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동(2024.1.7./ 주현 후 제1주일, 신년주일)
창조세계를 연주하라
창세기 1:1-5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 신년주일이다. 2024년 새해에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가정과 사랑하는 자녀들 그리고 소망하는 일마다 큰 복을 베푸시길 바란다.
서로 축복하자. 모두 현재완료형의 시점으로 축복하기를 바란다. 이를 예언적 축복이라고 부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셨다지요?”
새해가 아름다운 것은 새로운 꿈을 꿀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그 꿈은 바로 시작을 가능케 하는 희망이 된다. 그 희망은 내 삶에 생기를 주는 신비이다. 그러므로 내 믿음은 미래를 맞이하는 능력이다.
올해도 꿈을 꾸라. 내 꿈을 디자인하라. 내 삶에 기대를 가지라. 꿈을 이루려고 살라.
그러나 명심하라. 기도의 열매는 넝쿨 채 굴러 들어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밭에 뿌려지는 ‘한 알의 씨앗’이라는 것을!
오늘은 주현 후 첫 주일이다. 처음 부른 주현절 입례송은 “예수님은 누구신가?”이다. 사도 베드로는 말한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현절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절기이다. 올해도 예수님과 친밀하게 만나고, 기도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길 바란다.
1)
주현절(에피파니)은 아주 오래된 교회의 축일이다. ‘주현’은 마치 신년에 왕이 지방을 순시하듯이, 하나님의 따듯한 심방을 기쁘게 맞이하는 날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내 삶에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을 환영하는 때이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새해 첫 주일답게 “태초에” 일어난 일을 증거한다. 2024년을 시작하며 송구영신의 밤에 모인 이들은 톨레레게 시즌6으로 창세기 1장을 읽으며 출발하였다. 색동교회만의 참 좋은 리추얼이다.
창세기 1장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창조주 하나님은 태초에 가장 먼저 빛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일원으로 이 세상에 등장하였다. 나도 그 창조의 빛에 참여한다.
성경의 첫 문장은 가장 근원적인 신앙고백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
천지,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며, 자연의 상호작용 때문도 아니다. 모든 사물의 태초에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있었다.
‘창조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바라’는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바라’(창조하다)는 절대 주권자답게 무엇을 ‘무에서’ 불러낸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세상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신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창세기는 근대과학의 관점과 다르다고 과학적이 아니라고 한다. 당연하다. 성경은 우주와 인류의 기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책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다.
하나님에 대한 인생의 태도와 참다운 신앙을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제시하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려는 것은 모든 피조물의 배후에는 바로 초월적 조재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선언이다. 이것이 창조신앙이다.
창세기의 관심은 우주만물의 창조 사실이 아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이다. 그리고 나를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말하려는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라는 진리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2)
하나님의 첫 번째 창조는 빛이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
빛 때문에 모든 생명의 존재가 가능하다. 그 반대어는 어둠으로 혼돈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혼돈이 사라지려면 먼저 어둠이 없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이 살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먼저 빛을 창조하시고, 이어서 어둠을 분리해 내셨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신 것이다.
생명이 생명으로 존속하려면 빛 가운데 있어야 한다.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어둠은 사라지는 법이다.
창조 이후 어둠은 더 이상 혼돈이 아니라, 빛과 구별되는 창조된 어둠으로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빛뿐만 아니라 어둠에도 이름을 붙여주셨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5).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후, 어둠을 없앤 것이 아니라, 어둠을 분리하셨다. 그래서 어둠조차 하나님이 창조하신 경건한 세상의 부분이 된다.
창세기 사상은 대단히 혁명적이다. 그동안 사람들은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집트는 태양을 ‘레’라는 신으로 숭배하지만, 성경에서는 그저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다.
성경은 당시 잘못된 신관을 부정한다. 사람들이 믿는 태양이든, 자연현상이든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상, 곧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신이시다.
우리 역사에서 보면 종종 어둠이 빛을 이기고, 죽음이 생명을 억압하는 현실을 겪는다. 그렇게 보이는 때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혼돈의 어둠을 지배한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 1:5, 공동번역).
주현절은 빛의 절기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빛의 자녀에 동참하는 것이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요약하는 한 구절을 뽑는다면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4, 10, 12, 18, 21, 25, 31)이다. 모두 일곱 차례 반복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은 자화자찬이 아니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긍정이다. 모든 피조물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거기에 선악이나, 아름답고 추하고가 없다.
사람은 누군가를 인정할 때 ‘무엇 때문에’라는 인간적인 조건을 붙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쁘다 밉다는 식의 감각적이나, 잘한다 못한다는 식의 기능적이나, 착하다 나쁘다는 식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은 존재 그 자체를 인정해 주신다. “참 좋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방식이다. 심지어 어둠조차 밤의 영역으로 구분되어 하나님의 선한 세계의 부분이 되지 않았는가? 창조된 것은 선하고, 아름답다. 한마디로 좋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좋으심은 내게도 해당될까? 성경은 대답한다. 그렇다! 바로 하나님은 나를 인정하신다. 나를 긍정하신다. 하나님을 나를 ‘심히’ 사랑하신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3)
우리는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찬양한다.
낮과 밤, 저녁과 아침, 연말과 새해, ‘굿모닝!’, ‘굿이브닝!’,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평화~.”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어제 2023년 속장, 여선교회장을 모시고 저녁을 먹었다.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몇 가지 제안을 받았다.
속회 조직을 할 때 완전히 섞어보자. 카드를 만들어 뒤집어 배정하는 것이다.
부부도 나누어 보자. 개인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남자 속장도 잘 할 수 있으니, 도전해 보자. 몇몇 이름도 거명되었다.
매월 첫 주일 가족예배는 밥을 하지 말고, 김밥을 일괄 구입하여 속별 모임을 활성화하자. 밥도 안 하고 모임도 자주 갖는 일거삼득이 될 것이다.
수요기도회를 상반기는 속별로 주관하고, 하반기는 선교회 별로 주관하자.
훨씬 재미있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나는 대부분을 받아들일 생각이 들었다. 이제 여러분의 의지가 중요하다.
나는 평소 ‘작은 창조자’(c-minor)라는 의식을 갖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소소하지만 작은 창조를 하는 일이다.
나는 광대한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지휘에 따라 오케스트라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은 나를 그런 작은 창조자로서 내 삶에서, 내가 하는 일에서, 내가 관계하는 사람들 가운데 기쁨을 창조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더불어 선한 일에 참여하면서 창조세계 안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주요한 특징이 언제부턴가 ‘홀로’가 되었다. 유행어를 꼽아 보았다. ‘나 혼자 산다, 각자도생, 혼족, 더치페이, 혼밥, 혼여족(혼자 여행), 솔플러(혼자 게임), 그리고 1인가족, 고독사’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창조질서를 벗어나 각자도생, 홀로 던져진 고립감은 얼마나 뼈저릴까? 그날그날을 버텨내는 사람들의 마음은 소금밭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적극적인 균형과 조화가 필요하다. 더 많은 선한 역할이 필요하다. 그럴 때 세상은 잿빛이나, 어둠만은 아니게 된다.
선한 사람들 때문에 세상은 균형을 잡는다. 힘들어도 위로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다. 균형추가 되는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한다. 그것이 작은 창조자의 삶이며, 창조세계를 연주하는 행복이다.
지난 화요일에 박경희 권사님 장례를 잘 마쳤다. 여차하면 한국에 아무런 가족이 없어 그저 행정절차로서 무연고장례를 치룰 뻔 하였다. 그날 장례식에 온 이들이 “교회가 참 좋은 곳이다”라고 한마디씩 하였다.
창세기는 말한다. 우주 만물과 인간과 ‘나’는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다. 내 존재와 내 삶의 목적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로 인해 나는 삶의 의미를 똑똑히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무신론, 과학 만능, 쾌락, 물질주의, 욕망에 둘러싸여 삶의 진정한 의미를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희망 사항과 달리 자주 혼돈에 빠진다. 흑암에 묻힌다. 공허를 피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아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의 힘으로 구원의 빛을 던져 주실 수 있다. 태초에 창조하신 하나님은 지금 너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한다. 하루와 평생, 그 은총의 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 지혜롭다.
창세기는 나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부름받았음을 선언한다. 나는 창조세계를 누리며, 자유롭고 조화있게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연주하도록 부름받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삶을 사는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그 좋음을 회복하는 일이다.
내 삶이 지금 어둡다면 하나님의 빛을 구하라. 마음이 그늘졌다면 하나님의 빛을 구하라. 내 심령이 캄캄하다면 하나님의 빛을 구하라.
하나님이 혼돈과 공허, 흑암의 세상에 대해 “빛이 있으라”(3)고 말씀하셨듯이, 새해에 여러분의 삶에 ‘빛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빛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영원한 생명, 풍성한 생명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