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우리 교회의 전통적인 예식인 미사에서 끝부분에 하는 인사말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며,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히 여기는 마음은 너무 좋아요.
어느덧 6월도 여러 날 지나서 중순이 다가옵니다.
요즘 기온이 많이 올라갔어요. 이제 삼복더위도 머지않았다고 봐야죠.
건강 유지에 신경 써야 하겠어요.
오늘은 어제 예고했었듯이 지난 6일 제가 서울에 가서 만났던 사연과 소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엊그제(6일) 아침에 저는 집을 나서며 야후 카페 우리 신자님들과의 즐거운 첫상봉을 생각하며 기뻤어요.
저는 6일 아침 10시50분 대전발 서울행 KTX편을 이용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야후 인터넷 카페 클럽짱의 따님께서 서울역에서 근무하신다 해서 도움을 받았어요.
저를 위해 KTX 기차표를 미리 마련해 두신, 님이 감사했어요.
어차피 치르는 철도요금이지만, 그래도 편안한 서울행을 위해 신경써 주신게 너무 감사했어요.
그런데, 아뿔싸. 지산역에선가 열차선로 이상으로 우리가 타기로 한 10시50분발 KTX열차가 무려 38분을 연착하겠다는 거였어요. 흐미...
새마을호와 무궁화호는 여러대 앞질러 갔건만, 기다리는 기차는 안오고...
KTX개통이 1년이 훨씬 지났건만 처음 타보는 고속철도가 연착이라니....
어제 저는 제가 가입해 있는 인터넷 카페지기님과 막내 따님과 함께 대전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어요.
저나 카페지기님이나 같은 대전이시니, 엊그제와 같은 모임에 저 혼자 쓸쓸히 가는 것보단
함께 가는 게 훨씬 좋은 일이었을 겁니다.
카페지기님께서 보잘것없는 저를 위해 기차표 예매를 해놓고 제가 오기만 기다리고 계셨다니 너무 편하고 좋았어요.
저는 사무실에 잠시 들러, 우리 회원님들께 서울에서 좋은 만남의 시간이 되길 기도했죠.
그런데, 하필 저희가 명동성당의 모임에 참석하기위해 가는 열차가 선로이상으로 40분 가까이 연착하겠다니...
그 때문에 서울역 원래의 도착시간인 11시40분을 훨씬 지난 12시20분에야 서울역에 도착했는 데, 그래도 빠듯한 시간이었음에도 감사했어요.
서울역 도착하자마자 지하철 4호선을 타러 곧바로 갔죠.
4호선 지하철로 명동성당 가까이에 있는 명동역이 서울역에서부터 두 정거장밖에 되질 않아 금방 갈수 있었어요.
명동 지하철역에서 내려 7번 통로로 나오니 처음 온 저는 잠시 헷갈렸습니다.
마침, 지하철에서 막 나온 어느 여자분께 제가 “명동성당에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나요?”
하며 여쭸더니,
그분도 마침 카페모임이 있어 참석하고자 자신도 명동성당에 가는 중인데 어디로 가야 하는 지 잘 모르겠다 하시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이 데레사 자매님으로 저희와 같은 모임에 참석하러 오시는 분이신 것을... (하하하!)
인터넷카페가 오프라인으로 직접만나서 친교를 도모하는 모임이 아니고, 보통은 온라인상으로 만나 수인사로만 알고 지내니 무슨 계기로 회원님끼리 만나더라도 처음엔 생소하다죠.
2년전에 생긴 카페지만 그동안 정기모임이 아직 한번도 없었다기에 그런 일이 생겼어요.
카페모임 참석을 위해 인천에서 오시는 회원님을 몰라봤으니, 넘 죄송했지요. (ㅠㅠㅠ)
그래도 다행으로 어렵지 않게 우리가 원하는 “명동성당”을 잘 찿을 수 있었어요.(ㅎㅎㅎ)
다른 분들에게 “명동성당” 가는 길을 알아서 함께 걸어갔어요.
저와 카피지기와 막내따님(엘리사벳)과 갑자기 만난 이데레사 자매님과 같이 4명이서 담소를 나누며 함께 간거였죠.
드디어, 명동성당 뒤편으로 가니까 여러 회원님들이 벌써 와 계시더라구요.
대부분 서울과 수도권에 계신 회원님들이 대전서 참석하는 우리를 대환영하며 맞아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카페모임 참석을 아직 못해보고, 직접 만난 적 없었던 님들과의 첫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수인사를 꾸준히 해왔기에 금방 어색한 기분을 떨치고 함께 축하하는 시간이 되었죠.
중간에 기차가 40분을 연착하여 우리모임 약속시간인 오후 1시를 늦을까봐 걱정했었는 데 잘 도착하였으니 정말 다행이었어요.
서울역에 도착한 게 12시 20분쯤이었으니, 마음이 급했었지만...
그나마도 KTX가 있어 서울 ~대전 간이 종전보다 소요시간이 줄고 훨씬 가까워 졌음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서울 중구 명동.
우리나라에서 공시지가로 따져,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곳이죠.
평당 땅값이 웬만한 집 한채 값이라니... (ㅠㅠㅠ)
저는 한편으로 지난번에 근무시간 중에 반가운 만남 약속을 했던,
이 아오구스딩 형제에게 전화를 걸었죠.,
지금은 안양에서 살면서 분당의 공단지역 어느 제조업체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형제님.
지금은 대전교도소에서 1996년에 출소해 지방의 어느 산업체의 공장장으로 열심히 근무중이라던데... 너무 좋은 일이었죠.
제가 이 형제의 본당인 명동성당에 왔다고 전화하니, 그날에 꼭 얼굴이라도 보며 반가운 인사를 하고자 하였죠.
결국 안양에서 저를 보기위해 일부러 와준 이 형제를 저녁 6시 미사 직전에 잠깐 만났습니다.
이 형제는 “저희 집 현관에서 방문객을 맞아 주시는 성모님 상”을 직접 만들어 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정말 교도관 출신이란 보람을 느끼는 일이었어요.
다시는 죄짓고 고생하는 일이 없을 테죠.
이 아오구스딩형제는 제가 대전교도소 교도관으로 근무할 당시 저와 같은 신앙인으로
가톨릭 신자로 비록 감방 안에서나마 진실로 죄값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새로운 삶을
착하게 살기로 저와 약속했었습니다.
열심히 수행생활을 하며, 기도를 많이 했었죠.
개과천선(改過遷善)이 힘든 일이다해도, 저와의 약속을 너무 훌륭하게 잘 지키는 형제가
고맙습니다.
저희 집 현관에 있는 성모님상을 만든 형제의 멋진 신심으로 모두에게 기쁨과 행복함이
가득하시길 비옵니다.
형제와의 14년만의 극적인 만남을 하고서 명동성당에서 월요일 저녁미사를 함께 참례한 다음 저는 만났던 형제자매님들과 다음번의 더욱 행복한 만남을 생각하면서 이만 작별을 하고
서울역에서 KTX타고 대전으로 잘 돌아왔습니다.
돌아올 때는 갈 때처럼 연착 않고 제 시간에 잘 오더라구요.
대전역에서 내려 카페짱 슈어님과 따님 솔이와 헤어져서, 저희 집으로 시내버스 타고 왔지요.
뜻깊고 보람찬 하루였어요.
엊그제 만났던 회원님 모두에게 감사드리며, 크신 주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행복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더욱 건강하고 기쁜 일 많아지세요!!!
오늘은 6월 8일.
좋은 날에 행복하시길 바라며...
파이팅!!! 힘내세요!!!
아래에다 이 아오구스딩 형제와의 사연 이야기를 간추려 올려 드립니다.
그대로 전재하면 너무 길어져서요.
지난 글(2005년4월7일, 2004년10월2일)을 찿으시면, 전문(全文)을 보실 수 있지요.
벌써 올려 드렸던 글인데, 엊그제 만난 형제님과의 반가운 만남을 생각하여 못 보신 분들과 그후에 새로 가입한 님들을 위해 소개해 드립니다.
저와 이 아오구스팅 형제를 위해 기도드려 주세요!
감사드립니다. (넙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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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6일 오후 1시 20분쯤에 뜻하지 않은 전화 한통이 제 사무실로 왔어요.
받았더니, 들리는 음성이, “저 ○○○입니다.”
“와, 그러세요. 형제님 반갑습니다.”
작년 10월 2일에 제가 올린 글이 있었어요.
제목은 “저희집 현관에 있는 성모님상(像)”.
어제 전화 주신 분이 그 성모님상을 만들어 주신 형제님이었죠.
제가 대전교도소 교도관 근무시절 목공장에서 열심히 생활했던 형제님.
비록, 교도관과 재소자의 신분이었지만, 우리는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로서
다가설 수 있었어요.
1996년도에 출소하여 결혼하였고 지금은 경기도 어디에서 공장장으로 신앙생활
열심히 하며 잘 살고 있다는 데...
제 어머니에 대해 묻더라구요.
전의 글에서 제 어머님이 다른 성당 신자분들과 함께 당시 아들인 제가 근무하고
있던 대전교도소 종교행사에 한복 입고 가셨던 이야기를 썼었는 데,
바로 그날 제 어머님이 아름답다며, 몇 명의 재소자 형제들이 어머님과 끌어안고
울었었는 데, 이 형제도 지금껏 제 어머님을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2년전 4월에 안타깝게 돌아가신 어머님 이야기를 해 주었죠.
언제든지 대전 올 때에 연락 달라고 제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 주었어요.
정말 감격적이고 기쁜 어제 였습니다.
저를 찿고자 대전시내 5개 구청을 다 전화연락 했다는 데...
제가 대전교도소를 떠나던 날 “중구 부사동”으로 간다했는 데, 동사무소를
떠났지만 그래도 대전 중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저” 인데... (쩝!)
이 형제가 업무상으로 자주 “대전”을 온다니까 언제 만나면 찐하게 술 한잔 을
해야겠어요.
잊지 않고 저를 찿아주는 형제가 고맙습니다.
대전교도소 근무시절 저는 교대,순찰,접견,출정,정문근무,영선 등 초보시절
누구나 다 겪는 근무를 한 외에는 주로 미결사 본무담당을 했었죠.
본무때는 2사중층에 오래 있었어요.
미결사 근무하다보니 여러 재소자를 많이 만났다죠.
처음 2부제 하다, 11개월만에 3부제하면서, 신규직원이 많이 들어와 졸지에(?)
준고참이 되어 "패" 풀렸다면? (하하하)
저는 신앙을 갖고 있다보니, 천주교 사동의 수용자들과 많이 접했어요.
천주교 행사때는 24시간 철야근무를 마치고서도
행사를 완수하고자 늦게까지 함께 했었구요. 지금도 마찬가지시겠죠?
언젠가 재소자를 위한 행사가 있어 외부인 대전지역 성당의 신자분들께서
대전교도소를 오시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교도관으로 근무하는 걸 아시는 제 어머님께서 이런 말씀하시는
거여요.
"내 아들이 근무하는 대전교도소와 동료신자 직원과 재소자들을 한번 보고싶다."
저는 어머님 소원(?)을 들어드리고자 보안과 본부와 상급자께 상의드려
행사날 어머님께 다른 성당 신자분들과 함께 행사참석하시고 견학하실 기회를
드렸었어요.
드디어 행사가 있던 날,
제 어머니가 오셨어요.
자주색 치마에 연한 하늘색 한복을 입으셨던 어머님.
교무과 강당에서 행사가 있었는 데,
저는 전날 철야하고서도 교도사도회 동료직원들과 배치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행사 참여하랴, 외부손님 계호하랴 바빴었다죠.
원래, 교도소를 처음 접하는 외부인사들은 생소하기도 하고
아무리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해도 재소자를 만난다는 건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죠.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해산할 때 제가 아는 몇명의 재소자가 제 어머님의 손을
잡고 울고 있는 거였어요.
다른 분들은 양장 차림이거나, 간소복이었는 데.
제 모친은 유일하게 한복 입으셨는 데,
수형자들에게 자신들의 어머님을 생각하게 했으니...
저의 어머니도 안 쓰러워 같이 우시더라구요.
그래도 시간은 정해진 거고, 행사를 마쳐야 겠기에 달래어 보내고 저와 어머니는
함께 집으로 갔었죠.
이때 제 어머니 손을 붙잡고 울던 재소자 형제중에 "이**"가 있었는 데,
그후에도 저 퇴직할 때까지 제 어머님 안부를 묻더군요.
이 형제는 살인으로 들어와 장기 징역형을 받고 수형생활 하고 있었죠.
장농 제작하는 "목공"에서 일했어요.
벌써 13년도 지난 일이니까
지금은 이 형제도 출소했겠네요.
춘천이 고향이랬는 데, 자기는 언제든 나가면 서울에서 생활하려 한댔는 데,
어디서 뭘 하면서 잘 살고 있으려나?
저는 제가 만났던 재소자들이 비록, 장기수로 감방에서 오랜 기간을
지냈었다해도 앞으로는 착하고 성실하게 잘 살아주길 바랍니다.
제가 교도소 퇴직한다 할때,
이 형제가 제게 자신의 손으로 틈날때 만들었다며,
목공장에서 자투리로 나온 나무조각을 자르고, 아치형으로 동굴처럼 구멍을 내고
조그만 성모님상(像)을 동굴안에 세운 작품을 주면서,
"우리 담당님, 퇴직하시고라도 이걸 볼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시고,
주님께 성모님을 통해 기도드려 달라 "했었죠.
저는 지금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론, 퇴직인사 할 때 보안과에는 미리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죠.
부정물품은 어디서고 안되니까요. 아무리 선의의 뜻이래도 지킬건 잘 지켜야죠.
지금 제 집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면, 입구 오른쪽에서 방문객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성모님 모습입니다.
저보다 두살 어리다던 이**형제, 부디 건강하게 생활 잘 하시게나.
언제 어디서든 인연이 또 닿으면 만날수도 있겠지.
다만, 교도소 감방에서 보는 일은 절대 없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