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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맛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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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의 소통 스크랩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후박나무 추천 0 조회 255 08.06.27 00:09 댓글 36
게시글 본문내용

 

 

 

 

책상은 괴로워하지 않는다.

 

 

비구 서림

 

글 순서

1.들어가는 말

2.사성제의 dukkha

3.학자들의 dukkha에 대한 오해

4.삼특상의 의미

5.三苦의 의미

6.결론

 

1.들어가는 말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둑카(dukkha)에 대한 이해는 필수라고 할만하다. 그런데 이 둑카(dukkha)라는 단어를 가지고 이야기 하다보면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논의로 흐르기 쉽다. 그래서 이 글은 데바닷따가 붓다에게 상처를 입힌 구체적인 일화를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미 아는바와 같이 데바닷따는 승단의 지도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계략을 꾸민다. 그의 계략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라지기르의 산에서 붓다에게 바위를 굴린 사건은 돌의 파편이 붓다의 발에 떨어져 붓다의 발에 상처를 입혔다. 붓다를 죽이려 하였던 그의 의도로 보아서는 이 사건도 실패한 계략이었으나 불교도들에게 이 사건은 아직도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진다. 돌의 파편이 붓다의 발에 부딪쳐서 붓다의 발에서 피가 흘렀을 때, 붓다는 괴로움을 경험하였을까? 당연히 붓다는 괴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의 괴로움은 단지 육체적인 괴로움일 뿐 정신적인 괴로움으로 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붓다가 가르친 화살경(Sallasutta)1)등을 통해서 증명된다. 그런데 이때의 사건에서 돌맹이도 괴로움을 겪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돌에 맞기 이전의 붓다의 발과 붓다의 몸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황당하지만 요즘 괴로움의 논의 과정에서 쉽게 마주치게 되는 주장들이다.  어떻게 이러한 주장이 가능할까? 왈폴라 라훌라 스님은 dukkha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빠알리어의 둑카(dukkha)는 일반적으로 행복, 평안, 쉬움 등의 반대말인 고통, 아픔, 슬픔, 비극의 의미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성제에서의 dukkha라는 용어는 인생과 세상에 대한 붓다의 견해로서 깊은 철학적 의미와 크고 넓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사성제에서의 dukkha는 일반적으로 고통이란 말을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에 덧붙여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 실체(insubstantiality)의 깊은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2) 

그리고 한국의 조계종의 사이트에서는 “불교란 무엇인가”라는 항목에서 “일체개고”를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 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마디로 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 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체의 모든 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왈폴라 라훌라 스님처럼 “둑카(dukkha)라는 단어의 의미가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 실체(insubstantiality)의 의미”로 해석하는 태도나, 苦를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 모든 존재들의 성질이므로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苦라고 할 수 있다.”는 설명은 돌맹이도 둑카(dukkha)고 돌에 맞기 이전의 붓다의 몸 자체가 둑카(dukkha)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둑카(돌맹이)가 둑카(붓다의 발)에 부딪쳐서 둑카(아픔)를 발생 시키고 있다.

또한 “모든 형성된 것은 고이다. 그것은 무상과 동일하게 생성과 소멸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다.”3) 라는 주장이나 “고성제는 고의 보편성 문제를 제기한다. 고는 단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육체적 정신적 통각으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유위법 즉,  존재의 형태가 무엇이든지 간에 존재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현상에 내재한다.”4) 라는 해석들도 이러한 입장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주장들에 의거하면 “일체개고”를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다’'라고 해석해도 불교는 염세주의가 아니게 된다. 왜냐하면 이때 苦라는 의미는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 “모든 존재의 속성”5)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생물인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苦요, 돌맹이도 苦요, 삼라만상이 苦다”. 고를 “인간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 “존재의 속성”으로 보아서 “모든 존재는 고”라고 보는 시각은 불교를 비관주의, 염세주의로 이해하는 것이 될 뿐 아니라 해탈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뒤에 살펴보게 될 삼특상과 삼고의 설명에서 괴로움은 구체적인 “느낌”이라는 것과 괴로움은 분명하게 “원인”이 존재할 때, “중생”에게만 일어나는 사건이란 설명으로 분명해 질것이다.

 

2.사성제의 dukkha

초기경전에서 사성제를 설명하는 경전은 초전법륜경과 대념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사성제의 세 번째 진리인 dukkha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열반이라 불리는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고멸성제에서  고의 소멸의 내용은 "갈애의 소멸"로 설명되거나.6)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7) 이 사성제는 언제나 서로의 연관성속에서 설명되는데 고집성제는 연기의 순관과 상응하고 멸도성제는 연기의 역관과 상응한다.8) 또한 “이것이 성스러운 괴로움의 진리이다” 라고 고성제를 깨달았을 때 생겨난 지혜(ñaa)와 통찰지(pañña)등은 나머지 3가지 성제를 깨달았을 때도 똑같은 방식으로 언급되고 있다.9) 이러한 사실은  고성제를 이해하려 할 때도 나머지 3개의 성제와 연관성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다음과 같은 가르침은 그것을 정확히 그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는 것이 하나의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르는 길이다”라는 것이 두 번째의 관찰이다.10)

 

괴로움을 보는 이는 괴로움의 발생도보고, 괴로움의 소멸도 보고,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도 본다.11) 

성스러운 괴로움의 진리에서 성스러운 진리(ariyasacca)의 뜻은 세간의 지식으로서 파악된 진리가 아닌 지혜(pañña)로 파악된 진리를 말한다. 그래서 이 진리들은 항상 보시, 지계, 천상의 예비법문 다음에 상대방이 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과 자세가 되었을 때 설해지고 있다.12) 

그러면 초전법륜경과 대념처경에서 괴로움(dukkha)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 살펴보자.

“비구들이여, 이것이 성스러운 괴로움의 진리이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병듦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13)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 탄식,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비구들이여 그러면 요컨대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란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물질의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 느낌의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 , 인식의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 ,상카라의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 식의 무더기를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다.”14) 

초전법륜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4고 8고가 설명되고 있고, 대념처경에서는 12가지 괴로움이 열거되고 있다. 특히 대념처경에서는 12가지 언급된 괴로움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대념처경의 설명에 의하면 dukkha라는 단어는 12가지 괴로움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면서 좁게는 육체적 고통만을 한정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러한 경전들의 dukkha는 관념적이지도, 추상적이지 않으며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이다. 그런데 괴로움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오취온고”(pañcupadanakkhandha dukkha)의 해석에서 다양한 견해15) 가 나타나는데 오취온이 아닌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주장도 그중의 하나이다. 오취온에서 취착(upadana)은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kamupadana), 견해에 대한 취착(diṭṭhupadana),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silabbatupadana), 자아교리에 대한 취착(attavadupadana)의 4가지로 설명이 되고 있다.16) 이 취착중에서 견해에 대한 취착(diṭṭhupadana)은 예류도를 얻을 때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아라한도 에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kamupadana)이 제거된다.17) 취착이 없다는 의미인 “anupadi” 또는 “anupadana”는   수타니빠따에서 “취착이 없는 자”(anupadano)라고 붓다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18) 그러므로 “오취온고”는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만약 “오취온고”를 "오온 그 자체가 괴로움"19)이라고 해석한다면 갈애가 소멸된 아라한의 "오온도 괴로움"이라는 말이 된다. 물론 열반을 ”윤회의 그침“ 이라는 무여열반의 입장에서 보면 "오온 그 자체가 괴로움“이란 설명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성제와 삼특상에서 말하는 괴로움은 탐진치를 소멸시킨 아라한의 "오온도 괴로움"이라는 무여열반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사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의 소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자 할 때 붓다가 고통을 화살에 비유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떠올려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괴로운 느낌과 접촉해도 우울하거나 피로해하거나 슬퍼하거나 통곡하지 않으며 미혹에 빠지지 않는다. 그는 단 하나의 신체적인 고통만을 느끼며 정신적인 고통은 느끼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어 사람을 화살로 찌르고 또한 그를 두 번째의 화살로 찌르지는 않았다고 하자.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그는 단 한 개의 화살 때문에 고통을 느낀다. .... 그래서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도 그에게 분노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는 괴로운 감수에 대한 분노를 느끼지 않으며 괴로운 느낌에 대해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는다. 또한 즐거운 감수와 접촉하여 감각적 쾌락의 즐거움을 향수하지 않는다."20)

위 경전의 설명처럼 붓다는 누구라도 오온을 가지고 있음으로 받아야하는 육체적인 고통을  첫 번째 화살이라고 표현했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지만 지혜로운 이는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 붓다가 사성제에서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하는 고는 “두 번째 화살” 이다.  데바닷따가 굴린 돌이 붓다의 발에 피를 나게 했지만 그것이 정신적인 괴로움을 가져오게 하지는 못했다. “두 번째 화살”은 오온을 나라고 취착하는 무지와 갈애에서 비롯되는 정신적인 고통이다.” 오온자체가 고“ 라는 주장은 무여열반을 불교의 목표인 것처럼 말하고 첫 번째 화살까지도 피하려 한다.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고의 소멸이 죽어서나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붓다가 무여열반을 불교수행의 목표라고 말한 적은 없다. 유여열반을 얻은 사람이 무여열반을 얻기 위해 다시 노력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무여열반은 아라한이 도달하는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다.21)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하는 붓다의 정의는 없다. 붓다가 책망하는 것은 오온을 ego 또는 모호하게 존재의 소유물로 생각하는 취착이다.”22) 윤회의 그침은 지금여기서의 갈애의 소멸이라는 방법으로서만 얻어진다. 갈애의 소멸이 곧 윤회의 그침이다.23) 만약 사성제에서 말하는 고의소멸이 “첫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라면 이 말은 "만물은 고통이다"라는 해석을 옹호하는 것이다. 무여열반이란 용어는 열반을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괴로움의 의미마저 혼란스럽게 만들었다.24)

 

3. 학자들의 dukkha에 대한 오해

스리랑카의 비구이며 학자인 왈폴라 라훌라는 둑카(dukkha)가 오해되고 있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인 사성제의 dukkha를 거의 모든 학자들은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고 번역하고 ‘불교에 따르면 삶은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 한다. 이러한 번역과 해석은 모두  만족스럽지 못하며 오해 할 소지를 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정확하지 못한 안이한 번역과 수박 겉핥기식의 해석 때문이다.”25)

그러나 그도  둑카(dukkha)에 불안전(imperfection),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 실체(insubstantiality)라는 의미를 첨가함으로서  괴로움을 “존재의 속성”으로 해석하는데 동참하고 있는데 이것은 dukkha라는 단어의 어원을 분석한 결과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어원분석은 조계종 사이트와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뒤따르고 있다.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그것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즉 pain 혹은 괴로운 느낌(苦受)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이나 남방 학자들 가운데는 근원적인 괴로움이라는 의미에서 unsatisfactoriness(불만족성)으로 옮기기도 합니다. 고성제와 일체개고의 dukkha(苦)의 내용은 일체 유위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질도 苦라는 것입니다.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그리고 감각접촉이나 집중, 마음챙김, 정진, 자애, 연민 등등의 여러 심리현상들도 그 자체는 고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어법에서 고라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사실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성제와 제행개고의 고는 단순한 고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통찰지가 아니고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26)

“괴로움의 어원 즉, dukkha라는 말은 원래가 하우어(Hauer)의 견해에 따르면 베다어에서의 duh와 kha의 바후브리히 합성어로 duh는 '나쁜, 어려운' 의 뜻을 가진 전철이며 kha는 베다어에서 '수레의 바큇살' 을 의미하므로 합치면 '나쁜 바큇살을 지닌' 이란 뜻이다. 이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 반대말인 sukha가 su(좋은)와 kha(바큇살)의 합성어로 '좋은 바큇살을 지닌' 의 뜻을 지닌다는 데서 명백해진다. 따라서 이 괴로움이란 말은 나쁜 바큇살을 가진 차의 불완전성, 동요성, 흔들림, 변화, 혼란 이란 사태의 심각성을 지시하는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불안이나 괴로움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은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실제적인 세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정신 물리적인 총체적인 불안을 의미한다.”27)

이쯤 되면 dukkha에 대한 어원 분석28)이 오히려 dukkha를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둑카(dukkha)를 ‘단순한 고통(苦受)만’이 아니며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다”라는 표현이나 ‘저 밖에 객관적인 물질도 고인 것이다’라는 표현은 고를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이러한 설명은 모든 존재에 포함되는 태양도, 달도, 책상도, 돌맹이도 괴로움속에 있다는 설명이 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존재에 내재하는 괴로움, “존재의 속성”으로서의 괴로움을 없애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이렇게 이미 존재가 괴로움이라고 설명된다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이 다시 언급될 필요는 없다. 존재가 무상한 것에 이유가 없고 존재가 무아인 것에 원인이 없듯이 존재가 고인 것에 원인이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항상 고의 원인을 갈애와 무지라고 말하고 있다. “만물이 고통이다 라는 설명은 고를 실 체시하려는 시도이다. 무상하기 때문에 고통이고 따라서 무아다 라는 논법은 비논리적이며 고통을 무상과 무아와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은 잘못이다.”29)

그런데 어원분석을 통한 이해와는 별도로 다시 괴로움을 “존재의 속성” 으로 이해하고 무상과 무아와 같은 반열에 두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은 경전을 해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여래가 출현하건 머물건 출현하지 않건 그 도리가 정해진 것(sa dhatu), 법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dhammaṭṭhitata),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dhammaniyamata)이 있다. 그것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형성된 모든 것은 고이고, 모든 법은 무아이다.”30)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하다. 물질을 발생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하다. 비구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발생된 물질이 어떻게 영원하겠는가?”31)

 

“비구들이여 물질은 괴로움이다. 물질을 발생하는 원인도 조건도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발생된 물질이 어떻게 즐겁겠는가?”32)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아이다. 물질을 발생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아이다. 비구들이여, 무상한 것에 의해 발생된 물질이 어떻게 자아가 있겠는가?”33)

 

제행무상, 제행개고, 제법무아를 여래가 출현하건 머물건 출현하지 않건 그 도리가 정해진 것, 법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다는 표현은 연기경에서 연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문장과 똑 같은 서술들이다.34) 대승불교에서처럼 연기의 원리를 우주의 원리로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똑같이 서술되고 있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우주의 원리’나 ‘모든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물질은 무상, 괴로움, 무아이다. 물질을 발생하는 원인도 조건도 무상, 괴로움, 무아이다.”라는 표현들도 세가지 명제(삼특상)를 ‘우주의 원리’나 ‘모든 존재의 속성’이라고 설명되는 증거처럼 보일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보편적 성질(무상,고,무아)은 중생(오취온)의 보편적 성질이지 삼라만물의 보편적 성질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삼특상의 관찰은 열반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삼특상의 설명에서 제행과 제법의 의미가 오취온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더욱 분명해 질것이다.

 

4. 삼특상의 의미

고를 이해하기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가르침은 삼특상(Ti-lakkhana)이다.35) 삼특상은 언제 어디서나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차례대로 나타나는데 어느 경전에서든 무상, 고, 무아의 순서는 한 번도 뒤바뀐 적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삼특상의 법문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삼특상의 온전한 형태는 법구경과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보이는데 다음은 법구경에 나타나는 277,278,279번 게송들이다.

Sabbe sakhara anicca'ti yada paññaya passati 277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a.

모든 상카라는 무상하다. 라고 지혜로서 볼 때

그때, 그는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 이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다.

 

Sabbe sakhara dukkha'ti yada paññaya passati 278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a.

모든 상카라는 고통이다. 라고 지혜로서 볼 때

그때, 그는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 이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다.

 

Sabbe dhamma anatta'ti yada paññaya passati 279

Atha nibbindati dukkhe esa maggo visuddhiya.

모든 법은 무아다. 라고 지혜로서 보게 될 때

그때, 그는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 이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3개의 게송이 설해지게 된 인연은 비구들이 명상주제를 붓다에게 요청하였기 때문이다.36) 붓다는 비구들에게 각각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라고 통찰하면, 대상을 혐오(嫌惡)하고 이욕(離欲)하게 되어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법구경 277번과 278번에서 제행(Sabbe sakhara)이란 단어가 같이 사용되고 있다. 법구경의 주석서에서는 제행(Sabbe sakhar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277번 게송의 제행(Sabbe sakhara)이란

제행이란 욕계등에  나타난 무더기들이다.37)

278번의 제행(Sabbe sakhara)이란  

“모든 무더기들이다.” 38)

279번의 제법(Sabbe dhamm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법은 오온들을 의미한다. 39)

이와 같이 법구경 주석서의 설명을 따르면 제행은 ‘무더기들’ 이고 제법은 ‘중생의 오온’이다. 그러므로 제행을 “모든 존재” “삼라만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범위를 너무 확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주석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제행이 오온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게송을 살펴보면 드러난다. “모든 상카라는 무상하다. 라고 지혜로서 볼 때 그때, 그는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 라는 게송에서 “무상하다고 볼 때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는 것은 나(오취온)를 관찰할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나와 상관없는 물질을 현미경으로 관찰할 때 무상함을 관찰하게 될지라도 고통을 혐오하게 되지도 않고 그것이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모든 법은 무아다. 라고 지혜로서 보게 될 때 그때, 그는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는 게송도 마찬가지 이다. 무아로서 관찰되는 대상이 나(오취온)이기에 “고통을 혐오하게 된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 주석서에서 일체개고를 “무더기들(khandha) 이 압박받고 있는 상태가 괴로움”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오온이 압박을 당하기에 오온 그 자체가 괴로움” 이라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오온을 나라고 집착할 때 괴로움이 된다”는 뜻이다.40) 그러므로 일체개고(Sabbe sakhara dukkha)는 “오취온고”(pañcupadanakkhandha dukkha)와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삼특상의 원형으로 추측이 되는 아래와 같은 대화를 살펴보면 일체개고의 뜻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 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41)

위 경전에서 붓다가 라훌라에게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라는 물음은 누가 보아도 즐겁고 괴로운 느낌을 묻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조계종 사이트에서 처럼  “존재는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하고” 있는 의미에서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여기서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라는 질문을 살펴보자. 이것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조건절로 나타나고 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무상하기 때문에 행복하게 될 수도 있다고 반박 할 것이다. 무상하기에 슬픔이 기쁨으로 변화될 수 있고 겨울을 지낸 나무에 꽃이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린 라훌라 사미가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움 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대답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혼동하지 말고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붓다는 무엇을 대상으로 “무상한 것인가” 라고 묻고 제자는 무엇을 대상으로 “괴로운 것입니다”라고 응답했느냐 하는 것이다.

상윳따 니까야 전체를 살펴본 결과 붓다가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고 묻는 대상은 언제나 5온, 6입처, 18계, 6계로 한정 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5온, 6입처, 18계, 6계를 제외한 다른 것을 붓다는 결코 묻지 않았다.  붓다가 물은 이러한 대상들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들이다. 이것들을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들의 무상은 언제나 나에게 괴로움이 된다. 간단히 말하면 언제나 “무상한가?”라고 묻는 대상과 “무상 합니다”라고 말해지는 대상은 언제나 “나(나라고 생각하는 무더기들)” 자신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붓다의 제자들은 “무상 합니다” “괴로운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배우지 못한 범부들은 거룩한 이를 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해서 ... 물질이 나이고 나의 것이 물질이고 나 가운데 물질이 있고 물질 가운데 내가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물질은 부수어지고 만다. 그 때문에 그는 불행과 비참함에 떨어진다.”42)

이렇게 오온을 나와 나의 것 이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인간에게 오온의 무상은 나와 나의 것이 파괴되고 소멸됨을 의미한다. 당연히 오온(나라고 취착하는 대상)의 무상은 나에게 괴로움이 된다. 그러하기에 라훌라는 ‘'무상한 것은 고통’'이라고 대답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고, 생각되지도 않는 대상들, 나와 아무 상관없는 대상에 대하여 무상하냐고 물었다면 라훌라는 무상한 것이라고 대답을 했을지언정 괴롭다고 대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상하기에 괴로운 것이라는 말은 취착하고 있는 오온의 무상함이 괴로움이라는 말이지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괴로운 것이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를 모든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는 것은 행(sakhara)을 오취온으로 한정하지 않고 ‘삼라만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왈폴라 라훌라스님은 “무상한 것은 무엇이건 괴로운 것이다”라는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마지마니까야에서는 이러한 선정 상태에서 오는 정신적 상태를 찬양한 뒤 그러나 그것들도 역시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한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둑카라는 말이 분명히 사용된 것에 유의해야 한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통이 아니라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는 의미에서의 괴로움이다.”43)

그러나 마지마 니까야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삼계안에서 도달한 모든 선정상태가 아무리 최상의 미묘한 것일지라도 조건 지어진 것이기에 생멸하는 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그 선정에 집착하는 자에게 괴로움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라는 표현은 종종 “존재하는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무상한 것이 고라면 그 고에는 더 이상의 원인이 필요 없게 된다. 즉 갈애가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무상한 것은 고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전과 위배된다. 일체개고의 법문이 “모든 존재는 괴로움이다” 라고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5.三苦의 의미

일체개고의 설명에서 고를 어떻게 이해하게 되는가는 전적으로 제행(Sabbe sakhara)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고고성, 행고성, 괴고성이라는 삼고의 설명에서도 행고의 행(sakhara)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고의 의미는 달라진다.44)

청정도론에서는 삼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苦苦:dukkhadukkha /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vedana)은 고유 성질로서도 이름에 따라서도 괴롭기 때문에 고통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45) 

2.懷苦:viparinamadukkha / 즐거운 느낌은 그것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원인이 되기 때문에 변화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46)

3. 行苦:skharadukkha /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三界)에 속하는 상카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patipaipiitatta)되기 때문에 형성됨에 기인한 괴로움이라 한다. 47)

이 삼고의 법문은 느낌을 고수(dukkha vedana), 락수(Sukha vedana), 불고불락수(Upekkha  vedana)라는 3가지 느낌(vedana)48)이 왜 고이며 고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3가지 느낌(vedana)”이라는 단어는 이미 명확하게 삼고의 법문이 무생물을 포함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가지 느낌에 대한 관찰방법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즐거운 느낌은 괴롭다고 보고, 괴로운 느낌은 화살이라고 보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무상하다고 본다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는 탐욕의 경향을 버린 바른 관찰자 라고 불린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아만에 대한 바른 이해로 괴로움의 종극에 도달한다.”49)

 

이처럼 삼고는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이론이 아니라 수행자가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삼고를 자세히 설명하자면 

苦苦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운 느낌(vedana)이다. 이것은 생, 로, 병, 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와 근심, 후회, 탄식, 초조, 미움, 안타까움, 절망 등의 모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괴로움이다.50) 그런데 이 苦苦는 단지 육체의 아픔(pain)인 첫 번째 화살의 고통으로 종종 오해된다. 苦苦는 육체적 괴로움과 정신적인 괴로움 즉, 첫 번째 화살과 두 번째 화살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첫 번째 화살은 누구나 맞는 것이지만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수행의 목표는 정신적 괴로움인 두 번째 화살을 피하는 것이다. 이 苦苦만이 직접적인 괴로움이라 말해진다.

懷苦는 즐거운 느낌이 변할 때 괴로운 느낌이 일어남을 말한다. 인간은 느낌을 나의 느낌이라고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즐거운 느낌을 직접 괴로움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즐거운 느낌은 괴로움의 원인(hetu)이라고 설명하는데 그래서 간적접인 고통이라고 설명한다. 이 즐거움은 욕계의 오욕락 부터 색계4선과, 무색계4선과 , 멸진정에서의 즐거운 느낌을 포함하는 즐거움이다.51)

行苦는 불고불락수를 말하는데 이 느낌은 평온(Upekkha)과 같은 말이다. 이 평온한 느낌도 범부가 느끼는 일반적인 덤덤한 느낌부터 색계 선정, 무색계 선정과 멸진정 상태의 지고지순한 평온까지를 포함한다. 법집론에서 이 평온(Upekkha)을 10 종류의 평온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52) 그런데 이 평온은 아무리 최상의 평온일지라도 아직 번뇌가 남아 있는 선정 상태의  느낌이다. 그래서 이 평온은 형성된 것이기에 “무지의 경향”이 있으며  무상한 것이다. 맛지마 니까야의 소공경에서는 비구가 멸진정에 들어 최상의 평온을 얻었다 해도 그것이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임을 알아야  번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안다. 이 무상심 삼매(animitto cetosamadhi)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무엇이건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는 법이라고 통찰하여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그는 욕망의 번뇌(kamasava)와 존재의 번뇌(Bhavasava)와 무명의 번뇌(Avijjasava)에서 자유로워 진다.”53)

 

그러므로 평온의 느낌(Upekkha  vedana)은 무상하고 소멸하는 법이기에 행고인데 이것을 청정도론에서는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patipaipiitatta)되었기 때문이라고 성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도 무상하기에 행고라고 하는 것이지 “삼계에 속하는 상카라들” 그 자체가 행고라는 설명은 아니다.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paipiitatta)되었기 때문”이란 대상을 나와 나의것으로 취착할 때 대상의 변화는 나에게 괴로움이 된다는 의미이다.54) 이 행고도 간접적인 괴로움이다. 

 

三苦의 설명에서 苦苦는 직접적인 괴로움이지만 行苦와 懷苦는 간접적인 괴로움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즐거움이나 평온함이 그 자체로 고가 아니고 집착함과 집착하지 않음에 따라 고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삼특상에서 무상, 고, 무아의 순서가 언제나 한결같은 것처럼 경전에서는 이 삼고의 순서도 苦苦, 行苦, 懷苦의 순서로 한결같이 나타난다. 그런데 청정도론에서는 行苦와 懷苦의 순서를 바꾸어 苦苦, 懷苦, 行苦의 순서로 설명하고 있고 거의 모든 불교 사전이나 교리서들이 이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이렇게 경전과는 다르게 삼고의 순서를 바꾸어 설명하는 것은 행고를 가장 외연이 넓은 것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여기서 외연이 넓다는 것은 고를 “존재의 보편적인 성질”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어느 경전에서든 혹은 주석서55)에서든 중생의 느낌(vedana)으로 설명되고 있지 “모든 존재의 속성”으로 설명되고 있지는 않다. 이 dukkha라는 용어를 붓다가 분명히 느낌으로 사용했다는 증거를 아래와 같은 경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붓다는 앙굿따라 니까야의 로히땃사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인식과 마음이 함께한 이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이르는 도 닦음을 천명하노라.”56)

이 경전은 깨달음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고 내안에서 心法과 色法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에서 찾아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매우 유명한 경전이다.

이 경전의 주석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세상이란 괴로움의 진리이며, 세상의 일어남이란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며, 세상의 소멸이란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며, 세상의 소멸로 이르는 도 닦음이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붓다는 “도반이여, 나는 이러한 4가지 진리를 풀이나 나무토막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四大로 이루어진 바로 이 몸에서 천명 한다” 57)

 

이 경전의 주석서에서 인용하고 있는 붓다의 설법에서 알 수 있듯이 붓다는 결코 풀이나, 나무토막 등에서 苦라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풀이나, 나무토막 등이라는 말은 돌맹이, 책상, 달, 볼펜 등의 무생물로 확대 대응 시켜도 될 것이다. 

고는 무상과 무아와 같은 ‘존재의 속성’이 아니고 원인이 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무상과 무아 같은 자연의 법칙과는 다른 것이다. 괴로움은 원인이 있을 때만 일어난다.

한때 붓다는 찌라와시(ciravasi) 라는 아들을 둔 촌장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었다.

“촌장이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대가 아직 찌라와시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고 그녀에 대해 듣지 못했을 때에 그대에게 찌라와시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사랑이 생겨납니까?"

[촌장] "세존이시여, 생겨나지 않습니다."

[세존] "촌장이여 당도한 그녀를 보거나, 당도한 그녀의 소문을 듣고 나면, 그대에게 찌라와시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이나 사랑이 생겨납니까?"

[촌장]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

[세존] "촌장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약 찌라와시의 어머니가 살해, 포박, 몰수, 모략을 당하면 그대에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겠습니까?"

[촌장] "세존이시여, 그녀는 또 다른 나라고 여겨지는데, 만약 찌라와시의 어머니가 살해, 포박, 몰수, 모략을 당하면, 어찌 제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나지 않겠습니까?"

[세존] "촌장이여,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대는 이와 같이 알아야 합니다.“

“어떠한 괴로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것은 욕망을 뿌리로 하고 욕망을 원인으로 생겨난 것이다. 욕망이야말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라고.”58)

이 경전은 괴로움이 일어나는 데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욕망(chanda), 탐욕(raga), 사랑(pema)이라고 말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아무개” 라는 사람에 대하여 들어보지도 못하였고 만나보지도 못하였다면 그 “아무개”라는 사람을 대상으로 어떤 사랑하는 감정, 혹은 미워하는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불가능 하다. 그리고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6. 결론

 

오온은 무상하다. 그런데 오온을 나의 것, 나, 혹은 나의 자아 라고 생각하는 중생에게, 오온의 변화는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 변화는 내가 어찌 조절하거나 제어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고, 오온의 변화가 본인 에겐 나의 소멸로 느껴지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변화하는 것을 변화하는 데로 놔두면 된다. 변화하는 이 오온을 그냥 오온으로 바라볼 뿐,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집착하지 않으면 된다. 두 번째 화살을 안 맞으면 된다. 붓다는 이렇게 35세에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었다. 지금까지 사성제와 삼특상과 삼고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괴로움(dukkha)을 살펴 보았다. 고성제에서 괴로움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오취온고”는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임을 보았다. 일체개고의 일체(제행)의 의미가 오취온임을 확인 하였다.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고 있는 오온이 무상하게 변화될 때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는 가르침이 ‘일체개고’의 뜻임을 알 수 있었다. 삼고의 법문은 고수, 락수, 불고불락수라는 3가지 느낌(vedana)이 왜 고이며 고가 되는지를 설명하는 가르침이다. 행고의 의미 또한 수행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가르침으로 행고를 가장 외연이 넓은 가르침 즉, “모든 존재의 속성”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로히땃사경”의 주석서에서  “나는 사성제를 풀이나 나무 토막 등에서 천명하지 않는다.” 라는 붓다의 선언을 보았다. 고는 무상과 무아처럼  소멸시킬 수 없는 “우주의 보편적인 특성”이 아니라  “중생의 보편적인 특성”임을 확인하였다. 붓다와 촌장과의 대화를 통해서 괴로움은 갈애라는 원인이 있을 때 일어나는 사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괴로움은 그렇게 취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기에 이 몸을 가지고 금생에 괴로움의 소멸이 가능한 것이다. 고를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닌’ ‘존재의 속성’이라면 이러한 고는 보편적인 특성이므로 경감 시킬 수도 없고 소멸시킬 수도 없게 된다.

예를 들어 홍길동이라는 사람(오취온)이 무상한 존재이고 무아의 존재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보편적인 특성인 무상성과 무아성을 분리시키거나 제거해 낼 수가 없다. 무상과 무아는 제거 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법칙을 꿰뚫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길동이는 괴로움을 소멸시킬 수 없는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르면 홍길동이라는 사람은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홍길동이라는 사람에게 일어난 무지와 갈애를 소멸시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를 잘못 파악하게 된 이유는 ‘일체개고’나 ‘행고’를 “삼라만물은 괴로움이다” 라고 해석하고 이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어원 분석을 시도한 결과라고 본다. 이러한 시도는 ‘일체’를 삼라만물로 보았기에 둑카(dukkha)에 불안전, 무상, 공, 비 실체등의 의미를 첨가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확대해석 된 둑카(dukkha) 의미는 경전속에서는 발견 되지 않고 다만 해석한 사람의 머릿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고집성제에서는 고의 원인은 갈애라고 설명한다. 만약 책상이 그 자체로 苦라면 책상이 스스로 갈애를 일으켜야 할 것이다. 12연기에서는 苦의 원인을 무명이라 말한다. 만약 책상이 그 자체로 苦라면 책상 스스로 무명을 일으키고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책상이 스스로 갈애를 일으키고 무명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苦는 모든 존재의 속성’' 이라든가‘' 고에는 불안전, 무상, 공, 비실체의 의미가 있다’' 라는 해석들은 마땅히 제고 되어야 한다. 괴로움은 어디까지나 갈애와 무명을 바탕으로 일어나는 느낌인 것이고 팔정도의 수행으로 고는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붓다는 “아누라다여, 예전에나 지금이나 나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을 가르친다."59)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와지라비구니의 아름다운 시가 있다.

“마치 여러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무더기들에 의해 중생이란 거짓이름이 있다.

생겨나는 것은 오직 괴로움이다.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도 오직 괴로움이다.

괴로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괴로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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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PTS. 상윳따 니까야 4 p207.(sn.4.207. Sallasutta)

2) But the term dukkha as the first noble truth ,which represent the buddha's view of life and the world ,has a deeper philosophical meaning and connotes enormously wider senses. it is admitted that the term dukkha as the first noble truth contains, quite obviously ,the ordinary meaning of suffering ,but in addition it also includes deeper ideas such as imperfection, impermanence, emptiness , insubstantiality. [what the buddha thought. p17]

3)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p116] 전재성

4) [history of indian buddhism] by Etienne Lammotte. p27. 호진 스님의 번역

5) 아비담마에서는 법을 고유성질(sabhāvalakkhaa,自相) 보편적 성질(sāmaññalakkhaa, 共相) 구분하여 설명한다. 그러나보편적 성질(共相)’모든 존재의 속성’이라는 말과는 다르. , 불교에서의보편적 성질(무상,,무아) 중생이라는 존재(오취온) 共相이지 삼라만물의 共相 아니다. 그러하기에 삼특상의 관찰은 열반에 이르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을 안하기 때문에일체개고 존재하는모든 것이 괴로움이라는 식으로 해석하고 나서. dukkha(괴로움)라는 단어에 무상(impermanence), 공(emptiness), 비 실체(insubstantiality)등의 의미를 첨가하여 확대 해석하는 것이다.

6)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 yo tassāyeva ta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inissaggo mutti anālayo. 이것이 고멸성제이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시키고 없애고 포기하고 벗어나고 멀리하는 것이다.” (sn.5.425.Khandha sutta)

7) Katamañca bhikkhave asakhata: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ida vuccati bhikkhave asakhata.(sn.4.359.Kāyagatāsatisutta)

8) 특히 고집성제와 고성제(upādāna) 12연기의 갈애와 취착의 관계에 해당한다. 삼세양중인과에서는 갈애, 취착, 존재가 현재의 원인으로 설명되는데 사성제는 갈애는 원인 취착은 결과로 설명된다. 12연기가 삼세양중인과라면 사성제는 이세양중인과의 설명이다. 갈애는 현재의 원인이고 갈애의 소멸은 현재의 원인의 제거이다. 미래의 과보인 생로병사에 대한 취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9) "Ida dukkha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 udapādi ñāa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10)Ida dukkha aya dukkhasamudayo'ti ayamekānupassanā, aya dukkhanirodho, aya dukkhanirodhagāminipaipadā'ti aya dutiyānupassanā.(PTS. 수따니빠다. sp.140.dayatānupassanā sutta)

11)"yo bhikkhave, dukkha passati dukkhasamudayampi so passati dukkhanirodhampi passati, dukkhanirodhagāmini paipadampi passati. (sn.5.437.Gavamapatisutta)

12) dānakatha sīlakatha saggakatha kāmāna ādinava okāra sakilesa nekkhamme ānisasa pakāsesi. Yadā bhagavā aññāsi yasa kulaputta kallacitta muducitta vinivaraacitta udaggacitta pasannacitta, atha yā buddhāna sāmukkasikā dhammadesanā ta pakāsesi - dukkha samudaya nirodha magga. (PTS. 율장대품. mavagga.16.)

4성제가 지혜로서 파악되어야 하는 진리라고 해서 괴로움에 대한 이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지금여기서 이해 가능한 것이 불교이며 그것이 8정도를 번뇌가 있는 정견과 번뇌가 없는 정견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유이다.

13) Ida kho pan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ampi dukkha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n.5.421.Dhammacakkappavattana sutta)

14) katamañca bhikkhave dukkha ariyasacca: jāti pi dukkhā, jarāpi dukkhā, maraampi dukkha,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pi dukkhā,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 na labhati tampi dukkha,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pi dukkhā. ...Katame ca bhikkhave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seyyathīda rūpūpādānakkhandho vedanūpādānakkhandho saññūpādānakkhandho sakhārūpādānakkhandho viññānūpādānakkhandho. Ime vuccanti bhikkhave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pi dukkhā, ida vuccati bhikkhave dukkha ariyasacca. (dn.2.22.305~307. Mahāsatipaṭṭhānasutta)

15) 1. In brief, the five kinds of objects of attachment are suffering.A. foucher 번역을 [history of indian buddhism.1. by Etienne Lammotte. p74] 요약해서, 5가지 집착의 대상은 괴로움이다.

2. In brief, five aggregates of attachment are dukkha.[what the buddha thought. by walpola rahula. p25]요컨대, 5가지 취착의 무더기가 괴로움이다.

3. In other words, to grasp the five aggregates as though they constitute a self is suffering. [the heart of buddha's teaching. by thich nhat hanh. p258]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를 구성하는 것으로서의 오온을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4. In short, the clinging to the five aggregates is suffering. [mahāsatipaṭṭhānasutta by vipassana research institute. p47] 요컨대, 오온에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16) Katamañca bhikkhave upādāna? Cattārimāni bhikkhave, upādānāni: kāmūpadāna diṭṭhūpadāna sīlabbatūpadāna attavādūpādāna. Ida vuccati bhikkhave upādāna. (sn.2.42.Paccayasutta)비구들이여, 취착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것들 가운데는 가지 취착,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견해에 대한 취착, 계율과 의식에 대한 취착, 자아교리에 대한 취착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취착이라고 부른다.

17) 청정도론. 한글 3 -p140-

18) Sihosi anupādāno pabhinabhayabheravo. 그대는 취착 없는 , 두려움과 공포를 버린 사자입니다. (sp. 3. 102. Sabhiyasutta)

19) Here it should be clearly understood that dukkha and the five aggregates are not two different things: the five aggregates themselves are dukkha.[what the buddha thought. by walpola rahula. p20]

20) Sutavā ca kho bhikkhave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i kandati na sammoha āpajjati: so eka vedana vediyati kāyika, na cetasika. Seyyathāpi bhikkhave purisa sallena vijejhayyu, tamena dutiyena sallena anuveda na vijjheyyu Eva hi so bhikkhave puriso eka Sallena Vedana vediyetha. Evameva kho bhikkhave sutavā ariyasāvak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na socati na kilamati na paridevati, na urattāi kandati, na sammoha āpajjati; so eka vedana vediyati kāyika, na cetasika. Tassāyeva kho pana dukkhāya vedanāya paighavā na hoti, tamena dukkhāya vedanāya apaighavanta yo dukkhāya vedanāya paighānusayo so nānuseti; so dukkhāya vedanāya phuṭṭho samāno kāmasukha nābhinandati. (sn.4.207. Sallasutta)

21) 수타니빠따에서의 無餘(Anupādisese)취착없음 말하고 있다. Ettāvavataggampi vadanti heke Yakkhassa suddhi idha paṇḍitā se. Tesa paneke samaya vadanti Anupādisese kusalā vadānā(몇몇 지자들은 이것이 최상의 청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현자들은 취착이 없는 것이 최상의 청정이라고 말한다.) 수타니빠따에서의 ‘취착없음(無餘)’취착있음(有餘)’ 무여열반과 유여열반의 논의 에서는오온없음(無餘)’오온있음(有餘)’으로 변질되었다. 무여열반이란 단어는 붓다의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붓다의 사후에 나타나 단어이다. 붓다는 육체가 있고 없고의 차이에서 말하는 무여열반과 유여열반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22) here there is no judgment that the five aggregates are suffering. what is condemned is grasping the five aggregates as possession of a mysterious entity or ego.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 by David j. kalupahana. p87.)

23) “갈애의 소멸이 곧 윤회의 그침이다” 라는 말은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차이를 없앤다.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열반에 대한 탐착이라 비난하고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윤회가 곧 열반”이라고 지적했다.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이에게 첫 번째 화살은 이미 화살이 아니다.

24) 역사적으로 열반에 대한 논의 만큼 지속적으로 제기된 문제가 없었고 만큼 해결이 문제도 없다. 무여열반에 대한 논의는 곧장 14무기의 논의로 연결된다. 도무지 경험해보지 못한 , 말할 수도 없는 것을 생각하고 논의 한다는 것은 자체가 희론이다. 열반을무엇이다라고 말하는 대신에무엇이 없는 상태다”. 라고 말하는 붓다의 언어는 그래서 오늘날 까지 생동감 있게 살아있다. 유여열반만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이러한 문제는 해결된다.

25) the first noble truth is generally translated by all most scholars as the noble truth of suffering, and it is interpreted to the mean that life according to buddhism is nothing but suffering or pain.both translation and interpretation are highly unsatisfactory and misleading.it is because of this limited, free and easy translation, and its superficial interpretation ,that many people have been misled into regarding buddhism as pessimistic [what the buddha thought. p16] 전재성님 번역

26) 다음까페 [초기불전 연구원] 문답 게시판에서 각묵스님 대답

27) [초기불교의 연기사상.p207] 전재성.

28)청정도론에서는 dukkha의 어원분석을 du(나쁜,비열한) + Khai(텅빈,없음)으로 해석하여 위험하기 때문에 나쁘고,항상함,청정,행복,자아가 없기 때문에 비었다.라고 각각 해석한다.

29) [The heart of buddha's teaching.by thich nhat hanh. p21]

30) Uppādā vā bhikkhave tathāgatāna anuppādā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sabbe sakhārā aniccā"ti. ... "sabbe sakhārā dukkhā"ti.... "sabbe dhammā anattā"ti. Ta tathāgato abhisambujjhati abhisameti. Abhisambujjhitvā abhisametvā ācikkhati deseti paññāpeti paṭṭhapeti vivarati vibhajati uttānī karoti "sabbe dhammā anattā"ti. (An.1.286p)

31) Rūpa bhikkhave anicca. Yopi hetu yopi paccayo rūpassa uppādāya, sopi anicco. Aniccasambhūta bhikkhave, rūpa kuto nicca bhavissati. (sn.3.23.Pahama hetu sutta)

32) Rūpa bhikkhave, dukkha yopi hetu yopi paccayo rūpassa uppādāya, sopi dukkho. Dukkhasambhūta bhikkhave, rūpa, kuto sukha bhavissati. (sn.3.23.Dutiya hetu sutta)

33) Rūpa bhikkhave, anattā yopi hetu yopi paccayo rūpassa uppādāya, sopi anattā. Anattasambhūta bhikkhave rūpa, kuto anattā bhavissati. (sn.3.23.Tatiya hetu sutta)

34) 비구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머무르거나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Katamo ca bhikkhave, paiccasamuppādo? Jātipaccayā bhikkhave jarāmaraa uppādā vā tathāgatāna anuppādā vā tathāgatāna hitāva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sn.2.26.)

35) 붓다는 이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여실지견 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가지 특상(lakkhana)은 존재의 속성이 아니다. 이 특상(lakkhana)은 취착을 가진 인간의 특상(특별한 특징)이다. 이것은 성주괴공하는 “삼라만물의 특상”이 아니고 생노병사하는 “중생의 특상”이다. 이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전이나 개론서에서는 [삼특상]과 [삼법인]을 구분하지 않고 삼법인의 내용으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말하는가 하면 일체개고를 빼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말하기도 하고, 일체개고를 넣어 사법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틱낫한 스님의 지적대로 苦를 무상과 무아와 같은 반열에 두고 이해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혼란이며 이 혼란의 근원은 고를 모든 ‘존재의 속성’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조계종 사이트에서도 삼특상과 삼법인을 구분하지 않고 설명하고 있다.

36) 이경전이 설해지게 인연은 붓다가 제따워나(jetavata)에서 오백명의 비구들과 함께 있을 때의 일이다. 이들 비구들은 각각의 명상주제를 붓다에게 받아가지고 숲에서 명상을 했으나 별로 진척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에게 맞는 다른 명상주제를 요구 했고 붓다는 각각의 오백명의 비구들에게 전생에 닦아 오던 명상주제를 주었다. 그들은 무상, , 무아라는 새로운 명상주제로 모두 아라한이 되었다.

37)Tattha sabbe sakhārāti kāmabhavāsu uppannā khandhā tatta tattheva nirujjhanato aniccāti yadā vipassnāpaññāya passati. ..여기 제행무상의 제행은 다음 경전과 같이 “모든 형성?것 들”이라는 삼라만물로 확대될 수도 있다.“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Aniccā vata sakhārā uppādavayadhammino Uppajjitvā nirujjhanti tesa vūpasamo sukho)(d.n.2.157) 그러나 제행개고에서 제행은 오온에 한정되어야 한다.

38)Bhikkhave, sabbepi khandhā paipīana-ṭṭhena dukkhā. 괴로움이라는 것은 (무더기)들이 압박받고 있기에 괴로움이다.

39) Tattha sabbe dhammāti pañcakkhandhā eva adhippetā.

40)청정도론에서는dukkha의의미를4가지로설명한다. 압박(paipīana),형성(sankhta), 불타는 (santāpa), 변화(viparina)이다. 이설명은 고의 직접적인의미라기 보다는 간접적인 의미와 원인까지를 포함하여 분류(vibhāga)한 것이다. 이 압박(paipīana)이라는 표현은 청정도론에서 行苦를 설명할 때에도 나타난다. “평온한 느낌과 나머지 삼계(三界)에 속하는 상카라들은 일어나고 사라짐에 압박되기 때문에 행고라 한다.”

41)Ta kimmaññññasi rāahula, rūupa niccaa anicca vāa'ti? 'Anicca bhante'. Yampanāanicca dukkha vāa ta sukha vāa'ti? Dukkha bhante. Yampanāanicca dukkha vipariāamadhamma, kallannu ta samanupassitu ''eta mama, esohamasmi, eso me attāa''ti? No heta bhante. (sn.2.p249.Bandhasutta)

42) Evameva kho bhikkhave, assutavā puthujjano ariyāana adassāavīi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ito, sappurisāana adassāavīi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ito rūupa attato samanupassati, rūupavanta vāa attāana, attani vāa rūupa, rūupasmi vāa attāana, tassa ta rūupa palujjati. So tato nidāana anayavyasana āapajjati. (sn.3.16.Pahama upādāparitassanā sutta)

43) In one of the suttas of the majjhimanikaya, after praising the spiritual happiness of these dhyanas, the buddha say that they are impermanent, dukkha, and subject to change(aniccāa dukkhāa vipariāamadhammāa). notice that word dukkha is explicitly used. it is dukkha , not because there is ‘'suffering’' in the ordinary sence of the word.but because 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yad anicca ta dukkha) p18.

44) 조계종 사이트에서는 삼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고 있다. “고고(苦苦) 괴로움 자체의 고통, 행고(行苦) 시간적으로 덧없이 변하는데서 오는 고통, 그리고 괴고(壞苦) 공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부서지는 데서 오는 공허감의 고통이다.”

45)Tattha kāyikacetasikā dukkhā vedanāsabhāvato ca nāmato dukkhattā dukkhadukkhanti.

46)sukhā vedanā viparinamena dukkhuppattihetuto viparinama dukkham.

47)upekkhā vedanā ceva avasesā ca tebhûmakā sankhārā udayabbayappatipaipīitattā sankhāradukkham.한글 청정도론 2 16 547p (초기 불전 연구원, 대림 스님 )

48)여기서 말하는 느낌은 일반적인 아픈 느낌, 기쁨, 만족, 불만족, 선정상태 등등의 매우 광범위한 용어이다.

정신적 물질적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시각대상-안식>= 접촉-> 눈의 느낌 (cakkhusamphassajā vedanā)- upekkhā

-청각대상-이식>= 접촉-> 귀의 느낌 (sotasamphassajā vedanā)- upekkhā

-후각대상-비식>= 접촉-> 코의 느낌 (ghānasamphassajā vedanā)- upekkhā

-미각대상-설식>= 접촉-> 혀의 느낌 (jivhāsamphassajā vedanā)- upekkhā

-촉각대상-신식>= 접촉-> 몸의 느낌 (kāyasamphassajā vedanā)- sukha, dukkha

마음-인식대상-의식>=접촉->마음의느낌(manosamphassajā vedanā)- somanassa, domanassa, upekkhā.

49)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sukhā vedanā dukkhato diṭṭhā hoti, dukkhā vedanā sallato diṭṭhā hoti, adukkhamasukhā vedanā aniccato diṭṭhā hoti, aya vuccati bhikkhave bhikkhu sammaddaso acchecchi taha, vā vattayī saññojana, sammā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s.n.4.207.Daṭṭhabbasutta)

50) [what the buddha thought. by walpola rahula. p19] 그런데 청정도론의 의견은 다르다. 청정도론에서는 육체적 괴로움(dukkha), 정신적인 괴로움(domanassa), 근심은 苦苦에 속하고 탄식, 절망은 行苦에 속한다고 말한다.

51) Idhānanda bhikkhu sabba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samatikkamma saññāvedayitanirodha upasampajja viharati, ida kho ānanda etamhā sukhā añña sukha abhikkantarañca paītatarañca.(sn.4.225. Pañcakagasutta) (아난다여, 세상에 비구는 온전히 비상비비상처를 뛰어넘어 멸진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즐거움은 다른 즐거움보다 더욱 탁월하고 더욱 미묘한 것이다.) 경전은 2가지 느낌부터 ,3, 5, 8, 36, 108가지 느낌이 설명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멸진정은 느낌과 개념작용이 소멸했기 때문에 즐거운 느낌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상태를 경전에서는 즐거운 느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52) Upekkhā pana dasavidhā hoti–chalagupekkhā brahmavihārupekkhā bojjhagupekkhā vīriyupekkhā sakhārupekkhā vedanupekkhā vipassanupekkhā tatrama jjhattupekkhā jh±nupekkhā pārisuddhupekkhāti.

53) So eva pajānāti: 'ayampi kho animitto cetosamādhi abhisakhato ābhisañcetasiko ya kho pana kiñci abhisakhata ābhisañcetasika, tadanicca nirodhadhamma'nti pajānāti. Tassa eva jānato eva passato kāmāsavāpi citta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 vimuccati. (mn.3.121.Cūasuññata sutta)

54) 뜻은 yad anicca ta dukkha” 이라는 문장을 번역할 때와 같은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무상한 것이면 무엇이건 괴롭다(whatever is impermanent is dukkha)는 의미가 아니고, 오온을 나라고 취착할 때 오온의 변화는 괴롭다는 의미이다.

55) 법집론(Dhammasagai) 주석서인 앗타살리니(atthasalini)에서는 고통을 설명하는 경전의 언어를 5가지로 이해 하고 있다. 1)느낌으로서의 고통Dukkhavedanā 2) 바탕으로서의 고통Dukkhavatthu 3)대상으로서의 고통Dukkhāarammaa 4)원인으로서의 고통Dukkhapccaya 5)장소로서의 고통Dukkhapccayaṭṭhāna. 이상과 같이 5가지 고통을 이해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나서 앗타살리니에서 말하는 고통은 직접적인 고통인느낌으로서의 고통(dukkhavedanā)임을 밝히고 있다.

56)Apicāha āvuso imasmi yeva byāmamatte kalebare saññimhi samanake lokañca paññāpemi. Lokasamudayañca lokanirodhañca lokanirodhagāminiñca paipadanti. (an.2.49.Pahamarohitassasutta)

57) Lokanti dukkhasacca. Lokasamudayanti samudayasacca. Lokanirodhanti nirodha sacca. Paipadanti maggasacca. Iti “nāha, āvuso, imāni cattāri saccāni tinakaṭṭhādisu paññapemi, imasmi pana catumahā- bhûtike kāyasmiyeva paññapemī”ti dasseti.(AA.3.88-89)

58) Ta kimmaññasi gāmai yadā te ciravāsissa mātā adiṭṭhā āsi assutā, ahosi ciravāsissa mātuyā chando vā rāgo vā pema vāti. No heta bhante. Dassana vā te gāmai āgamma savana vā te gāmai āgamma evante ahosi ciravāsissa mātuyā chando vā rāgo vā pema vāti. Eva bhante. Ta kimmaññasi gāmai. Ciravāsissa mātuyā te vadhena vā bandhena vā jāniyā vā garahāya vā uppajjeyyu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ti. ciravāsissa mātuyā me bhante vadhena vā bandhena vā jāniyā vā garahāya vā jīvitassapi siyā aññathatta, kimpana me nūppajjissanti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ti. Imināpi kho eta gāmai pariyāyena veditabba ya kiñci dukkha uppajjamāna uppajjati sabbanta chandamūlaka chandanidāna, chandohi mūla dukkhassāti. (sn.4.330.Bhadrakasutta)

59) Sādhu sādhu anurādha, pubbe cāha anurādha, etarahi ca dukkhañce 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nti. (sn.3.119 . Anurādha sutta)

60)Yathā hi agasambhārā hoti saddo rato iti, Eva khandhesu santesu hoti sattoti sammuti. Dukkhameva hi sambhoti dukkha tiṭṭhati veti ca, Nāññatra dukkhā sambhoti nāññatra dukkhā nirujjhatīti. (sn.1.135.Vajirāsutta)

여러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생기듯이 오온에 의해 중생(나라는 개념)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여기서 부속이 있는 것이나 오온이 있는 것이 괴로움이란 뜻이 아니다. 부속에서 생기는 수레라는 개념, 오온에서 중생이라는 개념(我想)이 괴로움이다. 이 자기동일성(我想)은 무지와 갈애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생겨나는 것은 오직 갈애(무지)이다. 갈애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갈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갈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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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6.27 11:35

    첫댓글 조계종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글이 조계종스님들이 모두 그러한 견해를 가진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사이트를 구축할때 관련했던 분들의 견해일겁니다. 그런 견해를 올린 분들은... 이것 한가지만 생각해 보았더라면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부분을 올리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사성제는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책상이 삼계를 윤회하는 존재인가? 분명히 아니라고 대답할 겁니다.

  • 08.06.27 11:43

    본글에서 보면... 라훌라 스님의 '존재의 속성'으로 고를 파악한 것은 경전에 근거가 있는 올바른 견해라고 생각됩니다. 본글을 통해서 후박나무님은 라훌라 스님의 견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조계종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고에 대한 일부 잘못된 견해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 08.06.27 12:01

    "2. 사성제의 고" 부분를 살펴보면.... [“오취온고”(pa?cupadanakkhandha dukkha)의 해석에서 다양한 견해15) 가 나타나는데 오취온이 아닌 ‘오온이 괴로움’이라는 주장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구절에서는 "오온이 괴로움"은 쌍윳따의 경전에 그대로 나오는 구절입니다. 경전에 그대로 나오는 구절을 주장이라고 주장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또한 오취온고는 괴로움을 한마디로 요약한게 아닙니다. 4고8고의 하나에 해당될 뿐입니다.

  • 08.06.27 13:11

    "3. 학자들의 고에 대한 오해" 부분을 살펴보면... 각묵스님의 견해에서는 [그러므로 물질도 苦라는 것입니다.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 어떻게 고냐, 그리고 감각접촉이나 집중, 마음챙김, 정진, 자애, 연민 등등의 여러 심리현상들도 그 자체는 고와 관계없는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질]이부분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각묵스님의 고성제에 대한 이해정도를 알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고성제에 대한 이해라기 보다는 오온에 대한 이해 정도라고 표현되어야 더 정확한것이라고 볼수 있는데...

  • 08.06.27 13:54

    오온을 삼계의 존재,즉 욕유, 색유, 무색유 내에서 분별하는 것으로 한정해야지 돌, 책상, 태양, 달 등까지를 존재라 하여 색온,즉 물질을 고라 한다면 불교용어의 올바른 사용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돌, 책상, 태양, 달은 불교용어를 사용한다면, 삼유가 존재성을 영위해 나가는 세계의 환경이 되므로 기세간이란 용어를 사용해야 할겁니다. 전재성님의 견해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괴로움은 심리적인 용어가 아니라 실제적인 세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정신 물리적인 총체적인 불안을 의미한다] 이부분은 불교의 괴로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되는데...

  • 08.06.27 14:10

    [실제적인 세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정신 물리적인 총체적인 불안을 의미한다] 이부분에 세가지 존재를 넣으면, [외부의 실제적인 세계의 사건과 연관되어 있는 삼유의 정신물질적인 총체적인 불안] 이렇게 이해한다면, '돌, 책상, 태양, 달등이 고라는 주장이 나올턱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각묵스님의 인용구절도 무리가 없어 보입니다. 후박나무님은 저 밖에 있는 객관적인 존재입니다. 후박나무님한테는 물질도 있고, 집중, 마음챙김, 정진 등등의 여러 심리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오온은 고다. 이게 무엇이 말이 안됩니까?

  • 08.06.27 14:51

    비단금님 반갑습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깨달은 싯달타 존체인 색온 즉 5온(식, 행, 상, 수온+색온) 중 색온은 욕망 덩어리 인지요? ㅎㅎㅎ 그러니까, 썩어 문들어지기전에 불태워 사리(뼈만)와 재만 남겼으나 그 또한 시절따라 변하니 불자라면 존숭하는 사리 오온이 남기고간 조각이 아니던가? 이또한 욕망덩이네 ㅎㅎㅎ 그럼 도대체 깨달은 오온은 무엇이며, 못깨달은 오온은 무엇인가? 이 양자사이에 적확한 차이는 무엇인가? 깨달은 오온은 무상, 무아의 법칙을 따라 태어났으나 사라지지않는가! 영원하며 존숭되어야할 싸리라고 말하는 그 중생의 착각하는 마음이 바로 [고]요! 욕망의 고리이며 윤회의 고리인 것이다...()..

  • 08.06.27 15:16

    좀더 불교의 교리나 용어를 이해하셔야 될 듯 합니다.....

  • 08.06.27 14:50

    "4. 삼특상의 의미" 부분을 살펴보면.... 3. 학자들의 고에 대한 오해" 부분과 마찬가지로 존재에 대한 용어의 적용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불교의 세계관은 이렇습니다. 삼계가 있습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 입니다. 각각의 세계에 사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삼유입니다. 이 지구는 욕계에 해당됩니다. 욕계에는 욕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욕유입니다. 동물도 욕유입니다. 그러면 돌뎅이는 욕유입니까? 지구가 욕유입니까? 지구가 상카라에 해당됩니까? 돌뎅이, 책상이 상카라입니까? 돌뎅이, 책상, 달 등이 상카라라면 돌, 책상, 태양 등이 고다는 옳은 주장이 될겁니다.

  • 08.06.27 15:06

    후박나무님은 법구경의 주석서를 인용하면서, 삼카라는 '무더기들'이고 담마는 '중생의 오온'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4번 부분에서는 이렇게 쓰면서도, 정작 3번 부분에서는 돌, 책상, 태양, 달 등을 색온으로 들고 있는데, 이는 돌, 책상, 태양, 달이 욕유라는 의미가 됩니다. 세가지 존재, 삼유의 불교용어 사용에서 헛갈리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 08.06.27 15:15

    이미 윗 댓글에서 적듯이... 삼계는 삼유와 기세간으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돌,책상, 태양, 달은 색온이지만 삼유, 세가지 존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돌, 책상, 지구는 욕계의 기세간이고 태양, 달은 욕계인지 색계인지 모르겠지만 기세간인 것은 확실하겠죠. 법구경의 주석서에 따르면, 삼카라와 담마는 세가지 존재에 해당되는 것이지 기세간에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건 이해하기 쉽겠고요.. 용어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책상은 괴로워 하지 않는다"는 글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 08.06.27 17:20

    사실 사성제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므로 불교에 대해 말하려면 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므로...간단히 한번 살펴봅시다. 고성제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를 정의하셨는데, 니까야에 의하면, 고고, 괴고, 행고 이세가지를 고라 정의했으며, 여기에다가 고의 원인까지도 고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집성제는 말그대로 고가 어떻게, 어떤 이유로 쌓이는가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고의 무더기가 쌓이는 이유는 어리석음(무명)으로 인해 갈애에 취착하기 때문에 고의 무더기가 집한다고 합니다.

  • 08.06.27 17:26

    멸성제는 고의 소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고가 집하는 이유가 어리석음으로 인한 갈애의 취착이기 때문에, 고의 소멸은 고가 집하는 이유를 없애면 됩니다. 즉 무명을 멸해서 갈애에 취착하지 않는 것이 고의 소멸입니다. 도성제는 고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설명합니다. 즉 8정도가 무명을 멸해 갈애에 취착하지 않게 하는 길이라 말씀하십니다.

  • 08.06.27 17:39

    자 논의해 봅시다..... 돌뎅이, 책상 등은 물질이고 고이다. 이말은 고성제에 따르면,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하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돌뎅이, 책상 등은 객관적인 존재이고, 색의 무더기(색온)입니다. 색의 무더기는 고라 정의했으니 고입니다. 그럴듯 합니다. 집성제에 따르면, 돌뎅이, 책상등은 객관적인 존재이므로 무명이 있고, 갈애가 있고 그 갈애의 취착함이 있어야 합니다. 말이 안됐죠. 이렇게 불교의 고성제, 집성제에 의하면.. 돌뎅이, 책상이 괴로움이다 하는 것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건 자명한겁니다.

  • 08.06.27 18:11

    니까야에 의하면 분명히 "오온이 고" , "오취온이 고" 둘다 다 나옵니다. 윗글의 논리로 보면... [“오취온고”는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 구절에 의하면 "오취온이 고"인 이유는 오온이 고가 아니고 오온에 취착함이 고다 라는 주장인데, 니까야에 의하면, 고의 원인도 고라고 했습니다. 오취온은 오온의 취착함이므로 오취온도 니까야에선 고라 했고, 오온도 고라고 했으니, 취착함은 고의 원인이므로 고입니다. 그런데, 취착하는 것은 집성제입니다. 오취온은 오취온입니다.오취온을 오온에 취착하는 것으로 푸는 건 말장난임에 불과한 겁니다.

  • 08.06.27 18:56

    말장난으로 주장하는 걸 이렇게 말장난으로 풀면, '취착하는 것'은 집성제가 아니고 고성제라는 주장이 됩니다. 십이연기의 '취'는 고의 무더기이지만 취하는 것은 고의 무더기가 쌓이는 집성제입니다. 윗글의 논리는 이런 모순점이 있습니다. 윗글은 이런 논리 전개상의 모순점이 여러군데 보입니다.... 그럼 오온과 오취온이 윗글처럼 서로 다른 별개의 어떤것인가 여부를 살펴 봅시다.

  • 08.06.27 19:34

    윗글에는 법구경의 삼특상이 인용됩니다. [ 278번의 제행(Sabbe sa?khara)이란 “모든 무더기들이다.” 38) 279번의 제법(Sabbe dhamma)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제법은 오온들을 의미한다. 39)] 법구경의 주석서까지 인용합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보이는 글의 논리를 보면... 제행은 오취온이고 제법은 오온이여야 4번에서 오온고와 오취온고가 서로 다른 것이라는 주장에 합당한 논리입니다. 그런데도 [주석서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제행이 오온이라는 것은 전체적인 게송을 살펴보면 드러난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 08.06.27 19:45

    글 위와 아래부분에서 서로 모순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온고와 오취온고가 다른 것이다를 주장하기 위해 인용한 법구경과 그 주석서 구절이 오히려 오취온고과 오온고는 동일하게 것임을 보내주고 있습니다. 사실.. 니까야에도 오취온과 오온은 동일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오취온만 형성된것이고 오온은 형성된것이 아닌게 아닙니다. 오온이 나오는 숱한 구절을 읽어봐 보십시요. 오온은 무상한 것이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윗글에서도 그런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무상한것은 형성된 것의 특성입니다. 조건지어진것, 형성된것입니다. 이게 제행입니다. 그게 오온이고요. 일체개고는 오온은 고란 야그입니다.

  • 08.06.27 19:54

    니까야에서 오온은 고다. 숱하게 나옵니다. 법구경에서 나온 일체개고가 니까야에서 나온 오온이 고다와 다른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오온이면 됐지, 오취온은 왜 쓸데없이 경전에 나와서 불자들을 헥갈리게 하는가? 정확한 이유는 오취온을 경전에 처음 사용한 분만이 알고 있겠지요. 한가지는 추론할 수 있는데..오취온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사용하시지는 않으셨을 겁니다. 왜냐 하면 오취온이란 용어는 가장 오래된 경전들, 숫타니타빠, 법구경, 자설경등 에서는 나타나지 않았을 거니까요...

  • 08.06.27 20:04

    오취온을 사용한 이유는 교학상에서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오온을 형성된것, 취착된것으로 사용하다 보니 탐,진,치가 멸한 아라한과 부처님에서는 어떤 용어를 사용할 것인가가 문제가 될겁니다. 아라한과 부처님한테 일어나는 생리학적 현상은 우리들 일반중생들 한테 일어나는 생리학적 현상과 다른 점이 없단 말입니다. 밥먹고 똥싸고, 잠잘때 잠자고, 생각하고... 등등 다른게 없지요. 내부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육체적인 여러현상들은 동일하게 일어난다 말입니다. 이걸 구분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래서 구분하기 위해서 오온과 오취온으로 분별했습니다. 오온은 아라한과 부처님한테 사용하고 오취온은 일반중생들한테 사용하면 됩니다.

  • 08.06.27 20:24

    위에 인용된 첫번째 화살과 두번째 화살이 나오는 경을 보면.... 아라한, 부처님과 일반중생들과의 차이가 두번째 화살에 맞는가 맞지 않는가 차이인데.. 첫번째 화살은 신체적인 고통만을 느끼는 겁니다. 신체적인 고통만을 느끼는 현상은 오온이 모두 관여합니다. 화살이 몸이 박히면, 화살은 색경입니다. 몸은 신근입니다. 색경과 신근에 연하여 신식이 일어납니다. 신식다음엔 촉입니다. 신식*촉 다음엔 수입니다.애.상.... 육육법으로 가거나, 혹은 십이연기로 이론을 전개하겠죠. 신근은 색온, 신식은 식온,... 오온으로 분별할수 있습니다. 화살이 몸에 박혀 통증을 느끼는 그 현상은 불교용어를 사용하면 오온이 일어나고 사라짐입니다

  • 08.06.27 20:42

    아라한과 부처님한테 화살하나가 몸에 박히면 이와같은 현상이 일어나겠지요. 일반 중생하고 다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오온이 일어났다 사라짐입니다. 두번째 화살은 어떤 화살인가? [괴로운 감수와 접촉해도 그에게 분노가 생겨나지 않는다...괴로운 느낌에 대해 분노의 경향을 잠재시키지 않는다 ] 이 구절에서도 알수 있듯이 첫번째 화살에 몸 내부에서 일어난 반응에 취착함으로 두번째 화살을 맞게 됩니다. 즉 두번째 화살은 첫번째 화살에 대한 취착으로 형성된 분노의 경향성일겁니다.

  • 08.06.27 20:45

    차이는 분노의 경향성이 형성되는가 형성되지 않는가이며 그건 오온에 취착하는가 취착하지 않는가 차이입니다. 이걸 구분하기 위해서 오온과 오취온이 등장하는 겁니다. 경전에 특별한 구분 없이 기술되는 오온은 형성된것입니다. 취착하여 형성된 오취온을 말합니다.

  • 08.06.28 11:20

    깨달은 후 싯달타의 존체는 오온이며 형성된것이다. 형성된것은 무상하며 실체시 할 수 없는 무아이다. 그래서, 깨침전에도 깨침후도 마음과 몸은 형성된 것이며 시절이 도래하면 형성되지않은 것으로 [오고간다]. 하지만 몸과마음에 대한 취착으로인하여 [고]의 수레바퀴 인과연(원인-결과)을 지어낸다. 여기서 질문 [오온은 형성된 것]이라면 수행의 대상인가요? 취착하여 형성된 오취온은 수행의 대상인가요?

  • 08.06.29 07:57

    [깨달은 후 싯달타의 존체는 오온이며 형성된것이다.] 소슬님이 여기서 사용한 오온의 의미는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한 생명체를 의미하며, 그 생명체가 이세상에 태어나 성장하고 늙고 하는 것은 그 전생에서 무명과 갈애로 취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지 오온과 오취온으로 분별하자면, 소슬님이 여기서 사용한 오온은 오취온을 말합니다.

  • 08.06.29 08:04

    [몸과마음에 대한 취착으로인하여 [고]의 수레바퀴 인과연(원인-결과)을 지어낸다.] 이야그는 깨침전에 해당되는 말이지 깨침후에는 해당이 되지 않겠지요. 깨침후에도 생명활동을 하니 여전히 오온이 일어날때 사라집니다. 그러나 탐,진,치가 멸하셨기에 취착하지 않습니다. 굳이 분별하자면.. 깨침후에는 오온을 형성하려는 경향성이 멸하셨겠죠. 즉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습니다.

  • 08.06.29 08:23

    오온은 불교수행의 대상입니다. 오온은 소멸합니다. 조건지어지고, 형성된 것은 무상합니다. 무상한것은 고입니다. 그리고 무아입니다. 어떻게 수행하는가? 불교경전에 엄청나옵니다. 그걸 참조하시면 되겠지요....

  • 08.06.27 20:48

    윗글에서 지적해야 할 부분이 한군데 더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안다. 이 무상심 삼매(animitto cetosamadhi)도 형성된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 무엇이건 형성되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는 법이라고 통찰하여 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기 때문에 그는 욕망의 번뇌(kamasava)와 존재의 번뇌(Bhavasava)와 무명의 번뇌(Avijjasava)에서 자유로워 진다.”53)] 이부분입니다.

  • 08.06.27 21:06

    멸진정에서의 사티를 말하고 있는데, 멸진정에서의 사티는 멸진정삼매에 든 상태에서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삼매에서 벗어나서 삼매에 든 상태를 기억하면서 사유하는 겁니다. 무상심삼매는 형성된것입니다. 즉 과입니다. 의도를 갖고 행한 삼매수행의 결과입니다. 그러하기에 형성된것이며 의도된 것입니다. 무상심삼매는 당연히 유위법입니다. 유위법은 무상하고 소멸하는 법입니다. 니까야에서 유위와 무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무위는 조건지어지지 않는것, 형성되어지지 않는것을 의미합니다. 무상심삼매가 열반이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지어진 것, 형성된것인 무상심삼매가 열반일수는 없습니다.....

  • 08.06.28 11:27

    [조건지어진 것, 형성된것인 무상심삼매가 열반일 수는 없습니다.] 동감입니다. 하지만, 고타마 싯달타의 깨침은 죽음으로써 완성된것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전개로 깨침을 말하기엔 너무나 부족함을 느낌니다. ..()..

  • 08.06.28 12:29

    비단금님의 댓글 잘읽었습니다. 오온과 오취온을 구분할 필요가 있게되어 하게되었지만 형성되었다는 말은 오온 = 사대 [지수화풍]+ [바왕가]의 결합이라한다. 이 자체가 [고]인가? 고이다!!! 태어나지 않음이 [깨침의 본질]이다. 그렇다면, 돌맹이의 형성! 내 앞에 펼쳐짐 또한 고가 아닌가? 우리가 [고]니 [고가 아니다]느니 우리가 말하네. 자연은 대답이 없네ㅎㅎㅎ

  • 08.06.29 08:25

    '돌맹이의 형성! 내앞에 펼쳐짐 또한 고' 란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것이 "고"입니다.

  • 08.06.30 19:22

    그럼 사람으로온 것이 [고]가 아니다는 이야기이네요? 이렇게 느끼는 사람있으면 손들어보아요? 돌맹이의 형성되지않음이 [적멸, 불끄진자리인데] 인가? 돌맹이의 형성되지 않음이 [적멸, 불끄진자리]인가? 아니면 둘다 [적멸, 불끄진자리]인가?

  • 08.06.30 20:34

    ['돌맹이의 형성! 내앞에 펼쳐짐 또한 고' 란 생각의 일어남과 사라짐 그것이 "고"입니다.] 이 귀절이 어떻게 사람으로 온 것이 고가 아니다라는 의미가 있는 겁니까?

  • 08.06.30 13:03

    비단님은 [생각의 일어남 사라짐]을 고라고 하십니다. 그럼 [돌맹이]자체는 고인지 고가아닌지 모르는게 우리인간의 한계아닙니까?

  • 08.06.30 20:49

    불교는 기본적으로 "나 자신"을 기준으로 살펴나가야 합니다. [돌맹이 그자체]는 [돌맹이 그자체]에 반사된 빛이 나의 안처에 들어오면 안근이 작용하여 안식이 생하고 촉,수,상...을 통해 돌맹이의 형상이 인식됩니다. 돌맹이의 형상에 [돌맹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나의 마음작용입니다. 이과정은 오온이 일어났다 사라짐입니다. 안처가 일어났다 사라짐입니다. 고의 일어났다 사라짐입니다. 불교경전에는 돌맹이 그자체가 고란 소리가 없습니다. 소슬님은 제가 적어놓은 댓글은 읽어 보셨습니까? 제대로 읽으셨다면 '돌맹이 자체가 고인지 고가 아닌지 모르는게 인간의 한계아닙니까?' 란 질문이 나올수가 있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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