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췌본 화랑세기로 시작)
화랑은 선도仙徒 仙徒는 仙의 무리를 가리키며 仙에 대해서는 보다 폭 넓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다. 우리 나라 신라를 말한다.
에서 신궁神宮 神宮은 소지마립간 9년에 시조의 초생지처인 내을(柰乙) 설치했다는 기록(『삼국사기』3, 炤知麻立干 9년조)과 22대 智證王대에 창립하였다는 기록(『삼국사기』32, 祭祀조)이 있다.
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桐山, 노魯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 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源花를 삼게 되었는데, 지소태후只召太后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보도 사이에 출생했는데, 작은 아버지인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을 낳았다. 진흥이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7살(『삼국사기』4, 진흥왕 즉위조)또는 15살(『삼국유사』1, 기이 2, 진흥왕조)로 나와 있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7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까닭에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國人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神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 ‘국공들이(봉신을)베풀어 행한 후’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선도의 임무가 옛날에는 봉신을 주로 하였으나 국공들이 봉신을 행하게 된 후, 화랑도는 도의에 힘썼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된다.
[1세 풍월주 위화랑]
[마복칠성]
(1세) 위화랑魏花郞은 섬신공剡臣公 염신공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아부인碧我夫人이다. 어머니가 총애를 받아 비처왕毗處王의 마복자摩腹子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일종의 사회․정치적 의제(擬制) 가족 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을 갖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마복자의 존재는 단순히 성적 문란의 증거일 수 없다.
가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바 마복칠성摩腹七星이다. 아시공阿時公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宝兮이다. 수지공守知公의 아버지 이흔伊欣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공伊登公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이다. 태종공苔宗公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이다. 비량공比梁公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공肜吹公의 아버지는 덕지德知이고, 어머니는 가야국의 융융공주肜肜公主이다.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七成의 우두머리이며,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宝兮記』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위화랑의 풍모]
공은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벽아부인碧我夫人이 날이捺已에 있을 때 한 딸을 낳았는데, 곧 비처후毗處后인 벽화부인碧花夫人 벽화부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3, 신라본기 3, 소지마립간 22년조에도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벽화부인은 날이군 사람 파로(波路)의 딸이다.
이다. 벽화부인이 입궁하자, 공은 사제私弟로서 출입하여 비처왕의 총애를 받았다.
[법흥과의 관계]
법흥대왕 毗處王(炤知王)때 지증의 아들이었던 법흥은 그 이름이 원종(原宗)이었다.(『삼국사기』4, 신라본기 4, 법흥왕 즉위조)
은 그 때 부군副君 8세 풍월주 문노조에 법흥왕 건복 2년(537) 영실공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 마찬가지로 지증 역시 부군으로서 비처왕(소지왕)을 잇는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 아들로 국공國公의 자리에 있었는데,(국공에 대한 왕의) 총애가 (공만) 못하였다. 아시공이 이에 (법흥)대왕에게 권하여 공에게 하배下拜를 하게 하였다. 공이 그것을 섬신공에게 말하였다.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너에게 하배를 하는 것은 너를 신하로 삼기 위한 것이다. 지금 왕은 늙었고, 국공은 대망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를 섬겨야 한다” 하였다. 공이 이에 찾아가 신하가 되어 섬기니, 많은 것이 (국공의) 뜻에 맞았다. 법흥이 말하기를 “나의 등통鄧通 중국 漢나라 文帝의 총애를 받던 신하이다.
이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가 과연 죽었다. 『화랑세기』에서는 왕과 왕비의 죽음을 붕(崩)으로, 그렇지 않은사람의 죽음을 훙(薨)등으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지증대왕이 즉위하고 법흥을 태자로 삼았다.
[옥진궁주]
공이 벽화후碧花后에게 태자를 섬기도록 권하여 딸을 낳으니, 바로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다. 그 때 태자비인 보도부인保道夫人은 곧 비처의 딸인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보도의 아우 오도吾道는 선혜후善兮后와 묘심妙心이 사통私通하여 낳았다. 그러므로 매우 아름다워 태자(법흥)에게 총애를 받았다. (오도는) 삼엽三葉에게 아양을 떨어 공과 깊이 사귀고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그리하여 옥진궁주玉珍宮主를 낳았다. 태자가 알고 오도를 아시공阿時公에게 주고, 벽화碧花를 비량공比梁公에게 주었다. 이에 정비正妃인 보도부인을 총애하고, 공을 물리치고 멀리 하였다.
그러나 보도保道는 공이 덕이 있다고 여기고 지증대왕에게 청하여 (공을) 천주天柱에 봉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연제태후延帝太后 또한 공을 사랑辛을 받자, 곧 자시 처음과 같이 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이찬伊湌의 위位에 있게 되었다. 옥진이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보도保道로 하여금 비구니가 되게 하고, 공을 신하로 삼았다. 그러므로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을 그 우두머리로 삼아 이름하여 풍월주風月主 신라에는 일정한 시점에 여러 명의 화랑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대표가 되는 화랑을 풍월주라고 하였다.
라 하였다. 지소只召는 보도 부인의 딸인데 입종공立宗公 법흥왕의 아우이자 지소태후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이는 당시 왕궁에 거주하던 성골 집단 안에서 근친혼이 이루어진 것을 알게 해 준다.
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眞興大王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는 걱정이 되었다. 공이 이에 대의로써 옥진을 깨닫게 하여, (진흥을 태자로) 삼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태후思道太后 또한 무사하였다. 공의 덕이 컸다.
[위화랑의 자손]
공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 옥진궁주와 차녀 금진부인金珍夫人은 곧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은 처음에 영실공英失公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안 있어 법흥대왕의 사랑辛을 받아 비대공比臺公을 낳았다. 대왕이 (비대공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자, 공이 그것을 말리며 간하기를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 법흥왕대(514-540)에 이미 골품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영실과 더불어 함께 살았으나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하였다. 법흥이 죽자崩 지소태후는 비대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 公祀는 위화랑의 제사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 개원궁주開元宮主는 동륜태자銅輪太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 이화랑二花郞은 곧 준실부인俊室夫人이 낳았다. 준실부인은 수지공守知公의 누이이고 자비왕慈悲王의 외손인데, 아름다웠고 문장도 잘 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後宮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고, 공에게 시집을 가서 (이화랑을) 낳았는데, 또한 모습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 하였다. 지소태후가 총애를 하여 늘 좌우에서 모시게 하여다. 태후의 딸 숙명궁주叔明宮主가 좋아하여 도망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조사圓光祖師 원광의 성에 대한 이설들이 있다. 『삼국유사』4, 의해 5에는 『당속고승전』의 기록에 원광의 속성이 박씨라고 하였다. 『속고승전』13에도 원광의 속성이 박이라 하였다. 『해동고승전』2에는 설씨 혹은 박씨다. 그런데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원광이 증조인 보리(菩利) 사문(寺門)의 형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통하여 원광의 성이 김씨였음을 알 수 있다.
로 우리 동방의 대성인이다. 원광의 동생 보리菩利 사문沙門은 곧 나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을 가리킨다.
의 증조이다.
찬하여 말한다 :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의 아비이며,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로서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2세 풍월주 미진부]
(2세) 미진부공未珍夫公은 아시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이니, 곧 법흥대왕의 딸이다. (궁주는) 꿈에 백학을 보고 (공을)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사랑하였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더불어 궁중에서 자랐다. 그 즈음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이 즉위하기 어렵다 하고, 삼엽과 아시공이 태후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과 공을 사랑하였다. 태후가 정치를 맡자 공은 폐신嬖臣 윗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신하, 또는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
으로 삼았다. 이 때 공의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원화]
이에 앞서 삼산공三山公의 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 남모공주南毛公主는 백제 보과공주宝果公主 3세 풍월지인 모랑(毛郞)의 어머니. 법흥왕이 국공으로 있을 때 백제에 들어가 사통을 하였는데 후에 신라로 도망하여 와서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모랑공에 대한 찬(贊)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東城王, 479-501)이라 생각된다.
의 소생으로,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으며, 공과 더불어 도탑게 사랑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 중국 전국 시대 위(魏)나라 총신. 남색으로 왕의 사랑을 받았다. 영실공은 남색으로 법흥왕의 총애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준정은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왕의) 유명遺命으로 영실을 계부繼父로 삼았으나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로 맞은 것은 당시 남편이 한 명이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물러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魏花公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이 투기를 하였다. 이에 술로 유혹하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것을 폭로하였다.
[풍월주 설치]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았다.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내용은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조에 나온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원화를 폐지한 시기가 진흥왕(540-576) 초년이었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원화 폐지 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 하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풍월주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는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를 임명하여 낭도를 거느렸다고 하였다.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 부제(副弟)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던 존재이며, 화랑도 조직이 생각보다 잘 짜여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부제들이 풍월주의 지위를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를 잃은 이후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부인妙道夫人과 사통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태후가 알고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묘도를 아내로 맞이하여 미실낭주美室娘主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미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태후를 섬기며 충성을 다했는데,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미실이 (왕의) 총애를 얻자, (공은) 작爵이 각간角干으로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 또한 궁주宮主 신라의 왕궁은 대궁, 양궁, 사량궁의 3궁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왕들은 대궁이 있던 지그므이 월성에 살았다. 월성 안에는 여러 궁들이 있었고, 묘도가 그러한 궁의 하나를 차지항 궁주로서 왕궁 안에서 지위를 확보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궁주가 되는 것이 대원 신통이나 진골 정통의 인통(姻統)을 이어 나가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에 이르러 대원 신통大元神統 대원 신통과 진골 정통은 왕의 혼인 대상이 되는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이었다. (이종욱, “『화랑세기』에 나타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 『한국상고사학보』18, 1995, pp279-301 참조)
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찬하여 말한다 : 색色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했으며, 용맹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하였다. 부인 묘도는 위화랑공의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를 낳으니 천도天道가 아득하고 오래도다.
[3세 풍월주 모랑]
(3세)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서 백제에 들어가 보과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사통을 하였다. 후에 보과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모랑은) 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548),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의 혼백을 위로하였다. 위화랑공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모랑의) 처로 삼게 하였으니, 곧 이화랑二花郞의 누나女兄였다. (모랑은) 딸 준모俊毛 하나만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랑이 뒤를 이었다.
(4세) 이화랑二花郞은 위공魏公의 아들이다.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12살에 능히 모랑공의 부제가 되었다. (지소)태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황하黃하ㆍ숙명淑明ㆍ송화松花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와 정을 통通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는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는데, 왕은 어머니가 같은 누이라고 하여 매우 사랑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苔宗公 『삼국사기』44, 열전 4 이사부전(異斯夫傳)에 그를 태종(苔宗)이라고도 불렀다고 되어 있어 이사부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지증왕 6년에 실직주(悉直州) 군주(軍主)가 되고, 진흥왕 2년에 병부령(兵部令)이 되었으며, 진흥왕 6년에는 『국사』편찬을 왕에게 건의하였고, 진흥왕 23년에 가야가 반기를 들자 공격하여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
인데 그 때 상상上相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상대등(上大等)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7, 잡지 7, 직관 상에 상대등은 상신(上臣)이라고도 불렀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8년(534) 이찬 철부(哲夫)가 상대등이 된 후, 진지왕 원년(576),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기까지 상대등에 대한 임명 사실이 빠져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이사부가 상대등이 되었기에 상상(上相)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으로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그래서 왕은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림이 없었다. 왕은 평소에 사도思道 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숙명의 사랑]
이에 이르러 숙명후는 공과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하여졌고, 여러 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황후를) 폐하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왕이 숙명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은 스스로 임신을 하였다. 이에 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나갔다. 군신群臣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였다.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가 있으나 태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에게는 하나의 행운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호하여 태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드디어 숙명에게 허락하여 부부가 되게 하였다. 이에 원광圓光과 보리菩利를 낳았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개국開國 진흥왕 12년(551)부터 28년(567)까지 사용한 연호, 법흥왕 23년(536) 때는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5년(555), 모랑공이 비사벌比斯伐 진흥왕 순수비 중 창녕비에는 창녕 지역을 ‘비자벌(比子伐)’로 표기하고 있다.
에 여행하다가 병을 얻어 길에서 죽었다. 낭도들이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다. 그 때 공은 태후의 총애로 늘 궁중에 머물렀기에 사양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공魏公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앉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이에 명하여 오르게 하여 4세 풍월주로 삼고 군현郡縣을 순행케 하였다. 그 때 태후가 바야흐로 만호낭주萬呼娘主를 임신하였다. 그러므로 그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
[금진과 토함]
옥진궁주玉珍宮主의 동생은 금진金珍인데 또한 위공魏公의 딸이다.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대왕이 죽자崩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남모가 처음 해를 당하였을 때, 낭도들이 (원화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구리지공仇利知公과 몰래 정을 통하여 토함공ꟙ含公을 낳았는데, 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일찍 낭적郎籍 화랑도의 명단. 『삼국유사』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풍류황권(風流黃券)’으로 불린 낭적이 있었다.
에 소속되었는데, 이 때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궁중에 불러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比梁叔公보다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碧母보다 나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할 만하다”하였다. 공 또한 토함공을 심히 사랑하여 기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가 고맙게 여겨 공을 축복하였다.
[사다함]
토함공에게는 동생 사다함공斯多含公이 있었는데, 묘량妙梁의 풍모를 크게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그 때 무관랑武官郞이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렸다. 사다함공이 나이는 적으나 의義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청하여 더불어 서로 보고 크게 기뻐 말하기를 “공자公子 귀한 집의 나이 어린 자제를 의미한다.
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입니다. 섬기기를 원합니다”하니, 사다함이 대답하기를 “제가 어찌 감히 거느리겠습니까?"하였다. 그래서 (무관랑은) 고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이에 태후에게 아뢰기를 “토함의 아우 사다함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이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 풍월주와 다른 계통의 화랑의 우두머리. 신문왕 원년(681) 화랑도제가 폐지되었다 부활될 때, 풍월주 대신 국선이 화랑을 대표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한 사정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풍월주 대신 국선으로 나오지 않는가 한다.
이라고 이를 만합니다”하였다. 태후가 이에 궁중에 불러 음식을 내리며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사람 사랑하옵기를 내 몸같이 할 따름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좋다고 하는 것뿐입니다”하였다. 태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왕게게 말하여, 귀당비장貴幢裨將을 삼아 궁문을 과장케 하였다. 그 낭도 천 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 무렵 비조공比助公의 아들 문노文弩 또한 호걸로, 격검擊劍을 잘하였다. 공은 사다하으로 하여금 문노에게 검을 배우게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능히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豪俠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하였다. 문노가 이에 낭도 오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컸다.
그 때 동륜공이 점차 장성하였는데, 대왕이 보익輔翊하는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토함으로 하여 보익하도록 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임무이다”하였다. 이에 화랑의 지위를 그 아우에게 넘겨주었다. 공은 이에 사다함을 부제로 삼았는데, 그를 사랑함이 토함과 같았다. 그때 사람들이 공이 인재를 얻었음에 축하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이 종군을 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 주고, 토함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補養하는 데 힘썼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은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永興寺에 나가 살며 불도佛道에 전심하였다. 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하였고, 숙태자肅太子 또한 머리를 깎고 계戒를 받았다.
[원광법사]
공의 아들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숙명공주 소생이다. 임신할 때 공주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공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하였다. 갑자기 금불이 와서 고하기를 “나는 약사불藥師佛인데,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하였다. 공주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 배례하니,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러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하였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하였다. 기쁨을 나누고 원광을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필사본 『화랑세기』로 연결)
…족히 증거가 된다. 당시 공보다 더한 미남자는 없었다. 건복建福 진평왕 6년(584)에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17년(600), 원광이 신라로 돌아왔다. 공은 주위를 넘겨주고, 숙명, 새달과 더불어 제손諸孫을 거느리고 국내의 승지勝地를 두루 돌아다녔다. …하루는 조용히 공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공주와 더불어 시측侍側한 지 40년이고, 어수魚水의 낙이 지극한…까닭에 태후에 대왕을 따라 옥경玉京 하늘 위의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사낟고 하는 가상적인 서울.
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낭군이 향하는 바를 첩妾은 마땅히 따라야지요”하였다. 마침내 나란히 누워서 죽었다. 새달 역시 따랐다. 때는 건복建福 20년(603) 3월이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지소태후 능(곁)에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이었다. 아! 성대하다.
공의 한 마디 말은 …백세의 사표師表이다. 공은 말이 적었고…정행淨行 이뒤에 ‘?節?濟’ 4글자가 있다.
을 하였다. …송宋의 다도태후多道太后가 화랑을 많이 거느리고 여러 번 사랑辛하여 …. …가 말하기를 누이가 욕심이 많아 낭郎이 (면치 못하였다 …공은 태…. …후가)술로서 (머물게 하여 장차 …하려 하였다.…)태후는 또 …지켰다. 지금 왕…신은 마땅히 신궁神宮에서 발원하여 …그런즉 맹세하여 얻지 못하여 …궁은 무릇 17… 신에게 고하여 … 좌우 공… 지엄하게 거하여 …위에 …. 공의 일족의 …무리가 공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공이 궁중의 뜻을 알고 마침내 …응하였다. 공의 충직함이 이와 같았다.
공의 정(처인 숙명공주는) 공의 두 아들 원광과 보리를 낳았고, 또한 공의 두 딸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을 낳았는데, 모두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았다. 원광의 아우 보리는 정숙태자貞肅太子의 딸 만룡萬龍을 아내로 맞아 예원禮元 각간을 낳았으니, 곧 나 여기서 말하는 나는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을 가리킨다.
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이 누이妹 妹는 누이동생으로 여기서는 거의 누이라고 번역했다.
새달塞達을 아내로 맞아 서자 7인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찬하여 말한다 : 이화二花의 풍류(화랑도)는 신라의 청담淸談 속세를 떠난 고상한 이야기.
이라, 귀족의 자손이 공주에게 장가들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니 약서여래라. 화랑의 가문이고 법사의 친족이니, 위엄 있는 공족公族이며, 만세에 무궁하리라.
세계 :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준실이다) … 아버지는 … 손孫이다. … 준명俊明의 … 어머니는 자아紫我이니 곧 …. 문장을 …. 공은 그 맥을 얻었다. …
[5세 풍월주 사다함]
5세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比梁公이 벽화후碧花后를 그리워하여, 늘(후后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后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하였다. 구리지는 아름답기가 벽화후와 같고, 담력은 비량공과 같았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士를 좋아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와 통하여 토함ㆍ새달ㆍ사다함을 낳았다.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다.
처음에 우리 … 법흥대제 …. 위화랑 … 옥진궁주 …. 제帝가 … 이에 … 구진仇珍을 …(하고) 이윽고 다시 위화랑과 더불어 좋아하여 … 금진의 아름다움은 비록 옥진보다 못했으나… 옥진은 법흥을 섬겨 아들을 낳았다. 입종立宗의 (아들이) 입종과 금진 사이에 낳은 아들이 숙흘종이다.
… 곧 숙흘종肅訖宗이다. 법흥이 죽었는데崩 입종 또한 죽었다薧 6세 풍월주 세종공의 세계(世界)에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유명으로 영실공을 계부(繼父)로 맞이한 것으로 나와, 법흥왕이 죽기 전에 입종공이 죽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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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지]
… 옥진 형제와 친하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문상에 물러나 살았다. … 구리지는 낭도를 모아 금진을 원화源花로 삼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구리지는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서 금진의 명을 전殿 아래에서 늘 받들었다. 구리지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원해, 천주사天柱寺 『삼국유사』1, 기이 2, 천사옥대조에는 내제석궁(內帝釋宮)을 천주사라 하고, 진평왕이 세웠다 하였다.
에서 무릇 5년을 발원 하였는데, 금진이 비로소 홀로 살게 되었다. 구리지는 이에 날마다 가서 원화가 될 계책을 바쳤다. 금진은 나이가 또한 적었기에 명리를 탐하여 허락하였다.
구리지는 또 …. 원화라는 의협의 인물로, 낭도들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킨다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 금진이 말하기를 … 구리지… 낭주에게 … 한 것이 5년 전의 일 …의 일이다. 금진이 이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 바라 … 무리가 받들었다…. 너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 하였다.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명령하여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은 … 아직 …의 몸 … 허락합니다.”하였다. 금진이 말하기를 “네가 나의 집 … 황ꏚ(黃ꏚ)의 귀함으로 뒷간에서 사통을 허락하여 …”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이 나이가 젊어 동東 … 어찌 업신여김이 이와 같은가” 하였다. 금진이 …“일찍이 가득했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너로서 … 아버지이다. 오늘은 네가 …아니다”하였다. 구리지가 이에 기뻐 말하기를 “신은 이로부터 더욱 힘써 …”하였다. 정이 무르익었다. 옥진궁주는 …서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금진은 …당하여 …. 사다함 …을 알고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정하여 독산에서 죽었다.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진흥왕 9년(548) 2월조에, 고구려와 예인(濊人)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여 진흥왕이 장군 주령(株玲)에게 경졸(勁卒) 3천을 거느리고 격파하여 죽이고 포로로 잡은 사람이 많았다 하였다.
[금진]
처음에 구리지에게는 용양신龍陽臣 설성薛成이 있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였다. 구리지가 출정하여 자리를 비우자, 금진과 정을 통하여 설원랑薛原郞을 낳았다. 동(륜)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사도황후가 금진을 불러 유모乳姆 ‘乳姆’는 원래 ‘乳母’일 수 있으나 ‘姆’의 뜻에 여스승이라는 의미가 있어, 유모(乳母)의 어미가 단순히 젖어미인 유모(乳母)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로 삼았는데, 이로 인하여 사다함 형제도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왕의 나이가 아직 한차 때여쓴데 태후가 빈공嬪供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도 또한 사도思道와의 정이 각별하여 아직 다른 사람을 총애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사도는 산후 3개월간 왕과 관계를 갖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교태를 보이자 왕은 슬라瑟羅에 갈 때 (금진을) 황후궁의 궁인宮人으로 삼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였다. 황후가 그것을 알고 …, 왕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금진을 …에서 나가 살게 하였다.
…금진은 이에 설성 등, 다섯 사람을 몰래 거느렸다. …다시 불러 조하방부인朝霞房夫人 조하방은 신라 시대 내성(內星) 소속 관서인데 모(母) 23인이 있었다.
으로 삼았다. 그 때 …그 어머니에게 간언하여 …이 없도록 …. 금진이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하였다. 금진이 이에 울며 말하기를 “첩이 불행히도 타락하여 … 사노私奴 설성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하였다. …설성을 나마奈麻 신라 시대의 관위. 17관위(官位) 중 제 11위였다.
로 삼아 돌려 …노奴를 따라서 상桑을 …조하방에 다시 들어가 …. …죽었다. 사다함은 이에 땔나무를 쌓아 …하고자 하였다. 금진에게 물었다. 금진은 울며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곧 설성입니다”하였다. 왕은 그 장長을 취해 …로 삼았다. …설성은 인하여 또 사랑辛을 하였다. 이 해에 이화랑(이 풍월주가 되고) …토함을 부제로 삼았다. 제帝는 사다함 또한 …에 속하게 …. 또 제帝의 딸을 낳았으니, 이 이가 난성공주暖成公主였다. …스스로 그 도徒와 더불어 백제를 정벌하는 데 따라가 …이 있다. ?찬湌의 위位를 주고 금진을 처로 삼게 하였다. 사다함은 “오히려 …. … 색은 바로 본능입니다. 어머니는 홀로 정해진 짝이 없어야 되겠습니까?”하였다. 사다함은 말하기를 “… 않는가”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비록 천한 어머니의 바라는 바이나 제帝가 이미 허락하였으니 소홀히 할 수 없다”하였다. 사다함은 이에 금진이 설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따로 살며 사택賜宅과 본장本庄에 들어가지 않았다. 옥진궁주가 듣고 크게 칭찬하여, “이 아이는 반드시 그 아버지를 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사다함]
나이 12살에 문노文弩를 따랐는데 격검擊劍에 능하였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낭도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구리공의 음덕으로 받은 복이다”하였다. 사다함은 밖으로 굳세고 안으로 어질었고 우애에 독실하였다. 비록 설성에게는 거역하였으나, 어머니를 섬기는 효도는 지극하여, 금진 또한 이로써 가장 …하였다. 매번 4절節을 맞아 ꏅ유택(ꏅ遊宅) 『삼국유사』1, 기이 2에 사절유택(四節遊宅)으로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 있었다.
의 …에 들어가 …. …하여금 … 하였다. 제帝는 사다함이 춤을 잘 추는 것을 알고 … 금진은 짝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사랑辛을 받고 돌아왔다. … 스스로 기뻐하여 사랑을 하지 않고 돌아왔다. … 울며 …. 금진이 묻기를 “…에 사랑…”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임금이 짝이 되니 아들이 어찌 영광이 아닙니까?” 하였다. 숙흘종공이 장차…. …연이어 지나갔다. 금진이 바라보고 ….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하였다. …나가 숙흘종의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라 하였다. …말하기를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의義는 이미 끊어졌다”하였다. …. “…끊을 수 없다” 하였다. 숙흘종이 이에 들어가 금진을 보았다. …. “…끊을 수 없다”하였다. 숙흘종이 이에 들어가 금진을 보았다. ….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절하는가” 하였다. 금진 …. …모자의 정이 회복되었다. …울었다. 이로써 … 대신 사랑辛하여 딸 준영을 낳았다. 아름답기가 … 또한 사통하였다. 그러나 진종眞宗을 두려워 하여 감히 … 하지 못했다. …. …종宗이 말하기를 “고수瞽瞍의 아들 대순大舜 중국 전설상의 제왕. 오제(五帝)의 한 사람으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 고수는 순임금의 어리석은 아버지이다.
… 있습니까”하였다. 이에 낭도를 거느리고 ?영(?英)을 숙흘종에게 …. 벗을 위함이 이와 같았다.
[가야 정벌]
개국開國 11년(561)…(양)화공주兩花公主가 죽었다薧. 왕위를 이은 임금 도설지 道設智. 대가야의 마지막 왕.
가 야녀野女로써…월광月光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어 야인野人을 많이 거느리고 왔다. 야녀(野女)와 야인(野人)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알 수 없으나, 왜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로 여겨진다. 이 경우 야인을 거느린 것은 가야의 지배 세력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야인들이 가야의 통제를 받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제帝가 태종공苔宗公에게 명하여 지압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으나, 제帝는 사다함이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다함은 사사로이 낭도를 거느리고 몰래 갔다. 금진이 설성에게 “당신은 무품無品 개국 11년(561) 가야를 공격할 때 설성은 무품(無品)이었던 것으로 보아 신분이 낮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골품제가 존재한 것도 확인된다.
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하니, 설성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하였다. 이에 (설성은) 사다함의 휘하에 나아갔다. 야인을 대파하니 제帝가 기뻐하며 사다함을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그 때 (사다함의) 나이가 16살이었다. 정병精兵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伽倻…. 그 성을 …하고 도설지와 야녀를 사로잡았다. …군이 계속하여 이르러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구九…. 공으로 전田을 내려 주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生口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대왕이 (사다함을) 더욱 중하게 여겨 알천閼川의 땅을 주었으나,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불모지 수백 경頃 1경(頃)은 100무(畝) 땅을 가리키나, 신라의 경우 어떠한지는 잘 알 수 없다.
을 택하여 …을 받으며 말하기를 “이 (정도면) 사람으로 하여금 족히 근면하게 할 수 있다. …일이 없으면 입농入農하는 것이 나의 무리들의 …이다”하였다.
그 즈음 이화공二花公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아 낭도에 대하여 싫증이 났으므로 공을 5세 풍월주로 삼았다. 공의 포제胞弟 어머니가 같은 씨 다른 동생을 의미한다. 사다함의 아버지는 구리지이고 어머니는 금진이며, 설원랑의 아버지는 설성이고 어머니는 금진이다. 그러므로 사다함과 설원랑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설원랑薛原郞을 부제副弟로 삼았는데 나이가 13살 이었다. … 설성이 출전하여 사다함이 …에 당하여 …하고 죽었다. 이에 이르러 무리들이 기려 말하기를, 그대의 설성은 ….
[무관랑]
공의 신하인 무관랑 또한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금진낭주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 (사다함이)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 벗으로 …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 삼겠는가”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바로…. … 무관랑 …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 밤에 궁의 담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 여기서 말하는 궁장은 대궁이 있던 월성의 궁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지의 존재는 최근에 알려졌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1차 5개년 계획으로 실시한 월성 해자(垓字) 및 주변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에 이어 실시된 2차 5개년 계획(1990-1994)에서도 월성 해자가 발굴 조사되었다. 해자는 능원, 묘 따위의 지경, 성 밖을 판 못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지는 성곽 구지(城郭溝池)의 구지로,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 밑에 파 놓은 못 또는 물길을 가리킨다. 1984년 이전에 월성 주변에 구지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한편, 지금까지 해자라고 불러오던 것을 신라인들은 구지로 부른 것도 확인된다. 그리고 월성 밖에 보호 시설로 만들어진 시설의 실제 구조성 해자보다는 구지가 더 적합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구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근거가 된다.
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사다함의 죽음]
공은 애통해 하였다. 공 역시 여위고 병들어 7일만에 숨이 끊어지려 하니, 금진은 공을 품에 안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살겠는가”하였다. 공이 서서히 눈을 뜨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내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였다.
[미실과의 관계]
대개 공은 원래 미진부공未珍夫公의 딸 미실美室을 사모하였다.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의 명으로 세종공世宗公에게 시집을 갔다. 이로서 …발發 …심心 … 어머니에게 간하지 않았고 형을 따랐다. ≪형은 숙흘종이다≫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 청조靑鳥는 미실을 가리킨다. 공은 …. …의衣… 노래를 지어 보낸 까닭이다.
공公…. 낭도들이 이화공을 풍월주로 복립할 것을 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의 사위이다. 사다함은 …. …여로 골諸骨 골품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중 세종전군世宗殿君같은 이는 없다” …의 무리들이 이에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찬하여 말한다 : 비량比梁이 물려 준 정기精氣이고 위화랑의 손이라. 적을 친 공이 높은데 스스로 불모지에 머물다. 청조가 산중에 있고 송백松柏이 길이 푸르도다.
세계 : 아버지는 구리지仇利知이고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이며, 증조는 비지比知 『삼국사기』3, 신라본기 3에 소지왕 19년(493), 백제왕 모대(동성왕)의 혼인 요청으로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냈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화랑세기』에 나오는 비지(比知)가 아닌가 한다.
이고 고조는 비태比太이다.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처음에 내물왕奈勿王 …. … 후궁으로 산황山凰을 낳았다. 실성왕實聖王이 명하여 내물奈勿 …. ꏅꏅ왕이 서자, 후궁으로 들이고, 이어 사랑하는 아우寵弟에게 내려 주었다. 실ꏅ(實ꏅ)…미해공 …. 혹은 말하기를 심황心凰은 실상공實相公의 딸이라고 한다. 눌지왕訥祗王이 이에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奈勿神宮의 주主로 삼았다. 비지공은 이로서 …내물…손이다. 묘량부인妙梁夫人을 아내로 맞아 비량공을 낳았다. 묘량…왕녀이다. 또한 대원신통大元神統에서 나왔다.
[6세 풍월주 세종]
6세 세종世宗은 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이다. 진흥대왕大帝과 더불어 어머니가 같다同胞. 동포는 시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것을 뜻한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입종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며,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공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기에 동포(同胞)가 된다.
세종전군의 초명初名은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를 가졌다.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하였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나의 막내 아우다”하였다. 항상 곁에 있으며 (대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의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었다.
[태종공]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제帝를 찾아뵐 때, 공이 시측하였다. 태종공은 제帝에게 먼저 절하고 先拜 공에게 다음 절次拜을 하였다. 공은 황망하여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나의 신하이다. …몸으로 너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하였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殿君을 신화 할 수 있다. 성골 집단의 신성함을 유지하려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전군은 신자神子이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는가”라 하였다.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찍이 모후에게 전ꏅ(殿ꏅ)…나의 …를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하였다. 제帝는 “…(태후의) 신성과 예덕睿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써 나의 …이 있으니, 또한 나의 집의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나의 아우이다”하였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하였다.
[세종과 미실의 만남]
공公은 …와 더불어 …. 몇 달 전에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하였다.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묻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합니까”하였다. 제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입니다. 단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하였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며느리를 얻는 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니, 태종이 “폐하의 집안 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 법흥왕의 유명으로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繼父)로 맞았기에 우군(右君)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하니, 태종이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 ≪사도≫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어다면, 나는 잘 못할 뻔했습니다”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섬긴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 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사랑하여 장차(진골정)통을 잇고자 황후를 폐하려고 하였다. 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였다. 이 같은 계책이 황후에게 누설되니, 황후는 울면서 제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제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께 나아가 간하였다. 이에 태후는 미실을 (불러들인)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기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色事로 전군을 …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 할 수 없다”하고 출궁을 명하였다. …진종전군眞宗殿君의 딸 융명肜明을 정비正妃 정비의 존재는 신라 시대의 혼인 관계에서 처첩(妻妾)을 구별하는 등, 일정한 질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로 삼았다. 제는 따져 ….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따라갔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써 미실에게 …한 바 되어 …. … 사다함과 같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은 …. “…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 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 …하여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때이다. 나는 …. 한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하였다. 미실은 이에 정ꏅ이 일어나 서로 기뻐하였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
[풍랑가] 정연찬(鄭然粲) 선생은 이 향가의 제목을 <풍랑가(風浪歌)>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로 불렀다. 여기에 나오는 향가의 해독도 정연찬 선생이 한 것이다.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으로 위로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염려하여 미실을 다시 입궁시키자, 전군은 기뻐 미친 듯이 달렸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군은 태후에게 청하여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원비(元妃)나 차비(次妃)의 존재 역시 신라 시대에 일정한 혼인 질서가 지켜졌음을 보여 준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비쳤다. 미실은 전군과 더불어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 ‘해(解)’는 노래의 한 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해와 단해가 있겠는데, <청조가>는 두단으로 되어 있다. <청조가>의 문단 구분과 해석에 정연찬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하여 이르기를 :
[청조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 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 12세 풍월주 보리공조에는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 궁주를 호신으로 삼은 예가 나오고 있다.
되어 호신護神의 神은 일부분이 보인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 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이화공二花公이 감싸안고 슬퍼하며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하였다. 이에 사다함이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이에 이화공이 태후에게 정하기를 청하니, 태후가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하였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기를 “사다함 종형≪ꏚ질이다. 당시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래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다가 죽었습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 마디를 들어 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하였다. 세종이 옳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랑을 부제로 삼았다.
[미실의 꿈]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과연 미실이 꿈에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하였다. (미실이)공에게 아뢰니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한 왕족이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이끌어 준 것이다. 그 때 동(륜)태자가 이미 장성하였다. 태후는 (태자를) 만호공주萬呼公主와 짝지어 진골 정통을 잇고자 하였다. 사도황후는 대원 신통大元神統을 잇고자 하여 몰래 (미실과) 의논하여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后로 삼을 것이다”하였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고 태자와 상통相通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미실을 들어오게 하여 색공色供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미실은 음사陰事 후비(后妃)와 여관(女官)이 밤에 군주의 부름에 응하는 것, 방사(房事)를 의미한다.
를 잘했기 때문에 총애가 날로 중하여져 황후궁 전주殿主에 발탁되었는데, 그 지위가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하였다. 세종은 이에 출정할 것을 구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원화의 부활]
미실은 이에 설원랑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으며 세종의 일을 대신토록 하였다. 총애를 믿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 미생과 (정을) 통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여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가졌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하였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여 “옛날 선제先帝들은 첩을 원화 …. 총첩寵妾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습니다. …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고 있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 … 기쁘게 여겨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으며, 설원(랑)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 풍월주의 부인이 화주가 되어야 하나, 여자인 미실이 원화가 되었기에 설원랑의 어머니인 금진을 화모로 삼았다.
로 삼았다.
이에 세종은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서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하였다.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고 울며 물러가지를 못하였다. 제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를 통솔하여 조알케 하였다. 대왕과 전주殿主는 함게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燕饗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 진흥왕 29년(568)부터 진흥왕 (571)까지 사용한 연호.
이라 하였다. 이 날 밤, 제와 미실은 남도의 정궁正宮에서 합환을 하였다. 낭도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제와 원화가 난간에 다달아 구경을 하였다. 낭도들이 각기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서 손뼉치고 춤추며抃舞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하였다. 제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파고들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사도)의 존귀함이라도 이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채으로 도와 주는 때문이라고 하였다.
[동(륜)태자의 죽음]
미실은 본래 동태자銅太子를 … 하였는데 정숙한 어머니가 전주로 들어가니, 제가 백 년 후 …할까 염려하여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서로 이어 만났다. 태자는 …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미실은 심하게 많은 것이 드러날까 염려하여 미생과 의논하였다.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하였다. ꏅ자와 더불어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태자銅太子가 보명궁宝明宮의 큰 개에 물리는 일 오사(獒事). 큰 개(키가 4자가 넘는 개, 맹견)에 려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로 인하여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 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 …. 대왕 또한 새어 나온 말을 얻어들은 바로는 미실이 방탕하여 …이 없어 …. 세종이 부름을 받고 들어와, 미실이 원화에서 물러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세종을…하여 다시 하였다.
세종이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은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말하기를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세종은 이에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다. 그 때 금태자金太子 진흥왕과 사도부인 사이에 태어난 금륜태자를 이름. 『삼국사기』진지왕 즉위조에는 ‘사륜(舍輪)’으로 나오고 있고 혹은 ‘금륜’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삼국유사』왕력편에도 ‘사륜’이 먼저 나오고, ‘일작 금륜(一作金輪)’이라고 하여 ‘사륜’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사륜이 없다. 이는 ‘금륜’이 타당한데, 후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초 자료가 된 사료에 획이 변경되어 ‘사륜’으로도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미실을 좋아하여 설원ㆍ미생 등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고 방외우方外友 신분을 떠난 친구를 의미한다.
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하여 깨끗하게 살 것(淨業, 즉 念佛)을 공언하였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금태자와 더불어 후사後事를 약속하였다. 제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들여 의논하였다.
[진지왕의 즉위와 폐위]
제가 죽고崩 금(륜)태자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인하여 미실을 받아 들였는데 세상의 여론으로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진지왕은) 또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는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거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태자의 아들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시키니, 이이가 진평대제眞平大帝이다. 제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後宮의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화랑중의 화랑 세종]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 난시에는 싸움터에 나가서 장군이 되고, 평상시에는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함.
하였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하였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한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하여 말한다 :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세계 : 어머니는 지소태후인데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이고 법흥왕의 딸이다. 처음에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대왕 대제를 낳았다. 법흥대왕의 유명으로 영실공을 계부로 맞이하여 황하공주黃하公主를 낳았다. 영실공이 멀리하지 않았는데 …. 권신權臣들이 물리쳤다. 이에 병부령兵部令 『삼국사기』직관 上에 따르면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에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에 1인이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병부령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진흥왕 5년(544) 이전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을 …. … 숙명공주 및 공公…. 태종苔宗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며 곧 습보공習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인데, …의 딸이다. 습보공은 곧 내물왕의 손자이다.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즉위조에는 지증은 내물왕의 증손으로 나오고 있고 습보 갈문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 따라서 『화랑세기』에 나오는 습보가 내물왕의 손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에 비하여 『삼국유사』왕력편에는 지정(智訂)마립간의 아버지가 눌지왕의 동생인 기보 갈문왕(期寶葛文王)이라고 나오고 있어 『화랑세기』의 기록과 다름을 알 수 있다.
지소只召의 어머니는 보도황후保道皇后이며 소지왕의 딸이다. 보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인데 내숙공乃宿公 『삼국사기』3, 신라본기 3 조지마립간 즉위조에는 내숙(乃宿) 이벌찬의 딸로 나오는데 비하여 『삼국유사』왕력편에는 기보갈문왕의 딸로 나온다. 여기서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의 딸이다. 선혜의 어머니는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鳥生의 어머니는 아로阿老이고, 아로의 어머니는 내류內留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光明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모紅帽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옥모玉帽이다.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의 인통姻統 신라 시대에 왕비를 배출하는 계통으로, 철저하게 모계로 그 계통이 전하여졌다.
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하였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 정통 신라 시대에 황후를 배출하는 혼인 계통을 의미한다. 당시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은 여계 계승의 원리로 이어졌다. 이러한 여계 계승의 원리는 부계 계승을 거울에 비춘 것 같이 대칭되는 원리를 보여 준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계에 의하여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이 정해지고, 한 대에 한하여 그러한 계통을 이었다. 그 아들들은 다시 그 어머니의 계통에 의하여 계통이 정해졌다. 따라서 남자들은 부자간에 계통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서현은 그의 어머니가 대원 신통이었기에 그 계통을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김유신은 서현의 부인이자 유신의 어머니인 만명부인이 진골 정통어있기에 진골 정통이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용춘과 김춘추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용수ㆍ용춘의 아들인 김춘추는그 어머니가 진골 정통이었기에 진골 정통이 되었다. 한편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계승에서 남자들이 한 대에 한하여 그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던 것처럼, 선덕왕ㆍ진덕왕과 같은 영왕도 한 대에 한하여 부계 가계의 성원권을 가조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라 한다. 옥모부인은 곧 소문국召文國 벌휴왕 2년(185)에 신라에 병합된 소국이고, 그 위치는 신라의 문소군(聞韶君)이고 고려의 의성부(義城府)이며, 현재의 의성이다.
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이 아니다. 사로국 형성 이래 만들어져 온 신분제를 바탕으로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여 골품제를 편성했다고 보아 왔는데, 그 이전에도 진골이 있었을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
7세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이다. 금진낭주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이로 낭주娘主와 통通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 하였다.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 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너의 낭도를 잘 타일러 보냈다”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사람들에게 몸을 굽히고 재산을 풀어 주어 사람을 위로 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으나 아직 미흡함이 있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공毛郞公의 과처寡妻인 준화낭주俊華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 지 18년이었다.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 설웅薛雄을 낳았다.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위화랑공魏花郞公의 손자이다”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원랑은 평소 미실과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준화俊華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준화俊華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동태자와 통通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금태자에게 (몸을) 바치려고 하였다. 설원이 저지하며 “동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이 아는데, 또 금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하니, 이는 신라 시대에 남녀 관계가 난잡한 것만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준화가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하였다.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으나,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이 무슨 도리인가”하였다.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졌다.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모 미모美毛라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
[문노]
그 때 문노文弩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位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 이 때에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請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崩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진지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부인知道夫人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도의 아버지 기오공起烏公은 문노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 풍월주가 아닌 국선의 임명을 왕이 한 것을 볼 수 있다.
삼고 비보랑秘宝郞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협기)이 많았다.
[호국선과 운상인]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 하고 속세를 떠난 유람(청유)을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도文徒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고 하였고, 설도薛徒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骨品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도를 많이 따랐다. 화랑도에 파가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진지왕의 폐위]
진지대왕眞智大王은 미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思道)가 대원 신통이었기에 진지 역시 대원 신통이었다. 미실도 그의 어머니 묘도가 대원 신통이었기에 진지왕과 같이 대원 신통이었다. 그에 비하여 진평은 진골 정통인 만호의 아들로,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다. 진지왕과 진평왕은 각기 대원 신통과 진골 정통으로 계통을 달리하였다.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思道太后가 걱정을 하다가,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 진지왕의 폐위는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문제가 아니라, 왕으로서 정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폐위되었음을 알 수 있다.
노리부공弩里夫公 『삼국사기』4, 신라본기 4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노리부가 진지왕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상대등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思道의 오빠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 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 개의 도徒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 당시 왕의 폐위에 화랑도가 개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ㆍ우봉사화랑左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 화랑도가 원화, 상선, 아선, 좌ㆍ우봉사화랑 등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는 미천한 사람으로 고관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초택)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 일반 백성들도 낭도가 되어 활동을 하면 관등을 부여받고, 관직을 갖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선과 풍월주]
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로써 선도仙道의 스승(어른)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랑의 도徒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으나, 설원이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하므로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 주도록 하였다. (이에) 문노가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가?”하니, 설원은 “국선이 비록 전 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전군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師兄-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므로 감히 거역할 수 없다”하였다. 문노가 “궁주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臣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는가?”하고 뒤를 이었다.
[도맥과 통맥]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稱臣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과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이 때 세종이 미실에게 묻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脉으로는 스승이고 통맥通脉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하였다. 도맥(道脉)은 선도(仙道)의 맥을 뜻하고, 통맥(通脉)은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인통(姻統)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실이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며,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닙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며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자질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符를 주며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 이에 부서簿書 관청의 출납전, 관청의 문서를 의미한다.
를 주며 말하기를 “네 …을 욕되게 하지 말라”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劒仗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天ㆍ地ㆍ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그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하니, 설원이 절하여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寵主의 소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문노도의 불평]
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仙花 국선화랑을 의미한다.
라 하였다. 문노의 도徒에 불평하는 자가 있어 문노에게 일러 “선화가 먼저 사師가 되었다가 후에 제弟가 된 것은 궁주가 팔아 먹은 것이 아닙니까?”하니,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궁주는 전군이 받드는 바이다. 어찌 감히 말이 있을 수 있는가?”하였다. 이에 그 도徒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대개 문노의 뜻은 미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이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문노는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私臣頭上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彌勒仙花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미실과 설원랑의 죽음]
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죽었다卒. 건원은 신라 법흥왕 때의 연호이고, 건복은 신라 진평왕 때의 연호이다.
그 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奇疾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설원랑의 자녀]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 준화낭주俊華娘主는 장자인 웅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嫡女인 정금낭주淨金娘主를 낳고 죽었다. 미실궁주가 개원낭주開元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 개ꏅ(開ꏅ)와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미실궁주 …. … 보종전군宝宗殿君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난ꏅ(蘭ꏅ)…. 양약공주兩若公主는 곧 나의 조모祖母이시다. 잉피仍皮 …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설씨薛氏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 잉피, 원효로 이어지는 설씨 집안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설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 설씨 집단과는 그 계통이 다름을 신라인들이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 보다 앞섰다.
찬하여 말한다 : 미실의 신하이고 선화仙花의 시작이다. 불문佛門에 의탁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훌륭하도다! 깨끗한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인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
세계 : 아버지는 설성공이며, 그 출신을 알지 못한다. 그 선조는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공虎珍公의 후손이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從母姓. 신라 사회는 부계제 사회여서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를 알기에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모를 때 이와 같이 종모성(從母姓)할 수도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세계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설성이 구리공에 의하여 출세의 길이 열렸음을 볼 수 있다.
어머니는 빼어난 미녀로서 일찍이 남도南桃에서 유화遊花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相通을 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 공이 자라자 화랑의 놀이를 좋아하여, 매일 냇가에서 아이들과 화랑의 놀이를 익혔다. 구리공이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 그 아이의 생김새를 기특하게 여겨 불러 그 집을 물었더니, 곧 한 작은 민가 小民家는 신분이 평민 백성에 해당하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였다.
그 어머니는 천복賤服을 입고 보리를 찧고 있었다. 맨발을 손으로 가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구리공이 가까이 가서 위로하며 그 남편에 대하여 물었다. 목이 메여 울며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절구공이를 적시었다. 한참 후에 “첩은 나이 16살에 유화로서 좋은 낭도를 만나 한번 관계를 가져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관계를 가질 때 그 낭도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는데, 다만 출정을 하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습니다. 첩은 따르지 않고 무릇 14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부모 또한 죽고,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너는 아직 나이가 적은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하니, 그 어미가 말하기를 “30살 된 여자가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직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다시 “너를 보니 천한 옷은 비록 더럽지만 얼굴이 수려하며 살결이 부드럽고 희니 더러운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고, 마치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아서 도리어 사랑할 만하다. 네가 말한 좋은 낭도는 그 아름다움이 나와 비교하여 어떤가?” 하니, 어미가 말하기를 “귀인께서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첩의 추함이 어찌 감히 고귀한 분을 평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좋은 낭도라는 사람 역시 평범한 낭도에 불과하니 …. 귀인과 비교하여 만 분의 일이라도 되겠습니까?” 하였다.
구리공이 “나는 … 그 좋은 낭도인즉 그 낭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마땅히 …”라 하니, …“귀하신 분이 어찌 농담을 하십니까? 첩은 이것이 무엇 … 그 낭도가 살았다면 반드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은 것이 오래된 것은 정征에서 죽은 것입니다. 첩은 기다리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됩니다”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너의 길일이다. 보리밥을 지어 올 수 있는가?”하니, 어미가 기뻐 말하기를 “천한 음식을 받들어 올리기에 부족하지만, 감히 명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에 (공이) 한상에서 야채로 된 음식을 다 먹고 말하기를 “우리 부인吾婦의 음식이 심히 맛있다”하였다. 마침내 이끌어 사랑을 하려 하니, 어미가 간하여 멈추게 하며 “첩은 몸을 깨끗이 한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범하고자 하였는데, 첩의 의지와 기개를 굴복시키기 어려워 서로 경계하여 보호하여 준 까닭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루아침에 그것을 그르치면 마을의 무뢰한 자들이 당연히 …이르면 내일 어떤 놈의 소유가 될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되면 모자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귀한 분이 비록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감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이에) 구리공이 웃으며 “나는 곧 비량공比梁公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를 첩으로 삼는데 감히 누가 너를 범하겠는가?”하니, 어미가 크게 놀라 “뜻하지 않게 오늘 이같은 큰 경사가 있습니다. 첩은 감히 여러 말을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어르신 스스로 좋을 대로 하십시오”하였다. 곧 목욕을 하고 사랑을 받았다. 구리공은 새로운 집을 짓고, 그 향鄕을 봉하여 주었다. 향인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 향을 ‘대행大幸’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하여 설성공은 구리공의 신하의 지위를 얻었다. 구리공은 그 출신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급간 설우휘薛優暉의 가문에 소속시켜 벼슬길을 열고 ꏅ지(ꏅ知) ‘오지(烏知)’ 또는 ‘사지(舍知)’일 것이다.
로 발탁하였다.
구리공이 금진낭주와 통通하게 되자, 설성공은 그 사이에서 명을 받들었다. 금진낭주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몰래 통하였다. 구리공이 전쟁에서 죽자, 곧 더불어 함께 살아 공을 낳았다. 설성공의 어머니 또한 구리공의 서자 3인을 낳았다.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금진의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오도낭주吾道娘主이다. 오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妙心郞인데 곧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색사色事 남녀가 육체적인 교접을 하는 일을 의미한다.
를 잘 하여 후궁들과 더불어 상통相通을 많이 하였다. 선혜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에 따라 약속하여 … 삼생三生 …. 묘심妙心이 복주伏誅 형벌에 복종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되었다. 선혜황후는 진골 정통으로 … 제주祭主로 삼았다. 묘심랑이 …에서 먼저 나오고 …. 남해왕의 종자從子 姨從, 조카, 형제의 아들을 의미한다.
의 후손이다.
[8세 풍월주 문노]
[가야국의 문화공주 또는 야국왕의 공녀]
8세 문노文弩는 비조부공比助夫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 문화공주文華公主다. 혹은 문화공주는 야국왕野國王이 바친 여자貢女라고 한다.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왕의 공녀라는 설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밝혀 주는 단서가 된다. 야국 왕이 왜왕이라고 하면 왜국에서 신라에 왕녀를 공녀(貢女)로 바친 것이 되고, 그와 같은 공녀를 신하의 첩으로 삼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와 왜국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한 단면임에 틀림없다. 설령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 왕의 왕녀인 공녀가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관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밝힌 것은, 당시 신라인들이 신라와 왜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관계를 밝힌 것이 틀림없다.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ㆍ북으로 하였는데, 당시 신라의 세력은 가야 소국들을 남ㆍ북으로 나눌 정도였음을 잘 보여 준다.
이뇌異腦를 북국 왕으로 삼고 양화공주兩花公主로 처를 삼았으며, 청명靑明을 남국 왕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은 야국 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가야의 외손]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였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자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 하여 자주 사신을 갔다. 비조공比助公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가 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건원建元 건복(建福) 2년(585)이 되면 시간적으로 너무 늦다. 따라서 건복 2년은 건원(建元) 2년 (537) 법흥왕 24년이 타당하다.
2년 (537) 제가 장차 영실공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 … 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문노)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하였다.
[불신지신不臣之臣]
옥진궁주가 …을 근심하여 … 화랑에게 보호하게 하였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 아직도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 불신지신(不臣之臣)은 신하로 여기지 않는 신하를 의미한다. 사다함이 문노를 생각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 일정한 소속 없이 필요에 따라 아군을 지원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군대. 또는 일정한 부서를 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
입니다”하였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北漢에 나가 고구려를 쳤다. 7년 국원에 나가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주시오”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와 백제를 치는 데 여러 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 골품제 사회에서 모계가 가지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級湌의 위位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고 하자, 세종공이 이르기를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하였다. 이에 작爵을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 편을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 궁주가 불러서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낙하지 않았다. 진지眞智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湌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진지의 폐위와 8세 풍월주]
세종이 사도의 밀조密詔를 받고 장차 진지를 폐위시키려 하며 공을 불러 묻기를 “… 위에는 발탁하여 등용한 은혜와 또한 황후와 더불어 근친이 되어 … 조詔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신은 … 명으로 …할 뿐입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겠습니까?”하였다.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으로 아찬阿湌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위位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통일 대업]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 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 삼국 통일의 대업이 문노의 화랑도가 가지고 있던 사풍(士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활동으로 그와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화랑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
[낭도 부곡]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 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 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 봉사랑前方奉事郞 전방 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또 진골화랑眞骨花郞, 귀방 화랑貴方花郞, 별방 화랑別方花郞, 별문 화랑別門花郞을 두었고, 12ㆍ3 살의 빼어난 진골眞骨 골품제 신분의 진골 신분을 가리킨다.
및 대족大族 진골과 같은 신분은 아니지만 세력을 갖고 있고, 문노와 같은 아찬 이상의 관등을 갖가 되면 골품을 얻어 진골로 될 수 있는 세력을 가리킨다.
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左花郞 2인, 우화랑右花郞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ㆍ문사文事ㆍ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ㆍ악사樂事ㆍ예사藝事를 맡았으며,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ㆍ제사祭事ㆍ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문노의 아내 윤궁]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랫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國仙이 됨에 이르러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으로 삼았다. 윤궁은 황종공(거칠부)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궁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공주를 낳았다.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공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했다가 돌아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은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나의 동생인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공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 신부늘 논하지 않고 위품을 논한 것을 일정한 위품을 갖게 되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헤아려진다. 특히 삼국 통일 이전 골품제 하에서는 문노의 예와 같이 아찬 이상의 일정 관위에 오르면 골품을 얻게 되어, 진골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ㆍ고 시대는 골품 신분으로 모든 신라인을 편제하지 못하고, 그와 같은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을 논하겠는가?“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과 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내가 비록 뜻이 있으나 다섯 가지 의롭지 못한 것을 어찌할 것인가. 비보(랑) …. 문노는 위가 낮다. 그러므로 윤실과 더불어 자子 …를 꿇고 …. 나의 마음은 사철 내내 만족하지만, 지위가 낮으면 진종전군이 삼대의 영석榮席에서 나를 총애하니, 지금 늙어 … 사랑할 만한 것이 없으나, 누차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르는데, 정군貞君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세 번째 불의다. 압지가 재상의 신분으로 나를 마땅히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불의다. 금태자가 형군(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다섯 번째 불의다. 이 다섯 가지를 풀면 나는 문노에게 갈 것이다“하였다.
비보가 돌아와 공에게 말하니, 공은 “낭주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하였다. 이 때에 진종眞宗이 이미 세상을 떠나자 사절四節의 의리가 끊어졌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 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이에 공과 더불어 미실의 궁에서 서로 보았다. 공이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仙母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내가 군君을 그리워한지 오래 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해 3자와 3녀를 낳았다. 대강大綱ㆍ충강充剛ㆍ금강金剛이라 하였다.
[윤궁의 충고]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선모仙母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이에) 윤궁이 간하기를 “군君은 세종전군의 신하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함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殿君이 궁주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君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의 낭도가 만약 군을 옳다고 하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하였다. 윤궁이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이 오랫동안 전쟁터시석矢石에 있어서, 오직 강철 같은 심장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이 한 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 있겠습니까. …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하였다
[대사大私와 공公]
공이 탄식하며 “…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드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 … 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되고, …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臣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 무리를 … 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소?”하니,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저이 아니면 군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써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써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자기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이 섞인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 주십시오”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어리석을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두터워졌다. 공은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들여 주었다.
[문노의 자녀]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 금강은 태종무열왕 2년(655) 정월에 이찬(伊湌)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삼국사기』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2년 춘정월). 그리고 태종무열왕 7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금강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삼국사기』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년 춘정월). 상대등은 군신회의(群臣會議)인 대등회의(大等會議)의 의장으로 가장 높은 관직이다.
(윤강允剛)ㆍ현강玄剛ㆍ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득골품得骨品]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하면 공은 듣고 웃으며, “나도 지난날 전군이 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 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官位가 이찬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으니, 이는 아찬이 되어 윤궁과 같은 진골 신분이 된 것을 의미한다. 중고 시대에 골품 신분제의 운용 실상을 볼 수 있다. 당시 모든 사람이 골품을 가졌던 것은 아니나, 공을 세워 아찬의 관등을 갖게 되면 골품을 얻었다는 사실은 골품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삼국 통일 이후에는 신라인들이 골품 신분으로 편제되어, 신분적인 유동성이 크게 줄어든 것이 아닌가 한다.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하였다. 미실이 과연 제에게 청하자, 조詔를 내려 윤궁을 공의 정처正妻로 삼았다.
[포석사와 혼인]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 포석정이 포석사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포석사에는 왕들이나 문노와 같은 중요한 사람들의 화상 등이 있음이 틀림없다. 『삼국사기』12, 신라본기 12 경애왕 4년 9월에는 견훤이 고울부(영천)에 침입하였는데, 겨울 11월에 왕경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 때 경애왕은 비빈(妃嬪) 종척들과 함께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논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기록의 잘못일 것이다. 견훤이 가까이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포석사에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빌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에 나아가 크게 …,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었으니 …의 귀함이 어찌 가히 이 경사에 미치겠습니까”하니, 윤궁이 말하기를 “첩의 몸은 … 이에 같은 골의 남편으로 갖게 되었으니, 결혼식을 해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은 첩의 신하였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써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였다.
[영웅과 주색]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遊花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허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침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늘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 질 것이다”하였다. 윤궁이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지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 행하기를 청합니다”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침첩枕妾 한 명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文仙花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낭주와 같아야 한다”하였다.
[사기士氣의 으뜸]
포석사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士氣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각간으로 추증追贈하고, 관위를 각간으로 추증하여 올린 것은 그 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궁의 선단仙壇 화랑들을 모신 제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에서 대제를 행하였다. 신궁의 기능 중 왕이 아닌 문노와 같은 사람을 위한 대제를 지낸 것을 볼 수 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 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 또는 “낭주 또한 이 해에 공을 따랐다. 상선(上仙)은 공보다 10살이 적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갑자기 상선보다 10살이 적었다는 사실이 나오는 이유가 이해하기 어려워 위와 같이 해석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 가야의 외손이고 사기의 으뜸으로, 선의 꽃이 되니 우리 나라의 위엄을 떨치다.
세계 :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는 비지比知이다. 호조의 어머니는 곧 등흔공登欣公의 누이인 조리助里이다. 또한 …이 되다. 선혜황후는 묘심의 일로 폐하여 살게 되고 군君…. …감과 상통하여 비조부와 양화공주를 낳았다. 비조부 또한 호조공의 첩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하여 공을 낳았다. 문화공주는 북국 왕北國王의 딸이다. 또는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역사 기록에 그 세계가 없다.
[9세 풍월주 비보랑]
<비보는 기사년(549)생이고 임인년(582)에 화랑의 주主가 되었다.>
9세 비보랑秘宝郞은 비대전군比臺殿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實宝郎主인데 곧 미진부공의 누이였다. 공은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함게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우고,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쎄 보좌하였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副弟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의 법제를 힘써 따르고 미천한 자를 발탁하고 약한 자를 구하는 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당시 미생공은 설원공의 부제로서 오랫동안 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하였다. 공이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하였다. 때는 건복建福 2년(585) 춘정월이었다.
[혼인과 자녀]
공은 노리부공弩里夫公의 딸 세진낭주細珍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랑細好郞을 낳았고 딸 세미細美와 세신細新을 낳았는데, 병으로 죽었다. 다시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德明公主를 아내로 맞았다. 덕명공주의 어머니는 곧 가야국 월화공주이다.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붕부ㆍ보부ㆍ석부ㆍ보주ㆍ진주이고, 딸은 홍주ㆍ녹주ㆍ명주였고, 서자는 유오랑ㆍ유매ㆍ가기ㆍ수동 등인데,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고 명성이 있었다. 유오랑은 공의 첩 유지柳枝의 소생이다. 유지는 검술을 잘 하였고,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며 난도亂徒를 많이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모아 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18세 나이에 그 굴을 찾아가 생포하였다. 아마 유지가 미모에다 뜻이 높아, 공의 높은 풍모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공은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려 모두 풀어 주었다. 유지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다만 그대를 좇아 죽기를 원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하였다. 마침내 첩이 되었다. 유오랑은 어머니의 풍모를 갖추어 용모가 맑고 빼어났고 … 또한 … 18살의 나이에 지명법사智明法師 신라의 승려. 진평왕 7년(585), 중국 진(陳) 나라에 들어가 불법(佛法)을 구하고, 602년에 귀국하였다. 왕이 그의 계형(戒行)을 존경하여 대덕(大德)으로 삼았다.
를 따라 진陳에 들어가 …을 구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들을 가르쳤으니, 그 공 또한 크다. …
[국가의 태평]
… 국가가 태평하고 곡식이 익고 백성이 배부르게 되었다. 모두 공이 …의 주主라고 생각하였다. 미생공이 취임함에 이르러 곧 봄에 가물어 곡식의 씨를 뿌리지 못하였다. 제가 반찬의 수를 줄이고 죄수를 풀어 주자 비가 왔다. 사람들이 미생공이 욕심이 많은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대세의 아픔]
처음에 공은 동대공冬臺公의 아들 대세大世가 뛰어난 재주가 있으므로,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實宝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骨宝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랑諸文郞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하였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이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과 완적阮籍 중국 삼국 시대 위(魏) 나라 사람으로서 죽림 7현의 한 사람. 사마의(司馬懿)의 종사중랑(從事中郞). 봉은 관내후(關內候), 뒤에 소(昭)의 대장군, 종사낭중. 보병주(步兵廚)에 술 3백 석이 저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보병 교위로 자원할 만큼 술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에 비교하였고, 술을 마시면 울었다.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다시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세상에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 주고,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하였다. 잠시 괜찮게 되는 것 같았다. 미생공이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는 (미생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 왔다고 욕하였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우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
[열선각列仙閣]
공이 힘써 달래었지만 마침내 당파가 나뉘었다. 공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며 상선의 지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문노공이 허락하지 않고 “선도仙道의 우두머리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인데, 그대가 만약 물러나면 무사의 씩씩한 기운을 장려할 수 없다”하며, 권하여 …에 들어가게 하였다. 공은 제문랑을 해직하였다. 얼마 안 되어 미생공 또한 어려운 것을 알고 …. 덕명의 장자인 붕부가 돌아왔다. 골보는 생각하기에 … 죄를 면제받았다.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선정仙政을 모두 … (미)실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미실 또한 파의派議를 염려하여, 제 상선上仙과 상화上花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짓고 대의大議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파의派議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공 또한 미실의 신臣으로 배반할 수 없었으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었다. 미실이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이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 보리공ㆍ서현공ㆍ용춘공 등은 모두 공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세호랑과 선로仙路]
공의 아들 세호랑은 오랫동안 화랑으로 있었는데, 뽑히지 않았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로仙路는 나의 가물家物이 아니다. 단지 공을 세워 백세에 이르는 것이 옳고 아비로서 명위를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하였다. 공은 끝내 세호랑을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않게 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어렵게 여겼다.
건복建福 20년(603) 8월, 고구려가 침범하여 왔다. 제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공과 세호랑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여 한수漢水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제가 공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한 일이 없습니다. 곧 제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하였다. 제는 이에 세호랑을 발탁하여 아찬阿湌의 위를 주고, 대당大幢을 장악토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다. 또한 너의 어머니에게도 부끄럽지 않다”하였다. 대개 세진은 늘 공에게서 검을 배워 세호랑을 가르치면서, “처는 지아비의 일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말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죽을 때까지 검도를 버리지 않았다. 문하에서 나온 무리 중에 출세한 사람이 많아 사방으로 나아가 다스렸는데, 공은 늘 정사에 삼갈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죽자, 모인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다! 공의 별전別傳이 세상에 돌아 다니는 것이 많은데, 거짓된 것이 많아 다 기록하지 않는다. 전해지고 있는 9세 풍월주 비보랑의 별전에는 황탄(荒誕)한 것이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화랑세기』가 믿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을 보여 준다.
찬하여 말한다 : 법흥의 손이고 진흥의 사위이다. 위가 상선上仙에 이르렀고 검도劍道로 크게 떨쳤다. 무사의 기풍이 일어났고 백세의 스승이다.
세계 : 아버지는 비대 각간인데 법흥의 서자이다. 비대 각간의 어머니는 옥진궁주이다. 옥진이 영실공에게 시집갔다. 당시 법흥이 친히 길례吉禮 고대 5례 중의 하나. 신을 제사하는 예(禮)를 의미한다.
를 행하였는데, 그 아름다움을 보고 …하여 총애가 더욱 두터워졌고 비대 각간을 낳았다.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로서 전군의 지위를 막고자 하였다. 비대공이 자라자 … 헐뜯는 자들이 감히 다시 말을 못 하였다. 비대공은 미진부공의 친 손아래 누이인 실보낭주를 부처副妻 정처가 아닌 부처가 흥미롭다.
로 삼아 공을 낳았다. 실보는 곧 삼엽공주의 딸이다. 삼엽은 곧 벽화황후의 딸이고, 아버지는 곧 법흥대제이다.
[10세 풍월주 미생랑]
<미생은 경오년(550)생이고 을사년(585)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10세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공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여러 번 불러 입궁하여 동태자ㆍ금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다. 만덕萬德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는데, 제(진흥왕)가 문초하려 한즉 후后(미실궁주)가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풍류나비風流蝶 풍류접(風流蝶)은 미실과 미생의 집안이 대원 신통으로, 왕의 혼인 대상을 배출한 집안의 유풍으로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하였다. 제는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을 못 하였다.
[낭도 미생]
미실이 공에게 명하여 사다함공의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 없었다. 미진부공이 쫓아 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어찌 나의 아우를 한 번에 내칩니까?”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아침에 일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인가”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공은 검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으므로, 사다함이 곤란해 하였다.
[뇌물]
세종공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그 위를 전하여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하였다.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미실이 설화랑을 총애하게 되자, 공에게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공은 부제가 되지 못하였다.
[36살 풍월주]
이에 이르러 곧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 이미 36살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사다함공이 열여섯 살에 (풍월)주가 되자 천하가 명예롭게 여겼는데, 내가 열세 살에 전방화랑이 되자, 천하가 더욱 명예롭게 여겨, 나이 열여섯 살 이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서른여섯 살에 된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 네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에 대한 총애가 식으면 누가 하종夏宗을 위한 계책을 마련할까?”하였다. 이에 하종을 부(제)로 삼았다.
[화랑도의 5파]
그 때에 낭도들간에는 아직도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統合元流라 불렀다. 임종ㆍ대세ㆍ수일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文弩派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 신통大元神統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 일파美室一派인데, 하종ㆍ구륜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이다. 진골 정통인 자를 받들려고 하는 자들이니 곧 문노 일파로,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가장 권력이 있으며 옛 규정을 지키는 자들이다. 보리랑ㆍ숙리부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렇지만 문노 또한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종과 감히 다투지 않았다. 통합파統合派는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또한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공은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또 한 파가 있어 정숙태자貞肅太子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圓光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는 문노정파文弩正派와 통합파 중에서 혼성된 자들로서, 이화류二花流라 하였다. 또 한 파는 천주공天柱公을 (풍월주로) 세우고 서현랑舒玄郞 무력(武力)의 아들이자 김유신의 아버지. 숙흘종의 딸 만명(萬明)과 혼인하여 유신을 낳았다.
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곧 통합파 중 가야파加耶派이다. 10세 풍월주인 미생이 재위하고 있을 때 화랑도는 5개의 파로 나뉘었다.
1. 통합원류(통합파) : 임종․대세․수일 등이 중심.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파로 문 노파 중 가장 용맹한 자들이며,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미생공이 이를 제압하지 못 함.
2. 미실일파 : 하종․구륜공 등이 중심. 대원 신통인 자를 받들려고 하는 파.
3. 문노일파 : 보리랑․숙리부 등이 중심. 진골 정통을 받들려는 파로 지소태후의 명을 따르고 가장 권력이 많아 옛 규정을 지키려는 파. 문노가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에 하종과는 다투지 않았음.
4. 이화류 : 정숙태자를 풍월주로 삼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는 파. 문노정파 및 통합파 중 혼성된 자들로 이루어짐.
5. 가야파 : 천주공을 풍월주로 하고 서현랑을 부제로 삼으려는 파. 통합파 중의 가야파.
[천간성]
공은 3년 동안 (풍월주)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였다. 이에 하종공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천성을 길렀다. 공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랫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또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선문仙門 여기서 말하는 선문(仙門)은 화랑도와 관련된 것이고, 도교 등과는 관계가 없다.
에 있어,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은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미생기美生記』에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하였다.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 공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공을 천간성天奸星 하늘의 간사한(간음할) 별을 의미한다.
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시첩의 수가 …인데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다.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 진陳나라의 사신이 …상국上國에도 또한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 상국의 사절이 되어 그 제도를 두루 수집하여왔다. 까닭에 … 공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옥배와 노비]
공의 종이 공의 옥배玉盃를 훔쳤다. 공이 막 처벌하려고 하자, 종이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공의 어머니가 보고 공을 꾸짖으며 “노비는 수족과 같고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 황후 또는 어머니의 친정 친척을 의미한다.
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의 재물을 가졌으면서도 사대부에게 겸손하지 않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하였다. 공은 이에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하였다 도둑질은 이내 그쳤다.
[어색漁色]
공은 일찍이 동태자銅太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漁色 다녔다. 그 때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공에게 알려 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辛를 맺었다. 태자가 죽고 나서, 공은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저택에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미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하였다. 미실이 곧 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하였다. 공은 이에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여자는 공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축재와 당두]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조주祖主 『삼국사기』38, 잡지 7에 집사성(執事省)은 본명이 품주(稟主)인데 혹은 조주(祖主)라한다 하였다. 조주라 부른 시기를 찾으면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자, 공은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들을 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하였다. 이에 공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여, 공이 조부調府 조부는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되었는데 진덕왕 5년(651)에 令 2인을 두었다.(『삼국사기』38, 잡지 7, 직관 상)
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잡았다. 제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하였다. 제는 이에 당두에게 대나마大奈麻 『삼국사기』직관 상의 조부조에는 조부의 경이 될 수 있던 관위는 병부대감과 같았다고 하는데, 병부대감은 ○○에서 아찬까지로 되어 있다. 병부대감이 될 수 있던 하한 관위는 기록이 탈락되어 있으나, 집사성의 차관인 전대등의 관등이 나마에서 아찬까지였던 것으로 보아 나마 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대나마의 관등을 가지고 당두가 조부의 경이 되어 문제가 없다.
를 특별히 주고 조부의 우경右卿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조부의 경은 2인이었는데 문무왕 15년(675)에 1인을 더하였다. 이에 당두가 경일 때는 2인의 경이 있었고, 그 중 한자라를 우경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관부의 복수 관직명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미생(550-609)은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고, 588년에 물러났다. 이에 미생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이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부의 영이 되었다는 사실은 문제가 없다.
으로 삼았다.
그의 처는 공의 세 아들을 낳았다. 공은 모두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오랫 동안 조부에 있으며 … 한 것은 당두의 힘이었다.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 집에서 당두와 바둑을 두었다. 당두는 바둑을 잘 주었다. 문득 … 술을 마셔 조금 취하자, 공은 흡족하여 “내가 너와 더불어 …하여 집안의 재산은 쓰기에 족하다.
[당두와 만세]
내가 너의 처와 더불어 천하와 국가를 위하여 이물을 번성케 하겠다“하였다. 대개 당두의 처가 아들을 잘 낳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두는 이내 틈을 타서 물러나 그 처로 하여금 공에게 사랑을 받고 아양을 떨게 하였다. 그의 처남 만세萬世 또한 공으로 인하여 발탁되었다. 공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두는 나의 자방子房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조부의 경운 2인이었는데 문무왕 15년(675)에 1인을 더하였다. 이에 당두가 경일 때는 2인의 경이 있었고, 그 중 한 자리를 우경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관부의 복수 관직명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미생(550-609)은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고, 588년에 물러났다. 이에 미생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이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부의 영이 되었다는 사실은 문제가 없다.
이고 만세는 나의 진평陳平 중국 전한(前漢)의 정치가로, 처음 항우(項羽)를 섬겼으나 후에 한 고조 유방(劉邦)을 섬겨 도위가 되었고, 여태후(呂泰后)가 죽은 후 주발(周勃)과 힘을 합하여 여씨 일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이다“하였다. 만세의 처제 또한 공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고, 노래를 잘 하였다. 공의 아들인 백생공과 통하였다. 공이 백생공에게 주려고 하자, 만세는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간하였다. 공이 ”그녀와 내 아이는 나이가 서로 같아 다시 해로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하였다. 마침내 주었다.
[호아령]
공은 아들이 많았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정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격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大堂으로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공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곧,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하고 물었다. 공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 주었다. 그러므로 여러 아들이 공을 사모하여 따랐다. 공은 매번 출근할 대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調府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복 26년(609)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60이었다. 공의 아들 백생白生ㆍ월생月生ㆍ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다.
찬하여 말한다 : 옥진의 손자이고 대원 신통이다. 아들이 백 명이고 낭도는 만 명이다. 풍족하고 부귀로운 아름다운 일생이다.
세계 : 아버지는 미진부이고 할아버지는 아시이고 증조는 선모善牟이다. 고조는 장이章伊인데 복호공의 서자이며 보미궁주 소생이다. 장이의 처는 수리인데 곧 미해공의 딸이다. 선모의 처는 보혜인데 습보공의 딸이다. 아시의 처는 삼엽공주인데 법흥왕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곧 소지황후인데 벽화ꏅꏅ이다. 공의 어머니는 묘도궁주인데 곧 옥진 …. 묘도궁주는 옥진의 딸이다.
옥진이 법흥의 총첩이 되어 …을 호령하였다. … 미생이 있어야 한다.
미생의 누이女兄 미실 또한 묘도의 딸로, 진흥의 …이 되어 천하를 30년 동안 …하였다. 공의 부귀는 이에 기초가 비롯되었다.
[묘도의 충고]
묘도는 사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부처와 같아서 공과 공의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공에게 일러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 색공지신(色供之臣)은 묘도와 삳의 집안이 왕에게 색을 바치는 집안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신라 시대의 담론 가운데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는 실례라 하겠다.
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하니, 공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和文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음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묘도의 아버지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수지공이니 곧 등흔공의 손자가 된다.
[11세 풍월주 하종]
<하종夏宗은 갑신년(564)생이고, 무신년(588)에 화랑이 되었다.>
11세 하종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묘도의 탄생]
당초에 법흥제法興帝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蹴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리운 눈으로 헝크러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의 손을 이끌며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하였다. 제가 “무슨 꿈인가?”하고 물으니, “칠색조가 가슴으로 들어왔습니다”하였다. 제가 웃으며 “7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嬪妾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하였다. 옥진이 좋아하지 않으니, 제가 말하기를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하였다. 옥진이 이에 기뻐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으니, 옥진은 제를 신통스럽다고 여겨 묘도墓道라 이름하였다. 묘도가 자라자 제가 약속한대로 사랑辛을 하였다. 그런데 작고 좁아幺窄 맞을 수 없었고, 또 제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 하였다. 이에 제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미실의 탄생]
그 때 미진부공이 어머니 삼엽공주三葉公主와 늘 궁중에 입시하여, 묘도와 전殿을 사이에 두고 머물렀다. 묘도가 바라보고 …(미진부공을) 사모하였다. 미진부공이 회랑을 지나가는 것을 틈타 … 들여서 상통하였다. 대상大相이 같이 동혈同穴 부부가 사이가 극히 좋은 것을 의미하고 부부가 죽은 뒤에 같은 구덩이에 묻힌다는 뜻이다.
의 …이 되기를 맹세하였다. … 왔다. 제가 죽자崩, 태후가 아시공과 가까이 하고자 하여 …을 허락하였는데,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 속에서 날아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침실에 가서 엿보았다. 그 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好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 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貴女를 낳을 것이다”하였다. 과연 미실을 낳았다.
[미실의 색공色供]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를 닮아서 백화百花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옥진이 “이 나의 아이는 오도吾道를 부흥시킬만 하다”라고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媚道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하니, 미실이 말하기를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는데, 어찌 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하였다. (미실은) 궁중에 이르러 태후의 아들 전군을 교태로 섬겼다.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을 못 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궁궐을 나가 집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개의하지 않고 사다함과 사통私通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태후는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융명肜明을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전군이 미실을 사모하여 병이 났다. 태후는 부득이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마침내 하종을 낳았는데, 전군이 미실을 애지중지하여 다시는 융명을 사랑辛하지 않으므로 융명은 노하여 궁궐 밖으로 나갔다. 공이 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미실은 사도思道의 명으로 태자에게 색공色供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
[잉첩 미실]
(제帝를) 사모하여 애태우는燕鸎 미실의 모습이 더욱 더 애처로웠다. 제가 후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는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미녀인데, 어찌 너의 잉첩 가까이 있어 시중드는 여자 종. 여기서는 사도를 도와 왕을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하였다. 후는 이에 미실을 3대(부ㆍ자ㆍ손)를 모시는 자리로서 제에게 추천하였다. 제가 한 번 사랑하고 두 번 사라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다시 융명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殿主의 이름을 내렸는데 … 후后와 … 사랑寵함이 천하를 뒤집을 만하였다.
[문서 참결]
제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 황후는 … 궁과 삼주三柱의 신神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전주는 문장을 잘 지었다 …. 제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결參決하여 그것이 옳은지를 …. 조야朝野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 신통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사지舍知 하종]
태자의 딸이 태어나자, 제는 알지 못하고 자기의 딸로 알고 애송공주艾松公主로 봉하였다. 공은 애송의 형으로서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는데, 사지舍知 사지는 관위로, 보수를 주는 기준이다. 3살인 하종에게 17등 중 13등인 사지를 준 것은 의미가 있다. 하종은 진골 신분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진골이 어떤 관등부터 갖게 되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의 위를 내렸다. 궁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애송의 벗이 되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공주가 울면 곧 따라서 울었다. 제가 이로 인하여 총애하였다. 반야般若가 출생하자, 공은 관위가 올라 대사大舍가 되었다. 난야蘭若가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나마가 되었다. 수종전군壽悰殿君이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대나마가 되었다. 이에 앞서 제는 공주 등에게 공을 형으로 부르게 하였으나, 공은 위가 낮아 감히 형으로 자청하지 않았다.
[하종전군]
이 때에 전군이 처음 태어나자, 제가 크게 좋아하여 공을 전군으로 봉하여 전주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전주는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겸양을 베풀었다. 그 때 삼호공三好公이 내질內秩 구체적으로 무슨 관직인지 알 수 없으나, 내성(內省)의 장인 사신(私臣)이 아닌가 한다.
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따져 말하기를 “사자私子가 전군이 되는 것도 이미 참람한데, 하물며 사자私子의 아들이겠습니까”하였다. 제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그만두었다. 미실은 이에 삼호三好를 불러 꾸짖어 “아재비는 나 때문에 내질을 관장하는데, 나의 아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삼호가 웃으며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급히 차며 기울어지고 서서히 이루어지면 완전합니다. 비록 전군이 아니더라도 또한 부마가 될 수 있습니다. 하필 제도를 넘어서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거스른 후에 가하겠습니까?” 하였다. 미실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자, 삼호는 내질을 사직하였다.
미실은 이에 영실공의 아들 노동弩同을 천거하여 내질을 관장케 하였다. 제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의 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하니, 미실은 마침내 기뻐하였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하였다. 제와 더불어 미실전주, 수종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의 품 안에 엎드러지며 말하기를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하였다. 제가 …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다만 두 전군뿐이겠는가.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하였다.
[어머니 미실]
이 날 밤 제는 …에서 잔치를 베풀어 … 친히 축하하고, 태자 이하 왕자, 전군 태자, 왕자, 전군으로 이어지는 왕의 아들들에 대한 위계가 나타나 있다.
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私通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하였다. 제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를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은 사배하고 일어났다. 제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山呼를 외치고 물러갔다.
[개에 물려 죽은 동륜태자]
당시 보명궁주宝明宮主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태자는 이에 장사 수인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일이 성사되었다. 그 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薨.
[미실의 출궁]
제가 태자의 종인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잡한 짓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위를 사퇴하였다. 사도황후가 간하여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하였다. 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가 친히 거등하였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하니, 제가 또한 받아들였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가 다시 미실을 전주로 삼고자 하였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공의 부자와 단란團欒한 즐거움을 갖고자 해궁海宮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안압지 근처의 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를 해신海神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 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미실의 입궁]
제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등하여 서로 보고 …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제와 더불어 …로 돌아갔다. 세종공을 병부 우령兵部右令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에 1인이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544)에 1인을 더하였으며, 태종왕 6년(659)에 1인을 더하였다. 이 때는 병부령이 2인이 있었던 시기로, 각기 우령과 좌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으로 삼아 위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가 … 보명궁주를 …하고, 신궁을 황후궁 좌원左園에 지어 … 모궁母宮 …. 입궁하여 공주와 전군의 벗이 되었다. 그 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 지 이미 수 개월이 되었으므로, 해산을 하고 입궁하겠다고 청하였다. 제가 허락하지 않자, 입궁하여 옥종공玉宗公을 낳고 제의 마복자摩腹子로 삼았다. 이로써 미실에 대한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미실은 심복들을 모두 다시 끌어모아 중요한 지위를 주었는데, 제가 모두 허락하였다. 또 세종공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살도록 하였다.
[진흥의 풍질과 미실ㆍ사도]
미실은 이에 사도황후와 함께 내정內政을 마음대로 하였고, 세종ㆍ설원ㆍ미생은 외정外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제는 풍질風疾 미치광이가 되는 병이나 풍병(風病)을 뜻하는데 풍병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로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ㆍ미실ㆍ보명ㆍ옥리玉理ㆍ월화月華 다섯 궁주 이들은 왕을 모시는 여자들로, 각기 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 정사는 모두 사도와 미실로부터 나왔다. 처음에 사도후와 더불어 미실은 삼생三生 전생(과거)ㆍ현생(현재)ㆍ후생(미래)를 뜻한다.
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가 자못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의 사랑辛을 받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힘써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후后와 통하였다.
[진지왕의 즉위를 둘러싼 내막]
제가 붕崩하자 사도ㆍ미실ㆍ세종ㆍ미생은 비밀로 하였다. 태자가 알지 못하였다.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갖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 진지왕을 의미한다.
을 통제하고, 말보末宝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을 상대등上大等 『삼국사기』4, 신라본기 4에 진지왕 원년(576) 이찬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다 하였다.
으로 삼아 중망衆望 뭇 사람들의 촉망, 뭇 사람들로부터 받는 신용과 인망을 의미한다.
을 눌렀다. 그 때 황종공의 딸 윤궁允弓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아우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 월륜공주月輪公主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거칠부공居柒夫公 ‘거칠부’는 황종(荒宗)의 향음이다. 오기공(吳起公)이 향음으로 작성한 화랑의 세보(世譜)를 김대문이 한자로 『화랑세기』를 지으면서 이곳에서는 향음 ‘거칠부’를 그대로 둔 것을 볼 수 있다.
은 나이가 많아 대등 노리부弩里夫ㆍ노동공弩同公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공에게 급찬의 위를 주었다. 공은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를 토함공에게, 노래를 이화공에게, 검술을 문노에게, 춤을 미생공에게 배워 모두 그 정수精髓를 얻었다. 늘 선제先帝의 총애를 생각하여 매번 생일과 기일이 되면 낭도들을 거느리고 능침陵寢에 나아가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을 듣고 … 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추천하였는데, 정情이 치우치지 않아 … 중망이 있었다.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조祖와 종宗]
공의 어머니가 미실 궁주였기 때문에 공 또한 대원 신통이었다. 문노파가 불복하였기에, 미실은 화합토록 하고자 이화공의 아들 보리공菩利公을 부제로 삼았다.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였기 때문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진골(정통)은 지소를 종宗으로 삼았고, 대원 신통은 사도를 종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玉帽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宝美로부터 출생하였다.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을 어이 나가는 구조를 보여 준다. 조(祖)는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의 시작이며 근본 기준이 되고, 종(宗)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준점이 된다.
그렇지만 양골兩骨 여기서 말하는 양골은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을 가리킨다.
이 서로 뒤섞이어, 풍월주가 되는 사람은 각기 단지 그 당시의 정황에 따라서 나왔다.
[화랑도의 붕당과 청원의 기]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록 화합을 하나, 안으로는 서로 반목하여 붕당이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골고루 사랑하는 데 힘을 다한 결과 일시적으로 성황이 나아졌으나, 주형主兄과 부제副弟가 다른 파인 까닭에 자연히 불화가 점차 드러나서 보리공을 끌어서 몰아 내려 하였다. 보리는 평소에 공에게 좋게 보였기에, 마음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가 울며 공의 인정에 호소하였다. 공은 이에 이화공을 찾아가 옳게 결단할 가르침을 청하니, 이화공은 “선도仙道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써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 모랑공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는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위位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위位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라”하였다.
[삼파의 단결]
공은 이에 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코자 하였다. 낭도들은 이화공이 스스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써 공을 혼란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이에 사도태후의 조칙으로 낭도 대회를 열고 이화공과 세종공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 화합시키도록 하였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켰다. 이로써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갖게 되어, 서현랑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는데, 이이 또한 대원 신통이었다. 이것은 이화ㆍ미실ㆍ가야 삼파가 단결한 것이다.
[삼태후의 행정과 화랑도]
그 때 궁중에는 3태후가 있어 행정을 하였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종하하는 자들을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太上太后인 사도법주思道法主 24대 진흥왕의 왕이 사도 부인을 말한다.
는 미실궁주로서 법운法雲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공주阿陽公主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만호태후萬呼太后는 대왕의 어머니 만호태후는 진평왕의 어머니이고 동륜태자의 부인이다.
로, 더욱 상上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 정통의 수주首主가 되었다. 지도태후 25대 지지왕의 왕비이다.
가 태상太上과 만호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文弩正派를 도왔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코자 하였는데, 만호태후가 들어 주지 않았다. 용춘공이 비록 (풍월주의) 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歸附하매, 서현랑이 말하기를 “용춘공은 선군先君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하였다. 그 낭도들을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 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좋은 사람을 얻었다”하였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다른 무리를 규합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니, 안으로는 그 논論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때 은륜공주가 왕의 총애를 잃었다. 은륜은 태후太后의 막내딸이었다. 태상이 대원 신통을 걱정하여 공에게 명하여 받들도록 하여 효종공을 낳았다. 이에 앞서 공은 설원공의 딸 미모낭주美毛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을 낳았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夏姬와 월희月姬라 하였다. 모종의 누이는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라 하였다. 공은 검소하고 색을 삼갔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여 세종世宗의 풍모를 크게 지녔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공에게 복종하지 않던 사람도 있었으나 끝내는 귀부하였다.
[나의 증조 보리공]
3년간 재위하다가 보리공菩利公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선대 풍월주들이 큰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간 재위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오래 머물겠는가”하였다. 이에 보리공이 “주형主兄은 미실 원화의 아들인데, 어찌 뭇 화랑들과 더불어 같은 예로 하겠습니까”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였다. 보리공이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곧 나 나(予)는 『화랑세기』를 저술한 김대문을 가리킨다.
의 증조부이시다. (증조는) 일찍이 나의 아버지에게 하종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이 같은 효자ㆍ충신은 없다”하였다.
[삼조를 섬긴 미실]
대게 미실궁주가 삼조三朝를 차례로 섬겼는데 진흥ㆍ진지ㆍ진평의 세 왕을 모신 것을 뜻한다.
, 형제가 핏줄이 달라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았다. 은륜공주 또한 골을 믿고 방탕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세종공이 미실을 대접하는 것처럼 하고 불문에 부쳤다. 태양공주太陽公主는 은륜의 형으로, 공과 더불어 가까이 살았는데 공을 유혹함이 심하였으나, 공은 한 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공의 청렴과 지킴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찬하여 말한다 : 맑게 삼가고 덕을 닦아 훌륭한 명예를 지켰다. 세종의 아들이고 미실의 소생이다.
세계 : 세종조와 미생조에 자세히 보인다.
[12세 풍월주 보리공]
<보리菩利는 계사년(573)생이고 신해년(591)에 화랑주花郞主가 되었다>
12세 보리공은 이화공의 차자次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세종공과 한 배의 맏누이이다.
공주가 꿈에 황색의 신록神廘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부터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고 큰 뜻을 가졌다. 자람에 따라 맏형인 원광법사와 더불어 배움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원광과 숙명의 가르침]
원광이 일찍이 가르쳐 말하기를 “나는 부처(佛-실제는 승려)가 되고 너는 선(仙-실제는 화랑)이 되면 우리 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하였다. 화랑도가 불교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공은 이에 하종공의 문하에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하여 같은 배에서 출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모친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 나서,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고, 세종공 또한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공주가 미실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곧 공조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 태종 각간苔宗角干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도 높다 않고 땅도 넓다 않는 대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신神으로 받들어야 한다”하였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는 것을 풍자하여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신궁의 교신상]
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 신궁에는 화상, 신상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후에 제에게 절을 하였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 귀한 것은 모두 선제先帝가 내려 준 것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하니, 하종공이 “선제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하였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하였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하였다. … 태종공苔宗公 ….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 모제母弟가 어머니에게 불효하였다. 하종공이 말하기를 “돌아가 숙며에게 말을 하여 … 태종공과 더불어 옳다”하였다. 대개 양공兩公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 … 이다.
[우방화랑]
그 때가 건복 2년(585)으로 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이 우방대화랑이 되었다. 그러므로 공은 특별히 뛰어넘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 말하기를 “너는 나보다 낫다”하였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하여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하였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조카야! 너의 형을 잘 도와라”하였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하였으니 대개 공이 힘쓴 때문이다.
[만룡과 혼인]
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 정통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여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낭주를 공의 적처嫡妻 『화랑세기』는 이처럼 처첩의 구별이 분명하다.
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살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기 때문에 꺼리자, 공주는 “사도 또한 7살에 대제에게 시집갔는데,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꺼리는가”하였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신궁과 포석사]
이에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씨 다른 형 포형胞兄 숙명은 진흥왕과 사이에 정숙태자를 낳았고, 이화랑과 사이에서 원광과 보리공을 낳았기에 보리공과 정숙태자는 아버지가 다른 즉 씨 다른 형제가 된다.
정숙태자貞肅太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다. 그런데 미실의 딸 애함艾含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만호는 대원 신통이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특히 만룡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만호는)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앉히고 묻기를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제를 잘 모셨는데, 너 도한 능히 할 수 있느냐?”하였다. 만룡이 “지아비가 누굽니까?”하고 물었다. 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나의 좋은 형입니다. 시집가기를 원합니다”하였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하였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 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지난날 형매兄妹가 지금은 부처夫妻가 되었다. 처는 이와 같으면 안 된다”하니, 숙명이 “부처이자 형매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하였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하였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의 손아래 누이 화명花明은 … 하종공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은 이미 공을 만룡에게 빼앗겼다. … (화)명을 하종공의 적처로 삼으려 하였는데, 만호가 들어 주지 않고 모두 (진골 정통)을 받아들였다. 미실이 좋아하지 않으니,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가 숙모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主兄이 포형胞兄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하였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너는 진정으로 내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느냐?”하였다. 공은 양 통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을 가리킨다.
의 사이에서 이쪽 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보리공의 득위]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권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 9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의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가 사랑하였다.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을 삼았다. 건복 2년(585)에 공과 더불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건복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아 고에게 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서현과 만명의 탈출]
그 때 만룡의 형 만명萬明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을 하였다.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하여 불허하고, 공에게 명하여 용춘공을 서현랑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려 하였다. 만명은 탈출하여 함께 도망하였다.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고 하였으나, 공과 만룡이 힘서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화랑 세습 가문]
그 때 공의 여형女兄 화명과 옥명玉明이 진평대왕을 섬겨 사랑寵을 받았으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겠는가”하였다.
[만룡의 부도]
공이 청렴결백하며 지조를 지켰으나, 낭주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이에) 공이 낭주에게 일러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君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나의 아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하니, 낭주가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니,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같이 하였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를 다하였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하여 올렸는데, 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宝龍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이다. 서자는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는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만룡낭주의 침비枕婢 후단厚丹이 낳았다.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厚滿이 설원공과 통하여 후단을 낳았다.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이 비보랑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乳姆가 되었다. 이 까닭에 후단이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는 어리다는 것을 고려하여, 비婢에게 명하여 공을 모시도록 하였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親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하여 후단과 더불어 뜰에 단을 쌓고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남도의 예]
공은 건복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남도南桃의 예를 미루려 하였다. (이에) 낭주가 말하기를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 모도(母道)는 잘 알 수 없으나, 성호(成好)하여 남녀 관계를 갖고 어머니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하였다. 이에 (남도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나누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 즉, 낭주가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첩의 조건]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낭주는 제에게 청하였고, 제는 공을 불러 꾸짖으며 “후단이 비록 비婢이나 비대전군의 손이고 설원 상선의 딸이다. 첩으로 삼을 수 있다”하였다. 당시 첩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볼 수 있다.
공은 이에 (후단을) 사랑하여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여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니, 낭주가 위로하여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기를 원하면 곧 데려다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하였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쳤고, 감히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태후가 듣고 또한 궁중에서 빌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낭군은 낭주를 … 때문에 출산한 겨를이 없습니다. 가히 첩이 있어 사이에 …다”하였다. 이 말을 공에게 간하니, 공이 이에 깨달았다. 이에 …에게 물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 주도록 명하였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 신첩臣妾이 되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직 공의 처첩은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의 위位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전하여 주었다. 위位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佛門에 바쳐 백씨伯氏를 도왔다. 만룡과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만년의 일은 『고승전高僧傳』 『삼국사기』46, 열전 6의 뒷부분에 김대문은 본래 신라의 귀문 자제이고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는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이에 『고승전』, 『화랑세기』등의 책들이 『삼국사기』편찬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에 나온다.
찬하여 말한다 : 보리 사문은 위화랑공의 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 공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세계 : 아버지는 이화랑인데 곧 위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은 모랑공의 처남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그 때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骨品을 초개처럼 내버리고, 숙명은 진흥왕의 왕비인데, 이화랑을 사랑하여 그 지위를 버린 것을 보여 준다. 숙명은 골품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이화랑과 함께 출궁을 하였다. 진흥왕의 왕비였던 숙명은 성골이 분명하다. 그런데 골품을 버리고 출궁을 한 것은 성골 신분을 버림을 뜻한다. 그리고 당시 성골들이 3궁으로 이루어진 왕궁에 거주한 집단인 것을 볼 수 있다.
동혈同穴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여 손을 잡고 출궁하여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는 것이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다. 둘 다 이리로, 랑(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으며, 패(狽)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다. 둘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떨어지면 넘어지므로, 당황함을 나타내는 말로 쓴다. 도중에 실패하거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몹시 딱한 형편임을 뜻한다.
평자評者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했을 때, 제의 노여움이 혁혁하며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神國의 대성인 원광대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13세 풍월주 용춘공]
<용춘龍春은 무술년(578)생이고 병진년(596)에 낭주朗主가 되었다>
13세 용춘공은 금륜왕金輪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인데, 곧 기오공起烏公의 딸이다. 기오공은 선혜황후의 사자私子로, 사도태후의 포매胞妹 흥도 낭주興道郎主를 아내로 맞아 지도智道를 낳았다. 지도가 처음 동태자궁에 들어갔을 때 태자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금태자와 더불어 사랑私을 하였다. 동태자가 죽자 총애가 더욱 도타워졌다. 금태자가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공을 낳았다.
[용춘의 고매함]
공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며 …를 좋아하였고 탐욕스럽고 방탕한 놀이에는 끼이지 않았다. 진평대왕이 그 …를 기특하게 여겨, … 공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화二花와 문노文弩의 학學을 얻어 …의 도를 잘 하였다. 공의 손위 누이인 용명공주龍明公主는 곧 진흥의 딸이다.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용춘의 출생]
공의 형 용수 전군龍樹殿君은 혹은 동태자의 아들이라고 하고, 혹은 금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전군열기殿君列記』에 이르기를 “공은 곧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음란함에 빠졌기 때문에 폐위되어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다崩. 공은 아직 어려 그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으로 다시 신왕(진평왕)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庶弟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렇게 하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위를 물려 주었다고 한다.
[골품]
그리하여 13세 (풍월주)가 되었고 호림공虎林公을 부제로 삼았다. 공은 곧 낭도의 구습舊習을 고쳤다. 한결같이 인재를 뽑는데 골품에 구애받지 않으며 말하기를, “골품이란 것은 왕위와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골품은 성골과 진골을 가리킨다.
낭도에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어찌 파로써 다스리겠는가”하였다. 무리들이 크게 화합하여 말하기를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졌다”하였다.
[신선골과 균등]
이보다 앞서 미생공은 만은 폐첩嬖妾 아양을 부려 사랑을 받은 첩
이 있었다. 9부 낭두郎頭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딸을 바치고 청탁을하여, 화랑과 맺어진 낭도들을 이름하여 ‘신선골新善骨’이라 하였다. 보리공이 염려하여 3파를 섞어 등용하고 그 세력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름하여 ‘균등均登’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 시키지 않았다.
[대남보]
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 남의 위급함을 구해 주는 의협스러운 풍채.
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 보았다. 그런데 선골善骨의 품品이 없고 또한 균등의 힘이 없었다. 어떤 이가 대남보에게 권하여 “그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에게 바치고 골품을 얻지 않는가” 득골품(得骨品)은 당시 골품제 하에서 신분 상승이 가능했음을 잘 보여 준다.
하니, 대남보는 “우리 무리는 천인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할 수 있는가”하였다. 공이 듣고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낭두별장郎頭別將을 불러 묻기를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하니, 답하기를 “될 만합니다. 그러나 골품이 없습니다”하였다. 또 “… 공功은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윗사람(풍월주)을 모신 같은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 못 했습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하였다.
공이 “대상이 누구인가”하고 묻자 잡하기를 “조심보曹心甫입니다.”하였다. 공이 또 “조심보가 대남보보다 공이 큰가”하고 물으니, 답하기를 “조심보는 비록 공이 없으나 대남보의 대상입니다. 만약 대남보를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조심보를 승진시켜야 합니다. 이것이 3파 균등의 법입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재능이 없는 자를 재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이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는 대남보를 세 번 승진시켜 낭두郎頭로 임명하였다. (그러자) 불평하는 자들이 상선上仙을 찾아가 바로잡으려 하였다. 문노공은 “법이 점점 더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 용춘공을 가리킨다.
를 괴롭히겠는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생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습이 고쳐졌다.
[대남보의 딸]
대남보의 딸은 공을 위하여 스스로 정절을 지키고 유화遊花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공이 딱하게 여겨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안 되었다. 대남보가 “한 명의 여자로 인하여 어찌 공께서 걱정하실 수 있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내가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하였다. 딸이 듣고 슬퍼하여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낭두 등이 이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에게 절叩頭하고 말하기를 “이같이 이르도록 만든 것은 신들의 잘못입니다”하였다. 공은 마지 못하여 거두었다. 그 날로 남보男甫를 해직하고 말하기를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하였다. 남보는 기뻐하며 “나를 알아 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모름지기 지위를 논하겠습니까?”하였다.
[아이들의 노래]
제가 이를 듣고 곧 남보를 등용하여 공의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하여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從者드과 더불어 미복微服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唱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이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치고 가난해져
세 아들이 모두 베엇을 입었다네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아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공을 보자 그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男甫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謠가 있습니다”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이는 나의 잘못이다”하였다. 이에 그 장자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 신라 관위 중 15등은 대오(大烏), 또는 대오지(大烏知)이고, 16등은 소오(小烏)또는 소오지(小烏知)인데 여기소는 ‘오지(烏知)’로 나오고 있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삼국사기』를 보고 『화랑세기』를 위작하였다면 대오와 소오 중 하나를 기록 하였을 것이나, 그렇지 않음을 주목한다.
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해졌다. 나는 장차 위를 물려 줄 것이다. 그대는 그…”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 20년(603) 공과 비보랑이 제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용수 전군]
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 용수전군龍樹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 주려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용춘과 용수를 동일인으로 보고 있으나, 『화랑세기』를 통하여 형제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전군이 공에게 의견을 물으니, 공이 답하기를 “대왕의 춘추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됩니다”하였다. 전군은 이에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摩耶皇后가 들어 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천명공주가 그러워한 사람]
이보다 앞서 공주는 마음 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하였다. 황후가 용수龍樹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공주는 이에 공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첩이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하니, 공이 말하기를 “가정의 법도는 장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과 같겠습니까"하였다. 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에게 공의 처지를 떠받쳐 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위位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 용수공이 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마야황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肆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낭도 등용]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써 낭도로 등용된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 바치기를 원하였다.
[천명과 선덕]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 용봉의 자태요. 태양의 위용(龍鳳之姿 天日之表)은 임금의 인상(人相)을 의미한다.
은 왕위를 이을 만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고崩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공을 마음에 두고 공주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 집단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천명과 선덕이 한대에 한하여 성골 신분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졌음을 잘 보여 준다.
(천명)공주天明公主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을 하였다. 당시 성골 집단은 왕궁인 3궁에 거주하였고, 출궁하면 신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진평왕의 딸이며 선덕왕의 언니인 천명이 출궁하면서 왕위를 포기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천명의 신분은 성골에서 진골로 되었을 것이다.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 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용춘과 춘추]
그 때 승만황후僧滿皇后 진평왕의 왕비. 선비(先妃) 마야부인이 죽은 후 진평왕의 비가 되었다.
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角干에 봉해졌다. 용수 전군이 죽기薨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太宗 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공주이다.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공주天花公主를 아내로 맞았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용춘)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를 모시게 되자, 제가 천화공주를 백룡공白龍公에게 내려 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군신群臣들이 이에 삼서三婿의 제도를 이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을 보좌副하도록 하였다. 공은 본디 금륜金輪이 색에 빠져 폐위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政事를 을제 『삼국사기』5, 신라본기 5 선덕왕 워년 2월조에 대신 을제에게 ‘총지국정(摠持國政)’토록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용춘의 자녀]
이에 앞서 왕명으로 호명궁昊明宮에 살며, 딸 다섯을 낳았고 달리 적자嫡子는 없었다. 그러므로 태종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서자는 다섯인데,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서녀는 18명이었다.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주의 누이 용보龍宝는 태종을 섬겨 차득車得과 마득馬得 양 공을 낳았다. 공은 청렴하고 담백하여 색을 멀리 하였는데, 자손이 저절로 창성하였다. 사람들이 덕이 있는 사람은 창성한다고 말하였다. 나머지 자손을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다.
[용춘의 만년]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天明〮〮〮・호명昊明 양 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서 술상을 차려 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시첩 다섯이 온화한 모습으로 받들어 섬겼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太和 신라 진덕여왕 때 사용한 연호.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니薨, 수壽가 70이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였다. 태종이 즉위하며 용춘을 갈문왕으로 추존한 사실이 『화랑세기』에 나오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 성대하다! 공의 성스러운 덕은 하늘과 같고 땅과 같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찬하여 말한다 : 갈문왕의 덕 일월과 아울러 밝고, 삼한의 업이 힘입어 크게 이루어지도다.
세계 : 아버지는 금륜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황후이다. 금륜이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사도태후이다. 지도의 아버지는 기오起烏 각간이고 어머니는 흥도興道인데, 영실공의 딸이며 곧 사도태후의 포매胞妹이다. 기오의 아버지 홍기洪器가 신궁봉사神宮奉事가 되어 신궁황신神宮皇神과 통하여 선혜황후를 낳았다. 홍기의 아버지는 보기宝器이고 어머니느 수리首里이다. 보기의 아버지는 보신保身이고 어머니는 황아皇我이다. 보신의 아버지는 미해美海이고 어머니는 보미宝美이다.
[대원 신통의 대원]
보미는 대원 신통의 대원大元이다. 황아皇我는 눌지왕의 딸이고, 그 어머니는 치술공주鵄述公主인데, 실성와의 딸이다. 제상공堤上公에게 시집을 가서 삼아三我를 낳았으나, 제상공이 장차 멀리 떠나려 하자, 장사長沙에 드러누워 오랫동안 크게 울며 일어나지 않았다. 『三國遺事』奈勿王 一作 那密王 金堤上 조에는 …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왕이 불러 궁중으로 들여 색도色道로써 위로하니 마침내 황아를 낳았다. 그러므로 미해공美海公이 눌지왕에게 청하여 보신공宝信公의 배필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薨. 보미가 미해공의 말을 따를 것을 청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그런데 보신이 어린 까닭에 황아는 왕의 총신과 더불어 음란하여 벌지伐知와 덕지德知 양 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보기공은 실제는 양 공의 동복同腹 아우이다. 황아는 치술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양 공에게는 무에 힘쓰도록 명령하고, 보기공에게는 의醫에 힘쓰도록 명하였다. 선혜후의 천주사가 발생하자, 보기공은 태의로서 후를 보호하여 욕을 당한 일이 없이 재난이 그쳤다. 그 까닭에 후后가 홍기를 봉사奉事로 삼아 기오공을 낳았다. 아마 홍기의 노력에 대한 보답일 것이다.
[14세 풍월주 호림공]
<호림虎林은 기해년(579)생이고 계해년(603)에 (풍월)주가 되었다.>
14세 호림공虎林公은 복승공福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松花公主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혹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하고, 혹은 비보랑秘宝郞의 아들이라고 한다. 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검소하게 지냈으며 골품으로 뽀매지 않았다. 공의 적형嫡兄 마야부인은 그 때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龍春公이 부제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은 14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곧 진골 정통이다.
[화랑도와 불교의 융화]
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지장脫衣地藏이라고 불렀다. 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불仙佛 화랑도와 불교.
은 하나의 도道다. 화랑 또한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륵 선화彌勒仙花 7세 풍월주 설원랑을 말한다.
와 보리 사문菩利沙門 같은 분은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하였다. 공은 곧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로써 선불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무림거사]
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 현강낭주玄剛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었다. 하종공의 딸 유모낭주柔毛娘主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때 미실 궁주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낭주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다. 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게 하였다. 이에 선종랑善宗郞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
[칠성우]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공閼川公ㆍ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ㆍ보종공宝宗公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놀았다. 『삼국유사』를 보면 진덕왕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虎林公), 염장공, 유신공의 6인이 남산 오지암에서 국사를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호림공이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로 바꾸었으며, 보종공을 포함하여 칠성우를 이룬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삼국유사』보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잘 전하는 것이 분명하다.
통일의 기초가 공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세계 : 아버지는 복승인데 산종공山宗公의 아들이다. 산종공이 법흥의 딸 사도미沙道美를 아내로 맞아 낳았다. 산종공은 곧 법흥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이다. 산종의 아버지는 비처대왕이다. 그러므로 공은 비처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이고, 그 아버지는 영실英失 각간으로, 지소태후의 계부繼父가 되어 낳았다. 따라서 공은 지소태후의 외손이 된다. 사도미의 어머니 사룡沙龍은 사량궁주沙梁宮主의 손이다.
[15세 풍월주 유신공]
15세 유신공庾信公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인데, 곧 만호태후의 사녀私女이다.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인데, 또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이 야합하여 임신하였는데, 태후는 서현이 대우너 신통류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스무 달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공은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天日之表’는 임금의 인상人相으로 김유신에게 그 같은 모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해석을 달리하였다.
태후가 보고 싶어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참으로 나의 손자다”하였다. 이로서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호림공의 부제 보종공은 미실궁주의 막내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공이 중망衆望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이는 대게 궁주가 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다. 그 때 공의 나이가 15살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 정통]
가야파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하기를 “어른께서는 가야 정통으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가.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도各徒를 화합하였다. (공은) 늘 도徒에게 일러 “우리 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삼한을 통할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럽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을 다투겠는가.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가 없을 것이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을 잊으면 안 된다”하였다.
[신병의 호위]
무리가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은)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결秘訣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영모는 곧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 임신년(612)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오르는 날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ㆍ유신ㆍ춘추ㆍ문희]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따랐다. 용수공 또한 그 아들을 맡기니, 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이다”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용춘공은 왕의 남편皇婿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 주가 불안하였다. 공이 용춘공을 설득하기를 “천도天道가 제 스스로 있어 …은 한때의 일로 충효에 어긋남이 있었다”하였다. 춘추공이 그렇게 여겨 곧 천명을 위로하여 용서하였다. 공이 춘추공에게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나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하였다. 춘추공은 이에 공의 누의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었다.
[삼한 통합]
이보다 앞서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따라서 대원파가 불평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은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 주었다. 열국列國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찬하여 말한다 :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의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오동五東 ‘五東’은 ‘吾東’의 오자로, 우리 동방 즉 신라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 질서를 바로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 할 것이다.
세계 :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각간이며, 증조는 구충대왕仇衝大王이고, 고조는 감지대왕紺知大王이다.
감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 나라의 골품骨品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우리 나라 조정에 복종하여 따랐다. 감지왕紺知王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공納水公이 우리 덕지공德知公의 딸 계황桂凰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 나라 여자를 원하였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 질지대왕銍知大王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풂으로써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白欣公의 손아래 누이 통리通理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의 장녀 청아靑我이다. 서로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 하희河喜를 데려다가 첩으로 삼았는데, 또한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善通을 낳으니,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좌지왕坐知王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워쓴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으니,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와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 …을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다스리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리 나라를 원망하여 감지가 우리 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감지 10년(501)에 방원이 죽었다崩.
감지왕은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하였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여 보냈다. 감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고 구충仇衝을 낳았다. 구충은 계봉의 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고, 무력武力과 무득武得을 낳았다. 『삼국유사』에는 세종(世宗) 각간, 무도(武刀) 각간, 무득(武得) 각간을 낳았다 하였고, 『삼국사기』에는 김구해(金仇亥)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을 거느리고 항복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무력(武力), 무덕(武德)이 나오고 있다. 이에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자인 세종(世宗)은 6세 풍월주인 세종(世宗)과는 다른 인물임에 틀림없다. 풍월주 세종은 지소태후와 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
모두 우리 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은 만호태후의 딸 만명을 아내로 맞아(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眞骨ㆍ대원大元ㆍ가야伽倻 3파의 자손이다.
금관가야는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의 여자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은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 『삼국유사』가락국기에는 ‘마품麻品’이라 하였다.
을 낳았다. 마품은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소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은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리 나라에서도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를 보내어 아들 취희吹希를 낳자, 좌지가 크게 기뻐하여 정후正后로 삼았다. 금관金官에서 우리 나라 여자를 왕후로 삼는 것이 이로써 비롯하였다. 취희가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써 집정執政하여 우리 나라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다. 금관인 또한 우리 나라에 많이 왔으며, 사이좋게 친한 관계가 점점 깊어졌다. 취희는 우리 나라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銍知를 낳았는데, 곧 공의 5세조이다.
[16세 풍월주 보종공]
16세 보종공宝宗公은 또한 미실중주의 사자私子이다. 홍제弘濟 8년(579)에 사도태후가 친정親政을 하였다. 진흥왕의 왕비 사도태후가 25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26대 진평왕을 즉위케 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을 말한다.
미실궁주가 새주璽主 옥새를 관장하는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가 되어 정(사)당 政堂은 정사당政事堂을 의미한다.
에서 문서들을 보다가 낮 꿈을 꾸었는데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그것이 길한 꿈임을 알고 급히 제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정사당에 임근과 신하들 간에 거리를 두기 위한 장막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薛原郞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금하(설원랑)와 같았으므로, (미실)궁주가 금하에게 내려 주고 아들을 삼게 하였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하였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하였다. 공은 처음에는 제를 불러 아버지라고 하였다. 자라자 금하에게 돌아갔다. 제는 (보종을) 아들로 생각하여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보종공의 모습]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다.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았다.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驢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성공자眞仙公子’라고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 싹 백이(白荑)는 깨끗한 새 싹과 같은 손을 가리킨다. 이지(荑指)는 작고 얌전한 손가락을 뜻한다.
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보종공과 미실]
궁주가 일찍이 그 바라는 바를 물었더니, 공이 답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같이 죽는 것입니다”하였다. 궁주가웃으며 “네가 색은 좋아하지 않고 나와 같지 죽기를 원하니, 또한 무슨 뜻인가?”하였다. 공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도 어머니만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살 수가 없습니다”하였다. 궁주가 (다시)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까닭에 오로지 어미에게 정을 쏟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여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손자를 볼 것인가?”하였다. 공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합니까?”하자, 궁주가 “너와 같은 사람이 아름답다. 얼굴은 옥과 같이 아름답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으며, 눈은 아리땁게 빛나고, 말에 정情의 뿌리가 있는 자이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하였다. 공이 답하기를 “정의 뿌리는 갈래가 많고, 아리땁게 빛나는 것은 속기 쉬우며, 붉은 연지와 옥과 같은 아름다움은 몸을 지키는 보배가 아닙니다”하였다.
[보종공과 여자]
궁주는 이에 윤궁允宮의 딸 현강玄剛에게 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호림공은 이에 현강과 통하여 딸 계림桂林을 낳았다. 공은 이에 현강을 호림공에게 넘겨 주고, 스스로 아내를 맞지 않았다. 궁주가 근심하여 종실의 여자 종녀宗女들을 모아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하였다.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 주려 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궁의 딸 양명공주良明公主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정을) 통하였다. 공은 비로소 여색을 알게 되었다. 궁주가 크게 기뻐하여 양명에게 큰 상을 주었다. 보라宝羅와 보량宝良 두 딸을 낳고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학선學仙과 호국]
공은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아저씨)’라 불렀고, 한 번도 그 칭호를 바꾸지 않았다. 염장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얼굴이 늘 어린아이와 같았다. 늘 콩죽을 먹고, 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를 기르고 하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유신공을 엄한 아버지와 같이 두러워하였다. 유신공이 웃으며 “형이 어찌 아우를 두려워합니까?”하자, 공이 말하기를 “(유신)공은 바로 천상의 일월日月이고 나는 곧 인간의 작은 티끌입니다. 감히 두려워 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드디어 풍월주의 위位를 물려 주었다. 유신공이 낭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宝宗兄公을 따라야 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하였다. 미실궁주가 일찍이 유신공에게 일러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 주기를 바란다”하니, 유신공이 말하기를 “신이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道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하였다.
[우주 진기와 편작]
궁주가 죽자薨 공은 스스로 더불어 따르지 못한 것을 죄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홀로 거처하며 궁주가 쓴 수기手記 7백 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궁주의 초상을 그려서 걸고 아침 저녁으로 절하였다. 역대 상선上仙들의 모임에서는 번번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오직 ‘예’, ‘예’ 할 뿐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진기眞氣를 깊이 살펴서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신공이 병이 나자 공이 문득 몸소 치료하며 “우리 공은 국가의 보배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扁鵲 중국 전국 시대의 명의(名醫)를 의미한다.
의 학(의학)을 갖추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칠성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유신공이 칠성회七星會를 열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공은 “나는 물고기와 새의 벗으로 국사를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여러 공을 따를 분입니다”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은 공의 한 마디를 중하게 여겨 묻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공의 덕 또한 크다.
찬하여 말한다 : 어조魚鳥의 벗으로 천리天理를 달관하니, 말 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적송赤松 적송자(赤松子). 중국 전설 시대 선인(仙人)의 이름, 신농(神農) 때의 우사(雨師)로서 후에 곤륜산에 입산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세계 : 부계父系는 설원공조에 상세하고, 모계母系는 세종공조와 미생공조에 상세하다. 부계와 모계라는 용어는 『화랑세기』에 있는 것인지, 필사자가 사용한 용어인지 확인 할 길이 없다.
[17세 풍월주 염장공]
<공은 건복建福 병오년(586)생이고 신사년(621)에 (화)랑주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648)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 이 기록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본문 위에 기록된 것으로, 원본 『화랑세기』의 내용이 더욱 자세한 것일 가능성을 말해 준다
>
17세 염장공廉長公은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龍春公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공은 풍채가 좋고 말을 잘 하였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하였다.
[보종공의 부제]
그 때 공은 나이가 14살로, 보종공보다 6살이 적었으나, 준수하기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愛 자원하여 그의 아우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형처럼 섬겼다. 공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공이 부제가 되었고 공은 전방대화랑이 되었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는데, 용기와 힘이 있어 능히 무리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럼 늘 업어 주었다. 보종공이 (부제를) 유신공에게 양위하자, 염장공이 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종공을 보호하려 하였다. 호림공이 곤란하게 여겼다. 미실궁주가 이에 염장공을 불러 달랬다.
유신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을 좌방대화랑으로 삼고 염장공을 부제로 삼고자 하였다. 공이 보종공을 힘써 밀어 부제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좌방대화랑이 되었다. 보종공은 일을 본 적이 없고, 공이 모두 대행하였다. 보종은 내사內事 방사(房事)로서 침실 안에서 벌어지는 일, 규중의 비밀스런 일, 남녀가 성교하는 일 등을 의미한다.
에 욕심이 없었다. 양명良明과 혼인시켰는데, 양명은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하종공의 딸 하희夏姬가 보종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와서 유혹하였다. 보종은 “만약 우리 염장과 사랑을 하면 나 또한 더불어 사랑할 것이다”하였다. 하희는 이에 공에게 시집가서 하장夏長・윤장閏長・춘장春長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이 부제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나이가 31살이었는데, 중망衆望을 널리 얻었다. 보종이 1년이 안 되어 물려주려 하자, 공은 웃으며 “내가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반드시 물려주려 하십니까?”하였다. 보종은 이에 그만두었다.
[3파 교혼]
공은 부제로 6년, 풍월주로 6년을 있었기에 11년간 실제로 낭정郎政을 주관하며 3파를 화합시키는 데 힘쓰고, 서로 교혼을 시켜 마침내 동화同和를 이루었다. 그러나 낭권郎權의 큰 것은 모두 가야파에게 돌아가고, 진골과 대원은 모두 그 안에서 소멸해 버렸으니, 또한 운명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수망택]
공의 외척과 처족들이 사사로이 청탁을 하여, 3파 낭두의 딸들을 모아 첩으로 삼기를 힘썼기 때문에 서자가 매우 많았다. 보종공의 집안일을 보아 주고 그 재물을 취하여 사용하였다. 유신공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그 지위를 넘겨 주었다.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柒宿의 난 이찬 칠숙은 진평왕 53년(631) 5월에 아찬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꾀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이는 형을 받았다.
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영令 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은 선덕왕(632-647)이 즉위하자 조부의 령(令)으로 되었는데 조부의 령은 2인인데 진평왕 6년과 진덕왕 5년에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선덕왕대에는 좌령・우령의 구분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고읍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하였다. 당시 정치 지배 세력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 때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 『삼국유사』 1, 기이 2, 진한 조에 부유한 큰 집을 말하는 35 금입택 중에 수망택이 있다.
이라 하였다. 금이 들어가는 모습이 홍수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공을 미생공과 비교한 바 있는데 미생은 극도로 사치를 하였으나 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훌륭하였다.
세계 :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월화공주月華公主, 가양 이뇌왕異腦王의 딸이다. 곧 우리 양화공주兩花公主의 딸이다. 진흥의 소비小妃로 들어가 천주공을 낳았다. 커다란 도량이 있어 가야파가 여러 차례 추대하려 하였으나, 파가 달라 허락받지 못하였다. 지도태후가 홀로 되어 신제新帝를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서 공의 형제 3인을 낳았다. 모두 천주天柱의 풍모를 지녔다. 모계는 용춘공조에 상세하다.
[18세 풍월주 춘추공]
18세 춘추공春秋公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씨로 말을 잘 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어다. 유신공이 위대한 인물로 여겨 받들어 군君 군(君)은 풍월주를 가리킨다.
으로 삼았으나, (무열)왕이 사양하여 부제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양 공이 있었기에 춘추공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寶齡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 문희文姬를 화군花君으로 삼아 장자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문희]
이에 앞서 문희의 언니 보희宝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랐는데, 큰 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가 (이 꿈을) 비단 치마와 바꾸었다. 그 후 열흘 만에 유신이 공과 더불어 집 앞에서 축국蹴鞠을 하였는데, 곧 정월 오기일午忌日이었다. 유신은 일부러 공의 치마裙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서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하였는데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사랑을 하였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하였다. 그 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량궁주宝良宮主 원래 ‘宝良宮主’라고 된 것을 필사자가 ‘宝羅宮主’로 수정하였다.
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 선덕왕 11년(642), 백제군이 대량주(大良州)를 함락할 때 남편을 따라 죽은 품석의 부인(『삼국사기』41, 열전 1, 김유신 상).
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감희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선덕공주의 도움]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샇아 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으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대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석사의 길례]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량궁주 원래 ‘宝良宮主’로 되어 있는 것을 필사자가 ‘宝羅宮主’로 고쳤으나 고친 것이 틀렸다고 생각되어 원래 이름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있다가, 부제 흠순공欽純公에게 물려 주었다. 흠순은 곧 유신공의 포제胞弟이다. 왕의 대업은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찬하여 말한다 :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임금이다. 한번 천하를 바로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세계 : 아버지는 용춘공으로,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대제의 딸이다. 천명의 어머니는 마야인데 복승공의 딸이다.
[19세 풍월주 흠순공]
19세 흠순공欽純公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이르렀다.
[유신과 관계]
그 해에 공의 아버지 서현공과 형 유신이 낭비娘臂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나로 하여 이 같은 빈 그릇만 지키라고 하니,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나도 또한 지금부터 나갈 것이다”하였다. 대개 그 때 사람들이 공 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仙道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로써 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예원공禮元公 원래 ‘禮元公’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후에 누군가 ‘體元公’으로 바꾸었으나, ‘禮元公’이 맞는 것으로 생각되어 원래대로 기록하였다.
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 주며 “실제로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푸월주가 되어야 한다”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였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였다.
[보리공의 사위]
공은 나이 18살에 전방화랑이 되어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였다. 나의 보리菩利 할아버지 보리조(菩利祖)의 조가 할아버지이면 이 책의 필자는 오기공(吳起公)이 되고, 증조를 칭한다면 김대문(金大問)이 된다.
를 찾았을 때 예원공의 서자庶姊 보단낭주菩丹娘主는 바야흐로 나이가 16살이었고, 예원공은 9살이었다. 공은 보리 할아버지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이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윽한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은 곁눈으로 오랫동안 보다가 갔다. … 수일 만에 와서 보리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그 …을 장하게 여겨 …하며 말하기를 “남자가 삼가야 할 것은 색이다. 네가 나의 딸을 사랑하되 다른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지 않는다면 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줄 수 없다”하였다. 공이 맹세를 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이에 보단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의 내조]
보단은 보리 할아버지의 풍모가 있어 재능과 아름다움이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났고, 미덕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공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 돌아오며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은 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능히 국가를 위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가 뒤에서 도운 때문이다”하였다. 유신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이르러 낭주娘主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낭주는 원망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기도드렸다. 집에 돌아오면 한 집안 식구들이 떠들며 좋아하였다.
[금주]
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 낭주가 친히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드렸다. 하루는 공이 술을 찾자 낭주가 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오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공의 가족]
보리 할아버지가 듣고 “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면 곧 둘째 딸을 주어도 좋다”하였다. 이에 낭주의 동생 이단利丹을 또 공에게 시집보내어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형제가 한 지아비를 섬긴 까닭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 두 낭주 및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걸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저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 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다.
[염장공의 재물과 딸]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하였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내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다”하였다. 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하였다. 보단은 “염(장공) 형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을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하니, 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지요.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곧 염형과 같았을 것입니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인,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 만하지 않소?”하였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그(염장공)의 딸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 않았다.
[흠순의 아들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공盤屈公이다. 『삼국사기』47, 열전 7, 김영윤(金令胤) 조에 김영윤의 아버지는 급찬 반굴이고, 할아버지는 흠춘 (또는 흠순)이었다고 나와 있다.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을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였는데 곧 이단利丹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삼보三寶]
공은 여러 차례 대전은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 사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삼보三寶의 하나로 삼았다. 문무제文武帝 20년(680) 2월, 보단낭주와 더불어 함께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나이가 82살이었는데 낭주는 2살이 적었다. 자손이 백을 헤아렸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공결할 만하지 않은가.
찬하여 말한다 :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이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 데서 비롯되었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
세계 : 유신공과 같다.
[20세 풍월주 예원공]
20세 예원공禮元公 원래 ‘禮元公’으로 필사한 것을 ‘體元公’으로 고쳤으나, ‘禮元公’이 맞다.
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欽純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자 흠순공이 부제가 되어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았다. 성품이 단아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였다. 자신을 굽혀 다른 사람보다 낮추었고, 도로써 자신을 다스렸다. 나옫들이 축하하여 “과연 이화二花의 손자 이화랑의 아들이 보리공이고, 보리공의 아들이 예원이다.
입니다”하였다. 흠순공을 섬기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처럼 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흠순공이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서 (낭정을) 대행하여 폐정을 많이 개혁하였다.
[가야파의 불만]
가야파의 옳지 않은 자들이 진골(정통)을 부흥하는 일이라 하여 비방하였다. 공이 스스로 물러나려 하자, 흠순공이 노하여 그 무리를 내쫓고 말하기를 “부제는 곧 내 몸이다. 어찌 나와 조그마한 차별이라도 있겠는가. 또한 지금 천하가 한 집이 되었는데, 어찌 진골과 가야가 있겠는가”하였다. 이에 진골 정통의 옛 낭두郎頭들을 대거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가야파의 낭두들이 염장공에게 많이 모여 간절히 구원을 청하였다. 염장은 이에 (예원)공을 청하여 술을 내리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듣건대 네가 나이가 어리나 낭정을 잘 한다고 하니 기쁨을 금할 수 없다”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많은 낭두들이 당하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염장공이 그들을 가리키며 “이 무리들은 모두 내가 거느리는 바이다. 나를 믿고 너에게 불순하니 죄를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너느 심한 자를 매로 다스려야 마땅하다”하였다.
(이에) 공은 “불순하는 자가 없으며, 신 또한 (처벌) 글자를 읽을 수 없으나 벌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는 분명하다.
할 뜻이 없습니다. 단지 (풍월)주 형이 노하신 것은 말이 누차 귀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형의 노함이 조금 가라앉으면 곧 신은 마땅히 모두 제자리에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염장공이 웃고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진실로 나의 좋은 부제副弟이다. 나는 이미 선종仙宗 1세 풍월주 위화랑, 4세 풍월주 이화랑, 12세 풍월주 보리공, 20세 풍월주 예원으로 이어지는 풍월주의 가문 출신을 뜻한다.
이 보통 풍월주들과 같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낭도들은 본래 너의 집안의 무리이니 어찌 파가 있겠느냐. 이 무리들이 모두 너의 종奴들이니 또한 걱정스럽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낭두들이 모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죽을 죄를 지었으니 부주副主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이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쫓겨났다. 내가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각자 돌아가서 기다려라”하였다. 낭두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염장의 딸들]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첩으로 삼을 만한 어리석은 딸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하였다. 곧 서녀庶女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하였다. 공은 사야하며 말하기를 “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하여 감히 스스로 택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하였다. 곧 세 딸에게 명하여 손수 만든 옷을 공에게 바치고 애교를 부리게 하였다. 공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거두어 돌아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 딸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 정통파가 5명, 대원 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다. 모두 낭두郎頭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하였다. 예원공에게 청탁을 해 달라고 염장공을 조르는 것을 가리킨다.
예원공이 여러 차례 염장공의 부름을 받고 당堂에서 배알을 하면 염장공은 첩을 품고 앉아서 “아무개某는 실은 이 첩의 형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그를)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장차 첩들 때문에 곤란하여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는데, 첩들이 그냥 두지 않으니 어쩌겠는가”하였다. 공은 따뜻한 말로 사정을 아뢰어 올리고 물러났다. 염장공은 공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첩에게 말하기를 “예원은 비록 어리나 의리가 있다.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여 체면을 잃게 하지 말라”하였다. 첩들은 (예원)공이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것을 알고, 값비싼 뇌물로 공의 어머니 만룡낭주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만룡 또한 모두 어루만지고 순종케 하는 데 마음을 씀이 실로 많았다. 만룡은 평소에 미실의 딸 난야궁주蘭若宮主와 잘 지냈다. 그 딸 우야공주雨若公主는 진평제의 소생인데, 만룡은 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하였다. 공 또한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서로 화합한 것이 마치 아교나 옻으로 붙여 놓은 것 같아서 ‘如漆’은 사랑이 너무 깊어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첩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장공이 그 딸을 첩으로 삼아 주기를 너무 절실히 원하였으므로, 서로 사이가 나빠질까 염려하여 만룡이 취하기를 권하였고, 우야 또한 권하였다. 공은 부득이 염장공의 딸 찰기察己를 첩으로 삼았다. 곧 가야낭두 찰인察忍의 딸 소생이다. 만룡이 그 예의바른 태도를 보고 … 정하였다.
[부제 선품공]
공의 부제 선품공善品公 또한 미실궁주의 딸 보화공주宝華公主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그러므로 제帝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리 심하였다. 공은 선품보다 두 살이 많았다. 뜻과 취향이 서로 맞아 마침내 형제가 되었다. 은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 화랑의 부제를 의미한다.
로 삼고 거취를 같이하였다. 선품은 대원 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선도와 무도]
그 때 가야파인 진주공眞珠公이 오랫동안 좌방左方(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 줄 것을 권하였다. 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진주는 나의 형이다. 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려 줄 수 있겠는가”하였다. 진주는 이에 화랑을 물러나 병부兵部에 들어갔다. 화랑을 물러나 병부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하였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衆望을 크게 만족시켰다. 선도仙道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武道는 유신을 따랐다.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 주고 예부禮部로 들어갔다가 조부調府로 옮겼다. 선덕대왕이 총애하여 내성사신內省私臣220) 원래 필사본에는 ‘衿荷臣’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후에 ‘內省私臣’으로 고쳤다.
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죽자崩, 물러나 양진養眞 천성을 기르고 타고난 진심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을 행하였다.
[해신의 노여움을 풀다]
그 때 춘추공이 장차 당나라에 들어가려 할 때, 문장 잘 하고 풍채 좋은 사람을 선발하려 하였다. 선화仙花 3인, 승려僧侶 3인이 따라가기 때문에, 그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한 사람을 선발할 수 없었다. 흠순공欽純公이 “우리 예원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하니, 춘추공이 크게 기뻐하며 선발하였다. 공이 한가롭게 있으려 하여 사양하니, 춘추공이 말하기를 “이 같은 유사시에 어찌 한가로이 살 수 있겠는가?”하였다. 공은 이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유화遊花 3인을 뽑아 꾸며 태우고 거짓으로 종실 여자라고 이르게 하였다. 공이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骨品을 속이는가” 종실 여자 중에는 골품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라고 하며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하였다. 그 때 양도良圖 또한 선화仙花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主公 춘추공을 가리킨다.
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편안하면 함께 편안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海神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당인과의 문답]
당나라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공이 원광의 조카로서 문장을 잘 한다고 존중하였다. 유향柳享이 신선神仙의 도에 대하여 물었다. 공은 보종宝宗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연서燕書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이 암송하여 주었다. 또 우리 나라의 혼인하는 도道 혼도(婚道)의 구체적인 내용 중 문제로 삼은 것은 동기(同氣)가 상합(相合)하는 풍습으로, 근친혼임을 알 수 있다(22세 풍월주 양도공전 참조).
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신이 시조냐고 묻자 “일광日光의 신이다”하였다. 유향이 묻기를 “일광과 금천씨金天氏 『삼국사기』41, 열전 1 김유신 상에 의하면 신라인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였다.
가 같은가?”하였다. 대게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 나라에서 금천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일 것이다. 공이 반문하기를 “금천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하니,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또 당나라 재상이 묻기를 “너희 나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을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 나라가 군대와 땅을 빌려 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하였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리어 우리 땅을 침범하였다. 또한 가야는 본래 우리의 부용국附庸國이었고 지금은 이미 우리 나라에 들어왔는데, 백제가 그 서쪽 땅을 빼앗고 돌려 주지 않는다. 대개 탐욕스럽고 도가 없다. 그러므로 천병天兵을 얻어 토벌코자 한다”하였다. 또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건원칭제建元稱帝한 것은 언제부터인가?”하니, 공이 말하기를 “멀리 상고上古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단지 문자 사용을 말한 것이다”하였다.
또 묻기를 “가야가 너희 나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너희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어느 것이 옳으냐?”하니 공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기원전 57)에 섰고, 가야는 한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기원후 42)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다” 본서에 나타나는 신라와 가야의 건국시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건국연대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음을 볼 수 있다.
하였다. 당나라의 재상이 옳다고 여겼다.
[기신의 계책]
돌아올 때 당나라 사람들이 유화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우나 살 수 없다고 하였다. 유화도 함께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종자從者가 그들을 버리려고 하였다. 이에 공이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는가”하였다. 도중에 적병이 있는 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 기신은 한 고조의 신하인데, 고조가 하남성(河南省) 영양(榮陽)에서 항우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기를 희생하여 그를 구해 낸 사람이다. 고조의 수레에 타고 초군(楚軍)을 속여, 마침내 고조를 대신하여 죽었다.
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집사부 대등]
공으로 작爵이 오르고, 다시 품주稟主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당에 다녀온 것은 진덕왕 2년(648)이었기에, 예원이 품주로 있었던 시기는 648년부터 2년간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직관지에, 집사부는 본래 품주였는데 651년 집사부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예원이 품주로 있었던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어긋나지 않아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일 할 수 있다.
이어 이부理府의 영令이 되었다. 여러 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品이 이찬伊湌에 이르렀다. 문무제 13년(673) 집사부執事部의 대등大等 집사부의 장은 중시(中侍)였는데 대등(大等)이라고 한 것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각 행정 관부의 장들이 대등 회의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으로 있으며 관아에서 죽었다卒.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上大等의 예로써 장사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壽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
[신라의 혼도婚道]
공은 우리 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럽게 여겨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웠다. 항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 오기공이 사촌 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흠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품의 딸이니 네가 마땅히 자식으로 여겨야 하는데, 도리어 노여워하니 무슨 일인가. 산 자는 불안하고 죽은 자는 원망할 것이다. 네가 그것을 삺야 한다”하니, 공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운명은 곧 대문大問의 어머니이다. 『화랑세기』를 원래 쓰기 시작한 오기공은 적어도 이 부분까지는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구나. 아니면 선품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하였느냐”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보리의 자녀들]
공의 딸 온희溫喜는 춘장공春長公에게 시집갔고, 성희星喜는 원수공元帥公에게 시집갔으며, 우희雨喜는 마차공摩次公에게 시집갔다. 서녀庶女는 찰희察喜 ・ 찰연察燕 ・ 찰미察美 ・ 찰해察亥이다. 서자庶子인 찰덕察德 ・ 찰원察元은 모두 출세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 선화仙花의 으뜸이요 문장이 뛰어났다. 청빈한 호덕好德을 나라를 위하여 다 바쳤네. 신선을 물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성현을 물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인가.
세계 : 아버지는 보리 사문이고 어머니는 만룡낭주이다. 만룡의 아버지는 정숙태자이고 어머니는 만호태후이다. 정숙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다.
[21세 풍월주 선품공]
21세 선품공善品公은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다. 용모가 절묘하고 언행이 매우 아름다웠다.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宝龍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 주었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한결같이 예원공의 제도를 따랐다. 부제인 양도공에게 (풍월주를) 전하여 주고, 예원공을 따라 내성內省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예부에 올랐다. 인평仁平 신라 선덕여왕 때 사용하던 연호.
10년(643)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고 돌아와서 곧 죽었다卒. 나이가 35살이었다. 필사본에서는 원래 ‘35’로 된 것을 ‘36’으로 고쳤다.
왕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작을 아찬阿湌으로 올렸다.
[선품의 딸 자의와 운명]
후에 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波珍湌으로 추증하였다. 공의 차녀 운명雲明은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갔다.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제를 섬겨 궁주宮主가 되었다. 야명이 문무제를 섬겨 궁주가 된 것을 통해 당시 왕을 모시는 여자들 가운데 독자적으로 궁을 갖는 궁주가 나왔음을 알 수 있다.
외아들인 순원順元은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보룡]
처음 공이 죽고 보룡宝龍이 혼자 살았다. 그 때 문명태후가 선원전군仙元殿君을 낳고, 김춘추와 문명황후 사이에 출생한 아들 가운데 ‘仙元’ 혹은 ‘幢元’(처음 幢元으로 필사했다가 仙元으로 고침)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나오지 않아 문제가 된다(『삼국유사』1, 기이 2, 태종춘추공조 참조). 『화랑세기』에 문명태후가 낳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선원의 아버지는 김춘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26세 풍월주 진공(眞功)조에는 당원이 보룡의 아들이라 하였다.
보룡에게 젖을 먹여 줄 것을 청하였다. 문무제가 이로써 보룡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였다. 보룡이 제帝에게 장녀를 허락하고 스스로 여승이 되었다. 제帝가 애석하게 여겼다. 문무가 태자가 되자, 보룡의 딸 자눌慈訥을 비妃로 삼아 궁宮을 세워 자의慈義라 하고 자눌이 왕비가 되어 입궁하여 ‘자의’라고 한 것은, 당시 왕비들이 각기 궁을 갖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을 의미한다.
보룡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감監이 되도록 하였다. 순원順元 대아찬 순원(順元)은 효소왕 7년 당원(幢元)의 뒤를 이어 중시가 되었다(『삼국사기』8, 신라본기 8, 효소왕 7년.)
은 이로써 궁중에서 자랐으며 선원仙元 선원은 신문왕 10년(690)에 중시가 되었다(『삼국사기』8, 신라본기 8, 신문왕 10년).
과 당원幢元 당원은 효소왕 5년(696) 중시가 되었는데, 7년(698) 대아찬 순원(順元)이 중시가 될 때 까지 재임하였다(『삼국사기』8, 신라본기 8, 효소왕 5년, 7년).
전군과 더불어 같은 예로 작이 올라가니, 영화와 행운이 지극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일러 공의 음덕을 누린 것이라 하였다.
찬하여 말한다 : 보화의 아들이고 진흥대왕의 손자이다. 녹이 있으나 받지 않아 복이 자손에 미쳤다.
세계 : 아버지는 구륜이고 어머니는 보화이다. 구륜의 아버지는 진흥이고 어머니는 사도이다. 보화의 아버지는 진평이고 어머니는 미실이다.
[22세 풍월주 양도공]
22세 양도良圖는 모종공毛宗公의 아들이다. 선품공보다 한 살이 적었다. 처음 염장공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나이 겨우 12살에 상하의 예를 알았다. 흠순공 때에 이르러 예원공에게 속하도록 명하였다.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는데, 힘을 다하여 받들고 순종하였다. 풍월주가 되자 전횡이 많아 당시 사람 중에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의 성품은 사람 섬기기를 잘 하고 일의 추이에 밝았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공명功名을 중히 여겼다. 문장을 잘 하였고 격검에 능하였다. 늘 강개하여 천하를 말하니, 마치 한 세대의 영웅과 같았다. 상선들에게 몸을 굽혀 존경을 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것 같아서 윗사람들의 기분을 다 맞추었다.
[공의 출생]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공주良明公主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제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들이고 내사內賜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리는 것을 의미한다.
를 많이 하였다. 공은 스스로 가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가서 딸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보종공이 내사內事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곧 하종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럼 사랑하였다.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의 상서로움을 얻고 길조吉兆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하고는 반듯이 누워 자 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 옆에서 묵화를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럽혀졌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 원래는 글자를 읽ㅇ르 수 없으나 사랑(好)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여 공을 낳았다. 대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를 발로 차서 사랑好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5살 원래는 5살이 아니었으나 후에 수정된 것이다.
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랑하여 ‘제공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 이름지으며 말하기를 “그림은 제공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하였다. 공주가 기뻐하여 그 이름을 허락하였다.
[양도의 진도陳圖]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는 대답할 것이 없어 숨겨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은 것을 말한다.
말하기를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이름지은 것이다”하였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하였다. 따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사신 모종공]
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私臣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늘 모종공을 ‘숙공叔公’이라고 불렀다. 커서는 곧 친아버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하였으며,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효도하였다. 모종공이 말하기를 “너는 실제로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를 이었으니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옳다”하였다. 대개 보종공이 공을 사자嗣子로 삼은 까닭이다.
[사자嗣子]
공은 그러므로 형 장명長明을 뛰어넘어 먼저 낭계郎階에 발탁되었다. 공이 그 형을 걱정하여 양보하려고 하자, 염장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집과 나라에는 모두 사자嗣子가 있으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형에게 우애롭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게에 죄를 얻을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장명에게 형으로 처신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장명은 이에 몸을 굽혀 공을 섬겼다. 공은 한층 더 효도를 하고 우애를 다하였다. 염장공 섬기기를 또한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하였다.
[신국의 도]
처음에 장명의 손위 누이 보량이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전군인 보로宝路를 낳았다. 승만후僧滿后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공주가 이에 제帝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 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은 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공은 본디 동기간에 서로 결합結合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 공주가 성을 내어 책망을 하니, 공이 부득이 말하기를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夷狄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하였다. 공주는 이에 … 공을 감싸안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내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 하겠느냐”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큰 사랑과 작은 사랑]
공은 보량을 처로 대우한 적이 없고,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보량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느냐” 너와 내가 같이 산 지 3년이며, 이같이 아름답고 예쁜 아들을 낳아 부모가 매우 기뻐하고 내가 너를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불상도 신상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백 말의 공경은 한 되의 사랑만 못한다는 것을 부부 사이에 공경은 해서 무엇 하겠느냐?“하였다. 공이 웃고 보량을 감싸안으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같은 굴에서 생사를 하는데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를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과 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그대를 큰 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하였다. 보량은 이에 스스로 부끄러워 사과하고, 공을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 감히 외설스런 일로 공 앞에서 희롱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의 지아비는 천하에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다“하였다. 비록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조리하여 공의 입맛에 맞추었으며, 조그만 아픔과 작은 병도 걱정하며 정성을 다했다.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화주와 낭정]
공이 풍월주가 되자 스스로 아름다움이 쇠하였다고 생각항, 능보能宝를 뽑아 화주花主 풍월주의 처를 가리킨다. 나름대로 화랑도와 관련된 임무가 있던 것이 분명하다.
로 삼으려 하였다. 능보는 본디 보량의 침비枕婢였는데, 승진하여 난방暖房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선부仙父의 사자嗣子로 혈통血統을 얻었는데, (진골)정통은 그대에게 있다. 그대가 화주花主가 아니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되겠는가”하였다. 보량은 이에 기쁘게 화주의 지위에 올라 공과 더불어 축하를 받았다. 그 때 공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보량의 나이는 33살 원래는 34살로 되어 있는데, 33살로 고쳤다.
이었다. 공은 낭정을 보량에게 많이 맡겼으나 큰 일은 스스로 맡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주 『삼국유사』2, 기이 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조정(朝廷)의 화주(花主)가 나오고 있다. 이것을 정부의 관리로 알았는데, 『화랑세기』에 따르면 풍월주의 처임을 알 수 있다.
가 집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공이 실제로 큰 낭정을 결정하였다.
[낭두와 낭도]
풍월주가 된 후 처음에 낭두郎頭 화랑도 조직 중, 화랑이 아닌 낭도 중 우두머리를 낭두라고 하였다. 그들은 일정한 세력 집단을 이루어 화랑도의 낭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점차 그 지위를 확대해 나갔다.
7급을 9급으로 하였다. 국초에 서민庶民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郎門 화랑이 속한 선문(仙門)과는 달리 낭도들이 속한 곳이다.
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으며, 23,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는데, 화랑도의 연령에 따른 조직을 알 수 있다. 그 중 동도는 아직 어려 군대에 갈 나이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하여 평도와 대도는 군대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0살이 넘으면 화랑도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친 것도 확인된다.
대도 중 입망자入望者는 망두望頭라고 하였다. 공과 재주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臣頭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만이 낭두가 되었다. 대도大徒가 30살이 되면 곧 병부兵部에 속하거나, 또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長 향리의 장은 촌락의 차촌주 또는 진촌주가 된 것을 의미할 수 있다(이종욱,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歷史學報』64,1974, pp. 49-67).
이 되었다.
[입망의 법과 마복자]
입망의 법에는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摩腹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는데,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총애幸를 얻으면 물러났다. 물러날 때 그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고 맞이하였다. 이름하여 사함謝函이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였으며, 세함洗函이라고 하였고, 몇 날이나 몇 달 만에 총애幸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謝函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 경박한 여자는 선문에서 놀고자, 임신하였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들어가 탕비가 되었는데, 임신이 안 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隸卒들과 사통하거나, 혹은 선종仙種 화랑의 아이를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을 얻어 돌아가니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였다. 낭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낭두의 등급]
처음에는 낭두에 낭두郎頭ㆍ대낭두大郎頭ㆍ낭두별장郎頭別將ㆍ상두上頭ㆍ대두大頭ㆍ도두都頭의 등급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공이 그 위에 대도두大都頭ㆍ대노두大老頭를 더하였다.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지위를 높였다.
[청례와 옥로의 폐단과 유화]
낭두의 딸은 모두 선문에 들어갔는데, 이름하여 봉화奉花라 하였다. 위 화랑을 의미한다.
로부터 총애幸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투어 청례靑禮를 하기 위하여 아양을 떨었다. 총애를 받은 자는 ‘봉로화奉露花’라 하였고 아들을 낳은 자는 ‘봉옥화奉玉花’라 하였다. 옥로玉露 봉옥화와 봉로화를 의미한다.
가 아니면 낭두에 새로 오른 자들이 처로 삼지 않았다. 대개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청례를 하지 못하면 선문에서 늙어 예졸들에게 떨어졌다. 공은 이에 청례와 옥로의 폐단을 금하였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郎門에 속하여 유화遊花가 되었고, 서민은 평인ㆍ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평인ㆍ백성의 여자들이 유화가 되어 낭문(郎門)에 들어간 것이 확인된다.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田舍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서두르면 샌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문의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 중에는 전횡하다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염장공이 (이를) 걱정하여 공에게 지나치게 빨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이 직간하여 “미생공은 마복자가 …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부주父主께서는 마복자가 백 인이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저들이 좋아 요구하였으니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순리대로 하면 되고 서두르면 물이 샌다”하였다.
[신주의 덕화]
그 때 도두 세기世己의 처 도리道里는 어려서부터 아리땁다는 명성이 있었다.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고 나와서 세기의 처가 되었다. 세기보다 12살이 많았다. 세기를 노복과 같이 보아서 그 뜻에 맞지 않으면 세기를 매질하였는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세기에게는 첩이 셋 있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으면 도리가 질투를 하고 철기鐵器로 세기를 난타하여, 세기는 일어나서 낭무郎務를 볼 수 없었다. 공이 노하여 도리를 잡아다가 막 볼기를 치려 하는데, 도리가 말하기를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曉長과 유장劉長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법은 없습니다”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일종의 특권을 부여한 것으로, 선종(仙種)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된다.
하였다.
공이 노하여 “너의 죄는 곤장 3대에 해당하나 너의 말 때문에 곤장 3대를 더한다”하고, 그 치마를 내리고 묶었다. 보량이 간하여 말하기를 “염부廉父 염장공을 가리킨다.
가 알면 마음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우리들이 어찌 지위로써 사람을 다스리고 도리어 불효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면 많은 사람을 징계할 수 없소”하였다. 이에 세기를 불러 꾸짖기를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처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너의 죄는 파면해야 마땅하다. 너의 처를 곤장치려 하였는데 화주花主가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너를 파면함으로써 너의 처를 징계할 것이다”하였다.
도리는 세기가 파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볼기를 맞을 것이니 지아비를 파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부의 의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네가 세기를 나와 같이 섬기고 감히 방자한 행동을 않는다면 당연히 볼기맞는 것을 면하고 너의 지아비를 보호 할 수 있다”하였다. 도리가 이로써 그 지아비에게 굴복하여 방자함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첩들에게 강새암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낭두의 처들도 모두 선仙 관계를 맺었던 화랑을 가리킨다.
을 믿고 지아비에게 방자할 수 없게 되었다. 낭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신주新主의 덕화가 안방까지 깊이 미쳤다”하고, 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양도의 전횡과 개혁]
그런데 공은 실제로는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공의 아들을 많이 낳았으며, 폐신嬖臣 찰의察儀가 위로 보량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낭두들이 사사로운 정으로 많이 일어나 높은 자리에 올랐으며, 낭정郎政의 일이 전횡에서 많이 나왔다. 상선上仙들이 운상雲上에서 의논을 하고, 3파가 막하幕下에서 다투었다. 공은 이에 보량에게 “무리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파리를 쫓고 풀을 뽑는 것과 같다. 오래지 않아 …이 없어질 것인데 어찌할 것인가?”하였다. (이에) 보량이 웃으며 “낭군은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하였다. 공 또한 웃으며 “누가 나의 처를 강새암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나는 낭정에서 물러날 것이다”하였다. 이에 부제인 군관軍官에게 물려 주며 말하기를 “너는 능히 장엄하고 정중하여 자제력이 나보다 뛰어나다”하였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면서 오래 된 폐단을 개혁한 것이 매우 많으니 어찌 공이 없다 하겠는가. 공의 사랑하고 미워함은 심히 치우쳐, 마음 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랫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부제위 다툼]
공이 풍월주에 오를 때 문충文忠과 선제善祭 등이 모두 부제의 지위를 다투었는데, 22세 풍월주인 양도공 대에 이르러 화랑도의 조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음을 볼 수 있다.
공이 홀로 염장공의 아들 윤장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윤장의 누이 춘화春花가 공의 애첩이었으므로, 윤장은 나이가 어리고 경박하여 총애를 믿고 어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염장공이 명하여 부제를 그만두게 하였다. 문충文忠ㆍ선제善祭ㆍ천진天眞ㆍ하장夏長 등이 다시 부제 자리를 다투었다. 공이 홀로 군관軍官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여러 상선上仙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보현궁普賢宮의 사손嗣孫이 부제가 되지 못한다면 곧 누가 될 수 있습니까?”하고, 곧 그 첩인 천운天雲을 군관의 처로 삼아서 뜻을 공고히 하였다.
처음에 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이 명란明蘭이 사(통)하였는데, 공이 이미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였기에 명란이 장명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이 공만 못하여 그 어머니(昔明)를 원망하였다. 석명은 곧 양명良明의 이부형異父兄이었다. 양도의 어머너가 양명이고, 군관의 어머니가 석명인데, 양명과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이다. 양명의 아버지는 진평왕이고, 석명의 아버지는 진지왕이다.
군관은 이에 장명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하기를 “남의 부인 ‘嫂’는 형수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부인의 뜻으로도 쓰인다.
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하였다.”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커다란 지략을 가지고 있어 위아래를 다스릴 수 있었으니, 공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에게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서로 도왔다. 군관은 용기가 있어 전쟁을 잘 하였기에 공의 훈업 또한 군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신통한 점쟁이]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도중에 점쟁이를 만나, 점을 친즉 말하기를 “두 공은 모두 장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하였다. (이에) 공은 웃으며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하였다. 공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 『삼국사기』6, 신라본기 6, 문무왕 10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은 환국시키고, 양도는 잡아 가두어 원옥(圓獄)에서 죽었다 하였다.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하다가, 마침내 흠돌欽突의 난에 연루되어 명을 받고 자살하였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절의 노비가 된 양도의 자녀들]
공은 일곱 (명의) 아들과 …(명의) 딸이 있었으며, 서자녀庶子女는 각기 10여 명이 있었다. 군관 또한 공의 누이 2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18인을 두었는데, 흠돌의 옥사에 많이 연루되었다. 공의 처 보량은 공이 전사한 것으로 잘못 듣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은 절의 노비가 되었다. 대개 공의 가풍을 알 수 있다.
찬하여 말한다 : 미실의 후예이고 진평의 손이다. 나라를 위한 간성干城이 되어 공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어려움에 임하여 몸을 던졌고, 만리에서 혼을 불러 장사지냈다. 대인은 기림이 없으니 천자와 더불어 남으리로다.
세계 : 아버지 모종의 아버지는 하종夏宗이고 《어머니는 미모美毛》, 이 부분은 필사본 여백에 추기(追記)되어 있다.
양부養父 보종宝宗의 아버지는 설원이다. 어머니 양명良明의 어머니는 보명宝明인데, 지소태후와 침신枕臣 구진仇珍의 사이에 태어났다. 보명은 아름답고 부드러워 향기가 있었다. 세 명의 제帝를 섬겼으나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제帝를 도導하도록 도(導)에는 이끌, 인도할, 통할, 다스릴, 열어주 등의 뜻이 있다.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上導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 때 석명昔明을 가진 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幸을 받았다. 제帝는 양기陽氣가 통하게 되자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導할 것을 구하였다. 보명이 감히 어길 수가 없어 사랑幸을 받았다. 이 해 9월 제帝는 보명과 미실을 좌ㆍ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을 낳고 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을 낳았다. 양명은 보명을 많이 닮았다. 그러므로 제帝가 매우 사랑하여, 늘 제帝의 곁에 있었다. 나이가 20살이 넘어 비로소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보량을 나았다. 28살에 모종공과 통하여 공을 낳았는데, 보배로운 난새로 생각하여 어머니의 사랑이 더욱 깊었다. 공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종신토록 명을 어긴 바 없었다.
[23세 풍월주 군관공]
23세 군관공軍官公은 동란공冬蘭公의 아들이다. 어머니 석명공주昔明公主이니 진지제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 살이 적었다.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의 전형典型이 있었다. 15살에 활을 잘 쏘았고 힘이 세서 당할 자가 없었다. 병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릇이 크다고 하였다. 석명이 말하기를 “내가 해마海馬의 꿈을 꾸고 이 아이를 낳았다. 반드시 우리 집의 천리구千里駒 천리마로서 자질이 뛰어난 소년을 가리킨다.
가 될 것이다”하였다.
[삼생의 형제]
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을 따라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석명이 일찍이 진평의 후궁으로 있을 때, 양명과 더불어 함께 살며 삼생의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낳으면 함께 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명이 양명에게 “우리 자매의 마음을 이 아들이 꿰뚫었다”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양도공과 더불어 삼생 형제三生兄弟가 될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 양도공이 위가 오르면 반드시 공을 자기가 있던 자리에 이끌어 앉혔다. 그 때 윤장 또한 양도공의 사랑하는 아우弟로서 공과 나란히 경쟁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그 세를 당할 수 없음을 알고 일마다 윤장에게 양보하였다. 윤장은 공과 같은 나이인데 한 달이 빨랐으므로 공은 형으로 섬겼다. 윤장은 색을 좋아하였고, 재물을 탐하였으며, 종녀宗女나 유화와 간음을 많이 하였는데, 여자의 사사로운 말을 듣고 죄 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씌웠다. 소문이 궁중에 퍼졌다. 염장공이 그것 때문에 대죄待罪하였다. 양도공이 이에 공을 이끌어 부제로 삼고, 보량과 더불어 낭정을 함께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공은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한결같이 양도공의 마음 쓰는 법을 따랐다.
[폐신 찰의]
그 때 양도공의 폐신 찰의察儀가 미모로 아양을 잘 떨어 보량과 내통하고 전횡을 많이 하였다. 공이 검을 뽑아 참하려 하자, 찰의가 낭하로 달려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보량이 말하기를 “이 피라미를 죽이면 누累가 우리 부부에게 미칠까 걱정입니다”하였다. 이 때부터 찰의는 감히 다시 낭정에 대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선덕제와 군관]
공의 성품은 주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생활을 엿볼 수 없었다. 보량이 늘 “군관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의 신하다”하였다. 선덕제善德帝가 일찍이 궁정의 연회內宴 내진연(內進宴). 내빈을 모아서 베푸는 진연(進宴).
에서 조용히 보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듣건대 너의 폐아嬖兒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하였다. 보량이 대답하여 “신이 듣건대 천자는 신하의 내사內事를 묻지 않는다고 합니다. 폐하가 굳이 물으신다면 신첩에게 한 명의 사신이 있으니, 보여드리겠습니다”하였다. 다른 날 군관軍官을 데리고 뵈었다. 대개 제帝의 뜻이 찰의에게 있었는데, 군관을 뵈게 한 것이다. 제帝가 군관에게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슨 재주가 있느냐?”하고 물으니, 군관이 답하기를 “신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단지 마음 속에 있습니다”하였다. 제帝가 “네 마음 속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가?”라고 하자, 군관이 말하기를 “신은 보량 부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보량 부처는 폐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소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것뿐입니다”하였다. 제帝가 그 착함을 칭찬하며 음식을 내리고, 보량을 보며 말하기를 “네가 데리고 있는 한 아이가 나의 열 아이보다 낫다. 잘 기르기를 바란다”하였다.
[부제 천광]
처음에 염장공의 누이 천장낭주天長娘主는 수품공水品公에게 시집가서 딸 천운天雲을 낳았는데, 천운은 경국지색傾國之色 썩 뛰어난 미인을 의미한다.
이 있었다. 천운의 동생 천광天光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양도공의 폐신嬖臣 폐신의 원래 뜻은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이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이 되었다. 양도공이 마음으로 천운을 좋아하여 천장낭주에게 몸소 청하여 첩으로 삼고, 사랑하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보량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공이 이에 처첩의 도道로써 간하니, 양도공은 천운을 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광 또한 공에게 소속되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했다. (이에) 공이 “처의 동생을 이끌어 주었다는 여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하니, 양도공이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명령한 것이다”하였다. 공은 부득이 천광을 부제로 삼고는 천운에게 말하기를 “너는 화주가 되었고 너의 동생은 부제가 되었으니, 낭도들이 반드시 내가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천운이 웃으며 “낭군 또한 주군 풍월주를 가리킨다.
의 첩의 동생이 아닙니까? 우리의 살갗 한 점, 머리털 한 오라기도 주군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길 수 있습니까? 낭군은 단지 조심하며 명을 받들면 됩니다. 그리고 천광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면 또 옳지 않겠습니까?”하였다. 공이 “그대의 말이 옳다”하였다.
[화주 천운]
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 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양도공의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이 비록 화주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하는 낭도들이 노래를 지어 비방하기를,
부량의 문 안에는 사람이 구름 같고
천운의 집 위에는 흰 구름이 지나간다
하였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짖어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하였다. (이에) 천광은 “그 은혜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하였고, (군관)공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 누나의 견해와 나의 견해가 같다. 머지 않아 네가 풍월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흠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하였다. 이로써 천광은 감히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 공은 장엄하고 정중하며 큰 뜻이 있어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진노하면 천둥 번개가 이는 것 같았으나, 마음은 실로 부드럽고 온후하여 부인을 감읍하게 할 수 있었다. 부부가 대단히 화목하여, 역대의 풍월주들이 모두 낭두의 처와 딸들을 거느렸으나, 공은 홀로 한 번도 사랑幸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이 노래하여 이르기를,
천운은 높고 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공과 양공良公이 모두 선덕제善德帝를 입시入侍하여 작위를 뛰어넘어 받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찬하여 말한다 : 보현공주의 후손이고 금륜왕의 손이다. 양도공에게 한결같이 의지하였고, 생사도 같은 근본이다.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원통함을 머금었다. 오호! 푸른 하늘이여, 이 무슨 업의 뿌리인가.
세계 : 아버지는 동란冬蘭이고, 할아버지는 동종冬宗이다. 증조는 오종五宗이다. 오종공은 사실공주梭失公主의 아들이다. 보현공주가 어렸을 때 법흥대제와 사랑和好하여 사실공주를 낳았다. 법흥대제가 사실을 입종공入宗公에게 시집보내어 오종공을 낳았다. 오종공은 곧 진흥대제의 이모 형異母兄이다. 오종이 비차부比次夫의 딸 비란比蘭을 아내로 맞아 딸 오란五蘭을 낳고, 황종공荒宗公의 아들 동종冬宗을 데려다 아들로 삼아 오란을 배필로 삼게 하여 동란을 낳았으니, 공은 실로 보현과 사실의 적사嫡嗣이다. 석명공주가 처음에 진평제를 섬겨 두 딸을 낳고 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音聲署의 장長 원래의 필사본에는 ‘長’으로 되어 있던 것을 ‘令’으로 수정하였으나, 음성서에는 령(令)이 없었다. 따라서 필사본을 수정한 사람이 신라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38 직관 상에는 음성서의 장(長)을 신문왕 7년(687)에 경(卿)으로 고친 것으로 나오고 있어, 『화랑세기』가 적어도 687년 이전에 저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으로 향가鄕歌를 잘 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昔蘭을 낳았다. 제帝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 감히 처로 대하지 못하고 군君으로 섬기며 자녀를 계속 낳았다. 공은 그 네 번째이다.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인데, 금륜제金輪帝를 섬겨 현조玄鳥 제비의 별칭 또는 학의 별칭이다.
에 대한 꿈을 꾸고 석명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황종의 증손이고 구진仇珍의 외예外裔가 된다.
[24세 풍월주 천광공]
24세 천광공天光公은 수품공水品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말은 친절하고 거동은 단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협기가 있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으며,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상선上仙으로 인하여 동요하지 않았다.
[천운과 양도]
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嬖臣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도공이 여러 번 공의 집에 와서 잤다. 공의 어머니 천장낭주는 곧 염장공의 누이로서 공의 누나 천운과 더불어 양도공을 맞이하여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즐겼는데, 날이 밝아 오는 것도 알지 못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천운은 마침내 양도공에게 시집을 갔다. 양도공은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군관공에게 공을 부제로 삼도록 명하여 공이 부제가 되었다. 양도공이 공에게 춘화春花의 누이 윤화尹華와 결혼하라고 명하여 공은 그를 아내로 삼았고, 이에 이르러 윤화는 화주花主가 되었다. 처음에 윤장의 아우 하장夏長이 공과 더불어 부제가 되려고 경쟁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 때 이르러서야 양도공이 공에게 명하여 하장의 아우 춘장春長을 부제로 삼았다. 춘장은 곧 윤화의 형이다. 윤화의 어머니 하희는 곧 하종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 은륜공주는 사도태후의 딸이어서 많은 사재私財가 있었다. 윤화가 그것을 얻어 공에게 시집을 갔기에, 곤란한 사람을 도우는 데 쓰기에 넉넉하였다.
[염장공의 마복자와 낭정]
염장공 이후 낭정이 가야파에게 많이 돌아갔으므로,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에는 출세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다. (이에) 공이 개탄하여 발탁하여 주었다. 양도공과 군관공 때에 낭두들은 염장공의 마복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그들을 많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낭두는 낭정에 중요한 자들이다. 어찌 내 옹翁 천광고의 어머니인 천장(天長)의 오빠 염장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염장공은 천광공의 외숙부가 된다.
만이 홀로 중하고 낭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하였다. 쫓겨난 자들이 모두 염장공을 찾아가 공의 허물을 말하니, 염장공이 웃으며 “너희들이 새 풍월주를 따르지 않는데 나 또한 어쩌겠는가?”하였다.
[가야파 대노두 찰인]
그 때 가야파의 우두머리 찰인察忍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 대노두로 있었고, 처첩과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며, 출입하고 거동하는 것이 완전히 상선과 같았다. 그 아들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이 모두 도두가 되었는데 <찰두는 계해년(603) 생이고 찰석은 을축년(605) 생이다>, 각기 첩이 수십 인이었다. 낭두들이 그 아들과 사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대도두 당보 또한 찰인察忍의 사위였으며, 그 막내아들 찰의察儀가 양도공의 폐아嬖兒가 된 것 등, 그 권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찰인의 처 옥두리玉斗里는 절색으로, 역대의 상선을 섬긴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공은 본디 찰인을 미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먼저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골 정통의 구두舊頭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도 대노두가 되었다. 당보는 곧 당두唐斗의 아들로, 대원 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낭두의 연령 제한]
공은 우뚝 서서 들어 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대노두는 60살까지로, 대도두는 55살까지로, 도두는 50살까지로, 대두와 상두는 45살까지로,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別將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 사람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였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의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이로) 인심이 크게 흡족하였다.
[비담의 난 진압]
그 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 화랑도의 군사적인 임무가 커지고, 낭도들이 병부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 필사본에는 ‘毗雲’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5, 신라본기 5 선덕왕 16년조에 나오는 것과 같이 ‘毗曇’으로 바꾸었다.
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 24세 풍월주인 천광공을 가리킨다.
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 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였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功을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중흥 28장]
곧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인 춘장에게 전하여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將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 할 만하지 않은가! 공의 성품은 외유내강하고, 사리를 분명히 살펴으며, 사민士民을 사랑하고 구휼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술은 즐겼으나 많이 마시지 않았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방사房事에 어지럽지 않았다.
[3파 통합]
윤화낭주가 자녀 7명을 낳았다. 공은 첩이 5명이었다. 진수眞凁는 진복공眞福公의 누이이다. 효월孝月은 효종공孝宗公의 딸이다. 경화京華는 윤화의 누이이다. 찰언察言은 찰의의 누이이다. 만수萬水는 만덕萬德의 딸이다. 각기 자녀가 있어 일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찰인은 비록 그 지위를 잃었지만 딸을 공에게 바쳤고, 공이 지극히 공적이고 사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고 그 자손을 타일러 말하기를 “신주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영웅이다. 우리들이 어찌 일시의 잃음을 가지고 원망을 마음에 두겠는가. 기쁜 것은 이 훌륭한 선仙을 얻었으니 우리 외손을 낳아서 기르면 나의 집안이 또한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하였다. 이로써 3파가 화합하고 좋아하여 서로 혼인하고,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하였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계 : 아버지는 수품水品 상대등 『삼국사기』5, 신라본기 5 선덕왕 5년 춘정월 조에 이찬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인데 곧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구륜공이 반야공주를 아내로 맞아 수품공을 낳았다. 반야의 어머니는 미실궁주이고, 구륜의 어머니는 사도태후인데, 모두 진흥대제가 아버지다. 수품공은 천주공의 딸 천장낭주를 아내로 맞았으니, 곧 지도태후의 사생私生이다. 천주공 또한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세계는 염장공조에 자세하다.
찬하여 말한다 : 대원 신통에서 나왔고 가야파에 들어갔다. 세 화랑을 도왔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직 공의 맑은 덕은 만세에 바야흐로 빛날 것이다.
[25세 풍월주 춘장공]
25세 춘장공春長公은 염장공의 셋째 아들이다. 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덕을 좋아하였으며, 윗사람을 받드는 데 지성으로 하고 자기의 뜻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천광공天光公의 누이 천봉낭주天鳳娘主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낭정郎政은 한결같이 천광의 명에 의거하여 행하였고, 천광공의 명으로 찰두察斗를 대도두, 만덕을 대노두로 삼았으므로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부제 진공眞功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眞凁의 아우이다.
[바쁨과 한가함]
공은 낭정을 진공과 찰두에게 맡기고, 매일 낭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낭주가 말하기를 “내 형이 풍월주로 있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는데, 낭군이 풍월주가 되고는 낮에도 일이 없으니 무슨 까닭 입니까?”하니, 공이 웃으며 “바쁘다면 자체가 바쁜 것이고, 한가하다면 자체가 한가한 것이지, 어찌 추호의 가감이 있겠소”하였다. 그러나 공은 집에서는 근검으로 자제를 훈계하였다. 늘 낭주와 더불어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몰래 서울과 시골로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을 구흉하였다.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
[집사부 중시]
풍월주로 6년간 있다가 진공眞功에게 물려 주고 창부倉部에 발탁되어 들어갔다. 곧 집사부執事部로 옮겼는데, 그 일이 맞았으므로 여러 번 승진하여 중시中侍가 되었다. 공은 늘 스스로 겸손히 말학를 “나 같은 사람을 가히 일러 행운아라 한다. 한 가지 재능도 없이 단지 부형과 상선上仙들의 음덕에 의지했을 뿐이다”하였다. 공적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선문의 사표]
기상이 천주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천장이 늘 천봉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지아비는 아형阿兄 형을 친하게 부르는 말이다.
을 닮지 않고 나와 몹시 닮았다.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고 나를 닮지 않았다. 너의 부부는 도리어 나의 부부와 흡사하다”하였다. 그 말이 대개 빈 말이 아니었다. 공은 일찍이 보종공의 청결함을 사모하여 덕을 세우는 표준으로 삼고, 틈이 생기면 반드시 화주花主와 같이 몸소 그 사당에 나아가 절하며 기도하고 돌아왔다. 보량을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청하는 것은 들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보량은 이에 그 딸 양시良時를 공에게 주어 첩으로 삼았고, 다른 잡스런 여자는 없었다. 공의 행실은 선문仙門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찬하여 말한다 : 천주의 후예로 이 같은 성인이 있다. 마음가짐이 깨끗하고 …을 하는 데 어질었다. 내조가 짝이 되어 아름답고 복록이 날로 새롭다.
세계 : 아버지는 염장공이고, 어머니는 하희인데 곧 하종공의 딸이다. 하희의 어머니 은륜공주는 진흥대제의 딸이다.
[26세 풍월주 진공]
<진공眞功은 임오년(622)생이고 임자년(652)에 화랑이 되었다> 화랑이 아니라 풍월주가 된 것을 뜻한다. 이 기록은 필사자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원본 『화랑세기』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원본에 있었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원본을 다시 발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6세 진공眞功은 사린공思隣公의 아들이다. 처음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섬겨 반야공주를 낳았다. 천광공은 반야공주의 적손嫡孫이다. 또 수종 전군壽宗殿君을 낳았는데 후에 사진思眞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곧 사린이다. 그러므로 진공과 천광공은 재종 형제가 된다. 반야가 일찍이 수종에게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데 같은 아버지의 형제는 오직 너와 나뿐이다”고 말하고, 대대로 서로 저버리지 않기를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수품공 또한 사린 사랑하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 하였다. 사린의 어머니 호린好隣은 곧 호림공虎林公의 누님이다. 사린은 처음에 임종공林宗公의 대사大舍가 되었는데, 임종공의 첩 호명好明과 득통得通하여 딸 진수眞凁를 낳았다. 임종공이 곧 호명을 사린의 처로 삼게 하여 진공을 낳았다.
[진공의 탐욕]
(진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풍채가 있었고 기묘한 꾀를 좋아하였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하였으며, 또한 굳세고 용맹스러워 무리를 다스리기에 족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였고 마음이 탐욕스러웠고 사사로운 비밀을 많이 행하여, 인망人望을 얻지는 못했다. 찰두察斗와 결탁하여 찰두의 딸 셋을 첩으로 삼았다. 또한 찰두 아들 승昇의 처 대씨大氏를 첩으로 삼았다. 찰察과 대大 양족의 처와 딸 중 아름다운 자들은 모두 색공色供 장부에 올랐다.
[진공과 흠돌의 무례]
이에 앞서 진공과 달복공達福公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나인 흠신欽信이 보로전군宝路殿君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과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姬는 곧 유신공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고 보량을 설득하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폭로하면 단지 내 자녀가 상처를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까?”하니,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 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흠신]
흠신은 또한 진공이 출중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하여, 보로를 버리고 진공에게 가려고 하였다. 진공은 이에 사람을 시켜 보로를 설득하기를 “흠신은 병이 있으니 버리고 다시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다”하였다. 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곧 유신庾信의 삼녀 작광酌光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 진공은 이에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았다. 논자論者들이 옳지 않게 여겼다. 진공은 개의치 않고 아울러 흠돌을 부제로 삼았다.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
[자의의 아름다움과 흠돌]
그 때 가야파가 크게 성하여 찰씨察氏 일문에서 낭정을 모두 장악하였다. 찰의는 도두별장都頭別將인데 대도두로 행세하였다. 흠돌은 찰의와 죽음을 같이할 친구가 될 것을 허락하고, 보량과 득통을 하고 진덕제眞德帝를 알현하였다. 제帝는 그의 작爵을 올려 주고 총애하였다. 이에 앞서 흠돌은 자의慈義의 아름다움을 듣고, 보룡宝龍이 홀로됐음을 업신여겨 (자의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 전군幢元殿君을 낳았다. 흠돌은 사람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대개 보룡에게 왕의 총애가 있음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의가 태자비가 되자 흠돌은 장차 화가 미칠가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은 문명황후文明皇后의 조카였다. 그러므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궁慈儀宮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였다. 흠돌이 문명후文明后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어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 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광信光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族을 편안하게 함만 못합니다”하였다. 신광은 유신공의 딸로, 태자의 첩이 된 사람이다.
[27세 풍월주 흠돌]
<흠돌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흠돌의 악행]
신광의 형 진광晋光은 곧 흠돌의 처였다. 그러므로 흠돌은 유신공의 공功을 핑계대서 말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그 무리를 굳세게 하려 하였다. 문명후는 거의 기울었으나 태자가 받아드이지 않아 흠돌의 계책은 마침내 깨어졌다. 진공은 풍월주의 지위에 5년간 있다가, 흠돌에게 물려 주었다. 그 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 소명 전군은 무열왕의 태손으로, 문무왕의 아들이고,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이다.
이 이미 태어났고, 무열제는 자의慈義의 현속함을 매우 사랑하였다. 흠돌은 감히 다시는 그 계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보룡궁宝龍宮에 정성을 바치고, 그 딸을 순원順元의 첩으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보룡궁은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흠돌은 다시 사람을 시켜 야명궁夜明宮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정성을 바치고 전에 저지른 악행을 덮으려 하였다. 그 때에 야명夜明 또한 인명전군仁明殿君을 낳았는데, 준수하고 용봉龍鳳의 자태가 있었다. 태자가 매우 사랑하니, 흠돌이 스스로 말하여 인명仁明의 신하 되기를 원하였다. 야명夜明이 부득이 받아들였다. 그 때 순원공順元公이 흠돌에게 속아, 비밀히 흠돌의 딸과 사통하였다. 그리하여 흠돌을 위하여 야명을 설득한 것이다. 무열제武烈帝가 죽고崩 문무제가 즉위하자, 자의慈義를 황후로 삼았다. 자의는 흠돌의 악함을 알았으나, 문명태후에게 효도하였으므로 한 마디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삼간과 오기공]
이에 앞서 흠돌은 호원공好元公의 아들 흥원興元을 부제로 삼았다. 애초에 태양공주太陽公主가 진평대제를 섬겨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는데, 제帝를 닮지 않았다. 공주는 어려서 금륜태자金輪太子를 섬겼는데, 사신私臣을 좋아하였다. 제帝를 섬길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양 군(태원과 호원)은 통統을 얻지 못하였다. 흥원은 제통帝統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누이를 흠돌의 첩으로 삼아 결탁하였다.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 낭정郎政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하였다. 진골 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공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臣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하였다. 자의慈義 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풍월주의 지위를)받았다. 흠돌은 풍월주로 7년간 있고 나서 [28세 오기공조로 연결]
[28세 풍월주 오기]
<오기는 계사년(633) 생이고, 임술년(662)에 화랑이 되었다>
[삼간의 전횡]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풍월주)다.
이 때 낭정郎政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眞功, 흠돌欽突, 흥원興元 등도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다. 아버지는 바로잡을 수 없음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 원선공元宣公에게 물려주었다.
[29세 풍월주 원선공]
<원선元宣은 병신년(636) 생이고, 갑자년(664)에 화랑이 되었다>
원선공元宣公 또한 4년간 재위하고, 역시 군관공軍官公의 적자 천관天官에게 물려 주었다.
[30세 풍월주 천관]
<천관은 기해년(639)생이고 정묘년(667)에 낭郎이 되었다>
그리고 (흠)돌의 아들 흠언欽言이 대신하였다. 대개 그 첩이 언원言元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흠언은) 흥원興元의 조카로 흥원의 딸을 화주花主로 삼았다. 흠언은 5년간 (풍월주로) 있다가[32세 신공조로 연결]
[32세 풍월주 신공]
<신공信功은 기유년(649) 생이고 무인(678)년에 낭郎이 되었다>
진공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데, (신공은) 흠돌의 조카로서 또한 흥원의 딸 필사본에는 딸이라는 기록이 없으나 후에 ‘女(次〇)’를 추기(追記)하고 있다. 원래 필사본에 ‘女’가 빠진 것은 잘못이다.
을 화주로 삼았다.
[삼간 수중에 들어간 낭정]
수년 내에 낭정郎政은 한결같이 삼간三奸의 손으로 들어갔다. 흠돌은 아첨으로 문명태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에게 바쳤다. 태자와 모후母后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흠운의 딸은 스스로 소명 제주召命祭主가 되기를 원하였으며, 자의후慈義后가 (이를) 허락하였다. 이것이 소명궁召明宮이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등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 32대 효소왕이다.
을 낳았다. 후后가 이에 소명궁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컸다. 흠돌의 딸이 투기를 하였다.
[흠돌의 반란]
문명태후가 죽자崩,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게다가 흠돌의 딸이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을 하였다. 야명궁夜明宮을 핑계로 삼아 인명仁明을 옹립하였으나, 실제로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나의) 아버지 오기공이 북원北原으로부터 들어와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황후의 명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 진공이 호성장군으로서 인부印符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는데 어찌 중요한 직職을 가벼이 넘겨 주겠는가?”하면서 물러서지 않았다. 대개 적들의 모의가 이미 치밀했기 때문이었다. 제帝가 죽었으나崩 비밀에 부쳐 발설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京外의 군대를 입성시켜 흠돌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야명궁과 군관공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반란의 진압과 오기공]
오기공의 심복인 낭두가 그 모의를 공에게 발설하였다. 그 때 시위 삼도侍衛三徒는 적 편에 많이 서 있었다. 자의황후가 걱정하였다. 오기공이 이에 순지順知 順元일 가능성이 있다.
ㆍ개원愷元ㆍ당원幢元ㆍ원수元帥ㆍ용원공龍元公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을 불러 들어가 호위하고, 삼도의 대감을 모두 파면하여 다스렸다. 시위 삼도는 진덕왕 5년에 설치하였는데, 그 장은 감(監)이었다. 그러다가 신문왕 원년에 감을 파하고 장군을 두었다(『삼국사기』40, 잡지 9, 직관 하, 무관).
흠돌 등은 이에 크게 놀라 진격하여 대궁大宮 내성(內省)에서 관장하던 3궁 중의 한 궁(『三國史記』39, 잡지 8, 직관 중, 내성조 참조)으로, 현재의 월성을 가리킨다.
을 포위하였다. 서불한舒弗邯 진복공眞福公이 수병手兵 직접 거느린 부하, 손 아래 병대(兵隊).
을 이끌고 포위를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賊臣에게 미혹되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하였다. 그 때 흠돌 등이 그 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상대등 군관軍官과 각간 진복이 제帝의 밀조密詔를 받아 인명을 즉위시켰다”하였다. 그러나 군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으므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큰 소리로 왕에게 충성할 자는 오른쪽, 적을 따를 자는 왼쪽으로 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무리 중에 오른쪽으로 간 자들이 많았다. 흠돌 등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러가려 하였다. 오기공 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하였다. 경외의 병력이 또 이르렀다. 적은 이에 3간을 사로잡아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삼도 중에는 이로써 죽임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화랑도의 폐지와 부활]
자의태후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명하고, 오기공으로 하여금 낭도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에 속하게 하고 직職을 주었다. 낭도와 병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방의 낭정은 옛날 그대로 스스로 남아 있었다. 실직悉直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풍속이 다시 서울에 점점 퍼졌다. 중신들이 모두 오래 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후 화랑의 대표가 되었던 풍월주는 폐지되고 국선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의 풍속은 그리하여 크게 변하였다.
[발문]
돌아가신 아버지가 일찍이 향음鄕音 오기공은 황종(荒宗) 대신에, 우리 이름인 거칠부(居柒夫) 등으로 인명을 표기한 것을 뜻한다.
으로 화랑 세보世譜 오기공이 『화랑세기』를 저술한 목적이 화랑의 세보를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를 저술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불초 자식 김대문을 가리킨다.
이 공무의 여가에 낭정郎政의 큰 일大者 화랑도의 조직, 곧 화랑도의 편제, 화랑, 낭두, 낭도의 조지과 구성 등을 의미한다.
과 파맥派脈 설화랑의 운상인, 문노의 호국선 등의 계통과 진골정통, 대원신통, 가야파 등의 파맥, 그리고 미생전에 나오는 화랑도의 파 등을 가리킨다.
의 정사正邪 오기공의 파는 정(正)이고, 흠돌의 난에 가담한 화랑도의 파는 사(邪)에 해당한다.
를 모아 아버지의 계고稽古의 뜻을 이었다. 혹 선사仙史 선사(仙史)는 화랑들의 역사일 뿐 도교 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에 하나라도 보탬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