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음력설날이니 이제 명실상부한 계묘년, 토끼의 해다. 설 명절이라고 딸, 사위, 손녀로부터
세배를 받았다. 벌써 40대 중반인 딸들 내외 나이가 수월찮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보냈던 그 시절
을 회상하면서 가볍기만 한 세뱃돈 봉투에 묵직한 덕담이라도 한 마디 보태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동안 해오던 “새해 복 많이 받아라.”는 너무 추상적 표현이라 현실감이 없다. ‘복’은 줄 능력도
없으면서 말로만 받으라하니 공수표로 들리기 십상이다. 오늘은 좀 다른 덕담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맹상군열전에 나오는 “교토삼굴(狡免三窟)”을 소환했다.
“풍훤은 제(齊)나라 재상 맹상군의 식객이었다. 재상은 설이라는 땅의 식읍에서 돈놀이를 했
다. 백성들이 제때 빚을 갚지 않자 누구를 보내 독촉할까 궁리하다 풍훤이 자청하자 탐탁지 않았
지만 그를 보내기로 했다. 그가 물었다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 올까요?’ ‘여기 부족한 것을 사오게’
풍훤은 설읍에 도착 후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 더미를 불구덩이에 던져 버렸다. ‘재상 어르
신이 여러분들의 빚을 안 받기로 하셨소.’ 설읍 사람들 모두 감격했다. 풍훤이 돌아오자 맹상군이
물었다. ‘무엇을 사 왔나?’ ‘은혜와 의리를 사 왔습니다.’ 맹상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1년 후 맹상군이 재상직에서 쫓겨났다. 풍훤이 설읍에 내려가 잠시 있으라고 조언했다.
맹상군이 설읍에 도착하자 백성들이 양손을 들어 환호했다. 맹상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의리와 은혜를 샀다는 말의 뜻을 알겠소.’ 풍훤이 답했다. ‘꾀 많은 토끼는 구멍을 세 개나 뚫지요.
나머지 두 개의 굴도 만들어 드리지요.’”
여기서 유래된 말이 교토삼굴의 지혜다. 정년퇴직이 대세이던 시대는 사라진지 오래됐다. 한 가지
분야에서 우대받는 것만으로는 불안하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전문성과 다양성을 고루 갖춘
전문가가 각광받기 시작했다. 컴퓨터가 전공이지만 디자인 등에도 두루 전문성을 갖췄던 스티브
잡스나, 전기차가 전공이지만 우주항공 등에도 전문성을 갖춘 일론 머스크 등이 그들이다. 2010년
이후에는 기존의 전문분야 외에도 전문분야를 계속 확장해나가며 융복합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들
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제는 다직종, 엔잡러(여러 수를 의미하는 알파벳 ‘n'과 일을 의미하는
’job' 하는 사람을 뜻하는 ‘∼er’의 합성어로 두 개 이상의 직업과 소속을 지닌 사람이자 그런
형태를 일컫는다) 등으로 격변하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덕담에 열 살짜리 손녀가 “할아버지는 토끼띠세요?”라고 묻는다. “그래”라고 대답은 하면서, 굴3
개는커녕 한 개도 파놓지 못한 토끼띠 자신을 돌아보며 찔끔 했다. 역시 덕담은 말로 하는 것보다
실천으로 보여줄 때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새해에는 늦었지만 ‘글 쓰는 굴’ 한 개라도 제대로 만들
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첫댓글 친구들 계묘년 새해 좋은 일 함께 하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는 올해 무슨 덕담하나 더 맨더라볼꼬, 아이고!
아프지나 말자.
친구는 삼굴은 뚫어 놓은 것 같은데? 손녀가 예리하네.
가족이랑 즐겁게,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