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영 베드로 신부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소 1,15-23 루카 12,8-12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고백하고 증언하는 것은 신앙인의 핵심 의무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른다고 하면 하늘 나라에서 주님께서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세상살이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언할 것인지 생각해 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박해 시대에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신앙 고백이 오히려 쉬울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순교자들의 입을 열어 주시고 고문의 고통을 이겨 내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교묘하게 신앙을 부인하는 풍토와 세속적 무감각의 시대에 하느님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는 것은
어렵기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증언하는 단순한 방법을 찾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현대인은 끊임없이 추구하는 욕망의 시대에 살기에 감사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빚으신 해와 달과 별들을 바라보며 찬미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느님을 증언하는 삶의 시작입니다. 우주 만물을 바라보며 창조 때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영과 함께 머무는 시간도 하느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1독서에서 영광의 하느님께서 신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마음이 밝아져서 그들이 받을 영광에 대한 희망이 커지도록
기원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신자들이 하느님께 받을 상속 재산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께 감사하고, 아주 사소한 것에서나 매우 커다란 성공에서나
똑같이 주님께 찬미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의 평범함에서 하느님을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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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소 1,15-23 루카 12,8-12
오늘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호자(‘파라클레토스’)라고 부르십니다(14,16 참조).
우리말 『성경』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였는데, 이 말은 본디 법정 용어입니다.
죄를 문책하는 검사와 맞서 죄인 옆에서 그를 대변하는 변호사를 일컫는 용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시어 우리가 세상의 법정에서 당당하게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비단 지상의 법정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우리가 서 있을 때도 성령께서는
우리의 변호인이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지 않도록,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대변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서 8,26).
그러니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을 모독한다면 우리 스스로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대에 홀로 남아 용서받기를 거부하는 꼴을 자초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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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에페소 1,15-23 루카 12,8-12
오늘 복음의 분위기를 보면, ‘사람들 앞에서’ 또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서’ 예수님을
당당하게 증언하거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 상황을 투영하는 단락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사의 기로에서 순교가 아니면 배교를 선택해야 하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이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또 다른 구절을 기억합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6).
예수님께서는 현재의 생사 문제를 넘어서는 종말론적 시각을 지니도록 촉구하십니다.
제자들이 현세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세상 끝 날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대하실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복음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와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대조하면서, 누구를 더 두려워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눈앞의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거나 그분을 부끄럽게 여기면,
종말에 있을 심판에 더 큰 공포와 두려움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를 모른다고 하시거나 부끄러워하시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박해 때문에 생사의 갈림길에 설 일도, 배교를 강요당하는 처지에 놓일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일상 가운데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야 할 경우가 때때로 생깁니다.
혹시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를 부끄러워할 때가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상황에 놓일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지 스스로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끄러워하면 그분께서도 우리를 부끄러워하실 것입니다.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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