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통공의 현실; 메시아의 분노와 사도의 아픔
로마 9,1-5; 루카 14,1-6 /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2023.11.3; 이기우 신부
위령성월을 맞아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는 계시 진리를 위령성월 첫 날에 묵상했고, 이어서 믿는 이들이 죽은 이들과 어떻게 통공할 수 있는지를 둘째 날에 묵상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통공의 진리가 신앙 계시 안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의미와 위치를 확인하면서, 통공의 상대는 모두 하느님과 수직적으로 통공하는 존재들인 성인들인데 첫째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성인 성녀들이시요, 둘째는 교회로부터 시복 시성이 되셨으나 신자들의 세례명으로 호출되지 못한 수많은 성인 성녀들이며, 셋째는 비록 공식 교회로부터 시복 시성이 되지는 못했어도 무명치명자들과 입술배교자들을 비롯하여 의롭고 거룩하게 살다 가신 더 많은 성도들이고, 넷째는 설사 현세에서 흠 있고 허물 많은 생을 마치기는 했으나 세례를 받고 그 지향대로 열심히 살다 가신 선배 신앙인들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부류의 ‘성인들’과 이루는 수직적 통공의 행위는 현재 동시대를 함께 살면서 의롭고 거룩한, 같은 지향으로 살고 있는 이들과 수평적 연대를 이루어야 하는 이들도 넓은 범위에서는 통공의 범주에 넣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죽은 이들과 믿는 이들이 통공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공로를 계승하고, 그들의 허물을 대신 보속하며, 이 계승과 보속의 행위를 더 좋은 방식과 더 좋은 기회를 선용해서 실천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위령성월 셋째 날인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어이없게도, 예수님과는 피를 나눈 혈족이자 대대로 하느님을 믿어온 신앙인들인 유다인들이자 더군다나 하느님의 율법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고 자부해 온 바리사이들 사이에서 전혀 통공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반(反)통공의 현실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 분노를 느끼셔야 했던 이야기와 함께 사도 바오로의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는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죽은 이들과도 통공을 해야 하는 터에 산 이들과 도리어 통공을 이루지 못하는 반통공의 비극적인 현실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는 그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고정 관념을 지닌 바리사이 유다인들이 안식일 계명을 준수하는지 여부를 떠보려고 기껏 식사 자리에 초대해 놓고 당신 앞에 그네들이 데려다 놓은 수종병자를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그네들은 안식일이라면 그 어떠한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고, 수종병자처럼 극심한 고통을 앓고 있는 병자라 하더라도 안식일에는 절대로 치료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네들도 안식일에 아들이나 소가 물에 빠지면 구해주고 있었고, 무명의 영혼을 구해주는 할례 의식도 안식일에 버젓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수종병자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것도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서 치유해 주신다면 안식일 계명 위반으로 고발할 태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악행 탓으로 하느님과 끈이 완전히 끊어져 버렸습니다. 누구보다도 이 현실을 안타까워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신성모독죄로 죽여 버린 유다인 동포들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도 좋습니다”(로마 9,2-3).
하느님과 이루는 수직적 통공 위에 사람들과 이루는 수평적 연대가 통공에 관한 계시 진리일진대, 피를 나눈 혈족이나 신앙을 공유해 온 하느님 백성 안에서라면 이 통공과 연대는 더욱 자연스럽게 이룩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혈족인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들었던 데다가 또 실제로 사두가이들을 조종하고 로마 총독을 사주하여 죽여버렸습니다. 혈연은 물론 신앙의 인연조차도 통공의 진리에 역행하고 만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에서 발견되는 통공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족과 우리 교우들 사이의 통공은 만족스럽습니까? 우리 자신들은 하느님과 수직적인 통공을 이루고 있습니까? 하느님과 수직적으로 통공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개인적으로나 가정에서 기도생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수직적 통공은 처음부터 가로막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수직적 통공이 막혀 있으면, 수평적 연대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나 같은 신앙을 공유하는 교우라 하더라도 그러합니다. 반통공의 현실 앞에서 분노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을 느끼는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를 통해 묵상해 본 우리네 현실입니다. 하느님과 수직적인 통공이 되지 못하는 처지에서 바리사이 유다인들처럼 사람들의 현실에 공감하지 못한 채 그저 종교적 관행에만 집착한다면, 종교적 우상숭배 행태를 면치 못할 것이므로 예수님의 분노와 바오로의 아픔은 현재도 진행형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