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음보살의 원력과 상호 / 원빈 스님
'귀의(歸依)'란 결국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코 아무나 믿고 의지하지 않습니다.
감탄하고 칭찬할 만큼 훌륭한 점이 근거가 되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귀의할 수 있는 것이죠.
천수경에서의 '귀의의 대상'인 관세음보살과 무애대비심,
그리고 대비주에는 도대체 어떤 감탄할만한 공덕이 있을까요?
계수문의 첫 구절 '계수관음대비주'는 '귀의의 선언'이었습니다.
다음 구절은 찬탄의 총론격인 '願力洪深相好身'인데,
관세음보살의 자비로운 원력과 이를 원동력으로 장엄된
그의 모습과 능력에 대해 감탄하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구절들은 이 총론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죠.
이 계수문의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약본 천수경의 모본이 되는 '가범달마본 천수경'을 의지해야 합니다.
특히 관세음보살의 인연담은 계수문의 앞부분을 해석하는데,
절대적인 기준이 되기 때문에 먼저 소개합니다.
"제가 생각해 보니 과거 헤아릴 수 없는 아승지 억겁 전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는데, 명호는 '天光王靜住여래'입니다.
이 부처님께서 저를 어여삐 생각하시며 다시 일체중생을 위하여
이 廣大圓滿無碍大悲心陀羅尼를 설하시고,
금색 손으로써 저의 이마를 만지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남자야 너는 마땅히 이 대비심주문을 가지고 미래 세상에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큰 이익을 지어주라” 하셨습니다.
제가 그때 初地에 머물러 있다가 한 번 이 주문을 듣고는
第八地에 올랐습니다.
제가 이때 마음으로 환희하며 곧 서원을 발하기를
‘내가 만일 미래 세상에 능히 일체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한다면,
바로 내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구족되어 지이다.’ 하고
서원을 세우고 나니, 바로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다 구족되었으며,
시방에 대지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며,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이 내 몸과
시방에 끝이 없는 많은 세계에 동시에 광명을 놓아 비추어 주셨습니다.”
광본의 내용을 바탕으로 보자면 넓고 깊은 원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상호를 갖춘 인연은 '내가 만일 미래 세상에
능히 일체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한다면,
바로 내 몸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이 구족되어 지이다.'
이 서원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원이 원동력이 되어서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으로 상징되는
'천수관음'의 위대한 상호가 갖추어진 것이죠.
관음신앙이 인도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는 때는
기원전후로써 대승불교의 시작과 비슷합니다.
대승불교가 시작될 당시에는 사실 대승이라는 표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살승으로 호칭하였다고 하는데요.
이 '보살승'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뿌리는
결국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에서 비롯됩니다.
부처님이 세상을 떠나신 후, 사람들은 자비와 지혜를 갖추신
성인에 대한 그리움이 극에 달합니다.
특히 불자들의 경우 이후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의 대비 속에서
부처님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에 대한 상상을 이어나갔고,
'아미타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키워나갔습니다.
이것이 극에 이르면 ‘수많은 미래 부처님들이 지금 현재도
보살의 모습으로 수행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고,
이는 보리심을 가진 존재가 바로 미래의 '붓다'라는 '보살승 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는 세월동안 부처님은 점점 더 신격화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는 힌두교의 여러 신들과의 비교가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고,
붓다에 대한 그리움이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석가모니불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류 역사에서는
더 이상 부처님을 육안으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분명 “진리를 보는 자는 붓다를 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부처님의 육신은 볼 수 없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붓다를 볼 수 있다는 '법신불 사상'의 씨앗이 됩니다.
부처님이 여러 천신들과 비교했을 때, 더욱 훌륭했던 점은
육신이 아니라 바로 '정신'입니다. 그의 정신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탈을 불러오는 '법보'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불멸 이후 더 이상 육신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붓다는
그의 위대한 정신인 진리와 가르침을 통해 힌두의 신들과의
우위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붓다 정신의 신격화의 과정이죠.
물론 이러한 정신 VS 육신이라는 주제는 불교 내부에서는
또 다른 논쟁으로 이어집니다.
부파불교의 대표격인 '설일체유부'에서는 물질과 정신 중
물질을 중요시 여깁니다.
하지만 대승불교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정신을 중요시 여기는
'唯心사상'이 발전하죠.
그렇기에 관음신앙이 발전하기 시작되는 기원전후에는
정신과 육신의 중요도에 대한 논쟁은 중요한 이슈였습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부처님의 색신을 중요시 여겨 32상 80종호를
붓다의 특징으로 강조합니다.
하지만 대승불교 극초기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에서는
32상 80종호의 특징으로는 붓다를 구분할 수 없음을 강조하죠.
왜냐하면 이 색신의 특징은 '전륜성왕'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결국 붓다의 특징은 깨달음인 '반야의 정신'에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개인에서 붓다라는 명호를 증득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32상 80종호의 색신 때문인가요?
아니면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가르침 때문인가요?
한국불교에서는 [금강경]의 이 구절로 아마 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
만약 색신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삿된 도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결코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또한 초기불교에서도 “진리를 보는 자는 붓다를 보는 것이다.”라며
공통된 의견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교를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붓다께서는 중생들이 신심을 가지게 되는 원인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진리를 보고 신심을 가지는 중생들은 적고, 붓다의 상호와 위의 그리고 목소리를 듣고,
신심을 가지는 중생들은 매우 많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러니 육신 VS 정신의 무엇이 더욱 중요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둘 다 중요한 것이고,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천수경]에서도 이는 그대로 적용되는데 '원력홍심상호신'의 본문을
이 육신과 정신의 관점으로 본다면
“관세음보살은 아름다운 육신과 위대한 정신을 갖추셨다!”는 찬탄의 의미로써
상호와 서원 모두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고,
또한 상호간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천수경]에 의지해서 공부하는 수행자들은 이처럼 육신 또는 정신 하나에 치우치기보다는
이 둘 모두를 위대하고 아름답게 장엄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비로소 천수행자 개개인이 관세음보살처럼 아름다운 상호와
무애대비심의 위대한 정신을 닮아갈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원빈 스님 / 불교인문학 '꼬리에 꼬리를 무는 천수경' 中
출처 : 봉은사랑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