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굉음을 내며 질주하던 동해남부선 철길 옆 세병교 아래에는 투박한 삶의 소음과 조미료 공장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거제동 미원 공장의 붉은 로고가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 때면, 땡땡거리는 건널목 신호음은 마치 고단한 하루를 갈무리하고 우리를 부르는 다정한 종소리 같았습니다.
그 소란스러운 풍경의 틈새에서도 유독 고요하게 빛나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둑길 한구석, 연못 위 연꽃처럼 위태로운 듯 평온하게 흔들리던 작은 목로주점. 좌석버스 안에서 당신이 내게 건넸던 그 한마디, “욱곤아, 술 한잔하고 갈래?”라는 따뜻한 제안은 서리 내린 새벽 이슬처럼 제 메마른 마음 가장 깊은 곳까지 촉촉이 스며들었습니다.
노가리 한 마리와 시큼한 막걸리 향 사이로 당신은 피아노 선율 같은 꿈을 나직이 읊조렸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흐르는 아련한 빛을 보았습니다. 기차가 지날 때마다 술잔이 가르르 떨리고 대화는 뚝뚝 끊겼지만, 맞잡은 손의 온기만으로도 세상의 어떤 시련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었던, 참으로 눈부신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선명한 기억은 버스 문이 열리던 순간이였습니다. 서늘한 바깥 공기가 홱 밀려들며 차 안의 온기와 부딪혀 바스락거릴 때, 당신은 내 손을 이전보다 더 꼭 쥐어주었습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진 그 묵직한 온기는 말보다 분명하게 일러주었습니다. 당신이 내 손바닥에 슬며시 쥐여준 차비는 단순한 지폐가 아니었습니다. 주름진 지폐의 결마다 당신의 세심한 배려와 우리 앞에 놓인 희망이 촘촘히 접혀 있었음을 나는 느꼈습니다. 버스 문틈으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 찰나의 순간 더 밝게 빛나던 당신의 얼굴을 나는 사진 대신 마음의 감광판에 깊이 새겨 넣었습니다.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저립니다. 사진 속 미소 하나만 있었어도 그날의 빛을 영원히 붙들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그 소중한 순간들을 그저 두 손으로만 꼭 껴안은 채 속절없이 흘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목소리와 손의 온기, 버스 문을 열던 그 순간의 눈빛은 그 어떤 사진보다도 선명한 낙인이 되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잃어버린 사진 대신 나는 그 장면들을 한 장 한 장의 필름처럼 현상하여,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나만의 '기억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공장은 자취를 감추고, 철길 위엔 '명상의 숲길'이 들어섰습니다. 미선나무와 왕벚나무가 하얗게 피어난 그 길을 걸으며 나는 오늘도 당신의 흔적을 찾습니다. 들국화 사이로 수줍게 흔들리는 코스모스의 눈짓에서, 아파트 담장을 타고 넘는 주황빛 능소화의 미소에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얼굴을 읽어냅니다.
비록 당신은 먼저 하늘의 별이 되었고 우리가 머물던 목로주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내 마음속의 기차는 여전히 그 시절의 당신을 향해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만약 시간이 멈춘 그 자리에 그 작은 주점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나는 다시 한번 당신의 따뜻한 손을 잡고 묻고 싶습니다.
"그날, 우리가 나누었던 막걸리가 참 달았는데... 당신도 기억하고 있느냐고."
첫댓글 애절한 사모곡이 한 편의 서사시가 되어 다시 피어나고 있군요...
그동안의 사모곡들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 그 속의 목련과 능소화가 오래토록 당신의 사랑을 머금고 있도록 하심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