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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사무실에서 사랑채 쪽을 바라본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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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 눈길 끄는 공간 경영
청송의 송소고택(松韶古宅)에서 1박을 한 것은 추석연휴를 이틀 앞둔 10월 2일, 아내와 만난 지 10년째 되는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송소고택에 도착한 시간은 청송에서 늦은 점심 겸 이른 저녁으로 쌈밥을 먹고 해가 기울 무렵이었습니다.
마당에 들어서자 군불 때는 냄새가 고택에 가득하였습니다. 곳곳의 굴뚝에서 솟아나는 연기를 보니 "보아라, 황혼의 저물녘 저 대숲머리 잠기는 저녁 연기들"로 시작하는 송수권 시인의 시 <저녁 연기>가 생각납니다.
마당 한쪽 나무의자에 앉아 잠시 나무 타는 냄새를 맡았습니다. 사람도 꽤나 후각이 발달한 동물이어서 후각이 아로새겨놓은 몇 십 년 전의 저녁연기 냄새를 금세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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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사랑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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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 홈페이지 소개에 의하면 송소고택은 "조선 영조 때 만석(萬石)의 부(富)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호박골에서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지었다고 전하는 것으로, 188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대문은 솟을 대문에 홍살을 설치하였으며, 큰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주인이 거처하는 곳입니다. 우측에는 작은 사랑이 있고, 그 뒤로 안채가 있습니다. 안채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세살문 위에 빗살무늬의 교창을 달았습니다.
송소고택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건물에 독립된 마당이 있으며,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등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공간을 적절한 칸으로 나누고, 분할한 공간을 휘돌아갈 수 있게 배치하여 서로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서 대면하는 공간은 적절하게 가리면서도 틔워놓은 공간 경영이 눈길을 끕니다.
실수로 놓고 온 카메라 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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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지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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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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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낀 뒷산의 울창한 수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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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송소고택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합니다. 그러나 실수로 카메라를 집에 놓고 오는 바람에 어느 것 하나, 어느 한 풍경 찍어가지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이 때로는 다행으로 반전하고, 그러한 경험은 실수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행운이 되기도 합니다.
평상에 앉아 사과를 깎아 먹으며 적당한 한기가 몸을 감싸오는 것을 느리게 느끼는 맛, 고개를 들어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목이 아프도록 쳐다보는 재미, 간혹 멀리 도로의 차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가을 풀벌레 소리가 대신 채워주는 그 조용한 공간, 동이 틀 때 창호지 문을 다 열어놓고 누워 맡는 새벽 공기, 그리고 햇볕이 드는 큰사랑채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시간은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속에 찍어갈 수 있는 것들이었고,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아 다행스러워한 이유입니다.
물론 카메라 렌즈를 들이댈 만한 곳은 집안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새벽 가을안개에 감싸인 참나무와 대나무 울창한 뒷산, 빨갛게 익은 감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조금씩 흔들리는 장면, 동살이 비치는 창호지문, 시간의 흔적이 서린 문고리, 기와지붕 너머 살짝 드러나는 홍시 몇 개가 달린 감나무 가지 끝, 아침 햇볕이 드는 사랑채 마루 앞에 엎드린 어미개 껌껌이, 마당 한가운데의 동산과 동산을 감싼 헛담, 꽃담과 후원, 아궁이와 굴뚝과 연가(煙家), 담장 너머로 불빛이 비쳐 나오는 별채의 문살과 솟을대문, 마루 끝에 앉은 여치와 잠자리. 이러한 것들을 모두 카메라에 다 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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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채로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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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 그러나 카메라로 다 담지 못할 것도 많고, 오히려 카메라에 담으려다가 놓치고 마는 것들도 있지 않습니까. 눈과 귀에 담고 몸으로 느껴, 그리하여 오랫동안 몸속에 남겨둘 수 있으면 그것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설사 그러한 생각이 자기위안이라 할지라도, 그것조차 괜찮은 듯싶습니다.
불편함 대신 얻는 즐거움과 새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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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 사이로 보이는 안채 뒤의 장독대와 후원 담장 너머의 뒷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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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고택에서의 숙박은 화장실과 세면장이 집 안에 들어있는 도시생활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견 불편해볼 수도 있고, 사실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편함도 조금만 겪어보면 익숙해지고, 불편함을 통해 새로움을 얻기도 합니다.
불편하기, 느리기, 가만히 있기, TV 보지 않기…. 그러면 결국 동반자와의 대화나 자신을 바라보는 일 같은 것들이 남게 됩니다. 아내와 많은 얘기를 나눈 것 같기도 하고, 평소와 비슷한 정도로 대화한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저도 아내도 한결 여유로워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송소고택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은 안채와 별채 사이 후원의 빈 공간이었습니다. 늙은 감나무 한 주만이 가운데 서있는 곳. 그냥 빈 공간으로만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좋았습니다. 채움이 일상을 지배하는 도시인의 눈으로 보기 때문만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그 잎 진 늙은 감나무 아래서 감나무를 오래 쳐다보았습니다. 흔히 수동적이고 일의 방법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를 두고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린다고 말하곤 합니다. 실재로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는 그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면 딱 맞을 지점에 서서 입을 벌리고 한참을 있었습니다. 그런 쓸데없는 짓도 여기에서는 왠지 의미 있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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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하늘과 감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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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 개인적인 아쉬움이 있기는 합니다. 고택의 규모가 크다보니 일일이 손길이 다 닿지 못하는 곳도 있고, 아늑함이 적은 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고택의 큰 규모에서 비롯된 것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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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을 지키는 어미개 껌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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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소고택 | 그렇다고 아쉬움이 고택에서 얻는 신선함을 감소시키지는 않습니다.
이 가을, 한 번쯤은 색다른 시간을 가져보길 권합니다. 익숙해 있던 일상과 잠시 떨어져 조금은 불편하고, 조금은 생소한 장소에서 소중한 사람, 혹은 자신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송소고택 안채 기둥에는 입춘을 맞아 써 붙여 두었던 듯싶은 입춘서 '掃地黃金出(소지황금출 : 땅을 쓸면 황금이 나온다)'이 아직도 붙어 있습니다. 아침을 먹으러 안채로 들어가면서 한 번 읽고, 밥을 먹고 나오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어디 '땅을 쓰는 일'에서만 황금이 나올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택에서 자신의 안쪽을 쓸어보는 것도 황금을 얻는 것 못지않게 괜찮은 일 같아 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