과거속으로 들어간다.

 

 

 

 

   들어서면서 바로 그당시의 벽화가 보인다.

 

 

 

 

 

 아폴로신전은 폼페이서 가장 오래된 고대 신전으로 기원전 575년에서 550년 경에 지어진 도리아 양식의 건물로 양쪽에

아폴로와 다이아나의 동상이 있다

 

 

     로마광장 뒤로 보이는 산이 베수비오화산이다.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

 

폼페이의 도로와 길가의 주택가 풍경인데 길이 지금의 길과 비슷하게 인도가 있고 마차길이 있다.

 

 

 

 

 

 

 

    신을 모신 곳....

 

   여긴 홍등가로 윤락 형태에 따라 가격이 다른 가격표도 있었다. 그당시 폼페이는 환락의 도시였음을 보여주고있다.

 

 

 

 성매매 했던 방에 놓여 있던 침대....사이즈가 좀 작아 보였다.

 

    당시의 우물

 

  유적지 발굴전엔 이곳 땅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아왔는데 모두 철거하고

 사진에 보이는 지붕이 있는 저 집은 유적지 안에 유일하게 남겨 놓은 집이며 발굴작업을 위해 개발전에 있던 집을 그데로

  보존하며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공중 화장실

 

로마광장 옆에 위치한 폼페이곡물창고인데 지금은 화산폭발로 인해 묻혔던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엔 폼페이 사람들이 당시 사용하던 도자기 및 그릇들이 있고 화산폭발로 인해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화석도 있었다.

 

 

 

 

 

 

 

 

 

 

   그 당시 통행방향을 표시한 양의 머리....방향

 

 

    목욕탕 입구

 

 

 

고대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좋아했고 그당시 폼페이에는 ?공중 목욕탕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벌써 폼페이는 수로를 이용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 수로를 이용한다는 생각이 정말 대단하다.

우린 그당시의 목욕탕 내부를 둘러 보았다. 정말 정교하고 화려했으며 과학적으로 효율성도....

 

 

 

 

 

   여기는 스타비아나 거리에 있는 모데스토의 베이커리라고 했습니다.

  밀가루 반죽 도구와 탄화된 빵 덩어리들이 발견되면서 베이커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이 폼페이최후의날을 일으킨 베수비오화산이며 ?현재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유적지를 돌면서 많은 설명을 들었는데 모두가 비슷 비슷비슷하고 워낙에 많은 곳이였어 실물과 사진이 확실히 대비 되지 않고

정확하게 생각 나지 않아 설명을 모두 붙일수없어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태리 여행후 시차 극복과 이어서 또 다른곳 여행으로 사진 정리가 늦어져 메모한것과 사진이 햇갈려서...ㅎㅎㅎ

또 다음 사진 정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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