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갈라티아 5,18-25 루카 11,42-46
어느 잡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매번 음반 제작 제의를 퇴짜 맞던 무명 가수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한 음반사에서 거절당하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데, 허리가 굽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인이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노인의 행색이 안타까워 청년은 얼른 노인을 부축하였습니다.
낑낑거리며 길을 다 건널 무렵, 노인이 웃으면서 물었습니다.
“어떤가, 기분이 좀 나아졌나?”
청년은 어리둥절하였지만 솔직하게
“네, 조금 나아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노인이 굽은 허리를 쭉 펴고 똑바로 섰습니다.
청년이 깜짝 놀라자 노인이 말하였습니다.
“사실 나는 아주 건강하지만 근심이 가득한 자네 얼굴을 보고 잠깐 연기했지.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때 한결 기분이 나아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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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언제 찾아올까요?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게 아쉬운 것이 다 채워진다고 행복이 찾아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니, 행복이란 ‘나’ 자신만 잘살고,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갈 때
찾아오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불행하여라.”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자기 몫만 챙길 줄 알고, 자기 명예와 안위만 챙길 줄 알았지
다른 사람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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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갈라티아 5,18-25 루카 11,42-46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은 당대 유다 백성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할 것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불행을 선언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오늘 복음에 따르면, 그들은 십일조의 세세한 규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것에는 혈안이
되어 있지만, 정작 그 규정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구현해 내야 할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회당이나 잔치에서는 언제나 윗자리를 차지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즐기며 언제나 높은 사람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신을 봉분 없이 평평하게 매장하고서
어떤 표식도 해 놓지 않은 그런 무덤을 뜻하는데, 그것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거나 접촉한
유다인들이 결국 부정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민수 19,16 참조).
성화의 직무자들이 오히려 자신의 더러움으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서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는다고
비판받습니다. 지켜야 할 세부 규정들을 잔뜩 만들어 놓고서, 정작 사람들이 그 규정들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지원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판은 시대를 넘어,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서 활동하는 지도자들을 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며 높은 자리를 탐하는 욕구, 계명이나 규정의 본질을
망각한 채 형식적 준수만을 강조하는 태도,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경건함을 가장하는 태도,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의 고충과 힘겨움을 외면하는 태도에 이르기까지.
만일 이런 모습들이 우리에게도 있다면, 예수님께서 불행하다고 선언하신 그들 못지않게
우리 또한 매우 불행한 사람일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합시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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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갈라티아 5,18-25 루카 11,42-46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며칠 전부터 이가 시리는 증상이 있었습니다. 차가운 물을 마셔도 이가 시리고, 가만히 있어도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서 치과엘 갔습니다. 사진을 찍어보니 이의 뿌리가 약했습니다.
미세하게 금이 갔습니다. 신경치료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뿌리가 약하니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60년 동안 잘 견뎌준 이가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수고 했으니 이제 치과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합니다. 문득 나의 영적인 상태를 생각합니다. 기초가 약한 곳이 아팠던 것처럼
악의 세력은 영적으로 부족한 부분으로 들어옵니다.
저의 부족함은 ‘우유부단(優柔不斷)’함에 있습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은 장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유부단한 성격은
단점일 수 있습니다. 모든 이가 부족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오지랖이 넓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우유부단과 반대되는 말로는 ‘직정경행(直情徑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감정의 충동대로 전후를 생각하지 않고 솔직하게 행한다는 뜻입니다.
일본은 이러한 성격을 받아들여서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사람들에겐 '직정경행'은 긍정적으로 사용되어 내 맘에 들지 않으면 목을 베어도 괜찮다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그 사고방식이 면면히 흐르다 보니 저울질도 해 보지 않고
미국과 싸움을 꺼린다는 것은 악으로 보고 하와이의 진주만(灣)을 선전포고도 없이
비굴하게 공습해 멸망을 자초하기도 했습니다.
감정에 충실한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앞과 뒤를 가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십자가를 지신다니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대로 예수님께 이야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우유부단한 것도 고칠 필요가 있지만 감정을 있는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중용(Indifferentia)'을 강조하였습니다. 우유부단과
직정경행의 중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장점과 단점의 중간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용이란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한 것보
다 가난한 것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심에 응답을 주저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진다.” 결정했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같이 기도하도록 권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 결국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는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유부단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직정경행한 것이 불행의 씨앗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우유부단할지라도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직정경행할지라도 신속한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따르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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