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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 : 29명 = 12남 17녀 .... 제3대 태종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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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으로 더 잘 알려진 태종 임금이 공식 기록상으로 1위에 해당한다.
이성계 8남 2녀 중의 5남으로 태어난 이방원은 뛰어난 모험가이며 정치가이기도 하다. 이방원은 위화도 회군 이후 갑자기 절대 권력자로 승격된 자기 아버지 이성계가 병석에 드러 누워 아플 때마다 꼭 대형사고를 치곤 했다.
이성계 장군이 말에서 떨어져 다쳤을 때는 문병 왔다 돌아가는 정몽주 아저씨를 따라 가서 철퇴를 휘둘러 선죽교에 핏자국을 남겼고...
그래서 아버지 이성계를 임금 시켜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성계가 배 다른 동생을 세자로 책봉하자 속으로만 불만을 삭히고 있다가...
어느 날 임금님이 노환으로 병석에 드러 누워 골골하자 하룻밤 사이에 배 다른 동생 방번과 방석을 한꺼번에 죽여 버리는 대형 사고를 쳤다.(1차 왕자의 난)
돌아가실 줄 알았던 아버지 이성계의 병세가 다시 회복되자 아버지까지 임금 자리에서 끌어 내렸던 그 엄청난 모험가가 바로 태종임금 이방원이다.
정치적으로 욕심이 많았던 태종 이방원은 왕실이 번성해야 왕실이 안정된다고 굳게 믿었던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12명의 부인에게서 29명의 자녀를 생산해 내었다.
첫 부인 원경왕후 민씨가 낳은 자식만 해도 4남 4녀인데, 양녕, 효녕, 충녕, 성녕대군에다 정순, 경정, 경안, 정선공주 등이 모두 같은 배에서 나왔다. 원래 태종은 첫 부인의 막내 성녕대군을 가장 총애하였으나, 성녕이 허약하여 일찍 죽어 버리자, 태종의 사랑은 셋째인 충녕대군에게로 옮겨 갔다.
세자로 있던 양녕대군이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큰아빠, 작은 아빠들이 죽어 나가는 꼴을 보고서는 자신의 대에서는 절대 저런 골육상쟁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래서 그 때부터 일부러 타락한 척 하면서 세자 자리에서 쫓겨 나려고 애썼고, 그걸 본 동생 효녕대군도 탈정치에 뜻을 같이 하였는데, 형이랑 똑같이 난봉꾼 방면으로 나갈 수는 없어서 우아하게 입산수도해서 스님이 되겠다고 했다.
그래서 이 두 형님들 덕분에 철없는 셋째 충녕대군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임금이 되어 버렸는데, 그 사람이 바로 세종대왕이라 하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근데 기껏 힘들여 임금 시켜 놓은 이 세종대왕이란 녀석이 여자를 너무 좋아 해서인지, 원래 몸이 약해서인지 몰라도 불과 54세의 나이로 제일 먼저 죽어 버렸다. 플레이보이 큰 형 양녕대군은 67세까지, 스님으로 간 둘째 형 효녕대군은 91세까지 살았는데, 셋째가 제일 먼저 죽어 버린 것이다.
동생 세종이 죽은 이후에 조카인 문종도 잇달아 죽어 버리더니 글자도 잘 모르는 12살 짜리 어린 단종이 나와서 정치를 한단다. 글자를 잘 아는 황보인과 김종서가 결재서류에다 노란 점을 찍어 주면 어린 단종은 그 위에다 결재를 해 주는 소위 “황점정치(黃點政治)”란 것이 이루어졌다.
그 모습이 하도 한심하여 조카 수양대군을 불러서 “아무래도 네가 좀 도와 줘야겠다”라고 했더니, 그게 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 버려서 단종을 쫓아 내 버리는 제2의 골육상쟁으로 발전하였다.
자신의 대에서 골육상쟁이 보기 싫어서 임금 자리를 마다 한 것인데 양녕대군은 늘그막에 자신의 조카들이 벌이는 또 하나의 골육상쟁을 보게 되었다.
이 때 양녕대군은 “이게 셋째가 저리 빨리 갈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임금 하고 말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다. 어쨌든 29명의 장남 노릇 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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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 : 28명 = 12남 16녀 .... 제9대 성종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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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임금 중 자식 많이 낳은 두 번째의 임금은 성종임금이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인수대비의 과잉보호 밑에서 자란 성종임금은 조선시대 임금 중에서 가장 여자를 좋아 하였다.
공식적으로는 부인 12명에 28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워낙 여자를 좋아 하다 보니 임금이 사복을 입고 개구멍으로 궁중을 빠져 나가 외박을 하고 들어오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기생은 그 많은 후궁 중의 한 명으로 등록되는 것이 싫어서 밤에 몰래 찾아 온 성종임금에게 “임금 자격으로 왔으면 안 되고, 그냥 이씨 선비로 왔다 하면 만나 주겠다” 하여, 임금이 그냥 보통 선비 자격으로 기생 집에서 놀고 간 사례도 있다고 한다.
성종임금이 바깥에 뿌려 놓은 씨까지 합치면 자녀 수가 100명은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 이런 비공식 기록까지 합치면 자녀 많이 둔 실제 1위는 성종임금이 된다.
연산군을 낳은 왕비 윤씨는 이 바람끼 많은 성종임금과 자주 언쟁을 하여 임금님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낸 적이 있는데, 이 일로 결국은 폐비가 되고 사약까지 받게 된다.
어린 연산군은 자신이 임금 된 뒤 10년이 지나서야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궁중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다. 이 모두가 성종임금의 바람끼가 낳은 후유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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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 : 25명 = 14남 11녀 .... 제14대 선조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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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이리저리 쫓겨 다니면서도 자식 만드는 일 만큼은 게을리 하지 않았다. 8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이나 낳았다.
첫 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자식이 없어 일찍 죽은 공빈 김씨의 두 아들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데려다 길렀는데, 둘째 광해군이 더 똑똑하여 세자로 책봉하였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선조임금이 압록강으로 도망 갔을 때에는 세자 광해군이 임금대행 업무를 다 했다. 난리가 끝나고 선조가 임금으로 복직하고 왕비가 먼저 세상을 뜨면서 사태가 좀 복잡해졌다.
젊은 새 부인 인목왕후가 들어와서 영창대군을 낳아 버리는 통에 새 엄마보다 나이가 10살이나 많은 세자 광해군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나중에 광해군이 임금이 되기는 되었으나, 주변 인물들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어린 동생 영창대군이 죽게 되고.... 급기야는 광해군은 쫓겨 나게 된다.
노련한 외교술로 나라를 지켜 왔던 광해군이 밀려 나자, 그 다음 임금 인조는 서투른 외교술로 결국은 병자호란을 자초하게 되어 나라는 또 한번 난리에 휩싸이게 된다.
다음 임금으로 추대된 인조는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 소생 4남 5녀 중 셋째인 정원군의 아들로서 아마 반정 세력들이 볼 때에는 제일 데리고 놀기 좋았던 모양이다.
큰 나라에 대항할 힘도 없으면서 공연히 입만 살아 가지고 “오랑캐... 나쁜 놈들” 이라 중얼중얼거리다가 큰 나라의 성질을 공연히 건드려서 나라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어쨌든 선조 임금이 뒤늦게 제1부인을 다시 두는 통에그 이후의 사건이 좀 복잡해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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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 23명 = 15남 8녀 .... 제2대 정종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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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기간이 불과 2년 2개월 동안에 그친 정종 임금, 8명의 부인에 23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지런히 많이 낳기도 낳았다.
애초에 임금 자리에 뜻도 없었다... 동생 이방원에 떠밀려 임금이 되기는 했지만 그 자리는 가시 방석이었다. 어차피 정치는 동생이 하는 것이고 나는 아이나 부지런히 만들자... 정말 그랬던 것일까?
다행히 동생 이방원이 조속한 시일 내에 잠시 맡겨 두었던 임금 자리를 가져 갔고.... 덕분에 정종이 낳은 23명의 자녀들은 권력다툼의 소용돌이에서 멀리 비켜 나갈 수 있었다.
아마도 20명 이상의 왕자님, 공주님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골육상쟁을 하지 않은 가족일 것이다. 권력과 야심을 버리면 이렇게 온전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는 것을 사람들은 왜 모르고 있었을까...
---죽을 때 죽더라도 그래도 한 번 해보고 죽는 것이 더 좋다구요?
---그럼, 한번 죽어 보시지요. 이 때까지 확률상으로 성공보다 실패의 경우가 더 많으니... 만약을 대비하여 미리 명복을 빌어 줄테니 마음 놓고 권력 다툼 속으로 한번 들어 가 보시오.. 잉...
어쨌든 정종 임금은 조선 임금 중에서 가장 행복한 임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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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 22명 = 18남 4녀 .... 제4대 세종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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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도 모르고 형들 덕분에 임금이 된 세종, 6명의 부인에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숫자로만 치면 역대 임금 중 챔피언이다. (물론 성종임금의 비공식 기록은 포함하지 않고 말이다)
세종이 요즈음 가장 존경받는 임금으로 “세종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리우는 것에는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으나.... 아들 낳는 능력이 가장 탁월하다는 점도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세종대왕이 요즈음 한국조폐공사에서 발행하는 화폐 중에서 가장 비싼 10,000원 짜리 지폐의 전속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는 점 정도이다.
세종대왕이 여자를 좋아 하니까 장남인 문종도 여자를 무지무지 좋아했다.
장남인 문종은 세자 시절부터 여자를 너무 좋아 하여 세자빈과도 잘 놀아 주질 않아서, 세자빈이 화풀이로 동성연애를 하다가 주위 사람에게 들켜서 궁중에서 쫓겨 나기도 했다. 세종은 문종이 임금 되기도 전에 세자빈을 두 번이나 갈아 치웠다.
여자를 좋아 했던 문종은 몸도 약하여 일찍 세상을 떴다. 덕분에 12살 짜리 어린 단종이 엄청 고생을 하다가 강원도 영월까지 쫓겨 가서 죽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
뭐든 자기 능력에 맞게 분수에 맞게 할 일이다. 왜 일찍 죽어 가지고 자식을 고생 시킨담? 그런 의미에서 세종대왕도 문종도 모두 문제가 있다.
(출처 : '세종이 아들 낳는 전문가'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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