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사 구 신도비 내용
공의 이름은 행(幸)인데 본래는 김(金)씨이니 신라왕과 동성(同姓)이었다. 신라 말엽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을 지켰는데, 견훤(甄萱)이 신라에 들어와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전복시킬 때 고려(高麗) 태조가 구원에 나서 군 북쪽 병산(甁山)에 주둔하여 견훤군과 전투를 할 때 공께서 김·장 양공과 함께 꾀하기를, “우리들은 의리상 견훤과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서는 원수를 갚을 수 없으니 차라리 왕공에게 힘을 보태어 이 역적을 함께 섬멸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라 하여 드디어 고을 사람들과 고려 태조를 도와 ‘병산대첩(甁山大捷)’을 얻게 되어 의로운 소리를 크게 떨쳤다.
이에 고려 태조는 기뻐하여 “김행이 미기(微幾)를 밝게 살펴 권도(權道)에 통달하였으니 권도에 능한 사람이라 하겠다.”하며 이어서 권(權)으로 성(姓)을 하사하고 대상(大相)을 제수하며, 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켜 식읍(食邑)으로 봉하고 품계는 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태사(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太師)라 하였다. 돌아가심에 안동부의 서쪽 천등산(天燈山) 조화곡(造火谷) 남향(南向)에 장사지냈다.
아들은 인행(仁幸)이니 낭중(郎中)이고, 아들 책(冊)을 낳았다. 책(冊)은 본부의 향리가 되어 몇 세대동안 동안 호장이나 장교가 되었다. 처음에 호걸들이 각 고을을 나누어 점령하고 있었는데 고려 태조가 그들을 모두 통합하고 그 땅을 지키게 하였는데, 그 장민자(長民者 백성의 웃어른)를 호장이라 칭하고 군사를 통솔하는 이를 장교(將校)라 하였으며, 중앙의 관원을 보내 감독하였으니 이것이 외리(外吏 외관직)의 효시였다. 그 뒤에 자손이 더욱 번창해져 높은 벼슬아치가 나오고 세상의 흠모가 대대로 이어졌으니 부(府)에 사당을 지어 공을 향사할 때 김공과 장공도 함께 모시되 권씨 후손들이 제사(祭祀) 일을 주관했다.
묘(廟)에는 옥퉁소 · 옥관자 · 조복 · 금대 · 상아홀 · 은 밥그릇 · 시저 · 칠한 잔 · 받침대 등이 있으니 모두 우리 태사공이 사용하시던 물건이었다. 지금까지 700여년을 대대로 전해온 손때가 아직도 완연하다.
성화(成化) 연간에 18세손 평창군사(平昌郡事) 옹(雍)이 정성을 다해 찾다가 묘 곁에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봉문을 가토(加土)하고 표송(標松)을 심었다. 유언에 따라 같은 언덕에 부장하였고 옹의 아들 유(裕) · 작(綽) 등이 비를 세워 표지하였다. 만력(萬曆) 무자년(1588년)에 22세손 판서 극지(剋智)가 경상감사로 와서 종인들과 모여 제사를 올리고 묘비가 망가진 것을 새 돌로 다시 세웠다.
가정(嘉靖) 임인년(1542년)에 외손 김광철(金光轍)이 부사가 되어 사당터를 넓혀 새로 지었고, 21세손 영의정 철(轍)이 관찰사가 되었을 때 제전(祭田)과 묘직(墓直)을 두었다. 병진년(1556년)에 부사(府使) 소(紹)가 제전을 더 사고 곡식 100석을 공급하여 권씨 성을 가진 이방으로 하여금 그것을 관장케 하여 제수(祭需)에 보태도록 하며 또 묘역을 수축하여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올리게 했다. 계해년(1563년) 부사 응정(應挺)이 묘정(廟庭)에 비를 세웠으며, 만력(萬曆) 계축년(1623년)에 24세손 길천군(吉川君) 반(盼)이 관찰사가 되어 사당을 중수하고 춘 · 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최근의 계사년(1653년)에 관찰사 우(堣)가 묘소 아래다 재사(齋舍)를 처음으로 건립하고 몇 집이서 수호케 했다. 기해년(1659년)에 영천(榮川)군수 성원(聖源)이 사당에 참배하고 성묘한 뒤 개연히 말하기를, “자손이 비록 많지만 전에 평창공이 아니시면 뉘라서 태사공의 묘소가 여기에 있는 줄 알았겠는가. 당연히 신도비를 세워야 할텐데 비명을 짓고 세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 태사공으로서 비석이 아직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 아닌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일을 성취하자”고 하니 모두들 쾌히 동조했다.
무릇 후손이 원근(遠近) 귀천(貴賤)의 구분이 없이 모두 와서 돌을 다듬을 때에 부사 이연은 곧 나의 외손이라 그 일을 주관하였는데 성원 및 종인(宗人)들이 내게 그 일을 기록하라 위촉했다.
아! 우리 시조가 신라 말 고려 초를 당하여 대의가 드러나고 공열이 탁월함은 사람들이 모두 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서, 이름이 하늘과 땅과 더불어 빛나서 전후로 방백 수령이 성손이 아니면 외손들이라 모두 묘사(廟祀)와 묘소 일에 진력해서 창설하고 보수하며 여기에 사는 후손들이 전곡(錢穀)을 맡아서 제사를 끊임없이 받들며 이제 또 산소 앞에 비석을 세워서 천만년 뒤라도 모두가 태사공의 묘소임을 알게 하였으니 또한 가히 적덕(積德)의 갸륵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산의 무덤은 제일 위가 태사공이고, 두 번째가 평창공이며, 세 번째는 평창공의 부인 무덤이라 하며, 그 아래에 서애(西厓) 정승 류성룡(柳成龍)의 부친 묘소가 있으니 또한 외손이 된다. 드디어 명(銘)하여 이르기를,
힘을 자랑하고 절의에 통달하고 원수를 갚아 부끄러움을 씻었습니다.
어진 마음으로 백성을 건졌으니 경사로움이 후인에게 미쳤도다
고려 태조가 성을 하사하고 군을 승격하고 봉하여 내려주셨다네
공덕이 매우 높으시니 어찌 덕을 갚지 않으리까
날아갈듯한 사당이 있어서 공경한 마음으로 제사를 올리나이다
손때가 묻은 유물로 금대와 옥피리가 있도다
누가 제사를 주장하는가 부중에 사는 후손들이라네
교체하여 관장을 삼가 대마다 전해 감을 게을리 말지어다
토지가 있고 곡물이 있으며, 재실이 있고 비석이 있으며
여러분들이 계승하여 창설하고 중수함에 결함이 없어
공덕 새긴 비석을 세우니 또한 더불어 영광되도다
영세토록 상고됨이 있을테니 내가 잡된 말을 한 것이 아니로세.”
24세손 한성부우윤 권시(權諰) 찬
외예 이조참의 이경휘(李慶徽) 서
외예 사헌부장령 허목(許穆) 전
숭정(崇禎) 신축년(1661년) 9월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