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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묵상글 (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 손 내밀어요.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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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 내밀어요>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슬픈 벗에게
기쁨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아픈 벗에게
돌봄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지친 벗에게
돋움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외딴 벗에게
이웃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멈춘 벗에게
나감이 되게
정성스럽게
손 내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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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무한 은총을 무상으로 주시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치유를 가로채는 짓이 병원과 의사에게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기를 가로채는 짓이 기 치료사에게는 어림없는 일입니다.
옆집으로 가는 전기를 내가 몰래 끌어다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당장 아이를 살리러 주님께서 가시는데
그 길의 중간에서 주님의 기를 가로챈 여인의 행위는 치유 가로채기이고,
이런 행위는 병원과 의사에게는 어림없고 기 치료사에게도 어림없습니다.
한량없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우리가 얘기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한량이 있고 힘도 한량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량(限量)이란 양의 한계를 말하는 것이고,
인간이 유한하다고 함은 이처럼 양의 한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한이란 한계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하느님은 무한하신 분 곧 한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에 한계가 없고 은총에 한계가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여인의 행위는 죽은 소녀에게 가야 할
주님의 사랑이나 은총을 가로챈 것이 아니고,
누구나 끌어다 쓸 수 있는 무한 전기선에서
전기를 조금 끌어다 쓰는 것과 같은 겁니다.
이런 경우 끌어다 쓰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고 현명함이며,
끌어다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리석음이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여인처럼 하지 못할까요?
어떤 사람이 여인처럼 현명하지 못할까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은 한량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한량없다는 것은 알지만
하느님께서 그것을 무상으로 주실 거라는 점을 믿지 못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무한 은총을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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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오늘 <복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 이야기와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는 회당 장으로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였지만, 죽어가는 어린 딸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졌다 하더라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을 뿐입니다. 그 속수무책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모든 희망이 무너져 버린 참담한 순간입니다.
또한, 열 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은 그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느라 고생하였지만, 가진 것마저 모두 탕진해 자포자기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이 절망의 순간, 억울함과 원망이 밀어닥치는 이 순간, 하염없이 넘어지는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더 깊은 데서 물을 길어 올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더 깊은 곳으로부터 믿음을 퍼 올리는 기회의 순간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의 시련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회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이 그를 더 깊은 믿음에로 이끄시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혈루증 여인도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의 믿음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주술적이고 마술적이기 까지 합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회당 장의 믿음 역시 억지 부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끝났다고 여길 때, 바로 그때 하느님께서는 일을 시작하실 때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절망적이라고 여길 때,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요, 은총의 때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그분을 밀쳐대는 이는 많지만, 믿음으로 만지는 이는 적습니다.”
바로 이 순간 주님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주님의 옷깃을 만지는 일이 필요합니다. 만약, 만져도 만져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약한 까닭일 것입니다. 베다 성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의심과 이중성으로 주님께 다가가기 때문에 만져도 만져지지 못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줍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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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은 선물이나 협력이 필요하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여인의 믿음이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굴하지 않는 믿음, 창피함도 이겨내는 믿음,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은 구원의 보증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 우리의 협력을 기대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다 이루어 주실 수 있지만 준비된 마음 안에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지니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치유는 영적인 치유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데 있어 그 바탕이 됩니다.
저는 기도를 청하는 분에게 가능한 머리에 손을 얹어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의 역사가 안수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안수를 받는 사람과 공명을 이룰 수 있으며 저의 간절한 마음을 잘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기도를 청하고 싶어도 용기가 없어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안수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을 체험하게 합니다. 안수하는 사제와 받는 이의 마음이 통하게 될 때 놀라운 하느님의 역사를 느끼게 됩니다. 오늘은 백혈병으로 고통을 겪던 학생, 혀암으로 시련에 봉착한 자매, 위암 수술을 마친 자매, 췌장암 수술을 받고 투병 생활을 하는 형제, 난소암으로 불안해하는 자매, 가슴 깊이 미움의 응어리를 가진 사람, 용서와 화해를 원하면서도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 상처를 덧내고 있는 분, 남모르는 아픔을 겪는 모든 분에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해 주시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성령의 역사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 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한 말씀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데 굳이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으로 경탄해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멉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비웃을 것이며 구경거리로 삼고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굳건한 믿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누군가를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주고, 세례명을 불러주고, 손을 잡아 주는 가운데 사랑이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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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6월 16일 예수 성심 대축일에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에서는 ‘사제성화의 날’이 있었습니다. 저는 해외에 나와 있기에 최근 4년간 참석을 못하였습니다. 사제성화의 날은 제게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02년 사세성화의 날입니다. 당시 저는 경기지역에서 사목하고 있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사목체험’을 발표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경험도 일천하고, 사제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고사했습니다. 신부님은 강사료라는 당근과 선배의 권위라는 채찍으로 제게 다시 권하였습니다. 저는 당근에 마음도 끌리고, 선배의 권유도 무시할 수 없어서 발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신문에서 읽었던 글로 발표를 시작하였습니다. ‘춘잠도사사방진(春蠶到死絲方盡) 납촉성회루시건(蠟燭成灰淚始乾), 미득선수실( 未得先愁失실) 당환기작비(當歡己作悲),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었습니다. 신부님들이 저의 말에 마음을 조금씩 열어갈 때 저는 제가 생각하는 사목에 대해서 말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사목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목이란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만이 아니다. 사목이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사목이란 습관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본당에서 3년간 있었던 체험을 나누었습니다. 벌써 21년 전의 추억입니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듯이 저의 발표는 교구청에 있는 신부님들께도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목국장 신부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제갈공명도 아닌데 교구청에서 저를 찾아왔다니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러웠습니다. 국장 신부님은 교구 사목국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저는 겨울에는 30일 피정을 하고, 여름에는 성지순례를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국장신부님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서 저는 2002년 10월 1일부터 교구청 사목국에서 ‘교육담당 사제’로 일하였습니다. 본당에서 강론만 하던 제게 교육담당 사제의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보통 2시간 강의를 준비해야 하고, 18개 지구에서 실시하는 교육의 강사를 섭외해야 했습니다. 한 두 번은 모르지만 18번을 강의하려고 하는 강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의에도 경험이 생기면서 여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지런한 성격이라 2년 전에 강의를 부탁하면 대부분 강의 부탁을 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사목국에서 3년을 지내고 캐나다로 이냐시오 영성을 공부하러 갔습니다. 사제성화의 날 우연히 찾아온 발표의 기회가 저의 사제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3년 사제성화의 날에 교구장님은 사제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직접 참석은 하지 못했지만 교구장님의 말씀을 전해 들었습니다. 교구장님은 이 시대의 사제에게 필요한 것은 ‘영성’이며 영성은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기도 전담 사제를 더욱 늘려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쇄신 기도 피정, 성체조배 피정, 이냐시오 피정, 향심기도 피정, 예수마음 기도 피정’ 중에 하나는 3년에 한 번씩 꼭 신청하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을 통해서 다양한 교회의 영성을 체험한다면 사제생활이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출산과 고령화의 영향으로 사제성소가 감소하고 있는데 교구에서는 사제성소를 늘려가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사제성소를 늘릴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사제들이 영성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제들이 헌신한다면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사제성소를 지망하는 이들에게 전해 질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가정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만큼 신앙생활의 성장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2027년 세계 청년대회를 유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교구의 사제들이 교구장님의 사목지침을 잘 따른다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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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을 찾으라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다”-
“항상 깨어 있으시오.”(마태25,13)
왜관 수도원에서 내일 7월11일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김치삼 알렉산델 수사의 상본 성구입니다.
“내가 너의 하느님이니, 너는 걱정하지 마라.”(이사41,10)
역시 내일 7월11일 왜관 수도원에서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하는 고건상 멜키올 신부의 상본 성구입니다.
1973년 첫서원후 반세기 50년 동안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충실하면서 수도원에서 정주해온 두 분 수도자의 삶이 참 위대합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더불어 두분의 응답의 노력이 함께 이뤄온 놀라운 성취입니다. 저절로 나오는 제가 참 좋아하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구입니다.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시편118,1)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하루하루 하느님만을 찾으며 50년 동안 평범한 일상에 충실해온 두분 수도자입니다. 위 수도자는 저보다 두 살 위이지만 저는 1986년 첫서원을 했으니 수도연륜으로는 13년 선배입니다. 당시 저는 교대재학중 입대하여 군복무중이었고 저는 1974-1981년까지 8년동안 교편생활하다 1982년 입회했으니 하느님의 부르심은 이처럼 참 다양하고 신비롭습니다.
참 중요하고 힘든 것이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한 삶입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옛 사막교부의 금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절박한, 절실한 갈망이, 열정이 있을 때, 때가 되면 언제 어디서나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어제의 각별했던 만남에 감사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기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일입니다. 1998년부터 그러니까 25년동안 한결같이 제 시집과 강론을 정리하여 복사 제본해다 준 자매인데 대학 강의중 3월초 과로로 인한 뇌졸증으로 쓰러진후 재활병원에 입원중 만5개월만에 처음 수도원 오전 10시 주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 미사에 참석했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특별한 반가움에 외출하여 점심식사를 함께 나눴고 다시 재활병원에 귀원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간절한 열망, 절박한 마음에 눈만 열리면 언제 어디서 제 때에 찾아와 만나 주시는 주님입니다. 다음 고백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꽃자리 천국이옵니다.”
아, 문득 의술醫術이 인술仁術임을 보여준 치과의사 형제의 감동적 일화가 생각납니다. 연초록 풀잎에 맺힌 투명한 빗방울이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사진과 함께 보내준 카톡메시지입니다.
“주일이지만 보호자분의 간절한 요청으로 아는 수녀님과 함께 뇌졸중으로 와상중인 35세 청년의 치아 검진을 위해 봉천동에 갑니다...빗속을 뚫고 가서 만난 봉천동 청년은 참 해맑았습니다. 헌신적인 어머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그 짧은 검진과 간단한 잇몸 처치의 시간이 제겐 더 큰 은총이었습니다...투명한 빗방울처럼 제 영혼이 맑아지는 밤이길 기도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랑의 만남에 치유의 구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간절한 열망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주님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the sacred place)’가 됩니다. 오늘 형 에사우의 보복을 피해 도주중인 야곱의 심정은 참으로 막막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중에 간절히 하느님을 찾았을 것이며 꿈중에 주님을 만나 확약을 받습니다.
“나는 너의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며 이사악의 하느님인 주님이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고, 너를 다시 이땅으로 데려 오겠다.”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자 소스라치게 놀라 고백합니다.
“진정 주님께서 이곳에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모르고 있었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베개를 가져다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붓고,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작명합니다. 이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추억은 늘 평생 야곱의 뇌리에 생생했을 것입니다.
절박하게 하느님을 찾을 때, 바로 거기에 하느님은 찾아 오시고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 하늘의 문이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회당장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창세기의 야곱처럼 양상을 달라도 주님을 찾는 갈망은 하늘에 닿았기에 마침내 주님을 만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된 것입니다. 당시 곤경중에 있던 분이 둘 뿐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갈망과 열망의 사람 회당장과 혈루증을 앓던 둘뿐이었습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쫓아내신 뒤에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그 사이 예수님은 자기 옷자락에 손을 댄 여자의 간절한 열망의 믿음을 알아채린후 즉시 치유의 구원을 선언합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 주님과 만남의 일화인지요!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주님을 찾으십시오. 간절한 열망의 믿음이 있을 때 바로 거기가 하느님의 집이고 하늘의 문이 됩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여기가 하느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입니다.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주셨네.”(2티모1,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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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주제는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가셔서 아이를 일으키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믿음을 보인 회당장과 옷자락에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인 여인, 이 둘의 믿음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오늘날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어디서 이런 믿음을 볼 수 있을까요?
루르드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수많은 지팡이가 걸려있었습니다. 루르드의 샘물로 치유된 이들이 두고 간 지팡이들입니다. 올 때는 몸과 마음이 병들어 왔지만, 그 샘물로 목욕을 한 후 그들은 지팡이를 두고 두 다리로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습니다. 물론 성모님께서 선물해 주신 샘물을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그 샘물이 그 역할을 다하도록 온전한 믿음을 보인 수많은 병자의 믿음도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었다면 그런 치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기적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나서 수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이 있는 곳에는 ‘믿음’이 늘 함께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소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간절하고 절실하게 기도하는 분들을 저는 이곳 갑곶순교성지에서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분들 뒤에서 함께 기도합니다. 그분들의 믿음이 씨앗이 되어 치유와 기적의 씨앗이 되기를 바라며 말입니다.
손님 신부님이 오셨나 봅니다.
한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고해성사를 보러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실 본당 신부님께서 계시리라 생각했기에 조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성당에서 봉사하는 분이어서 신부님이 그 자매님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성호를 긋고 고해를 시작하는데 반대쪽에서 신부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런데 본당 신부님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본당 신부님의 목소리보다 더 허스키했습니다.
손님 신부님이 오셔서 고해성사를 주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지금이 기회다.’라는 마음으로 있는 것, 없는 것, 기억 저 너머에 있는 고해 거리까지 가져다가 고해를 했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 또한….’으로 묶어 버렸을 것들까지 몽땅 고해했습니다.
시원했습니다. 아주 가벼웠습니다. 눈물도 옴팡 흘렸습니다.
고해성사가 끝나고 성당 자리에 앉아 미사 시작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고해소의 문은 열렸고 본당 신부님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때 본당 신부님은 목감기에 걸려있었던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목감기는 그렇게 치유의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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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0. 연중 제14주일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이런 회사는 잘 운영될까요? 아니면 망할 것 같습니까?
CEO의 계획을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회사, 부하 직원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회사, 직원들은 CEO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그 계획을 더 발전시키는 회사.
아마 잘 운영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면 어떨까요? 직원들이 CEO의 계획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고, CEO 본인도 직원을 무시하면서 자기 마음대로만 하려고 한다면, 이런 회사의 미래는 밝아 보이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쫄딱 망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네요.
하느님의 계획과 여러분의 계획을 비교하면 어떤 계획이 나을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계획이 훌륭하므로 우리는 무조건 하느님의 계획을 잘 숙지해서 더 발전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계획만을 내세우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께 청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청하고 또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물 위를 걷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물속에 빠지고 맙니다. 이 상황(자기)을 보게 되면서 물속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많은 성인성녀께서는 이를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과연 어떤가요?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회당장이 찾아와 예수님께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딸의 죽음이라는 그 상황만을 보고 있었다면 아마 예수님을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자고 있을 뿐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소녀의 손을 잡아 살려줍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당장의 집을 갈 때,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예수님 옷자락 술에 손을 대면서 치유의 은총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 역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 계획이 아닌, 하느님의 계획에 따르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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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도 우연이 아니고, 실패도 우연이 아니다(브라이언 트레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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