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 박물관 뒷편에 있는 주산 능선을 돌며 고분군을 보고 하산하여 대표로 전시해 놓은 왕릉 순장묘 내부를 관람했다. 대가야읍 지산리에 있는 가야 유물 전시관이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 무덤인 지산리 제44호분의 내부를 재현해 놓은 전문 전시관이다. 건물 형태는 무덤의 모양처럼 직경 37m, 높이 16m 규모의 초대형 돔 형식 구조로 지어져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그 외에는 매점, 수장고 등이 있다. 대가야왕릉전시관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의 모습대로 재현해 놓았다. 관람객들이 실물크기로 만든 모형 지산동 44호분 속에 직접 들어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 등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전시관 내부 중앙에는 발굴 당시의 돌방구조를 그대로 둔 채 발굴 보고서를 토대로 출토 유물과 남아있는 인굴 등을 복제해 넣어 두었다. 전시관 내부 벽체에는 대가야의 사인물을 전시하고 관련 영상물을 앉아 관람할 수 있게 해두었다. 그리고 벽을 따라 진열장에는 지산동 고분군 출토 유물 130여 점을 비롯하여 다른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무구·관·장신구 등의 유물을 전시해 두었다. 또한 입구에는 컴퓨터를 설치하여 관람객들이 대가야의 역사와 순장, 지산동 44호분의 구조, 출토 유물 등 관련 정보를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게 해 놓았다.
순장묘殉葬墓는 왕이나 귀족이 사망했을 때 살아있는 아내와 자식, 그리고 그에 따른 하인들, 가축까지 죽여서 함께 묻은 무덤이다. 그렇게 매장하는 장례 행위를 순장이라 한다. 사람을 죽여서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 집단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고대 세계에서 널리 성행한 풍습이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계세사상(繼世思想)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행한 것이다. 이승에서 누렸던 권력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기막힌 이야기를 들으며 소름 돋는 순장묘를 돌아보았다. 삼국시대 고령 지역에서 발견된 순장이 이루어진 무덤이다.
대가야의 순장은 주인공의 묘실인 주실 외에 별도의 순장 곽을 따로 마련해 순장자를 매장하는 방식으로, 순장 곽이 1기뿐인 단곽 순장과 2기 이상인 다곽 순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 순장곽식 순장 방식이다. 단곽 순장 묘라도 순장 곽뿐 아니라 주실의 주인공 발치나 머리맡에도 순장자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순장은 고령, 합천, 함양 등 대가야 지역에 주로 분포하고 있는데, 특히 다곽식 순장묘는 지금까지 예로는 대가야의 중심지인 고령 지산동 고분군에만 분포하고 있다.
지산동 44호분은 주산성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능선의 정상부에 위치한 5기의 고총 고분 중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해 있으며,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1977년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고분의 내부는 한 봉분 안에 여러 기의 석곽이 배치된 순장묘로 확인되었다. 중앙에는 주석실, 남·서석실 등 3기의 석실과 그 주위로 32기의 순장 석곽이 배치된 구조를 하고 있었다. 32기나 되는 순장 석곽들은 무질서하게 배치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무리를 이루면서 일정한 규칙성을 갖고 배치되었다. 크게 보면 석실을 중심으로 북쪽에서 서쪽 및 남쪽, 그리고 동남쪽까지 가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봉분의 원주선을 따라서 돌아가며 1~2열로 배치되었으며, 북쪽에서 동쪽 및 동남까지 가는 부분에서는 주석실을 향해 부채살 모양으로 펼쳐진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순장자는 순장 곽에 있는 32인과 주실의 주인공 머리맡과 발치에 각각 1인, 2개의 부실에 1인씩 2인을 합하여 모두 36인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순장자들의 유골은 50대의 남성도 있고, 20대의 여성도 있는가 하면 하나의 순장 곽에 성인 남녀의 머리를 반대로 두고 합장한 것, 10세 정도의 여아만 합장한 것, 성인과 여아를 합장한 것도 있어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의 신분이나 역할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으나 순장자의 유물과 매장 위치를 통해 대체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주실의 순장자는 금제 귀걸이와 유리 구슬 목걸이 등 고급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어 이들은 주피장자인 왕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근신으로 보이며, 부장실의 순장자는 창고지기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순장 곽의 순장자들도 말 재갈과 같은 마구, 낫과 같은 농구, 직조 도구인 방추차, 화살촉·창·칼과 같은 무기 등 가지고 있는 부장품이 각기 달라 마부, 식량 생산인, 직조인, 호위 무사 등의 맡은 직분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산동 45호분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 중 최대 규모인 ‘금림왕릉(錦林王陵)’으로 추정되는 47호분 동남쪽 30m 아래의 급경사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1977년 계명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남향의 급경사면에 위치한 때문인지 봉토의 남북 장축이 동서축보다 약간 길며, 봉토도 정상부는 평탄하고 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봉토의 유실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두 개의 석실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석곽을 원주상으로 배치하고 있다. 내부는 2석실, 11석곽의 다곽식 구조로, 중앙에 석실 2기를 동북에서 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주위에 11기의 석곽을 원형으로 배치하였다. 주피장자 이외에 12인이 순장되어 있었는데, 주실인 1호 석실에 2명, 부실인 2호 석실에 1명이 순장되어 있었으며, 주변의 11개 석곽에서 9인 이상의 순장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1호 석실 내에는 주피장자의 머리와 발치 쪽에 각각 1인이 순장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금제 귀걸이와 경옥제 굽은옥이 달린 유리 목걸이를 착용한 상태였다. 2호 석실은 주로 토기가 부장된 창고와 같은 공간으로, 동북단벽 가까이에 1인이 순장되어 있었다. 2호 석실의 순장자도 1호 석실의 순장자와 동일한 금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처럼 1·2호 석실 안의 피장자가 비교적 화려한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주피장자와 밀접한 관계의 사람으로 추정된다. 주변의 11기의 석곽 중 2호 석곽에서는 40대 남성의 뼈가 나왔으며, 부장품 가운데 쇠도끼와 화살촉 등이 나왔다. 쇠도끼는 위쪽에 뚫린 자루 구멍이 있는데, 이는 생활 연장이 아니라 고구려 안악 3호분의 벽화에 보이는 것과 같은 전투용 도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석곽에 순장된 사람은 주피장자를 보좌한 호위 무사일 가능성이 높으며, 그 외 석곽에 피장된 사람들은 일반민으로 짐작된다.
지산동 30호분은 주산 남동 부분 능선 자락의 끝에 단독으로 위치하는 고총 고분으로, 편년은 5세기 4분의 2분기로 여겨진다. 발굴 조사 결과 주석실 및 부곽이 T자 모양, 순장 곽 3기가 ㄷ자 모양으로 동·남·북쪽에 배치되었음이 확인되었다. 특히 가야 지역 고분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주석실의 바닥 아래에 하부 석곽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출토 유물들은 발형기대·장경호·파수부호·고배 등의 토기류와 철정, 마구류, 무구류, 금동관 등 다양하다. 금동관은 주석실이 아니라 2호 석곽에서 두개골 편과 함께 출토되어 피장자가 금동관을 쓴 채 매장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해설사와 함께 설명을 들으며 왕릉 순장묘 전시관을 돌아보고 나왔다. 내가 타고 온 한국시인협회 버스는 2호차였다. 간사는 말하기를 고령 박물관에서 탐방후 시를 제출하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귀가하여 시 한 편씩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면 고령군에서 시집을 엮어 자료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순장묘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상전을 위해 죽어간 사람들의 영혼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주고 싶어서다. 귀가하여 그 다음날 [대가야 순장묘]라는 시를 써서 한국시인협회에 보앴다.
대가야 순장묘 / 김윤자
그날 저승길로
같이 가자 할 때
한번 마음껏 울어는 봤는지
아니 가겠다고 뒹굴어는 봤는지
못다 한 목숨을
어찌 놓고 여기 왔는지
그 동안 암흑 세상에서
무엇을 꿈꾸며 견뎌 왔는지
이제 무덤 사이로 빛이 들어왔으니
권력에 눈먼 영령들에게
이승으로 다시 보내달라고
애원은 해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