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408
2월21일[연중 제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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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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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r1EyMuU1gw0 (윤종식 티모테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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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런 사람!>
예수님과 제자들이 카파르나움으로 향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장서 가시고, 제자들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뒤따라 갔었는데, 제자들 사이에서 참으로 민망하고 볼썽사나운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제자 열둘 사이에서 누가 서로 높은가 하는 문제로 길거리에서 한바탕 다툰 것입니다.
앞서가시던 예수님께서 그들의 미성숙한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즉시 날카로운 질문 하나를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코 복음 9장 33절)
부끄럽기도 하고 어색했던 제자들이 입을 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예수님께서는 즉시 분위기를 파악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지네들끼리 서열 정리하느라, 서로 얼굴을 붉히며 길거리에서 대판 싸운 것입니다. 아직도 갈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단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킨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분 가르침의 핵심적인 요지를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조만간 유다나 로마 제국을 능가하는 강력한 대 제국을 건설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그 왕국이 서면, 미리 한 자리 확보하기 위해, 서열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고 있는데, 다들 김치국부터 벌컥벌컥 한 사발씩 들이킨 것입니다.
기가 차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즉시 특별 정신교육을 실시하십니다. 자리에 앉으신 스승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제자들 앞에 세우신 다음, 그를 꼭 안아주고 나서,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복음 9장 35~37절)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자존심까지 긁어가시며, 강도 높은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신 것입니다.
짧지만 긴 여운을 남기는 시, 순수한 사랑의 언어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는 시로 유명한, 존경하는 나태주 시인의 시 ‘그런 사람으로’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가
세상의 전부일 때 있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로 세상이 가득하고
세상이 따뜻하고
그 사람 하나로
세상이 빛나던 때 있었습니다
그 사람 하나로 비바람 거센 날도
겁나지 않던 때 있었습니다.
나도 때로 그에게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보고 또 보아도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요?
틈만 나면‘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나대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람은 다시 상종하고 싶지않습니다. 엄청 높고 대단한 사람과의 만남 역시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불편하고 어색하기만 합니다.
반면에 어린이같이 작고 겸손한 사람, 어깨에 힘을 뺀 사람, 순수하고 소박한 사람, 틈만 나면 밑으로 내려가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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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Fh08vdZsgf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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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관심 없는 사람은 하느님에게도 관심 없다
어느 성당에 가건 조금은 이상하다고 여겨지는 신자들이 한둘은 있습니다. 제가 오산성당에 있었을 때 한 자매님이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미사 중간에 항상 씩씩하게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며 비키라고 하고 미사 분위기를 부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담배 피우는 것을 싫어해서 사제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아도 바로 빼앗아서 발로 밟아버렸습니다. 그분은 버스를 탈 때도 도로 한복판으로 뛰어 내려가 달리는 버스를 세워 잡아타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교구에서도 유명한 분으로 통했습니다.
많은 신자는 그분을 보면 인상을 찌푸리고 심지어 소리까지 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분을 보면 궁금해집니다. ‘왜 저렇게 되셨을까?’ 지금은 고인이 되셔서 제가 그분에게 물어보고 알았는지, 아니면 그분을 잘 아는 분에게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분은 매우 똑똑한 분이었고 남편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여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이 담뱃불로 학대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나니 그분이 가엾게 여겨지고 회복되시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본당 사제로 온 이후에는 매우 차분해졌다는 소리를 들어서 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 사람 왜 저래?’라고 끝내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나오기 싫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왜 그러는지 알려고 해야 합니다. 알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판단만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증명하려는 것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이처럼 보잘것없는 사람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아버지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면 하느님께 관심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술품에 관심이 없으면서 예술가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하는 묵상에 관심이 전혀 없으면서 저에게 관심이 있다고 하는 말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서 성체성사엔 관심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다면 성체에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나 자신이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교만이라고 합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배에서 내리지 못합니다. 배에서 태어나 평생 배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사는 세상으로 내려가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듯 자신이 아는 세계가 안전하다고 생각하여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그 사람과 그 사람이 속한 세상을 알아야만 하는데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음이 밝혀지는 게 두려워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결국엔 알고 싶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 책이 저에게는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입니다. 당시 누구나 볼 수 있는 성물방 책방 코너에 꽂혀 있었지만, 그 책을 빼서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묻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묵상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으면 내가 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알게 되면 효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린이를 먼저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알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분이 만드신 작은 것들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먼저 알기 위해 질문을 던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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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바둑 용어 중에 ‘포석’이란 말이 있습니다. 초반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것입니다.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은 소위 ‘강남의 노른자 땅’을 미리 차지입합니다. 반면에 아직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쓸모없는 ‘나대지’를 차지입니다. 이렇게 되면 바둑은 시작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 됩니다. 그래서 바둑을 잘 두기 위해서는 어디가 중요한 자리인지 파악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같은 한 점이지만 어떤 한 점은 20집의 가치가 있고, 어떤 한 점은 1집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런 수를 ‘악수’라고 말합니다. 신문을 읽을 때도 행간과 전체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시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 주 부터는 ‘사순’에 대한 기사가 많이 나올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성탄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례와 문맥에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행간과 문맥을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며 꾸중을 들었습니다.
2000년 전에 로마는 지금의 미국만큼이나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습니다. ‘아프리카 북부, 중동, 유럽’은 로마의 통치아래 있었습니다. 그때 로마의 변방이던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런데 불과 200년이 되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로마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극심한 박해에도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전역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역사는 그 이유를 2가지로 바라봅니다. 하나는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꿈속에서 십자가를 보았고, 십자가를 깃발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십자가를 구원의 표징을 삼는 그리스도교를 인정하고, 박해를 금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 헬레나 성녀입니다. 헬레나 성녀는 일찍이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웠습니다. 이런 헬레나 성녀의 깊은 신앙이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역사가들은 그리스도교가 로마에 급속하게 퍼질 수 있었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입니다. 지금의 코로나 팬데믹처럼 당시 로마를 뒤덮었던 역병은 ‘홍역과 흑사병’이었다고 합니다. 의료시설이 지금처럼 발전하지 않았을 때이기에 역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로마의 황제도 피난을 갈 정도로 역병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때 로마를 떠나지 않고 역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돌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받으면서, 순교하면서 신앙을 지켜왔습니다. 역병 속에서 죽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굶주리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들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바로 예수님께 선행을 베푼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목숨을 걸고 따랐습니다. 역병으로 죽어가던 로마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으로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역병과 함께 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면역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는 박해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물 위에서 화려하게 움직이는 백조를 보지만 물 밑에서는 헤엄치기 위해서 부단히 움직이는 백조의 다리가 있습니다. 예전에 성전을 신축할 때입니다. 본당 신부님의 강론과 추진력이 성전 신축의 기반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폐지를 모아서, 빈병을 팔아서 신축금을 내셨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신축 현장에서 나무에 박힌 못을 모두 빼서 모아 자재를 아꼈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돌아가며 야밤을 서면서 자재를 지켰던 교우들의 정성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곧 사순시기를 맞이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허구일 뿐입니다. 부활이 없는 십자가는 고통일 뿐입니다. 십자가라는 뿌리 위에 부활이라는 꽃이 피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꿈꾸던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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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하신다(3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를 못했다. 그들은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투었다(34절).
우리는 허영심을 버려야 한다. 오히려 단순함과 정직함으로 공동체를 이끌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자신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보다 더 낮은 존재로 봉사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이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이 길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교회에서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봉사자와 지도자들은 이 사랑의 봉사를 통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지금 내가 하는 일들 모두가 바로 더욱 많은 사람을 위하여 섬기고 봉사하도록 초대하는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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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가장 큰 사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세 번씩이나 예고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이고, 제자들이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도록 그들을 미리 준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자들 쪽에서 생각하면, 우선 먼저 마음의 준비를 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단계적으로 믿음과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월 21일의 복음 말씀은, ‘두 번째 예고 말씀’과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현세적인 생각만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만난 여러 가지 걸림돌들을 극복해야만 했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부터 사도로 ‘완성’된 사람들이 아니라, 큰 노력으로 그 완성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렇게 노력하는 과정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인으로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긴 시간 동안 노력하고, 또 노력해서 신앙의 완성에 도달하는 사람입니다. 언제 어떻게 도달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지만, 과정 자체를 면제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0-32)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부활 예고’를 겸한 말씀입니다. 사실은 ‘부활’을 더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고, 하느님이 아니라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는 자들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요한 8,44ㄱ)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돌아가신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니라, 악마와 그것의 추종자들이 한 일입니다.
물론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하느님의 섭리’ 안에 있기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도 하느님의 뜻이라고 표현하긴 하는데, 하느님의 진짜 뜻은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부활과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로써 죽음의 세력을 멸망시키신 분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시련’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거나 신앙생활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그런 일들을 잘 극복해서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태 10,23) ‘시련’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 아닙니다. 우리가 고난과 시련들을 극복하려고 애를 쓸 때 우리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시는 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입니다. ‘시련’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는 표현도 좋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과 시련을 만나든지 간에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하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는 말은, 그들이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들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부활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희생일 뿐입니다.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을 때 제자들의 모습과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을 때의 그들의 모습은 확실히 다릅니다. 그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새롭게 변화된 것은 부활 신앙 덕분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가장 큰(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을 했다는 것은(마르 9,34), 그들 안에서의 서열이 정리되어 있지 않았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제자들 모두가 각자 자기가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고작 열두 명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그들의 욕심은 겨우 열두 명밖에 안 되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되려는 욕심이었습니다(마르 10,37).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첫째가 되려고 하지 말고, 꼴찌가 되려고 노력하여라.” 즉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여라.”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하느님 나라는) 스스로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 예수님처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고, 하느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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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제1독서는 아름다운 집회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우리 가운데 누가 주님을 섬기려는 마음을 가지고자 할 때, 주님께서 우리가 바라는 것을 오십 배 백 배로 풍성하게 베풀어 주시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 삶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집회서의 말씀을 들어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여기서 ‘시련’은 우리에게 좋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가장 값진 은총을 받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그러면서 집회서는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참고 견뎌야 한다며, 금이 불로 단련되듯이 주님께 맞갖은 이들도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시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집회서의 저자는 그때마다 “그분을 믿어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하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그리고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줍니다.
오늘 복음은 이와 관련하여 좀 더 명확한 가르침을 전합니다. 시련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혼란이나 망설임을 되풀이하지 않으며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중반부 이후에는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은지를 놓고 다투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리에 앉으셔서 그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습니다.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오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제자들이 당신 곁을 떠나 있다고 느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시련 가운데서도 당신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라십니다.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길은 신앙의 참기쁨을 얻는 길이지만 십자가의 길이고 시련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우리가 주님의 길을 올바로 걷고 있다는 분명한 표징입니다. 시련을 겪을 때에도 언제나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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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무슨 의미인지 그분께 묻는 것조차 두려워합니다.
그때까지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 곧 적통 왕손이자 메시아라는 생각만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왕궁이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께서 왕좌에 앉으실 것이고 본인들은 부귀영화를 누리리라고 꿈꾸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곧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 다투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그런 생각을 모르지 않으셨지만, 그 기회에 누가 큰 사람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는 작고 겸손함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어린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며 그들을 당신의 여정에 동참시키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하여 있습니다.
우리도 영광받으신 주님만을 바라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 영광은 고통스러운 수난과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어졌는데도, 힘든 십자가는 여전히 외면하고만 싶어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행복과 기쁨만을 주셔야 하는 분이시고, 닥쳐올 모든 어려움을 비켜 가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참신앙은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임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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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거룩한구속주회 이정호 요아킴 신부님]
<모든 이의 종>
필리핀에 있는 저희 수도회 공동체를 방문하였을 때 90세가 넘으신 아일랜드 신부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하시다가 연세가 들어 이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이 드십니다. 거기에 치매 증상도 있어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온종일 휠체어에 앉아 수도원 복도를 오가는 수사님들과 신자들이 신부님께 인사하면 그 모두를 반갑게 받아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짧은 대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실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고 간호하는 이가 항상 옆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처지였지만 신부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주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치매 때문에 매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이들(사실 매일 보는 얼굴이긴 하지만)에게 눈짓 하나 짧은 말 한마디를 통해 인자롭고 따스한 마음을 건네주고자 애쓰는 노 신부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을 개종시키고 성사를 주고 큰 성과를 올린 이들에 비하면 그분은 무력하고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모든 기억을 잃어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그분의 마음에 남아 몸소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등 선교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희생의 크기로 우리를 윗자리에 앉혀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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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고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파견하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받아들이다."라는 동사를 여러 번 사용하셨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 되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3,16-17) 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 불행의 시작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 기준을 두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뱀은 하와에게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3,5)라는 말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 대신 뱀의 말을 받아들여서 열매를 따 먹었다.
받아들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기준을 두고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아담과 하와처럼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받아들임의 기준을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다."라는 심각한 말을 듣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자기들의 문제를 갖고 논쟁하였는가?
그 이유는 첫째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제자들의 관심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받아들인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는 것의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선택의 기준을 두고 있다. 즉 이것을 받아들이므로서 나에게 이익이 오는가 아니면 손해를 보게 되는가를 보고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를 결정한다.
우리가 실수하지 않고 잘 받아들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라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데에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높은 감투자리 하나라도 확보해야하겠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자리다툼을 하게 만들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논쟁이나 하는 제자들을 불러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해주셨다.
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린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다. 어린이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는 부모가 사랑해주고 베풀어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그런 것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는 절대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존재요, 타자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성장하려면 예수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제자들도 당신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올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방식대로가 아닌 어린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성숙해질 수 있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런데 그동안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건만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 끼로 서로 논쟁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려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신 것이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껴안으신다"는 것은 제자들도 당신이 어린이를 껴안으신 것처럼 그렇게 당신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온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안으라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건성 듣지 말고 마음으로 끌어안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이다.
어린이를 껴안으려면 어린이만큼 낮아져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모든 이를 끌어안는 사람이다. 모든 이를 끌어안으려면 모든 이들보다 낮아져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어린이는 순진하다는 특징도 있지만 생각이 미숙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어린이를 데려다가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모든 이들이 보라는 듯이 어린이를 안으시는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이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 안으시는 행위는 소외되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주었듯이 이제부터 너희들도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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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자리>
마르코 9,30-37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다, 가장 큰 사람)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 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가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의 자리>
굳이 오르려 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내려가려 하지 않겠습니다
위에 있는 이 받치고
아래 있는 이 끌어올리는
지금여기 나 있어야 할 자리니까요
오르려는 것도 욕심이요
내려가려는 것도 욕심이니
이 욕심 미련 없이 버리고
나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굳이 맨 앞에 서려 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맨 뒤에 서려 하지 않겠습니다
앞선 이 밀어주고
뒤진 이 이끄는
지금여기 나 있어야 할 자리니까요
앞서려는 것도 욕심이요
뒤서려는 것도 욕심이니
이 욕심 미련 없이 버리고
나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굳이 커지려 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작아지려 하지 않겠습니다
큰 이 우러르며
작은 이 품는
지금여기 나 있어야 할 자리니까요
커지려는 것도 욕심이요
작아지려는 것도 욕심이니
이 욕심 미련 없이 버리고
나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굳이 있으려 하지 않겠습니다
굳이 사라지려 하지 않겠습니다
나 있음에 빛나고
나 사라짐에 아름다운
때와 곳 나 있어야 할 자리니까요
있으려는 것도 욕심이요
사라지려는 것도 욕심이니
이 욕심 미련 없이 버리고
나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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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서로 섬기는 사랑>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 너머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면서도 예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으니 예수님께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살펴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복음적인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고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속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서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다 퍼 주고도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것입니다. 성당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나의 친절한 말이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까요? 우리 모두는 서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의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의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주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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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강의 시간이 남아서 근처 식당에 들어가 식사했는데, 그때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이 식당이 맛집으로 유명한 곳인지 식사 때도 아닌 데도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습니다. ‘잘 들어왔다.’라고 생각하며, 메뉴 중에서 ‘설렁탕’을 주문했습니다.
잠시 후에 음식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주문한 설렁탕이 아닌 뼈다귀해장국을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입니다. 주문서를 확인해보니, 분명히 설렁탕입니다. 그래서 주문한 음식이 잘못 왔다고 종업원을 부르려 했습니다.
하지만 식당 홀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직원들을 보니 미안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로 인해 불편함을 겪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냥 뼈다귀해장국을 먹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내가 직원까지 이렇게 배려한 거야.’라면서 말입니다. 잠시 뒤, 화난 목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뼈다귀해장국을 시켰는데 왜 설렁탕을 가져다줬냐는 소리였습니다. 맞습니다. 음식 전달이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배려한다고 그냥 먹었지만(이미 두 숟가락 먹었습니다), 처음에 미리 직원에게 이야기했다면 손님을 화나게 할 일도 없었고 직원이 혼날 일도 없었겠지요. 너무나 미안한 마음이었고, 불편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자기 생각이, 또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도 결코 완벽할 수 없습니다. 종종 자신이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배려했는데 자기에게 이럴 수 있냐면서 화내는 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생각과 배려가 남을 곤란하게 하고,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주님께서 말씀하신 겸손의 삶이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해 듣게 되었고, 또 그 나라의 영광이 얼마나 큰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했습니다. 세상에서의 첫째 자리의 영광처럼, 하늘나라에서도 첫째 자리의 영광은 떵떵거리면서 남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 논쟁하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아오스딩 성인께서는 이를 나무에 비유하셨습니다.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야 하기 위해서는 뿌리를 깊숙이 내려야 하는 것처럼, 겸손의 뿌리를 깊숙하게 내려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첫째 자리를 욕심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겸손의 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부족해 보이는 어린이까지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겸손의 뿌리를 깊숙하게 내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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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세상의 꼴찌, 천국의 첫째>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이 말씀은 첫째가 되기 위해 작전상 꼴찌가 되라는 말씀일까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잠시 패자가 되라는 그런 맥락에서 말입니다.
그런 맥락이라면 주님의 가르침답지 않고 결코 그런 뜻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것이라면 이 세상에서의 첫째와 꼴찌 얘기지요.
그러나 제 생각에 주님 말씀의 뜻은 이 세상에서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서 꼴찌고, 사람들 가운데서 첫째는 하느님 앞에서 꼴찌라는 뜻일 겁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꼴찌가 되라! 이 말씀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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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
-지혜 훈련의 달인 그리스도 예수님-
“주님께 네 길을 맡겨라.
그분이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내일 2월22일은 재의 수요일로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이제 바야흐로 지혜 훈련의 시기가 시작된 듯 합니다. 지혜 역시 훈련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은 얼마나 지혜의 훈련이 잘 된 분인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그대로 지혜 훈련의 달인이자 하느님의 지혜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집회서의 내용은 지혜에 대한 가르침을 모아 놓은 듯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익힌 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주님을 경외함”이란 소주제로 전개되는 사순시기를 앞둔 우리에게도 참 적절한 지혜로운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중심의 삶에 적절한 지혜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주옥같은 내용이라 전문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얘야(My child)”로 시작되는 말씀이 우리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하는 듯 합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 날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주님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원하신다.”(집회2,1-11)
사순시기 지혜의 훈련 내용이 참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 자체가 지혜로운 삶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두고, 그분의 자비를 기다립니다. 사실 제 주변에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악조건 속에서도 저를 부끄럽게 하는 이런 지혜의 훈련에 철저한 이들이 꽤 많습니다.
철저히 주님 중심의 삶에 전력투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대로 치열한 지혜 훈련, 지혜 추구의 삶입니다. 예수님 몸소 지혜 훈련의 달인으로서 그 모범을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십니다. 말 그대로 오합지졸, 동상이몽의 제자들 공동체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의 공동체 삶이 얼마나 어려우셨겠나 능히 짐작이 갑니다.
수난과 부활을 두 번째로 예고하시는 예수님의 내면은 많이도 착잡하셨겠지만 얼마나 믿음과 인내, 희망의 내적 훈련이 잘되셨는지 전혀 동요함이 없이 지극히 침착하게 가르치십니다. 이런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철부지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을 벌입니다.
제자들에게 포착되는 바, 경청의 자세가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청은 제자들의 기본자세입니다. 경청해야 순종할 수 있고 비로소 배울 수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 말씀을 마음 깊이 경청했더라면 경솔, 경박하게 누가 크냐는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청과 겸손은 함께 갑니다. 주님은 이어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참 영성의 잣대요,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첫째가는 제자가 되려하는 자는 꼴찌가, 섬김의 종이,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과 섬김의, 겸손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만 있을 뿐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어원도 같습니다. 참으로 주 예수님을 닮아 종이 되어 섬김의 영성을 살아가는 겸손한 이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종들의 종”으로 정의한 교황에 대한 그레고리오 대종의 언급도 적절합니다. 참 향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감동을 주는 사람이 종과 섬김의 영성에 투철한 겸손한 사람이겠습니다.
경청과 겸손에 이어 환대입니다. 참으로 경청과 겸손, 환대의 훈련은 그대로 지혜의 훈련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어린이 하나를 껴안으시시며 환대에 관한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는 천진무구한 그런 어린이가 아니라 약하고 병들고 불쌍하고 측은하고 가련한 주변으로 밀려난 소외된 인간 존재를 상징합니다. 성서의 언어로 하느님께만 희망을 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anawim)”을 상징합니다.
바로 이런 아나뵘의 노래 모음집이 우리가 매일 기도로 바치는 시편집입니다. 부단히 우리의 무딘 마음을 두드리며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의 아나뷤들입니다. 제 주변에도 도움을 청하는 이들이 자주 있지만 제대로, 제때에 응답하지 못해 강론 쓰는 지금도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로 이런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로 상징되는 가난한 이들을 환대함이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말씀입니다. 바로 친히 가난한 이들의 배경이 되시면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예수님이요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지혜의 훈련에 환대의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가르침도 규칙에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사순시기 만반의 준비를 하시고 하루하루 날마다 영성훈련, 지혜의 훈련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지혜의 훈련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시편37,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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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첫째가 되는 길!>
오늘 복음(마르9,30-37)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와 '가장 큰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또 다시 예고하시는데, 부활의 절대적 전제인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인지, 곧 예수님의 수제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문제로 논쟁을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마르9,32)
'제자들의 몰이해'와 '자리다툼하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보여 주듯이, 신앙의 본질이요 핵심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머리로 알아듣고, 삶으로 살아낸다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알면서도 예수님처럼 죽기는 싫고, 영광만 누리려는 모습은 아닌지? 그리고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는 나의 모습은 아닌지?
예수님은 모든 이의 꼴찌가 되셨고,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 결정적 표지가 바로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 잡은 '십자가 고상'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의 눈에는 그 십자가가 꼴찌의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뒤에 숨어 있는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써 첫째가 된 승리의 표지입니다.
누구나 첫째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중에서도 믿는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가 아니라, 죽음 저 너머의 세상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입니다. 거기에서 첫째가 되려면, 확실하게 본을 보여주신 예수님처럼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신앙고백을 해야 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갈라6,14)
낮춤(겸손)과 비움과 내려놓음의 모습인 '죽음으로' 이제와 영원히 첫째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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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N_s1OIYth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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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 35)
예수님께
닿는 길은
언제나
섬기는 길입니다.
다시 한 번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배우게 됩니다.
묶여 있던 것을
푸는 방법은
오히려 우리가
아래로 내려와
섬기는 것이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삶의 깊은 맛은
바로
섬기는 맛입니다.
섬기는 사람은
자아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섬기는 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방치했던
우리 마음이
십자가로
다시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사람을
피할 수 없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피할 순 없습니다.
십자가는
경고등이 되어
우리의 모진
자아를 꺾어
놓습니다.
나눔과 섬김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향해
있습니다.
섬기면 비로소
보이게 되는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삶은
섬기는 삶뿐입니다.
변두리까지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섬기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빛이 됩니다.
빛이 되는
오늘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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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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