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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과 호칭
1,성경
출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출3:15 !h;r:b]a' yhela> !k,%yteboa} yhela> hw:hy] laer:c]yI ynEB] Ala, rJm'ato AhKo hv,%mo Ala, !yhila> d/[ rm,aY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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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전적 의미
1) 이름(!ve : 이름 name) 이름 name™…(명남)은 '이름 name'을 의미한다.
이 단어의 확실한 어원은 아직 입증되지 않고 있지만 오늘날에는 스미스(W. R. Smith, Kinship, 213)가 내놓은 견해가
몇몇 학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스미스의 주장에 따르면 !ve은 '표를 하다' to mark 혹은 '...에 소인을 찍다' brand를 뜻하는 아랍어 어근 !ve에서
유래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 사람들도 고유한 개인적 이름들의 중요성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삼상25:25)
2) 의 웃음을 상기시킨 것이다(창17:17, 18:12).
야곱은 발꿈치를 잡는다(창25:26, 이스라엘).
참조: 창2:19 이하의 동물에 대하여 아담의 주권. 삼하12:28에서는 한 성에 대하여,
시49:11에서는 땅에 대하여, 여자들은 남자의 이름을 칭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그의 소유가 되고 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사4:1).
별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자로서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시다(시147:4).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르시고 그를 자기의 소유로 만드셨다(사43:1, 63:19)
이름을 변경하는 것도 이름의 중요성을 증거 하는 것이다(창41:45, 왕하23:34).
여호와께서도 어떤 사람의 이름을 변경시키면서 자신이 선택하신 자들에게 현재 처해진 환경,
혹은 미래를 위하여 새로운 중요성을 부여하셨다.
예컨대 아브람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인 아브라함이 된다(창17:5).
야곱은 이스라엘이 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과 겨루었기 때문이다(창32:28).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이름은 그 이름의 실제 소유자보다 훨씬 더 중요성을 지닌다(창48:20).
예루살렘은 말세에 새 이름을 받는다(사62:2). 새 예루살렘으로
이사야는 자신의 자녀에게 상징적 이름을 주었으며(사7:3, 8:3),
구원을 전하는 자들의 이름들은 여호와의 은혜의 증거이다(사7:14, 슥6:12).
구약에 인격적인 이름이라는 개념에는 종종 존재, 성격, 평판의 개념이 포함된다(삼상25:25).
…의 복수형은 종종 '사람들'persons이라고 번역된다(명수 민1:2, 18, 20, 3:40, 43, 26:55)
"이름을 제하여 버리다"는 말은 그 사람 자체를 없앤다는 말과 같다(신7:24, 삼상24:21)
이름을 개명하는 경우
종종 아이가 어떤 인물로 성장해 주었으면 하는 부모의 소원이나 기대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야곱이 이스라엘로 개명한 경우가 있다(창35:10). (W. C. Kaiser)
(b) ① 여호와의 이름이 가장 의의가 깊다. 친히 그 이름을 계시로 알리셨다(창17:1, 출3:14).
성경 계시의 가장 기본적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도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적인 이름을 가지셨고 그 이름에 의하여 그를 부를 수 있으며 또 불러야 한다.
3.여호와께 호소할 때 가까이 오셔서 약속을 지키신다.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출20:24, 민6:24)
제사장들 레위인들 심지어 왕까지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다(민6:27, 신10:8, 삼하6:18).
여호와의 이름은 인격적 통치와 활동의 강력한 표현이다(레18:21, 시7:17, 암2:7, 미5:4).
여호와께서 인간과 접하시는 면이 그의 이름이며, 이름으로써 여호와는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스라엘은 그 이름을 거룩케 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것은 예배 의식, 희생 제사, 기도, 축복과 저주 또한 거룩한 전쟁(시29:8)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다른 신의 예배 의식에 참예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힘을 뜻한다(레19:21)
이름으로 예루살렘(렘25:29), 성전(렘7:10), 언약궤(삼하6:2)를 통해 신성화의 유일한 기초다.
②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와 관계 하였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여호와 자신은 하늘에 거하시지만 그러나 그는 땅에 그의 "이름"이 거할 한 장소를 선택하셨다.
(신12:11, 14:23, 삼하7:13, 왕상3:2, 5:17).
성전이 더럽혀질 그러한 경우라도 하나님의 초월성은 보존된다(여호와께서 두꺼운 흑암 중에 거하신다고 표현한
왕상8:12과, 여호와의 이름이 성전에 거한다고 언급한 왕상8:14)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주권성을 지닌다.
③ 결과적으로 여호와의 이름은 그 자체의 능력있고 독립된 존재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의 이름은 여호와 그 자신과 여전히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자신의 어떤 본질에 거의 가깝다(시54:1, 89:24, 118:10 이하).
④ 여호와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야훼로 발음되며 구약성경의 이름에 관한 신학의 주제이다
야훼라는 이름이 창세기에서 거의 150회 가량 나온다.
이와 동일한 사상이 출3:13에서도 암시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의문사 마(무엇)는 어떤 사람의 신분(성질)을 묻는 것이고, 반면에 미(누구 who)는 단지 신원(정체) 만을 묻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는 것을 의미한다(시22:22).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할 수 있다.그러나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한다(미4:5).
여호와(hw:hy])라는 호칭은 이름이기도하지만 그분의 성품이나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의 법궤는 그것은 장차 오실 성육신하신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삼위일체를 완전하게 계시하기 위하여
우리 주 여호와께서 준비하신 것이다.(W. C. Kaiser)
4,많이 불러야한다.
유대인들 특 교회 지도자들의 실수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되었었다.
1) 랍비들의 권위
랍비들의 권위의식 때문이었다. 교권주의와 제사장들의 권위의식이었다.
부르지도 못하게 우매 정치를 했던 것이다. 부르지도 않고 어떻게 교육이 되겠는가?
2) 많이 부르고 자주 불러야한다.
레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마치 예수 즉 여호수아의 이름은 결과적으로 누구의 이름인가?
이름은 부르라고 있는 것을 알지를 못했었다.(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다)
작성자 / 한원식
하나님의 이름 - 여호와와 야훼,
한글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번역했습니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에 약 7,000번 등장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은 YHWH(יהוה)입니다
많은 현대 번역본들이 보편적인 방식은 유대교 전통(신성한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는 관습)을 따라 YHWH를 주(Lord)로 번역합니다.
영어 성경(NIV,KJV,NASB)이 LORD(대문자 표기)로 표기하고 한국 개역성경은 여호와,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주로 번역했습니다
70인역 성경을 사용하는 정교회, 프랑스, 스페인, 독일도 주로 표기합니다
여호와와 야훼는 히브리어 자음 4글자(YHWH)에 모음을 붙여 발음하는 방식입니다
여호와 (Jehovah) 표기는 개역개정 성경, 1611년 킹제임스 성경(KJV), 스페인어 레이나 발레라 성경 등입니다
야훼 (Yahweh) 표기는 공동번역, 가톨릭, 프랑스어 예루살렘 성경 등에서 사용합니다
일반적인 명칭인 하나님(God)으로 번역하거나, 히브리어 엘로힘과 혼용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있는데 영어의 일부 번역본과 인도에서 사용합니다
YHWH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유일신 하나님의 고유 이름으로,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나다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호와 이름과 스스로 있는 자는 둘 다 모세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장: 하나님 이름의 사전적 정의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3:14)
I AM who I AM, אֶֽהְיֶ֖ה אֲשֶׁ֣ר אֶֽהְיֶ֖ה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출애굽기 6장: 하나님의 공식 성함으로 "내 이름은 여호와/야훼다"
"나는 여호와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출 6:2~3)
3장 14절과 6장 2절은 모두 YHWH(יהוה)입니다
두 장 모두 같은 존재가 같은 이름을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2. 여호와와 야훼 중 더 정확한 발음?
유대인들은 십계명 중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에 따라, 성경을 읽을 때 YHWH가 나오면 발음하지 않고 주님을 뜻하는 아도나이(Adonai)로 바꾸어 읽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네 개의 자음인 יהוה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신성 4문자(Tetragrammaton)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며, 각 글자의 명칭과 발음 기호(자음)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י (요드, Y/J)
② ה (헤, H)
③ ו (바브/와우, V/W)
④ ה (헤, H)
고대 히브리어 성경 사본에는 모음 기호가 없이 자음 יהוה만 적혀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원 : 12~13세기경, 학자들이 히브리어 자음 YHWH에 아도나이의 모음(a-o-a)을 결합하여 읽으면서 Yehowah(여호와)라는 인위적이고 혼합한 발음이 탄생했고, 이것이 라틴어, 영어 등을 거쳐 한국 성경에 정착되었습니다.
야훼가 더 정확한 이유
학계의 동의 : 고고학적 자료와 언어학적 연구 결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YHWH의 원래 발음이 야훼(Yahweh)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또는 야훼로 표기하는 것은 번역의 차이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야훼가 실제 고대 발음에 더 가깝다고 보고 있으나, 여호와는 오랜 전통 속에서 고유명사로 굳어져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나 야훼 이름을 선택하거나 발음을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고, 하나님 아버지로 부르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아버지로 가르쳐 주셨고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데오스,Θεός, God)으로 표기되었습니다.
3. 그 손을 보라, 그 못을 보라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인 YHWH(יהוה)를 구성하는 고대 히브리어 상형문자(알파벳)의 개별 의미를 연결하면 "그 손을 보라, 그 못을 보라"는 뜻이 됩니다.
각 철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 Y (Yod, י) : 손(Hand)을 의미합니다.
● H (Hey, ה) : 보라(Behold), 창문, 드러내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W (Vav, ו) : 못(Nail), 갈고리, 연결을 의미합니다.
● H (Hey, ה) : 다시 한번 보라(Behold)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네 글자를 조합하면 "손을 보라(Y-H), 못을 보라(W-H)"가 되며,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는 예언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4. 구약에서 YHWH(여호와, 야훼)는 성부 하나님인가? 성육신 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가? 둘 다인가?
① 삼위일체 하나님
구약의 여호와는 기본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을 모두 포함하는 단일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고유 명칭으로 봅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전체를 가리킵니다.
② 성부 하나님이라는 관점
전통적인 예배나 일반적인 인식 속에서 여호와는 성부 하나님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신약 저자들은 구약의 여호와를 성부로, 예수님을 주(Lord, 아도나이)로 묘사하며 위격을 구분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③ 성육신 전 그리스도라는 관점
많은 정통 신학자들과 교부들은 구약에 나타난 여호와의 현현 중 상당수가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 보이지 않는 하나님 :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한복음 1:18)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모세나 아브라함을 만난 여호와는,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제2위격인 성자(예수 그리스도)라는 해석이 우세합니다.
또 육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만 보았고 사도요한은 보석처럼 빛나는 빛으로 보았습니다
● 여호와의 사자 : 구약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경배를 받거나 스스로를 하나님과 동일시할 때, 이를 성육신 전의 예수님으로 봅니다.
요약하자면
전체적 의미는 여호와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뜻합니다.
기독론적 의미는 구약에서 인간에게 직접 나타나 행동하시는 여호와는 성육신 전의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됩니다.
위격적 의미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도 널리 통용됩니다.
"두 분 다"로 볼 수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면서 동시에 사역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기도 합니다.
5. 여호와의 사자
구약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천사(사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는 견해는 매우 강력한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그리스도는 천사가 아니다"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히브리서 1장의 기록처럼 예수님이 피조물인 일반 천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 본체 이심을 수호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와 명확히 구분되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다음은 여호와의 사자가 그리스도라는 증거입니다
● 하나님과 자신을 동일시함
일반 천사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만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직접 1인칭(내가)으로 말합니다.
창세기 16장 하갈에게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 경배를 받음 : 성경에서 일반 천사는 인간의 경배를 거절합니다
하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신발을 벗으라고 하거나(여호수아 5장), 경배의 대상이 됩니다.
●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함 :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사람들은 한결같이 "내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라고 고백합니다 (기드온, 마노아 등)
왜 그리스도인가?
● 중보자적 위치 : 성부는 본래 인간이 볼 수 없는 분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을 계시하고 소통하는 보내는 자(여호와)와 보냄을 받은 자(사자)의 관계는, 신약의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일치합니다.
● 신약의 증언 : 정통 신학에서는 구약의 존재를 성육신 전의 성자로 해석하며,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 8:58)고 하신 말씀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합니다.
● 천사라는 명칭의 오해
히브리어 말라크(Malakh)나 헬라어 앙겔로스(Angelos)는 피조물인 천사라는 종족적 의미보다 보냄을 받은 자(전령)라는 직분적 의미가 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사라는 뜻이 아니라, 성부로부터 보냄을 받은 거룩한 대리자로서 그 직함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는 일반 천사가 아니라 성육신 전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상 매우 타당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 전체를 관통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하는데, 특히 사사기와 스가랴에서의 등장은 그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성자 그리스도)임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사사기의 여호와의 천사는 이스라엘의 심판자이자 구원자입니다
단순히 메시지를 전하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를 행사합니다.
● 보김 사건 (사사기 2:1) :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출애굽을 주도하고 언약을 맺은 주체가 바로 자신(1인칭)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 기드온 (사사기 6장) : 기드온이 제물을 드렸을 때 지팡이 끝에서 불이 나와 제물을 살랐고, 기드온은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며 죽을까 봐 두려워합니다.
● 마노아 (사사기 13장) :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났을 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묻자 "내 이름은 기묘자(Wonderful)니라"라고 답합니다
이는 이사야 9장 6절에서 장차 오실 메시아(예수)를 부르는 칭호와 일치합니다.
스가랴의 여호와 사자는 하늘 성전의 중보자로 묘사합니다
스가랴서의 환상 속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사자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예표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재판(슥 3장) 장면에서 사탄이 대제사장을 고소할 때, 여호와의 사자가 사탄을 꾸짖고 대제사장의 더러운 옷을 벗기며 죄를 사해줍니다
죄를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이 사자는 명백히 성자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5장에 등장한 여호와의 군대 대장도 여호수아가 엎드려 절했을 때 이를 거절하지 않고 오히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셨던 말씀과 똑같습니다.
학자들은 구약의 여호와의 사자를 성육신 전의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합니다.
예수님은 계시록에서 어린 양으로, 복음서에는 인자로,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하는 것은 아버지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칭호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예수의 칭호는 마태복음 4:3, 4:6, 마8:29, 마14:33, 마16:16, 마26:63, 마27:54, 마가복음 3:11, 5:7, 9:7, 15:39, 누가복음1:35, 눅4:41, 눅8:28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마태에 있어서 예수는 그가 출생한 이래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그렇게 선포하고 있다(마3:17)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직접적인 고백은 마14:33과 27:54과 같이 예수에 대한 직접적인 칭호로서 신앙 고백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은 메시야와 동일시되어 불려지기도 하였다(마26:63).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포되는 광경을 볼 수 있으며,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으며(마3:11, 마5:7) 예수는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말 것을 명령하신다.
누가복음에서는 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태어날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 질 것을 말하고 있다(눅1:35). 그리고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마귀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하고 있다(눅4:3).
킹즈베리는 기독론적인 문서인 마태복음 전체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발견해 내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마태의 예수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는 성서 속에서 여러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마태복음 17:1-8에 나오는 예수의 변모에 관하여서 예수의 수세이야기와 비슷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하늘에서 들여오는 음성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즉 마태복음 17:5에서 하나님이 예수를 자기의 유일 무이한 선택된 아들로서 다시 한 번 선포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로서 포도원 비유에서의 농부의 아들을 자기로 알레고리화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소작인들에 의해 결국 성밖에서 죽어야 하는 포도원주인의 아들을 알레고리 적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는 부분을 증거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비교적 역사적-경제적 사실과 많이 부합하는 문서로 간주되는데, 이러한 비유들은 투쟁, 변호, 방어, 공격, 도전 등 주로 논쟁을 위한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서의 모든 비유를 알레고리 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 포도원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 21:33-46은 그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짐작하고 비유를 들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증거로서 삼고 있다. 또한 이 비유는 이사야 5:1-7의 포도밭의 노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즉 이사야의 이 텍스트로부터 가져왔다는 것이다.
오히려 공관복음서안의 이 포도비유가 수정되며(죽은 포도원 주인 아들의 죽는 장소에 따라 복음서마다 다른 것은 편집…수정하는 과정에서 결국 십자가의 고난에 그리스도가 매달리게 될 장소는 성밖이란 점에서, 그렇게 수정…편집되었다는 것)복음서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와는 달리 혼인잔치 비유는 맥락상으로 살펴 볼 때 예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넘어선다. 전자가 십자가 처형을 예견한다면, 후자는 마태복음 28:18 이하에서 제자들이 받는 위대한 사명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마태는 알레고리를 통해 이 비유를 예수에게서 시작해서 마태 자신의 시대에 이르는 구속사에 대한 묘사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비유 중의 왕은 하나님, 그의 아들은 부활하신 예수, 혼인잔치는 메시아 향연, 초대받은 자들은 이스라엘, 종들은 제자들과 교회의 전도사들, 초대에 대한 무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거부,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 것은 교회에 대한 이스라엘의 박해, 군인들의 도시파괴는 예루살렘의 멸망,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차별 없이 초청해 옴은 이방인의 교회영입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심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비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왕의 아들인 혼인 잔치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메시아 향연인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주로 고백적인 배경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의 백부장의 신앙고백은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진술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곧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는 16:16과 대제사장의 질문이 나오는 26:63에서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메시야라는 칭호는 서로 동격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메시야 칭호의 유래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역사적 출처는 모호한 것이다. 예수가 이미 자신을 그렇게 붙였는가 또는 교회가 비로서 이 칭호를 그에게 부여했는가하는 점은 그 칭호가 어디서 유래했으며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물음에서 중요하지 않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출4:22), 그리고 왕으로부터 나타난다. 시편 2:2의 기름 부은자, 7절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이것은 동양적 궁중 문학 양식이다. 물론 유대교는 하나님이 몸으로 낳았다거나 하나님이 성육신한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었다. 구약성서의 왕칭호가 예수에게 이전되었으며, 하나님의 아들이란 의미는 메시야의 의미와 동일하다는 가정이 이 시편귀절에 근거하여 자주 제기된다. 그러나 유대교안에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 칭호들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없다는 사실이 그런 가정을 반영해 준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메시야)란 칭호는 마태복음 1:1, 1:16-18, 마2:4, 마16:16, 11:2, 16:20-21, 마22:42, 마23:10, 마26:63, 26:68, 마27:17, 27:22, 마가복음 8:29, 9:41, 누가복음 2:11, 9:20에 잘 나타나 있다. 마태는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한 차원에서만 사용하지 않았다. 마1:1에서 이 칭호는 한 사람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예수 메시야).마1:18, 마16:21도 같은 경우로 원문상 논란이 있으나 ?예수 메시야?가 정확한 독법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 메시야?라는 칭호가 단순한 이름으로 취급되었다 할지라도 마태복음서에 있어서 이 칭호는 ?예수가 메시야이시다?는 근본적 진리는 늘 함축하여 사용된다.
마태는 기독론적 칭호로서의 메시야란 칭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메시야 그 분은 구약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고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그 오시는 이이시며, 다윗의 왕위를 계승하시는 왕으로 오신 예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시키는 분이며, 하나님의 권위로 사람들에게 구원 또는 심판을 행하시는 분이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 이 메시야라는 칭호를 더 나아가 유대인의 왕,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도 규정지으려 했다. 만약에 메시야란 칭호의 사용이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로 결과되게 되는 것이라면, 예수 메시야의 행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서의 행동이었다는 것과 메시야라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대용어라는 이해가 타당한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한스 콘첼만에 있어서도 그리스도는 메시야라는 칭호이긴(막 8:29)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그리스도란 결합에서 단순히 이름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바울이 단지 형식적인 관사를 사용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 진술은 타당하다. 그런데 그리스도란 의미가 이름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물론 희랍어를 쓰는 세계에서였다. 희랍인들은 메시야 칭호를 이해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구원자의 본질을 다른 칭호와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원 상으로 볼 때 메시야는 민족주의적인 유대교적 종말론에 속한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구약성서에서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본래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인 구원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구원자에 대한 표상들이 융합되어졌다. 즉 초월적인 존재로 고양되어 졌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묵시문학적 문헌의 대부분에서 나타나고 있지 않다.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개념이 침투되어 있는 부분은 이차적 발전단계에 속한다.
인자(人子)
인자(사람의 아들)는 마태복음 8:20, 마9:6, 마10:23, 마11:19, 마12:32, 12:40, 마13:37, 13:41, 마16:13, 16:27-28, 마17:9, 17:12, 17:22, 마19:28, 마20:18, 20:28, 마24:27, 24:30, 24:33, 24:37, 24:39, 24:44, 마25:31, 마26:2, 26:24, 26:45, 26:64, 마가복음 2:10, 2:28, 막8:31, 8:38, 막9:9, 9:12, 9:31, 막10:33, 10:45, 막13:26, 막14:21, 14:41, 14:62, 누가복음 5:24, 6:56, 눅7:34, 눅9:22, 9:26, 9:44, 9:58, 눅11:30, 눅12:8, 12:10, 12:40, 눅17:22, 17:24, 17:26, 17:30, 눅18:8, 18:31-32, 눅19:10, 21:27, 21:36, 눅22:22, 22:48, 22:69, 눅24:7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인자라는 칭호는 마태복음서의 기독론적 칭호들 중 매우 중요한 칭호 중의 하나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이 이론은 도전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칭호는 다른 복음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신이 자신을 지칭하는 칭호로 마태복음서도 사용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그렇게 분명하다 하여도 인자와 관련된 몇 가지 물음들은 아직도 마태복음서 연구가들 사이에 명쾌한 결혼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마태가 사용한 이 용어의 정확한 용법이 무엇인가? 이 용어는 왜 마태복음 8:20 이전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 용어와 하나님의 아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이 칭호가 성격상 대중적인 경우는 진정한 한 기독론적 칭호로 작용하고 그 외에는 고백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의 보충적 역할을 함을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자는 예수의 사역의 세 구별된 국면을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그의 공적 사역과 관계된 것이고, 둘째는 그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과 관련된 것이다, 세째는 그의 재림과 관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가만히 보면은 이러한 인자의 기능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과 상당히 일치되어 나타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가 예수의 재림과 관련하여 거의 사용되지 않은 것처럼, 인자라는 칭호는 소위 예수님의 현지사역과 관련하여서는 그렇게 중요하게 사용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이 인자라는 칭호야말로 마가복음에 있어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합당한 칭호이며, 따라서 아무런 수정이 필요 없는 유일한 칭호란 것이다. 그리고 이 칭호의 뛰어난 점은 마가복음에 있어서 이것이 항상 예수님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되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에 이것은 예수의 자기이해(self-understanding)의 표현인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여러 칭호들 중 인자칭호는 가장 규범적인 것이 되며, 예수께 대한 다른 칭호들을 재해석하여 하나님께 예수님에 정하신 신적 운명이 고난과 죽음이란 것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도 예수를 예수 인자라 칭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인자의 기능이 나사렛 사람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는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가는 예수를 매우 분명하게 다윗적 메시야, 왕, 하나님의 아들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인자는 독자들에게 예수가 누군가를 설명하는데 사용된 흔적이 없다. 그는 인자의 세가지 면을 지상적인 자, 고난받는 자, 묵시적인 자로 이해했다.
주(主)
주라는 칭호는 마태복음 7:21-22, 마8:2, 8:6, 8:8, 8:25, 마9:28, 마14:28, 14:30, 마15:22, 마16:16, 16:22, 마17:4, 17:15, 17:16, 마18:21, 마19:27, 마20:30, 20:33, 마21:3, 21_19, 마24:42, 마25:11, 25:20, 25:22, 25:24, 25:44, 마26:22, 26:33, 26:35, 마가복음 1:17, 8:29, 막10:28, 막11:3, 막14:31, 누가복음 2:11, 눅5:8, 8:24, 8:45, 눅9:33, 9:49, 9:54, 9:61, 눅10:17, 눅11:1, 눅12:41, 눅13:23, 눅17:37, 눅18:28, 18:41, 눅19:8, 19:25, 눅22:33, 22:38, 22:49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이 칭호는 원시교단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도교에로의 이행이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다음 두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이 칭호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언제 그리고 어디서 이 칭호가 그리스도교에로 들어왔는가? 이미 원시교단에서인가? 또는 헬레니즘 교회에서인가? 이미 원시교단이 예수를 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까닭은 maranatha라는 부름은 순수히 묵시문학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이다. 교회는 스스로 고대하는 자로 이해한다. 그에 반하여 헬레니즘 세계에서는 오실자를 기대하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현재 지배하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교단이란 윤곽이 들어 났다. 그 부름은 이제 예수는 주이시다. 이것은 간구가 아니라 환호와 선포이다. 하나님의 아들과 주는 교차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각기 뚜렷이라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아들은 본질이오 주는 아들에게 부여된 지위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를 부를 때에는 주라고 하는 것이다. 신앙은 이 칭호에서 올리워진 자에 대한 관계성의 현재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성서개념과 친밀히 결합돼 있다. 성령은 주의 역사의 현존이다. 주를 부르는 것 자체가 성령에 의해 역사 되는 행위이다.
킹즈베리에 의하면, 마태복음을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은 대개 검증되지 않은 근거들 위에서 마태가 사용하는 주요한 기독론적 칭호는 주 혹은 퀴리오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들어 나는 증거에 따른다면, 이 칭호가 그렇게 두드러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마태는 퀴리오스라는 용어를 적어도 세 가지 수준에서 사용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지닌 분, 다윗의 아들로서의 능력을 지닌 주, 인자의 능력을 지닌 주인 것이다. 마태복음 27:63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퀴리오스라고 부를 때 이 말은 순전히 전통적인 용법, 영어의 Sir와 동의로서 사용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볼 때 이 말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을 지칭한다. 물론 이 말은 예수의 칭호로서 나타나기도 한다.
퀴리오스란 말이 예수를 믿으면서 그에게 나오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나온다는 의미에서 고백적인 칭호이다. 이러한 것의 유일한 예외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에서 저주받는 자들도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마7:21-23, 마25:37) 마태복음에서 퀴리오스라는 칭호는 기독론의 중심적인 칭호가 아니라 오히려 보조적인 칭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 칭호는 그 칭호 자체를 넘어서 보다 명확한 다른 칭호를 암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자손은 마태복음 9:27, 마12:23, 마15:22, 마20:30-31, 마21:9, 21:15, 마22:42, 마가복음 10:47-48, 누가복음 18:38-39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를 보면은 귀신들려서 예수께 나아 오는 자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치유와 관련된 것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다윗의 자손에게는 이런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할 때 호산나하면서,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치는데, 하지만 복음서의 이 구절들을 찾아서 자세히 보면, 그 다음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영향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구절들이 나오는데 이를테면, 이는 누구냐에 대한 반문으로 사람들은 이는 나사렛사람이 아니냐는 구절은 다윗의 자손의 칭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한스 콘첼만에 의하면, 족보는 역사적인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남게 되는데 바로, 마가복음 10:48-소경 바디매오의 외침이다. 마가복음 11:1- 의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 왕국의 도래에 관한 환호가 있다. 이것은 현시 전설 적이다. 한편 마가복음 12:35-17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요한복음 첫 구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윗의 자손인 예수그리스도는 태초 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다. 콘첼만에 의하면, 이 구절들은 교회공동체의 두 단계 그리스도론을 표현해 준다고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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