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만 안젤로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에 선포되는 복음은 다른 제자 일흔두 명의 선발과 파견, 그들을 위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서 저자는 앞서 9장 1-6절에서 열두 제자의
파견을 다루었는데, 여기에서 되풀이하면서 이 두 이야기는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파견받는 이들을 향한 가르침에서 많은 공통 요소가 발견됩니다.
예수님께 선발된 일흔두 명은 ‘사도’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아포스톨로스’가 직접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보내다’ 또는 ‘파견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아포스텔로’는 일흔두 명을 ‘사도’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10,3 참조).
루카 복음 9장 13절에서 사도의 대상이 ‘열둘’에 한정되었다면,
여기에서는 ‘일흔둘’로 확대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파견된 제자들, 곧 사도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예를 들면, 군중)과 구별되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권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권한’ 또는 ‘권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엑수시아’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루카 복음 10장 19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일흔두 명의 사도에게 권한이 부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 권한을 받아
그분께서 보여 주신 것처럼 병자를 고쳐 주며 복음을 선포할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념하는 성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보여 주신
신비를 설교와 기록을 통하여 세상에 알리도록 루카를 선택하셨습니다(본기도 참조).
우리도 예수님의 ‘사도’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복음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사도로서 정체성을 확고하게 세워 나갑시다.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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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정민 베르나르도 교수님의 ‘다산과 연암’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산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격물치지는 흐트러진 것을 바르게 하면서
앎에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다산의 글은 그래서 늘 정갈하고, 정확했습니다.
다산의 대표작인 ‘목민심서(牧民心書)’는 관리가 행해야 할 책임과 사명을 제시하였습니다.
관리는 목민심서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추구하였습니다. 다산은 완벽함을 추구했기에 그를 따르는 사람은 창의적으로 먼가를
할 필요가 거의 없었습니다. 저도 다산과 같은 본당 신부님을 모신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은 신학, 문학, 음악, 건축, 언어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어떤 주제를 이야기하여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제게도 ‘팡세, 그리스 철학사, 예수’와 같은 책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산보도 늘 같은 시간에 정확하게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기에
좋았지만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져서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연암은 ‘갈 길과 요령’의 자세로 학문을 했고, 글을 썼다고 합니다. 다산이 조선이라는 ‘틀’에서
격물치지를 했다면 연암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의 ‘틀’에서 갈 길과 요령을 생각했습니다.
조선이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정책을 세운다면
위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암은 만주 벌판을 거닐면서 드디어 ‘울음’을 터트릴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첫울음’을 터트리는 것은 어머니의 자궁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듯이,
연암은 끝없이 이어지는 만주벌판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향해 한번 ‘울음’을 터트려도
좋겠다는 포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연암의 ‘열하일기, 호질, 허생전, 양반전’은 다산의 격물치지는 아니지만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판단한 자신의 생각을 요령껏 기록한 것입니다. 연암이 다산처럼 기록했다면 당시 조선의 법정에서
유죄판단을 받을 수 있고,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연암은 배고픈 이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연암에게는 박제가, 이덕무와 같은 창조적인 문하생들이 있었습니다.
글을 쓸 때에 다산의 ‘격물치지’와 연암의 ‘갈 길과 요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환상적인 작품이 나올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산의 격물치지를 따르기도 어렵고, 연암의 창조적인
갈 길과 요령을 배우기도 어렵습니다.
저 자신 매일 ‘묵상’을 나누지만 ‘갈 길’을 모르면 시간이 흘러도 글을 쓰기 힘들었습니다.
흐트러진 마음에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금이나마 흉내를 내려 할 뿐입니다.
오늘 교회는 ‘복음사가’ 루카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루카는 우리에게 두 개의 성서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루카 복음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입니다.
루카 복음이 우리에게 ‘갈 길과 요령’을 알려 준다면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격물치지’를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루카는 성령의 감도를 받아 글을 썼기에 ‘갈 길과 요령 그리고 격물치지’가
조화를 이룬 성서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에게 ‘갈 길’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요령’은 산상수훈의 가르침과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격물치지’는 겸손과 인내로 ‘칠죄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루카 복음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만남’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루카복음 1장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엘리사벳은 ‘은총이 가득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도시도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처럼 상대방을 축복하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하고,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루카복음 23장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시고,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엠마오입니다. 구원은 어느 곳을 향한 여정과 목적지가 아닙니다.
구원은 지금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주님의 말씀을 충실히 따르고, 주님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그것이 바로 순례이고, 그것이 바로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모든 만남이 지향하는 곳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 축복과 은총,
사랑과 기쁨이 시작됩니다. 십자가의 끝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길도 감사하면서 받아들였습니다.
오늘 나의 삶에 주어지는 ‘십자가’ 그것은 바로 은총의 길, 구원의 길입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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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승현 베드로 신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2티모테오 4,10-17ㄴ 루카 10,1-9
파견된 제자로서 내가 받아들여야 할 가난과 불편함은 무엇인가요?
루카 복음 10장 1-9절
“하느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가까이 왔습니다.”
파견된 이들의 삶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고장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그럼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라는 거지? 이곳저곳을 어떻게
돌아다니라는 거야’ 하며 선뜻 이해되지 않는 그 말씀에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스승의 삶을 아는 제자라면 곧 이 말씀 안에 담긴 예수님의 깊은 뜻을 바로 알아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목적은 우리 가운데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자신이 가진 노하우를 하나 전수해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철저한 가난이었던 것이죠.
그것은 곧 예수님 스스로가 지켜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셨지만 인간의 약함을 취해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셨고
인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시면서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함께 계심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삶의 궁핍과 불편함 안에서도 기쁘게 하느님 나라를 살아간다면
이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도 제자들 모습에서 희망을 얻어 하느님 나라로 하나둘
모여들지 않을까 생각하신 건 아닐까요.
그렇듯 우리가 체험한 복음을 우리 삶의 자리에서 살아나갈 때
하느님 나라는 이 땅 위에서 점점 확장될 것입니다.
성 바오로 수도회 강승현 베드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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