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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십자가 정신이란 무엇인가? /마태복음 16:24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https://www.youtube.com/watch?v=APAN6YKRMu4
이제 막 덧셈 뺄셈을 배우기 시작한 꼬마가 엄마 손을 잡고 예배당에 왔습니다. 그 아이의 눈에는 예배당 전면에 있는 커다란 십자가가 더하기(+) 표시로 보였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야! 더하기다. 맞지? 엄마. 그런데 왜 저기 더하기가 있어?” 아이의 질문에 엄마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인데, 나에게 뭘 더해 주었나?”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갈 6:14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랑할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십자가는 왜 자랑거리였을까요?
본래 십자가는 사형틀 이었습니다. 십자가 사형틀은 페르시아에서부터 사용했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땅이 그들이 섬기는 올무즈(Ormuzd)라는 신에게 바쳐진 신성한 땅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중범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처형할 때 신의 소유물인 땅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의 시체를 땅에 닫지 않도록 높이 올리려다가 십자가형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가형이 페르시아에서 북 아프리카 칼타고로 건너갔고, 칼타고에서 다시 로마로 전해졌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생각해낸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십자가 처형을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방법이 있습니다. 사형언도를 받은 현장부터 십자가 처형 장소까지 죄인이 십자가를 메고 가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형벌이 시작됩니다. 처형 장소까지 가는 죄인을 채찍으로 때려서 반쯤 죽입니다. 그리고 처형 장소에 도착하면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면 피를 흘리게 됩니다. 갈증이 시작됩니다. 박힌 못의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파리와 모기떼들은 극성스럽게 몰려듭니다. 상처를 빨고 물어뜯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사형수는 죽어 갑니다. 아주 긴 시간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고안해 낸 사형 방법 중에 가장 잔인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빌라도에게 사형 언도를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오전 9시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달려서 고통을 당하시다가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시고 죽으셨습니다.
2천 년 전 주님이 지신 십자가, 그분이 고통당하신 십자가, 그분이 죽으신 십자가는 그분과 믿음으로 연합한 내가 진 십자가요. 내가 고통당한 십자가요. 내가 죽은 십자가인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믿는 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사형틀에 불과한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사도 바울에게는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십자가가 믿는 사람들의 자랑거리일까요?
①십자가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핵심 구절은 요 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신 목적은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동기는 사랑입니다. 영생을 주시는 방법은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무엇 때문에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②십자가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8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십자가의 도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미련해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구원의 능력입니다.
③십자가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골 2:15에 보면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의 능력으로 마귀와 귀신들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승리의 비결입니다.
④십자가는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갈 3:13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시므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일정 시대에 김인서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교편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삼일운동에 앞서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가셨습니다. 이분이 감옥에 있는 동안 조금도 죄책감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교사로서 의롭고 올바르게 살았기에 ‘나는 죄인이 아니다.’라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죄수들은 진짜 죄를 짓고 들어와 있으니 자기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령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재판관이 죄인으로 정해서 죄를 지고 왔지만 너는 내 앞에서 죄인이다.” 이분은 마음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죄인으로 지정하셨으니 그럼 나는 어떻게 하느냐?’ 굉장히 마음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광채가 넘쳐나면서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이분이 예수님이 나의 예수님이 되시고,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고, 성경이 나의 성경이 되고, 천당이 나의 천당이 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옥에서 나와서 열심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요 축복입니다.
십자가는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있고 내가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 져야 할 십자가를 말씀합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십자가 정신으로 무장하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설교는 십자가 정신을 다루겠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요 5:19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예수님은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고 모든 일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도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에 받아드리신 것입니다.
막 14:36입니다.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과 수치를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셔서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가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드리시고 다음 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정신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정신입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때문에 얼마나 고생하고 있었습니까? 자기만 고생한 것이 아니라 가족들도 고향에 살 수 없어서 황무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사울만 죽이면 다윗의 고생은 끝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 왕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았고, 원수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 왕을 두 번 다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살려주면 자기가 계속해서 고통당할 것을 알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선택했습니다. 이런 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기록 되어 있으니 우리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십자가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마음의 감동이나 음성이나 부담감 등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다를 때 우리는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와 아내는 사실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합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신 감동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금액을 낮추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와 아내의 영혼에 마치 돌에 글을 새기듯이 정확하게 금액까지 감동으로 알려주실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내적인 갈등을 잠간하지만 결국은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때 저와 아내는 십자가의 정신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기도하거나 설교를 들을 때 또는 생각지 않았던 마음의 감동과 부담이 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도장을 찍듯이 주시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럴 때 계산하지 마시고 손해가 되느냐 유익이 되느냐를 따지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2. 먼저 찾아가는 정신
빌 2:6-8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십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찾아오신 것일까요? 우리가 주님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죄인들과 소외 된 자들과 원수 된 자들에게 손을 내밀기를 원하십니다. 호 1:2입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은 호세아를 부르시고 그에게 음란한 여자 고멜을 찾아가서 고멜과 결혼하라 명하셨습니다. 고멜은 결혼 후에 바람을 피워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긍휼을 받지 못한 자’라는 뜻입니다. 고멜이 아이 젖을 뗀 후에 또 임신을 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내 백성이 아니라’라는 뜻입니다. 호세아의 아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고멜은 집을 나갔고 아마도 방탕한 생활로 빚을 지고 노예 신분이 되어 몸을 판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고멜을 찾아가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호세아는 당시 노예 한 사람의 몸값을 지불하고 고멜을 찾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와 창기 고멜을 통해서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십니다. 구원의 도리는 먼저 찾아가는 정신이 기본입니다.
마 7:12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이것이 구약의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진리의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무엇이요? 섬김 받기 원하고, 대접받기 원하고, 용서 받기 원하고, 사랑 받기 원한다면 내가 먼저 찾아가고, 내가 먼저 대접하고, 내가 먼저 용서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구약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 말씀을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사셨습니다. 진리가 실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십자가 정신은 먼저 찾아가는 정신입니다.
3. 낮아지는 정신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춥니다. 시 22:6입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당하실 것을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하여 마치 벌레처럼 낮아지셨고 사람들에게 비방과 조롱을 당하실 정도로 낮아지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십자가 정신은 무조건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위해서라면 벌레요 사람의 비방거리요 조롱거리가 된다할지라도 견뎌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빌 2:8에서는 주님의 낮아지심을 말씀합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만왕의 왕의 자리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자기를 낮추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자기를 낮추는 정신입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신을 낮추는 태도입니다. 교만은 잘난 척하고 뽐내는 건방진 태도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한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살기를 원하시며 겸손한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잠 22:4입니다.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성경에는 이렇게 축복의 비결이 확실하게 나옵니다.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 풍성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비결은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약 4:6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물리치는 사람은 불행하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다보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있어서 잘 되고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조심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럴 때 승리에 도취되어 겸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면에서 들리는 성령의 음성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로마의 황제나 장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개선문을 통하여 성 안에 들어갔고 그 이후에 성대한 잔치가 있습니다. 이 잔치에서 사제는 열렬한 시민들의 환호에 도취되어 있는 황제와 장군 뒤를 따르며 그들에게 귓속말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속삭였습니다. 라틴어로 “너의 죽음을 기억하라.”입니다. 시민들의 환호의 함성만 귓전에 들릴 때 사제는 다시 반복했습니다. “메멘토 모리!” 전쟁에서 대승한 사람에게 “지금 대단한 일을 해서 영광을 받지만 당신도 죽을 것이다. 그러니 승리에 도취되지 말고 겸손하라.”는 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우리에게 항상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되고 형통할 때 그 형통에 도취되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순간에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기 때문에 교만할 수가 없고 겸손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4.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지신 것이 아니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지신 것입니다. 엡 1:7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는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한 고난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정신은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입니다.
“부모는 국수틀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수틀은 국수만 만들지 자기는 먹지 못 합니다. 부모의 희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간관계를 국수틀처럼 한다면 억울하고 속상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인간관계에는 부메랑의 법칙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든지 무슨 희생을 하든지 당장 그 자리에서 돌려받으려고 하니 억울하고 속상한 것이지 우리가 인생의 심고 거두는 원리로 보면 억울하고 속상할 일이 아닙니다.
백화점을 160개나 가지고 있었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는 남을 위해 희생하면 자기에게 복이 된다는 십자가 정신을 터득했습니다. 그가 젊을 때 하루는 잘 가꾸어진 장미화원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 주인은 그에게 정원에 있는 온갖 장미들을 구경시켜 주더니 갑자가 장미꽃들을 꺾었습니다. 몇 개의 덩굴은 한 송이 장미만 남겨두고 모든 가지를 쳤습니다. 워너 메이커는 “아니, 왜 가지를 모조리 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인이 대답했습니다. “좋은 장미 덩굴을 만들려면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너메이커는 “내가 가지를 쳐서 잃는 것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받고는 진리를 터득했습니다. 그래서 워너 메이커는 그날부터 나누어주는 선한 일을 열심히 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것이 복이 되어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 나눔은 희생입니다. 십자가 정신은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는 정신입니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줄 수 있는 정신입니다.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이 십자가 정신입니다.
5. 조건 없이 사랑하는 정신
성경의 핵심구절인 요 3:16에서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십자가 정신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지 우리의 믿음입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는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돈이나 봉사나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십자가 정신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네가 이만큼 하면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해주고 구원해줄게.”가 아닙니다. “내가 너를 멸망에서 구원해줄게, 아무것도 필요 없다. 십자가의 도를 믿기만 해라.”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에는 조건이 많습니다. 우리는 상대가 그 조건을 충족시켜주면 사랑하고 조건이 충족 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졌습니다. 롬 5:5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하나님은 믿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조건 없는 아가페 사랑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려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인도와 감동에 순종하면 됩니다. 우리의 육신은 사랑을 하는데 조건을 따지지만 성령님은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피지섬에 어떤 장교출신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긴 칼을 벽에 걸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하루는 전도하다가 어떤 사람한테 질그릇으로 얻어맞았습니다. 그곳에서는 질그릇으로 맞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그가 집에 돌아와 생각하니 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큰칼을 집어 들고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큰 칼 밑에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을 펼치니 마 5:44이 보였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때 그는 하나님의 뜻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질그릇을 하나 사 가지고 낮에 자기를 질그릇으로 때린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니까 그 사람이 혹시 그가 복수하러 온줄 알고 긴장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웃으면서 “아까 나 때문에 질그릇이 하나 깨졌는데, 이 그릇을 쓰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상대가 어리둥절해 “예수 믿으면 다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더니 예수님을 영접하여 신자가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선택입니다. 육신적인 감정을 선택할 것인가 성경대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선택할 것인가 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누구나 부정적인 감정은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감정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아가페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선택하여 순종 할 때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정신은 조건 없이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6. 누구든지 용납하는 정신
로마서 5장에 보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어떤 사람도 용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롬 5:6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주님이 누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까?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롬 5:8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놀라운 사실입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어주는 것도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대신 용감히 죽는 자가 가끔 있을 수 있습니다만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롬 5:10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정신은 누구든지 용납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말은 어떤 사람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딸이 열 살이었을 때에 한 번은 그 딸이 큰 소리로 울면서 집에 들어왔습니다. 한 남자아이에게 막대기로 심하게 얻어맞아서 분하고 화가 나서 운 것입니다. 딸이 아빠에게 말했습니다. “저 녀석이 막대기로 나를 때렸어요. 아빠! 저 놈을 혼내주세요” 톨스토이는 딸을 꼭 껴안고 속삭였습니다. “아빠가 그 아이를 때려주면 그 아이는 너와 원수가 될 텐데…. 그 아이를 미워하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훨씬 낫단다. 너의 사랑이 전해지면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톨스토이는 샌드위치를 만들어 딸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이것을 그 아이에게 갖다주렴.” 그 후 딸은 그 아이와 좋은 친구가 됐습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우리들이 생활 속에서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면 더 좋은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가 만들어 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제자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정신으로 살면 금보다 더 귀한 복음의 깊은 비밀을 알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먼 나라를 정복하여 전리품으로 얻은 금을 한 마차 실고 본국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마차를 나귀가 끌고 있었고 마부 한 명이 나귀를 몰고 있었습니다. 워낙 먼 거리라 나귀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마부는 마차에서 금덩어리 몇 개를 꺼내서 자기 어깨에 메고 나귀를 몰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알렉산더 대왕이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왜 금덩어리를 짊어지고 걷는가?” 마부가 말했습니다. “나귀가 너무나 힘들어 하여 짐을 덜어 주고 있습니다.” 감동을 받은 알렉산더 대왕이 말했습니다. “짊어진 것은 네 것이다.” 십자가는 비밀입니다. 십자가 안에는 영적인 온갖 보화가 가득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감추어진 보화를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사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자가 정신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십자가 정신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정신 2. 먼저 찾아가는 정신 3. 낮아지는 정신 4. 남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는 정신 5. 조건 없이 사랑하는 정신 6. 누구든지 용납하는 정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