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8]사통팔달의 길, 숫눈길, 봄-길
‘길’이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무엇일까? 혹자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어떤 이는 안소니 퀸과 줄리에나 마시다가 열연한 1950년대 흑백영화 <길>을 떠올릴 것이다. 허나, 나는 ‘길’하면 우리 고향집 대문 앞의 4개의 길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1.5km쯤 떨어진 앞산 중턱으로는 완주-순천 고속도로가, 그 아래 건너마을 앞을 지나가는 전라선(익산-여수) 철도가, 또 그에 못미쳐서는 일반국도 17번이, 집 앞에는 군도郡道가 얼마전 2차선 포장을 마쳤고, 대문 바로 앞 동네안길은 최근 아스콘으로 말끔하게 포장돼 있다. 툇마루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우리집보다 더 좋은 집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들판 뷰’가 좋다. 오는 사람마다 탄복을 하니, 어깨가 으쓱으쓱할 따름이다.
내 고향은 탈농脫農시대 직전엔 60여가구가 거주했는데, 현재는 30여가구로 줄어들었지만,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역으로, 뒤로는 노령산맥 줄기의 고만고만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앞으로는 성수산에서 비롯된 섬진강 상류 둔남천이 흐르고 있다. 4개의 길에서 하루내내 쉬임없이 차들이 이어지다보니, 심심할 사이가 없다고 할까? 아무튼, 1.5km 거리 안에 4개의 길(이때의 길은 영어로 road이다)이 있으니, 보기에 나쁘지 않다. 낙후된 전라선全羅線이긴 하지만, 여천공단 덕분에 수송열차도 제법 있고, 무궁화도 하루 대여섯 번 지나간다. 길은 많아서 나쁠 것은 없다. 길을 바로보고 있자면, 누군가 불쑥 예고없이 우리집을 찾아올 것같은 생각이 든다. 오늘같이 봄비가 사흘내내 내리는 날이면 최남선의 <가만히 오는 비가 낙수져서 소리하니/오마지 않은 이가 일도 없이 기다려져/열린 듯 닫힌 문으로 눈이 자주 가더라>라는 시조가 저절로 외어지면서 대문앞을 자주 바라보게 된다.
외로운 것일까? 아니다. 그저 그렇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누군가 찾아와 준다면 반갑긴 무척 반가울 것같은 날이다. 길은 뻥뻥 잘 뚫려 있으면 좋은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단어에 걸맞는 길로는 서울 한복판 ‘광화문 광장’을 들 수 있겠다. 나는 그곳에서 25년을 산 ‘광화문통 직장인’이었다. 수백 개의 버스 노선이 광화문으로 집중되는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그러니 인근에 각종 은행지점도, 음식점도 구비돼 있어 편리하다. 게다가 그곳은 ‘민주화의 성지聖地’ 역할도 여러 번 한 역사적인 곳이다. ‘광화문 길’을 생각하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도 울림이 크게 다가온다. 귀향한 지 4년이 다 돼가는 데도 가끔씩 광화문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입안이 후덕후덕 매워 쩔쩔매는 이강순실비집의 낙지무침에 침이 넘어가기도 한다. 광화문 시절에 나는 역사를 알고, 인생을 배웠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길, 하면 고향집 앞 4개의 큰 길 다음으로 사통팔달 광화문 길이 생각나는 소이연所以然(까닭)이다.
그 다음, 길은 제법 철학적인 길이다. 로드road가 아닌 웨이way. 사람은 누구라도 자기가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있고 길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나의 길이, 너는 너의 길이 있는데, 그것을 어느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비할 수 있겠는가. 저마다 길을 홀로 걸어간다. <가지 않은 길>이라는 유명한 미국시를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터. 이제 7학년을 앞둔 마당에 가끔은 이 시를 감상해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인연>이라는 수필로 유명한 피천득 선생이 번역한 것을 읊어보시라.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The road not taken>이라는 제목의 영시 원문을 한번쯤 읽어봐도 좋으리라. 누구라도 ‘두 길’을 다 걸을 수는 없는 일. 이리 가도, 저리 가도, 어차피 후회는 남는 일,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놓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지름길보다 오솔길을 더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길은 <숫눈길>이다. 아시는가? 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눈 쌓인 길, ‘숫’는 ‘처녀’라는 뜻. 그 길을 새벽에 호올로 걸으며 백범 선생이 애송한 <답설야중거踏雪夜中去 불수호란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에는 어지러이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한시 구절도 떠올린다.
또한 요절한 범능스님의 애절한 노래구절도 흥얼거린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은/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지금 그대가 걷는 이 길도/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저마다 길이 없는 곳에 태어나/동천햇살 따라 서천노을 따라/길 하나 만들며 음-음-음 돌아간다> 길에 대한 생각을 머리 속에서 이리저리 궁글리다가 오늘 오후 좋은 시를 발견해 흐뭇했다. 정호승 시인의 <봄길>이라는 시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 세상이 아무리 변하고 시끄럽고 발전이 느려터졌어도 <스스로 사랑이 되어/한없이 봄 길을 걸아가는 사람이 있다>고 시인이 말하지 않은가. 그렇게 ‘봄 길’을 걸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