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저무는 봄날
김 진 진
봄인가 싶더니 벌써 개나리의 푸른 새순들이 하나 둘 돋아나기 시작했다. 한창 벌어지기 시작한 목련들은 서러운 빛깔로 피어나고 봄날의 오후는 바람이 거칠기만 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평일의 호숫가는 그래서 약간은 썰렁한 느낌마저 든다. 서서히 연둣빛이 살아나는 경이로운 봄마다 마음한쪽이 적막해서 울적해지곤 한다.
그애가 아프기 시작한 건 4월 중순쯤이었다. 새 학기가 달 반 쯤 지난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지 싶다. 직장에 다니며 이미 결혼 말이 오가던 20대 후반의 큰언니와 대학 초년생인 오빠, 고등학교에 입학한 작은 언니, 나, 초등학교 입학 전의 여동생. 나이차가 너무 많은 우리 오남매의 일상은 격차가 심해서 그리 얼크러져 자라지는 못했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면 으레 손아래 여동생뿐이었다. 그러니 그애와 나는 매사에 유난히도 각별했던 모양이다.
오남매 중에 유독 어머니를 빼어 닮은 여동생은 동공이 커서 마치 잘 익은 머루알 같았다. 갓 나았을 때부터 어찌나 예쁘던지,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서로 경쟁이나 하듯 품에 안고 얼러 대기 일쑤였다. 갑자기 막내 자리를 빼앗긴 나는 그때마다 심통이 나서 할머니의 무릎으로 기어들곤 했다. 아들 하나에 줄줄이 딸만 낳아댄다는 할머니의 가시 박힌 언성이 문밖을 넘어가도 아버지를 많이 닮은 나를 그래도 귀여워는 했으니까.
산림청의 고급공무원이던 막내삼촌은 강원도 지역의 영림책임자였다. 효성이 남달라서 때때로 할머니께 강원도의 특산품들을 보내오곤 했다. 송이버섯이나 잣, 알맞게 잘라 말린 간식용 노루고기 같은 것들이었다. 그 중에는 산머루가 으뜸이어서 가을마다 나무궤짝에 가득 담겨 왔다. 새콤하고 단내가 진동하는 그것들을 구슬처럼 따들고 내가 곧잘 하는 짓이란 여동생의 눈언저리에 갖다 대고 “네 눈하고 똑 닮았어!”하면서 짓궂게 놀려대는 일이었다.
한창 배밀이를 할 때만 해도 그애의 타고난 운명이 그리 가혹하리라 누군들 짐작이나 해봤겠는가. 새순이 돋아나길 세 해쯤 되어서야 비로소 다들 머리를 갸웃거리기 시작했으니. 여름이어도 가을이어도 겨울을 나고도, 도무지 일어설 줄 모르는 그 천진한 것의 해맑음. 물정모르는 여린 것을 보면서 차츰 먹빛같이 흐려지던 어머니의 눈빛은 봄이 깃들고 새날이 푸르러도 시나브로 물빛만 가득했다. 마당 구석구석에 피어나던 갖가지 꽃들이 목줄을 놓아버린 후에도 그저 말없이 침울하기만 했다. 병원에 다녀 올 적마다 새벽 내내 아버지와 두런거리던 어머니의 근심어린 목소리, 그 깊은 한숨과 가녀린 울먹임들.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잠결에 번져가던 내 안의 이상한 슬픔들도 그렇게 해서 어렴풋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한 후, 여동생은 더욱 혼자가 되었다. 학교에 가 있는 한나절의 긴 기다림이 그애의 유일한 그리움이 되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대문을 밀고 들어와 마당을 건너 뛸 때면 어느 새 대청 끝까지 기어 나와 새까만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채 고개만 쳐들던 그 아이. 그때 난 왜, 어린것의 마음속에도 어른들이 알 수 없는 지독한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왜…….
그러면 그때부터 나는 공책들을 꺼내고 스케치북을 열고 크레용을 들쑤시고 하면서 그애 옆에 배를 깔고 누워 그날 배운 것들을 이것저것 모두 가르쳐 주었다. 대청 깊숙이 퍼져있던 투명한 햇살이 힘을 잃고 마당 가득 그늘이 넘칠 때까지. 굳이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니었는데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기 전 까지도 어떻게든 글자들을 깨우쳐 주려고 내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쓰곤 했다. ㄱ ㄴ과 숫자들, 구구단, 시계를 보는 법, 그애 혼자서도 동화책을 모두 읽게 된 것은 그렇게 진종일 이어지던 그애와 나의 종알거림과 웃음소리 탓이었다. 그때의 종알거림과 웃음소리가 조금만 덜 했던들, 그리고 그 아이가 글자를 전혀 깨우치지 못했던들, 차라리 얼마나 다행이었을까 싶다. 글자들을 거의 다 깨우치자 그애는 내가 없을 때마다 혼자서 책 속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자 나날이 늘어 가던 질문들. “언니, 장화, 홍련은 왜 죽었어? 죽는 게 뭐야? 나도 죽으면 언니랑 못 만나?”
초등학교 입학 시기를 한 참이나 넘기고도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그애는 학교생활을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그 후로 점점 시무룩해지고 웬 일인지 말 수도 적어져 갔다. 그럴수록 나는 그애를 위해 온갖 놀이들을 생각해내고 같이 얽혀 방 안을 뒹굴곤 했다. 오빠나 언니들은 이미 다 커버렸으니 제 생활들에 바빠서 우리와는 친밀감이 덜했다.
겨울 추위도 끝나고 앞동산 개나리의 노란빛이 한창 이울기 시작했을 때, 돌연 그애가 아프기 시작했다. 며칠씩 병원을 다녀오고 온갖 약을 먹어도 좀 체로 나을 기미가 없어 보였다. 그러기를 한 달 쯤 지나 마침내 네 발로 기는 것조차 힘겨워 드러눕게 되었을 때, 병명도 알 수 없이 미음조차 넘기기가 어려워졌다. 책과 더불어 사물의 이치를 조금씩 알아가던 날들이 어느 순간 폭발하듯 그애의 머릿속을 옥죄이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게서 글자들을 깨우쳤던 그 순간들이 첫 단추였는지도. 제 안에 일기 시작한 알 수 없는 노여움의 불길들. 슬픔으로 점령당한 제 육신을 그렇게 태우고 한 마디 표현조차 제대로 못 한 채 시름시름 시들어 가던 그 고통의 나날들. 우리는 짐작조차 못했겠지 싶다.
그날도 그랬다. 며칠째 미음 한 방울 넘기지 못한 그애가 학교로 가는 나를 향해 힘겨운 웃음을 겨우 내비쳤을 때, 창백한 미간 아래로 잠시 휩쓸고 지나던 형용할 수 없던 눈빛. 내게 무얼 말하고자 움찔거리던 서러움을 가득 담은 그 참담한 눈빛. 제 어미를 닮아서 어린것이 눈동자에 서기만 넘친다는 할머니의 그 질기고 질긴 오랜 넋두리를 가슴속에 한으로 품기라도 했던 것인지…….
이제 막 유월의 초여름이 시작 된 너무나도 화창하고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날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대문을 밀고 들어섰을 때 집안 가득 번져 나오던 울음소리들. 양쪽으로 미닫이가 활짝 열린 안방에는 길게 덮인 무명천만이 만개한 목련빛으로 가득했다. 새치름한 얼굴에 장죽만 물고 있던 할머니의 시린 옆모습. 대청너머로 어머니의 저미는 흐느낌을 보다가 얼결에 마당을 가로질러 장독대로 뛰어갔을 때, 햇살 아래 흐르던 아버지의 굵은 눈물. 가을볕의 산수유 열매처럼 붉디붉은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쏟아지던 그 눈물들을 보고서야 뜨겁게 북받치던 내 안의 슬픔들…….
사흘이 지나고 어둑발이 내릴 무렵, 부모들을 따라나선 낯선 아저씨들과 함께 그애는 홀연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 내 삶에서 마주쳤던 어린 날의 첫 번째 죽음은 마치 폐기된 우물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가시지 않는 충격과 상처를 남겼다. 무슨 이유인지 지금껏 부모님은 그애가 묻힌 자리를 단 한 번도 내게 알려주지 않으셨다. 수십 년째 타국에 계시니, 화계산 골짜기는 해마다 더욱 더 우거지고 있을 뿐.
그애의 퀭한 눈빛과 애처롭게 야위어 가던 모습들은 봄이면 봄마다 불쑥불쑥 찾아와 눈앞을 아른대고, 이상스레 해가 갈수록 짙어져만 간다. 그러니 꽃망울이 터지기 시작해서 청정한 여름으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해거름 녘이면 나도 모르게 먹먹함에 젖게 된다. 천지사방 봄꽃들이 피어나 고요한 날이면 더욱 그렇게. 꽃비라도 흩날리면 그애의 눈물일까 내 속 뜰은 하염없이 무너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