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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최 찬 식
인천 팔미도 넓고 넓은 물결은 호호망망하여 하늘과 한빛이오 월미도 등대 너머로 너울너울 넘어가는 햇발은 분홍 놀을 아울러서 일본공원(지금의 자유공원. 인천광역시 중구 소재) 일폭을 연지빛 같이 물들였는데, 그 놀빛 비치는 곳 기념각 난간머리에 정신을 잃고 시름없이 서서 늦은 조수 밀어오는 곳에 살 같이 들어오는 기선을 바라보고 눈썹을 찡그리며 한숨을 쉬는 부인은, 구름 같은 히사시가미(앞머리를 풍성하게 쑥 내밀게 빗고 뒷머리는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에 사쿠라색 리본을 새뜻하게 꽂고 보라·회색 겹저고리에 생삼팔 옥색치마를 단정하게 입었는데, 나이는 열팔구 세쯤 되고, 백옥 같은 용모와 청수한 미목은 가히 근대 일색이라 할 만하나 얼굴에 수색이 가득하여 무심히 해색만 바라보는 모양이, 정녕 깊고 깊은 가슴 속에 무한한 근심이 첩첩이 쌓인 듯하더라.
그 부인이 그와 같이 서서 해천을 바라다가 수건을 들어 눈물을 씻으며 그 옆에 사람이 있어도 들릴락말락하게 조용조용 하는 말이,
“사람이 장래에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살아 있는 것을 어찌 영광이라 하리요 우리 남편은 비록 나를 버리지 아니하나 다시 만날 기약은 묘연하고 나는 몸에 병이 들어 회생할 기망이 없을 듯하니, 이같이 가련한 신세는 일찍이 조처하니만 같지 못하도다. 우리 친어머니께는 지극한 불효가 되나, 내가 지금 부모의 혈육을 버리는지두에 어찌 불효를 말하겠느냐.”
하더니 누구에게 그런 끔찍한 편지를 보내려는지 품에서 종이를 내어들고 오른손 무명지를 깨뜨려 만단설화를 혈서로 써서 봉투에 넣고 단단히 봉한 후 다시 연필을 내어 피봉을 써가지고 분수탑 앞으로 걸어 나와 천천히 공원 문밖으로 향하는데, 이때 사람의 자취는 끊어져 사면이 요요적적하고 다만 무정한 낙화가 봄바람에 불려 분분한 향기를 어지러이 날릴 뿐이더라.
그 부인이 공원 문밖을 나서더니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화개동(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의 일제강점기 명칭.) 고개를 넘어서서 시키시마(敷島. 일제강점기 현재의 인천광역시 중구 신흥동에 있었던 유곽의 이름으로, 바닷가가 바로 근처에 있었다.) 아래끝 공허허무인한 해안 저문 연기 깊은 곳에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선다.
때는 하오 일곱 시 반이라. 그리 영롱하던 놀빛은 검은 구름으로 변하더니, 천지는 어둑어둑하여 지척의 사람도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충청도 남단으로 막막무제한 수로에 희미한 해색만 훤―할 뿐인데, 그 부인은 무슨 마음으로 그곳까지 왔던지 아무 말 없이 남천을 바라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만 쉬다가 입속에서 가만가만히 스스로 탄식하는 말이,
“나는 우리 모친이 금옥 같이 기르고 우리 남편이 보화 같이 사랑하던 경자(瓊子) 아닌가 경자야 너는 세상에 나서 아무 죄도 아니 지었거든, 오늘날 신세가 어찌하여 이 지경이냐. 슬프다 가련한 경자여, 가슴에 맺힌 원한을 누가 알 자 있으리요! 우리 남편이 나를 이별할 때에 일본공원 분수탑 옆에서 간절히 부탁하기를, ‘부디 내 생각 말고 부모 봉양이나 잘하며, 사오 년만 지내면 내가 동경가서 좋은 공부 많이 하고 나와서 우리 내외 자동차 타고 이런 공원으로 산보 다닙시다’ 하더니, 그 말 하던 우리 남편은 내가 오늘날 고기 배에 장사 지내는줄을 어찌 알리요! 에라, 그런 생각 다하여 쓸데없다. 이 몸이 저 물에 빠져 태평양 넓은 물결에 둥실둥실 떠가서 동경 품천 해변에 다다라 가슴에 새겨둔 우리 남편을 보리라”
하고 다시 돌아서서 북향재배하며,
“천고불효 경자는 우리 어머님께 만수무강하심을 축수하읍나이다.”
말을 마치고 손을 들어 피눈물을 뿌리며 무변대해 만경창파에 떨어지니, 그 부인은 무슨 원한이 있어 그 지경까지 하는지 모르거니와 놀란 파도는 애매한 원앙의 꿈을 깨어 푸드득 날아갈 뿐이요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월미도 등대의 불빛은 경경 시끼시마 일산루의 사미센 소리는 쟁쟁, 동천에 돋는 달은 교교한 광휘를 일본공원 팔판루(인천신사 경내에 1889년 창업한 요정을 겸한 여관. 처음에는 수명루라 했지만 청일전쟁 후 팔판루라 개칭했다.) 앞에 날리더라.
“이애가 웬일인걔 이애가 웬일이야? 우리 경자가 어디를 가서 아니 오나? 공원에 산보하러 간다더니 여기도 아니 오고 어디를 갔단 말인가? 에그 참 괴상도 하다.”
한 걱정을 하며 이맛전에 땀을 뻘뻘 흘리고 얼굴이 선앵도빛이 되어 팔판루 앞으로 갈팡질팡하는 사람은 나이 오십여 세쯤 된 부인이라 일본공원 일폭을 샅샅이 찾아 돌아다니며,
“경자야―!”
불러도 보았다가, 팔판루 요릿집에서 여중(女中[죠취] 하녀나 식트 여관·요릿집 등의 여종업원을 가리키는 일본어)이 나오면,
“에그 네가 경자냐?”
헛소리를 하였다가 미친 사람 같이 허둥지둥하다가 나중에는 진력을 하여 운동틀 앞에 털썩 주저앉으며 넋이 없이 월색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하는 말이,
“이애가 어디를 가면 이렇게 늦어본 적이 없고 또한 어디든지 제 마음대로 가지 아니하더니, 오늘은 이게 웬일인고? 암만해도 무슨 변이 있는 게야. 몸도 성치 못한 것이 이렇게 늦게 아니올 리가 있나. 그사이 집으로 돌아왔는가 어서 가 보겠다.”
하더니 벌떡 일어서서 지팡이를 질질 끌며 공원 문밖을 나서더니, 용동통 큰길로 해서 축현정거장(경인전철 동인천역의 일제강점기 명칭)을 향하고 부리나케 가다가 정거장을 지내놓고 만석동 막바지 조그마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는데, 그 부인은 다른 사람이 아니오 곧 경자의 친모라. 깊고 깊은 용궁으로 소문 없이 들어간 경자를 아무리 애를 쓰고 찾은들 어찌 얻어볼 수 있으리오 가련하도다, 그 부인의 정형이여! 그 부인은 본래 한미한 농민 정씨의 아내로서 그 남편과 부평 요류동서 살며 농업을 힘써 그럭저럭 생활을 하느라니, 빈궁한 가계를 면하기 어려워 세상에 사는 재미는 아무것도 없으나 슬하에서 웃고 재롱하는 딸 경자가 있어 내외의 마음을 위로하는 고로 그 딸을 사랑하며 내외 화목하게 지내더니, 경자 다섯 살 먹던 해 봄에 불행히 천붕지통을 당하여 외로운 신세를 의지할 곳이 없을뿐더러, 고아·과부의 가련한 생명을 능히 보전할 도리가 망연한 고로, 인천항구가 살기 좋다는 말을 듣고 경자를 데리고 인천항에 가서 남의 집 곁방을 얻어들고 밤이면 바느질품을 판다, 낮이면 해관에 나가 헤어진 곡식을 줍는다, 늙도 젊도 아니한 여자가 못할 일 없이 부지런히 하여 겨우겨우 연명을 하여가며 한푼 두푼 모이는 돈은 신용 있는 실업가에게 맡겨 취리하여 주기를 부탁하니, 성심소도에 금석을 가투라고 그와 같이 근검하고서야 어찌 좋은 성적이 없으리오. 그 모양으로 오륙 년을 지내고 보니 형세가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시는 해관에 나가 헤어진 곡식을 아니 주워도 먹을 것이 앞에 있고, 개미 금탑 모으듯 한푼 두푼 모은 돈이 돈 천 원이 되었는지라. 그제야 비로소 남의 집 곁방을 하직하고 만석동 산 밑에 조그마한초가집을 사서 살림을 차리니 가세는 오히려 그 남편 살아 있을 때보다 백배나 나은 고로 부인은 그 남편 생각을 하고 항상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그 딸 경자를 보옥 같이 기르는데, 시대는 차차 문명한 지경으로 나아가 내외하던 여자도 장옷을 벗고 큰길로 나가며,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하나둘 해마다 늘더니, 딸둔 집에서는 으레 여학교에 보낼 줄로 생각하여 비록 여자일지라도 학문이 없으면 세상에 용납지 못할 줄로 아는 시대로 점점 변천하자, 경자의 나이 십여 세가 되어 학교에 다닐 연령이 되었는지라 부인 생각에, ‘시대가 이와 같이 변천을 하니 옛날 풍속을 지켜 딸자식을 안방에 가두어두었다가는 자식의 신세를 그릇하는 지경에 이르리니, 우리 경자는 아무쪼록 공부를 시켜 조선 여자계에 모범이 되게 하리라.’
하고 경자 열두 살 먹던 해 춘기에 여학교에 입학을 시켰더라.
경자는 비단 인물만 미묘할 뿐 아니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온순하고 재기가 과인하여 부모를 효도로 섬기며 침선을 부지런히 공부하매 열 살 되던 해에는 침공이 능란하여 십첩 병풍 목단화 수를 놓아 삼십 원을 받고 팔아본 일까지 있는 고로 보는 사람마다 칭송을 한다. 서울 같이 번화하고 안목 높은 천지에서도 그러한 아이가 있으면 사람마다 놀랄 만한 일이어든, 인천 같이 무무(貿貿. 교양이 없어 말과 행동이 서투르고 무식함)한 곳에서 그런 신재를 보고 어찌 하품 아니할 자 있으리요.
경자가 그와 같은 재화로 학교에 입학을 하매 그 과공은 문일지십하는 성적을 얻어 시험마다 우등이요, 학기마다 진급을 하여 경인간에 여학생계에 성예가 자자하니, 이때는 그 모친의 은근한 심중에 한 가지 근심이 생겼는데, 그 근심은 다른 근심이 아니오,
‘인물이 절묘한 우리 딸 경자, 재화가 비범한 우리 딸 경자, 저러한 인물과 저러한 재화가 있는 우리 경자를 어느 곳에 가서 저와 같은 사위를 구하여 시집을 보낼꼬 여자의 일평생 신세는 전혀 남편을 잘 만나고 못 만나는데 있거늘, 만일 결혼을 한 번 잘못할지면 자식에게 못할 노릇을 함이니 무슨 방법으로 사위 재목을 구하리오’
하여 태산 같은 근심이 가슴에 가득하여 자나 깨나 그 생각 아니 날 때가 없이 지내는 중, 무정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여 경자의 나이 어언간 십칠 세가 되니, 그 해는 경자가 여자고등과 졸업을 할 시기라 그 모친의 근심은 더욱 깊어서 일시를 민망히 여기는데, 하루는 경자가 학교로부터 집으로 돌아올 길에 공교히 서울서 내려온 보성전문학교 학생의 원족회 일행과 마주쳐서 여자의 부끄러워하는 성질로 머리를 숙이고 지나가는데, 경자의 팔자가 잘되려고 그리하였든지 못되려고 그리하였든지 그 원족회 일행 중에 경자의 용모를 알고 유심히 여겨보는 학생이 있었더라.
그 학생은 서울 계동 사는 황참서의 아들이요 이름은 대성(大成)이라. 그 학생 역시 기질이 헌앙하고 재주가 충분하여 나이 십팔 세에 벌써 고등과 졸업을 하고 법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장차 법률대가가 되기를 자기하는 유지인데, 나이 성년에 이르러 차차 혼기가 되어오매 그 부모는 혼처를 광구한다. 그 부친 황참서의 위인은 원래 완고 인물일 뿐 아니오 투미하기가 짝이 없는 고로 시대가 어찌 되는 세상인지 내두사를 어찌하면 잘 될는지 전연히 알지 못하고 다만 고집불통의 완만한 심지를 굳게 지켜 그 아들의 혼처를 구하되, 그 신부의 학문 여하는 묻지 않고 지체나 자기와 같고 형세는 과히 빈한치 아니하여, 신부가 시집올 때에 혼수나 굉장히 하여가지고 올 만한 곳을 구하여 결혼코자 하므로 통혼하는 곳은 모두 신식에 몽매하고 구습을 고수하는 집뿐이라. 그런 집에서 생장한 처녀로 대성이와 결혼할 것 같으면 이는 봉황에게 닭을 짝하는 양이라 어찌 될 수 있는 일이리오 대성의 뜻은 그와 정반대가 되어 자기의 배필을 구할 것 같으면 문벌이나 신분은 헤아릴 것 없고 다만 신부의 학문이 섬족하고 지식이 충분하여 가히 조선 여자계에 모범되고 스승이 될 만한 신부를 구하여 배필을 삼고 일반 여자계를 개량함에 섭력코자 하는 사상이라. 그런고로 그 부모가 통혼하는 눈치를 보면 그 모친께 간곡히 말하기를,
“사람의 조혼하는 폐해는 제일 무서운 것이올시다. 저는 아직 장가드는 것이 온당치 않사오니, 공부나 다하고 지식이 충분하여 가히 가족을 어거할 만한 때를 기다려 성혼코자 하온즉, 어머님은 아버지께 그런 말씀을 하시와 아직 혼처를 구하기 말게 하여주시오”
하며 누누이 설명하나, 그 부모는 어린아이의 철없는 말로 돌리고 사면에 매파를 놓아 혼처를 광구하더라.
조선 사람의 혼인하는 풍속은 결코 선량한 법이라 하기 어려우니, 대저 혼인이라 하는 것은 삼강에 으뜸 되는 인륜대사일 뿐 아니라, 부부되는 그 사람의 일평생 길흉영욕이 대수롭지 못한 맞절 한 번에 달렸은즉, 그 맞절 한 번이 얼마쯤 어려운 일이며, 얼마쯤 삼가서 할 것이리오 사람이 일평생을 지내자면 절이라 하는 것을 몇 천 번 몇 만 번을 하는지 모르지마는, 초례청에서 신랑신부가 맞절하는 그 절 한 번은 참 하기 어려운 절이라 그 절 한 번을 하자면 불가불 조심에 조심을 더하고, 주의에 주의를 더하여 특별히 삼가지 아니하면 될 수 없는 일이어늘, 조선에서 자래로 혼인하는 습관이 어떠하냐 하면, 비록 삼가고 주의치 아니하는 바는 아니나, 혹 아들이나 딸이나 귀한 줄만 생각하는 자들은 대가리에 피도 아니 마르고 입에서 젖내가 나는 어린 것들을 조혼하기가 일쑤요, 또 한 신랑은 신부가 어찌 생겼는지, 신부는 신랑이 어찌 생겼는지 전연히 모르고 백년의 고락을 같이할 중대한 언약을 일조에 맺나니, 그런고로 저간에 불화한 내외가 비일비재하여 내소박을 하느니 외소박을 하느니 금보다 아까운 일생을 처량 강개하게 지내는 폐단이 열이면 아홉이나 되는 것이라.
그러하므로 황대성의 주견은 어떠하냐 하면, 그와 같이 자래로 관습이 되어 내려오는 부모의 명령적 결혼을 타파하고 장차 부부될 신랑신부의 공화적 결혼을 창도하는 자의 효시가 되어 차차 풍속을 개량하고, 차후로는 부부간에 소박이니 이혼이니 하는 문제가 절대적 없도록 하고자 함이 자기 의견에 대체되는 목적이오 그 다음에는 자기 일개인의 사정으로 장가를 들면, 결코 조선인의 관습적 교육을 받아 밥이나 짓고 옷이나 꿰매고 아이나 낳고 건넌방이나 지켜줄 신부는 인물이 양귀비라도 싫고, 자기 입에서 학문적 담화가 나오면 가히 수작 한 마디 할 만하고, 연회에서 청첩이 오면 가히 동부인해서 참예할 만하고, 자기 없는 사이에 집에 손님이 오면 가히 응접실에 나가 접대할 만한 신부와 내외되지 아니하면 당초에 장가를 들지 아니하여 일평생 답답한 꼴이나 보지 아니하리라 하는 주견이라. 그러나 부모가 그리하는 것을 어찌할 수 없어 근심이 태산 같은 중, 하루는 학교에 다녀와서 안방에를 들어가 본즉 자기 모친 앞에 어떤 노파 하나가 앉아서,
“그러면 신부 댁에 가서 어서 청단을 하라고 할 터이니 기별만 오거든 속히 사주를 보내게 하십시오. 에그, 그렇게 어려운 것 처음 보았습니다.”
하는 수작이 자기 혼사가 성립된 모양이라 별안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여전히 말 한 마디를 하고 싶으나 당장에 그리할 수는 없어 참고 또 참고 돌아서 옷을 벗어 거는데, 그 노파가 언제 한 번이나 본 듯이,
“새서방님 학교에 다녀오셨소?”
하며 정답게 인사를 하더니 제출물에 하는 말로,
“새서방님이 저렇게 얌전하시니까 신부아씨도 그렇게 얌전하시지. 키가 작달막한 것이 참 얌전하시지. 아마 새서방님보다 이마 하나는 작을 걸이요 유복하신 댁에는 할 수 없어. 할멈이 애는 쓰지 마는 우연히 그런 좋은 혼처가 나섰단 말이야. 여보 새서방님, 한턱하오. 하하하”
하며 무엇이 좋아서 양양자득한다. 대성이는 그러지 아니하여도 부모의 하시는 일은 할 수 없고, 애매한 매파들 드나드는 것이 어찌 미운지 못 견딜 판인데, 그 말을 들으매 속마음에 공연히 씸증이 나서 심히 불쾌하게 대답이 나온다.
“한턱이 무슨 한턱이란 말인가? 자네가 내게 턱 받아먹을 일이 무엇 있어?”
노파 “턱이 무슨 턱이야 어여쁜 색시 얻어주는 턱이지. 여보, 그런데 늙은이더러 하게를 하신단 말이오. 댁 마님께서는 하게를 하실지언정 서방님이야 하게를 해서 쓰겠소? 중매한 생각을 하면 절을 해야 옳지.”
그 모친은 그 노파의 말을 듣고,
“아서라, 어린아이들이 늙은이보고 보고 왜 하대를 한단 말이냐.”
하며 대단히 나무라나 대성이는 미운 마음에서 나온 말이라. 그 모친의 말씀은 못 들은 체하고 노파를 대하여,
“그렇지, 옳은 말이야. 중매를 잘하면 물론 절이라도 할 것이지. 그렇지만 자네는 혼인중매를 잘못하니깐 내게 하대나 들을 수밖에 없어.”
노파가 그 말을 듣더니 깜짝 놀라며,
“에그 도섭스러라. 그게 웬말이오. 왜 혼처가 어때서 그래? 첫째, 양반이 좋아, 가세가 넉넉해, 신부가 얌전해, 그에서 더 좋은 혼처를 어디 가서 구하란 말이야? 여기도 할멈의 비단신 세 켤레가 다 떨어지고 겨우 중매를 하였는데.”
대성 “글쎄, 할멈의 안목으로는 더 고를 수 없지. 그렇지만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는 것이야 어찌하나?”
노파 “원 별말이 다 많소구려. 알지도 못하고 딴소리를 왜 하시오? 어찌 알고 마음에 맞느니 아니 맞느니 하오? 어서 하게나 고만하고 고맙거든 그저 고맙다고 하오 세 살부터 무당질해야 목뜩이란 귀신은 못 보았다괴 내가 혼인중매는 꽤 웬만치 하였소만 새서방님 같은 신랑은 처음 보겠소 그래, 서방님은 어떤 신부가 마음에 맞겠소?”
대성 “그건 알아서 무엇하려나?”
노파 “서방님 소원대로 중매해 드리지.”
대성 “나는 양반도 싫고”
노파 “또?”
대성 “신부의 집 부자도 쓸데없고”
노파 “또?”
대성 “신부의 인물도 볼 것 없고”
노파 “에그 망측해라. 별소리를 다 듣겠네. 처갓집 가문이 흐릿하면 남의 조소는 어찌하며, 처갓집이 가난해서 대접을 잘못 받으면 무슨 재미며, 신부의 인물이 박색이면 평생을 두고 보기 싫어 어찌한단 말이오. 그러면 무엇을 취한단 말이야?”
대성 “내가 취하는 바는 자네가 알지 못하리. 나는 신부의 인물은 어찌되었든지 머리에 북상투나 찌고 가슴 속에 진주 같은 학문이 서너 말 들지 아니한 신부하고는 결혼하지 아니할 터이야 자네는 그런 줄 알고 어서 가게.”
노파 “하하하, 신부가 북상투가 웬일이야요? 저댁 새아씨는 칠보족두리에 진주 많이 박았습디디, 하하! 여자의 학문이 별수 있습니까? 언문이나 똑똑히 하고, 인사체면이나 알고, 음식솜씨나 좋고, 바느질 얌전히 하면 고만이지. 글을 너무 잘해도 지레시어서 남편 업신여겨 보기만 하지 쓸데가 무엇이요? 두말 말고 좋거든 속마음으로만 좋다고 하오 학문 있는 신부가 마음에 맞는다니, 문장은 소동파요. 명필이 왕희지를 겸하신 신부래야 쓰겠소구려, 하하하! 그렇지만 꽃 같은 새아씨를 데려다놓고 보아 그때는 할멈 고마운 생각이 저절로 날 터이니.”
대성 “글쎄, 그럴 듯도 하겠네. 그만두고 어서 가서 자네 볼일이나 보게. 그러나 자네 집이 어딘가?”
노파 “그렇지, 이때 하신 말은 모두 장난의 말씀이요 할멈의 집을 물을 때에는 내가 큰 수나 나는 건데, 나는 아무것도 싫소 우리 집은 새문안 정자동 일통 일호이니 쌀이나 댓 섬 보내주, 하하!”
대성 “주다마다 내 마음 맞는 혼처만 구해주면 쌀 아니라 금이라도 주지.”
하고 사랑으로 나갔더라. 이때 대성의 생각에 그 말 몇 마디 하였다고 노파가 그 혼인중매 아니할 리 없고, 부모가 역시 파의할 리가 만무한즉, 실없이 성가신 일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 노파 가기를 기다려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그 모친을 보고 간절히 묻기를,
“어머니, 아까 그 노파가 말하던 혼처는 어떠한 데오니까?”
하매 그 모친은 빙글빙글 웃으며,
“그것은 알아 무엇하니? 부모 되어 설마 범연한 곳에 혼인하겠느냐?”
하는지라, 대성이는 그 말에 더욱 기가 막혀서 다시는 말 한 마디 못하고 눈살을 찌그리고 섰는데, 그 모친이 다시 하는 말이,
“아무 염려마라. 혼처는 매우 가합하더라 벽동 김 과장집어라면 그 문벌을 누가 모를 사람이 있느냐. 그 부자를 누가 모를 사람이 있느냐, 신부의 인물도 나무랄 데 없고, 침선이라든지 행검(점잖고 바른 몸가짐)은 그 집 가정교훈이 있으니까 물론 얌전할 것이니, 그만하면 혼인하지 별수 있느냐? 신랑 놈이 공연히 건방지게 하지 마라. 아까 노파를 대해서 그게 무슨 당치 못한 말을 횡설수설하느냐? 아서라, 다시 그리하지 마라.”
대성 “아―, 신부집 양반이나 가세가 혼인에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저는 도시 알 수가 없는 말입디다. 바로 신부의 행검이 있다는 것은 가히 취할 만합니다마는 전 세상 말이지, 지금이야 양반이란 것은 무엇에 쓰는 것이오니까? 그리고 김 과장집으로 말하면, 완고로 유명한 집인 줄 누가 모릅니까. 그 집은 전일 양반 생각만 하고 세상 형편이 어찌되는지 꿈을 깨지 못하여 아들 조카를 학교에도 아니 보내는 집이올시다. 그 집 딸이 옛 규모를 지켜서 졸직한 행
검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법 학문이라든지 가정 정리하는 법을 알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저더러 건방지다고 하시니, 지금 세상에는 비록 여자일망정 학문이 없으면 일가정을 어거치 못하고 남편의 보필되기 어려우니, 그런 여자를 데려놓고 답답하여 어찌 본단 말씀이오니까? 그리하고 또한 제가 아직 공부를 다하기 전에 혼인을 하는 것이 결코 불필요하오니 아직 참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며 명기불연한 말을 하매 그 모친은 코로도 듣지 않고,
“너는 아무 말 말고 부모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어. 아버지께서 그런 말을 들으시면 꾸지람하셔.”
하고 냉소를 하는지라. 가만히 서서 생각한즉, 부모가 하는 대로 순종을 하여 그 신부와 결혼을 하자 하니 자기의 목적한 바가 모두 와해될 뿐 아니라 실상 일평생을 아무 재미없이 지내게 되겠고, 부모의 명령을 거역하여 그 신부와 결혼을 아니하자 하니, 그리하면 자기는 불효가 되고 집안이 불화하여 큰 근심을 부르게 될지라. 어찌할 계책이 없어 가슴이 답답한 중 화증이 왈칵 나서 벗어 걸었던 옷을 다시 떼어 입고 대문 밖을 홱― 나서니, 이때는 양춘 삼월이라. 열었던 버드나무는 가지가지 황금실이요 도화이화는 방긋방긋 웃어 영롱한 춘광이 금수강산을 이룬 속에 봄을 희롱하는 새소리는 이곳저곳 관현음이요 바람길을 따라 계동 골짜기로 들어오는 피리 소리는 처량하게 귀뿌리를 긁어서 사람의 회포를 무한히 곤하게 하는데, 아무데도 갈 데는 없고 교동 큰길로 나서서 탑골 파고다공원으로 산보를 갔더라.
공원으로 들어가니 사람은 어찌 많은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나 아는 친구는 한 사람도 없고, 이리저리 혼자 돌아다니기가 너무 무료하여 매다점에 가서 신문 한 장을 사가지고 한편 나무 그늘 밑 의자에 걸터앉아 화증도 잊어버릴 겸 심심파적도 할겸 착심하여 보는데, 그 신문은 무슨 신문이든지 제삼면 잡보란에 여학생의 사진 동판을 놓고, ‘모범적 여학생’이라 이호 활자로 제목을 쓰고, 그 옆에 오호자로 ‘인천 여자고등학교 사년급 정경자’라 하였는지라 그 기사를 자세 보매, 대개 그 여학생의 이력과 숙덕과 과공이 우월함을 지극히 찬양한 기사이라 속마음에 매우 흠앙하여 그 사진을 도려 지갑에 넣고,
‘조선에도 이러한 여학생이 있으니 일반 여자계에 대하여 가히 축하할 바는 장래에 좋은 희망이 있겠도다.’
하는 생각이며, 자기의 혼사 생각이 다시 나서 남모르는 한숨을 쉬고 그곳을 떠나 음악당 옆으로 돌아가자니까, 어떤 노파 한 분이 우산을 걸터 짚고 가장 취미가 있는 듯이 화희를 구경하며 지나가는데 그 얼굴이 여러 번 보던 사람이라 자세히 살펴본즉 그 노파 역시 자기의 혼인사건으로 중매를 하러 다니다가 어찌하여 그랬든지 실패를 당한 사람이라 조선의 매파라 하는 것은 혼인중매로 생애를 하는 인물이니, 만일 가세나 구차치 아니한 집 혼인을 중매할 것 같으면 신랑·신부집에서 귀빈 같이 대접을 하는 고로, 양편으로 다니며 돈 십 원이나 좋이 얻어먹고, 속이 궁하면 가끔 다니며 보채서 돈냥 쌀되 두고두고 울궈먹는 화수분덩이로 아는 것인데, 그 노파는 불행히 실패를 하고 낙망이 된 노파인 고로, 대성이는 그 노파를 만나매 한 가지 의견이 나서 가까이 쫓아가며,
“여보시오 아지머니.”
하고 한 번 불렀다. 그 노파는 누구인지 모르고 흘낏 돌아보다가,
“에그 황참서댁 서방님이시지요? 나는 눈이 무디어서 몰라 뵈었습니다그려. 내남 없이 늙으면 다 그런 게야요 몰라뵈었다고 책망이나 마십시오 그런데 구경오셨습니까?”
하며 친절히 인사를 하는지라.
“아따, 인사가 선후가 있소? 먼저 본 사람이 먼저 인사하는 것이지오. 그러나 요새는 왜 한 번도 아니 왔소?”
노파 “아따, 그 일이 그릇된 뒤에 면난(무안하거나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짐)해서 못 갔습니다. 댁 마님도 안녕하십니까?”
대성 “네, 안녕하시지요― 그런데 그 일이 무슨 일이란 말이요?”
노파 “아따, 서방님은 왜 모르십니까P 서방님 혼사 말씀이야요. 내가 중매를 들다가 여의치 못하였으니 미안해서 다시 갈 수가 있습니까?”
대성 “아지머니가 그 말을 하니 말이요마는, 내 생각에는 아지머니가 중매하던 혼처가 곧 훌륭하던걸 그릇되어 내 마음에 어찌 섭섭합디다. 그런데 새안 정자동 집 없소?”
노파 “있지요 그래서요?”
대성 “아―, 그년의 할멈이 요사이 며칠 다니며 우리 어머님과 수군수군하더니 어디 가서 웬 못된 집과 매개를 해서 거진거진 성사가 되는 모양이요구려.”
노파 “아―, 저를 어찌하나? 어떤 집과 의혼을 합더니까?”
대성 “아따 뉘 집은 알 것 없고 나는 아지머니가 중매하던 곳으로 결혼을 하고 싶으니, 우리 집에 한 번 와서 내 말대로 할 터이요?’,
노파 “그럴 것 같으면 하고말고요 양식 싸짊어지고 다니며 하지요.”
대성 “자―, 그러면 이렇게만 하오”
하고 그 노파의 귀에다 대고 수군수군 두어 마디 한 말이 있더
라
대성이가 그 노파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를 양육하던 유모를 찾아갔다 그 유모는 나이 사십여 세 된 여자인데, 대성이 두 살 먹던 해부터 대성의 유모가 되어 자기 젖을 먹이며 십여 년을 친자손 같이 양육한 고로 저간에 서로 정이 들어서 유모는 대성이를 자기 아들 같이 사랑하고, 대성이는 그 유모를 자기 친모나 다름없이 친절히 하는 사이라 사흘만 서로 못 보면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여 대성이가 아니 가면 유모가 찾아오고, 유모가 아니 오면 대성이가 찾아가서 지극히 정답게 지내는 터인 고로 그 두 사람은 서로 못할 말 없이, 심지어 집안 사정까지라도 의논하는 처지라. 이때 대성이가 그 유모를 찾아가매 유모는 대단히 반가워하며 바느질을 하다 말고 과자를 사다주며 비록 장성한 사람일망정 어린아이 같이 귀하는데, 대성이도 역시 어린아이나 다름없이 과자를 먹으며 언구럭(아픔이나 괴로움 등을 거짓으로 꾸미거나 실제보다 과장하여 나타내는 것)을 부리고, 이런 말 저런 말 온갖 이야기를 하던 끝에 눈살을 찡그리고 불편한 일이 있는 듯이,
“저는 요사이 태산 같은 근심이 있습니다.”
한 마디 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 한 번을 쉬었더라. 유모는 대성의 모양을 보고 깜짝 놀라며,
“응, 근심이 있어? 네가 근심이 무슨 근심이란 말이야?”
대성 “요사이 제 혼인을 정했다나요”
유모가 그 말을 듣더니 하하 웃으며,
“나는 근심이 있다기에 대단한 걱정이나 생긴 줄 알았지. 혼인을 정했으면 여북 좋아서 근심이 무슨 근심이야?”
하고 다시 웃으며 대성의 근심 있다는 말을 장난의 말로 돌려버리더라.
대성 “그런 게 아니야요 정말 걱정이 생겼어요 혼인은 사람의 경사니까 물론 좋은 일이지요마는, 지금 정혼한 혼처가 아주 흉한 집이야요. 우리 부모는 그런 줄 모르시고 매파의 거짓말을 곧이들어 정혼을 하셨으니, 저를 어찌하면 좋을는지요? 나는 그 집에 흉이 있는 줄을 소상히 알지마는, 부끄러워 말씀은 못 여쭙겠고, 그런 말을 깨쳐드릴 사람은 없은즉 자연히 심중에 근심만 태산 같을 뿐이올시다그려.”
하며 한 걱정을 한다.
유모 “나도 혼사가 거진 성취되는 줄을 대강 짐작한다마는, 그 집에 흉이 무슨 흉이 있단 말이냐? 네가 아는 대로 말을 하면 내가 집에 가서 그런 말을 여쭈마.”
대성 “정녕 여쭈어주시겠소?”
유모 “대단한 흉이 있을 것 같으면 여쭙고말고.”
대성 “또 내가 그런 말을 하더라고 하시게요?”
유모 “아니야 내 말로 할 터이야”
대성 “그러면 내가 하더란 말 마시고 그 집 형편을 분명히 아시는 듯이 이런 말을 좀 여쭈어주셔요”
하며 은근히 수군수군 두어 마디 하고 즉시 집으로 돌아갔더라.
“아이그 내가 이 댁에 와본 지 꽤 오래다. 마님, 그 사이 안녕히 계셨습니까?”
하며 대성의 집 안마당으로 달려드는 사람은 대성이가 공원에서 만나보던 노파이니, 그 노파는 대성의 말을 듣고 무슨 먹을거나 생긴 줄 알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대서는 것이라
대성의 모친은 그 노파 오는 것을 보고,
“에그 자네 참 오래간만일세그려. 그 사이 그렇게 한 번도 아니 온단 말인가? 나는 무엇에 틀린 줄 알았네그려.”
노파 “천만의 말씀도 하십니다. 틀릴 것이 무엇 있습니까? 늙은 것이 어린 자식들하고 벌어먹자니까 소갈데 말갈데 가느라고 자연 댁에를 한 번도 못 왔습니다그려.”
하며 안방으로 들어와 앉더니, 된말 안된말 한참 늘어놓으며 너덕거리고 수선을 떨다가,
“아, 마님, 그러나 잊은 일이 있습니다그려. 혼사 정하신 치하를 미처 못했습니다. 김 과장댁으로 하신다지요?”
부인 “응, 아직 완정은 아니하였네마는, 아마 그리하기가 쉽겠네.”
노파 “아따, 잘 되었습니다. 한 가지 흠이 있어 그렇지, 그만한 혼처도 구하기 어렵습니다. 에그 이렇든 저렇든 마님께서는 한 시름 잊으셨습니다.”
부인이 그 말을 들으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 속마음에 궁금증이 났던지 바싹 채쳐 묻는다.
“한 가지 험이 있어? 그 험이 무슨 험인가?”
노파 “아따, 그것을 알아 무엇하십니까? 들으면 병이요 안 들으면 약이라고, 그런 불긴한 말은 아니 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부인 “그게 무슨 말인가? 험절이 있으면 아는 대로 일러주어야 정답지 아니한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네마는 자네가 그런 말을 아니할 것 같으면 나를 서어하게 생각하는 것일세그려.”
이때 노파는 마지못하여 말하는 듯이,
“에그 제가 경솔히 말씀을 하였습니다그려. 응―, 늙은 것이 입도 경솔하지.”
하고 괴탄하며,
“그 댁은 문벌도 좋고 신부도 얌전하시지마는 한갓 흠이 있어요. 그러나 그런 흠은 요사스러운 댁에서나 기하는(꺼리는) 것이지, 그렇지 아니한 댁에서는 관계할 것 없는 것이올시다.”
이만치만 말하고 자세한 말은 아니한다.
부인 “에그 갑갑해 못견디겠네! 어서 시원히 말 좀 하여주게.”
노파 “제가 공연히 그런 말씀을 하였습니다그려. 그러나 이런 말을 아니 일러드려서는 제 도리에 틀린 사람이 될 터이니까 말씀은 합니다마는, 그저 들으시면 병이야요”
하며 바싹 다가앉으며 가만히 하는 말이,
“그 댁에 무서운 손각시(처녀귀신)가 있답니다.”
부인이 그 말을 듣더니 혀를 홰홰 내두르며,
“그게 정말인가? 그런 줄은 몰랐네그려.”
노파의 하는 말은 모두 대성이가 공원에서 가르쳐준 말이지마는, 노파는 천연덕스럽게 남이 곧이들을 만치 이주걱을 부린다.
“아, 정말이고말고요 제가 언제 거짓말합더닛까? 그 댁 새아씨 형님되시는 아씨도 시집갈 때에 그 독한 손각시가 따라가서 온 집안이 우환으로 들볶다가 끝에는 삼년 안에 과부가 되었지요”
공교히 신부의 형이 과부가 된 일이 있던지 부인이 그 말을 듣더니 진저리를 치며,
“에그 지긋지긋해라 그래서 신부의 형이 과부로구먼. 그런 말을 자네가 아니하였더면 감쪽같이 모를 뻔 하였네그려. 에그 할멈 고마워라”
대저 조선 여자의 어리석은 품은 한량이 없는 것이라 미신적 습관이 뇌에 젖어서 우습고 변변치 못한 말이라도 정녕 그렇게 되는 줄로 생각하여 심지어 비오는 날 머리 빗지 마라. 부모 돌아가신 날 비가 온단다. 조금에 손톱 깍지마라. 평생에 가난을 면치 못한단다’ ―이같이 사소한 말까지라도 확실히 믿고 이행을 하거든, 황차 혼인 같은 대사에 조금이라도 불길하다는 일을 어찌 하며, 더구나 손각시가 따라오면 집안이 망한다는 일을 어찌 감히 하리요? 소위 손각시라 하는 것은 장성한 계집아이가 시집가보지 못하고 죽은 귀신을 이름한 것이라. 그 손각시라 하는 귀신은 생전에 시집 못가본 것이 원혼이 되어서 남의 혼인을 저희하고 경사를 방해하기에 지극히 악독한 귀신이라 하여, 귀신 중에는 제일 무서운 귀신으로 인정하는 것인 고로 누구든지 아들이나 딸의 혼사를 정하려면 제일 되는 문제가, ‘그 집에 손각시나 없느냐?’고 묻는 것인즉, 조선의 우치한 여자는 이것을 제일 꺼리고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라.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듣고 어찌 놀랍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반신반의하여 정녕 그러한가 아니 그러한가 확실히 믿지 못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매파라 하는 인물은 거짓말쟁이로 유명한 것이요. 또한 남이 중매한 혼처는 어디까지든지 험담을 하는 것이 으레 하는 일이라. 그 노파로 말하면 제가 대성의 혼인 중매를 하다가 불여의하여 파의가 된 일이 있은즉, 물론 다른 사람이 중매한 곳을 무한히 험담할 것은 정한 이치라. 그런고로 대성의 모친은 그 말 들은 후에 상말로 똥누고 밑 아니 씻은 것 같이 꺼림칙하여 생각이 여러 가지라 그런데 노파는 그런 말을 귀가 젖도록 하다가 갈 때에 하는 말이,
“그 댁에 그것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마님께서는 그렇게도 모르셨습니까? 아마 새서향님 유모도 대강 알 걸이요 기닿게 할 말 있습니까 그런 곳으로 중매하는 년이 죽일 년이지요”
한 마디를 툭 던져두고 갔는데, 대성의 모친은 소사하기가 이를 것 없는 부인이래 그 말을 들은 후로 일변은 의심이 있고, 일변은 근심이 되어 불가불 그 진가를 알아보아야 혼인을 하든가 아니하든가 일찍이 속시원하게 귀정을 할 터인 고로 장차 탐지를 할 터인데, 그 중 친절하고 믿음직스러운 유모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속하고 위불없을 줄로 생각하였든지 그날 즉시 유모를 불렀더라.
부인이 유모를 불러놓고 묻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곧 그 말이었다.
“자네, 우리 대성이를 김 과장집으로 정혼한 줄 대강 알지?”
유모 “알고말고요 그러지 아니하여도 그 말을 듣고 한 번 오려고 하던 차이올시다.”
부인 “그런데 그 집 소문 더러 들었나?”
유모 “네, 대강 알지요”
부인 “그런데 그 집에 무슨 괴악한 것 있단 말이 옳은 말인가.”
유모가 그 말을 듣고 대성이가 부탁하던 말을 생각하였든지 부인의 말대답을 서슴지 않고 한다.
“글쎄, 그런 말이 있어요 있어도 아주 악독한 것이 있는 걸이요. 그렇기에 그 집 색시는 시집을 가서 길한 사람 없대요. 제가 일전에야 그 말을 듣고 와서 여쭙고자 하다가 자세히 알아보고 올 양으로 이때까지 있었는데, 어제 거짓말 아니할 사람에게 들은즉 과연 그러 합디다그려.”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듣고 별안간 얼굴빛이 변한다. 그 유모는 부인이 신용하는 사람인 고료 유모의 말이라면 부인이 꼭 곧이듣는 터이라 소사한 부인이 미신적 관습이라면 앉은 방석을 옮겨놓치 못하는 터에, 그 말을 듣고서야 어찌 혼인을 할 수가 있으리오. 물론 그 혼사는 동풍에 불려 대서양으로 멀리 갔더라.
부인이 유모의 말을 들은 후에는 그 혼사가 성립되기를 날로 기다리던 마음이 별안간 돌아앉아서 그 남편에게까지 그 집과 혼인 못하겠다는 말을 한지라 그 남편 황참서는 짝이 없이 어리석어서 그 부인이 이리 하자면 이리 하고, 저리 하자면 저리 하는 인물이라. 그런 의논은 하나마나 물론 동의가 된 고로 그 후에 그 혼인 중매한 매파가 신부의 집 청단을 가지고 와서 사주 보내기를 재촉하는 것을, 부인이 개 꾸짖듯 하여 보내ㅛ 마침내 그 혼사를 파의하였더라
대성의 천성은 지극히 정직한 사람이라 비록 남이라도 속일 생각을 아니 두거든 하물며 부모를 속이리요마는, 혼인이라 하는 것은 일평생에 큰 관계가 달린 대사인 고로 사세부득이 부모를 속이고 소원대로 파혼을 하였으나 그것은 장차 발명할 날이 있을 것이요. 심중에 큰 근심이 다시 생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조선 천지에 자기와 배필이 될 만한 여자가 없는 것이라. 이번에는 교묘히 파혼을 시켰거니와, 이다음에 만일 다시 불합의한 신부와 정혼이 될 것 같으면 부모를 두 번째 속이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오. 속절없이 모피치 못할 경우라 그런고로 자기 마음에 충분한 신부는 졸지에 구할 수 없을지언정 심지나 온순하고 공부가 면무식이나 되어 자기 마음에 의지하여 쓸 만한 여자가 있을 것 같으면 즉시 결혼을 하여 다시는 매파가 대문 안에 발 들여 놓는 꼴을 아니 볼 경영이나 졸지에 그러한 신부를 구할 도리가 없어 날마다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반측을 하며 가끔가끔 내어보는 것은 신문지에 게재되었던 인천 정경ㅊH 동판 사진이라. 파고다공원에서 그 사진을 얻어가지고 온 후에 어찌 여러 번 내어보았던지 그 사진을 대성의 눈동자 속에다 다시 사진을 박아서 만일 실지로 정경자를 볼 것 같으면 여러 해 사귄 구면으로 알만치 되었는데, 하루는 학교에서 학도들을 데리고 운동 겸 견학 겸하여 인천으로 원족회를 하는 고로, 대성이도 역시 그 일행에 따라 내려가서 축현 마루터기로 지나다가 기약한 것 같이 정경자를 만나니, 정경자는 대성의 눈에 사진을 박아둔 얼굴이라, 어찌 반갑던지 마음에는 쫓아가서 인사라도 하고 싶으나, 학도의 신분이라 지나가는 여학생을 여러 번 보는 것도 불미한 행동인 고로 눈 바로 보지도 못하고 섭섭히 지나가고 말았으나, 깊고 깊은 속마음에는 은근한 생각이 있었더라.
대성의 심중에 은근한 생각은 다른 생각이 아니라, ‘조선 여자 중에도 저같이 얌전한 여자가 다 있던가? 파고다공원에서 신문기사를 볼 때에도 실상 저러할 줄은 몰랐더니, 실지로 경자의 용모와 태도를 보매 실로 생각하던 바에 지나간다 하겠도다. 근일의 소위 조선 신부인이라 하는 여자들을 보면, 하나도 문명한 지경의 실지를 밟는 자가 없고, 다만 히사시가미에 보석핀이나 꽂고, 손가락에 금반지나 두서넛 끼고, 화려한 의복에 반짝반짝하는 금시곗줄이나 늘여 남자의 눈동자를 현황하게 하는 것으로 성사를 삼을 뿐이라. 그런 여자들의 행위를 말할 것 같으면 지극히 한심한 일이니, 그자들이 겨우 보통과 졸업이나 하였으면 여자대학이나 졸업한 듯이 제 위에는 다시 사람이 없는 줄 알아 자긍하는 마음이 하늘을 뚫을 듯 하고, 날마다 생각하는 바는 연극장 구경이나 다닐 생각 밀매음이나 할 생각, 툭하면 이혼이나 할 생각 이것이 소위 조선의 신부인이라 하는 인물이라. 가로상에 나다니는 거동을 보면 그 경박한 태도가 가히 그 사람의 심장을 엑스광선으로 비추어보는 듯하여 유지자의 탄식을 발하게 하나, 지금 경자는 실로 그런 유가 아니오 가위 조선의 신부인이라 하겠도다. 인물은 취할 바가 아니나 그 미묘한 인물은 가히 근대(近代) 서시(西施)라 할 만하고, 그 온아한 태도는 가히 태임의 후신(太任之後身)이라 하겠도다. 에라, 저 경자가 뉘 집 딸인지 내 좀 알아보리라 학생의 신분으로 남의 집 여자의 뒤를 탐지하는 것은 대단히 불온당한 일이다마는, 나는 원대한 경영이 있어 그리하는 것인즉 덕행에 조금도 관계가 없는 일이라 내가 지금 저 경자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보아서, 만일 벌써 시집을 갔을 것 같으면 하릴없거니와, 다행히 아직 미가 전일 것 같으면.’
하는 생각이라.
이같이 생각한 결과로 경자의 집 내용을 은근히 탐지하여, 경자가 본래 부평 토반(여러 대를 이어서 그 지방에서 붙박이로 사는 양반)의 딸로 만석동 오막살이집 속에서 그 모친을 모시고 생활하는 일과 학업을 힘써 금년 춘기에 여자고등과 졸업까지 하여 일간 졸업장 수여식을 할 터이라는 말이며, 아직 미가 전 처녀인 고로 그 모친은 경자와 같이 인물 좋고 학문 있는 남자를 구하여 사위를 삼고자 노심 중이라는 사정까지 자세히 알고 심중에 매우 기쁜 생각이 있어, 이번 견학여행에 큰 보화나 얻은 듯이 여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즉시 정의상통하는 자기 유모를 찾아갔더라.
대성이가 그 유모의 집은 날마다 가는 터이지마는, 이번에 간 것은 전과 같이 심상한 방문이 아니오. 곧 의논할 일이 있어 간 것이라, 전보다 더욱 정답게 문간에서부터,
“어머니!”
부르고 들어 간다.
“응―, 대성이 오나? 그 사이 인천 갔더라더니 좋은 구경이나 잘하고?”
대성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예, 좋은 구경 많이 했습니다. 구경만 잘 했을 뿐 아니라 겸하여.”
하더니 하던 말을 멈추고 다만 웃기만 할 뿐이라.
유모 “에그 사람도 왜 저리 실없어? 말을 하다 말고 웃기는 웬 일이야? 구경만 잘 할 뿐 아니라 겸하여 웃었던 말인가?”
대성 “하하하, 나는 어머니를 뵈면 좋아서 웃음부터 나오는 걸 어찌합니까? 그러나저러나 어머니, 나 장가 좀 들여주구려.”
유 “에그 별말도 다 하는구나. 친부모께서 어련히 장가들여 주실라구. 나더러 무슨 장가를 들여달라느냐? 그래고저래고 너는 어떤 혼처를 구하는지 모르겠다마는, 일전에 훌륭한 혼처를 네가 발광을 쳐서 파의하고 어떤 혼처에 장가를 들고자 하느냐? 나는 그 집에 손각시가 있는지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네가 지성껏 하라기에 하기는 하였다마는, 나는 아무리 생각하여도 너의 주의를 알 수 없다 너는 소위 학교에도 다니고 신사상이 있다는 사람이 미신의 말을 꺼려서 파혼을 한단 말이냐? 네 생각이 그러한 것이야 어찌하겠느냐마는 내 생각에는 그 혼처를 원통히 파의하였더라.”
대 “아 어머니도 그런 말씀을 하시오? 아 원통하기는 무엇이 원통하여요? 저가 학교에도 다니고 문명한 사상이 있기에 그런 혼처를 파의한 것인데, 어머니는 이때까지 제 속을 모른단 말씀이오. 제가 아무리 못났기로니 손각시를 무서워할 사람이오니까? 정작 시집온다는 산각시가 합당치 못하여 그리한 것이야요.”
유 “그러면 너는 어떤 각시를 합당히 여기느냐?”
대 “그는 저더러 물어볼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생각해 보시오구려. 나같이 학문이 유여하고 문명사상이 있는 사람에게 어떠한 여자가 상당한 배필이 될까.”
유 “그러면 너는 너와 같이 학교를 졸업하고 얼굴을 드러내고 가로상으로 개 싸다니듯 하는 여자가 소원이냐?”
대 “글쎄, 어머니께서 그같이 말씀하셔도 고이치 아니하나 그중에 만일 참된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가히 닭의 무리 속에 봉황이라 할지라. 내 눈에도 얼굴을 드러내고 가로상으로 다니는 여자는 모두 닭의 무리로 뵈더니, 이번에 인천 가서 정말 봉황 하나를 보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힘을 좀 쓰시면 제 목적을 가히 달할 듯해요.”
유 “인천 갔을 때에 네 눈에 가합한 신부를 보았단 말이지? 인천 구석에 무슨 합당한 신부가 있어? 대관절 어떤 사람을 보고 그리하느냐? 화개동 갈보가 흔하다더니, 네가 아마 화개동 갈보를 보고 그러는 게로구나 하하하”
대 “에그 어머니도 나를 그렇게 어림없는 사람으로 여기시오? 갈보 모르고 학생 모를까요?”
유 “아 그 신부가 학생이야?”
대 “예, 여학생이야요 그 신부의 성명은 정경자이요 학업은 올에 고등과 졸업까지 하였다는데, 인물도 그같이 미묘한 인물은 처음 보았,고 행동도 그같이 온아한 여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유 “응―, 정경자, 정경자이면 나도 아는 처녀이지. 그 정경자는 내가 비단 알 뿐이 아니라, 곧 우리 형님의 딸이야”
대성이가 그 말을 듣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며 손을 들어 무릎을 치고 하는 말이,
“아, 정경자가 어머니 형님의 따님이야요? 대체 어머니는 적이 진중도 하시오. 이때까지 형님이 인천서 산다는 말씀을 아니하셨단 말이오? 그럴 것 같으면 장황히 말할 것 없소 지금이라도 차비 드릴 터이니 인천 좀 가시오구려.”
유 “너는 하는 말이 모다 당치 못한 말이다. 나더러 적이 진중하다 하는 말은 정의가 부족하여 형님이 있다는 말을 이때까지 아니 하였는가 해서 하는 말인가 보다마는, 나도 본래 그렇지 아니한 집 딸로 가세가 빈궁하여 나는 네 유보 노릇을 하였고, 우리 형님은 인천서 해관에 헤어진 곡식을 주워 연명을 하는 처지에 그게 무슨 좋은 말이라고 남에게 말하겠느냐? 그러나 그 신부로 말하면, 대단히 얌전한 줄까지도 짐작하는 바이나 너의 친어머님께서는 여학도
라면 대기를 하시는 중, 또한 문벌이 상당치 못한 정경자와 혼인을 하실 리가 있느냐? 내가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이 없으나 만일 그런 말을 냈다가는 성사도 못되고 걱정만 들을 터이니 될 수가 있느냐?”
대 “그렇기에 어머니께 청이지요. 어머니 수단으로 그만 일 하나를 못하신단 말이오? 해보다가 못되는 것이야 어찌하리까. 어머니가 만일 주선을 아니하여 주실 것 같으면 나는 오늘 어머니를 하직하는 날이요”
유모는 그 말을 듣고 눈썹을 찡그리며 입맛을 쩍쩍 다시고 앉았다가,
“너, 그래 그 신부가 마음에 합당하냐?”
대 “그는 두 번 물어보실 것 없어요.”
유 “그러면 되나 안 되나 어디 주선이나 하여보자 안심하고 있거라.”
유모는 이같이 말한 후에 즉시 옷을 갈아입고 문밖을 나서서 허둥지둥 향하는 곳은 곧 대성의 집이라 그 유모가 대성의 집을 가서, 대성의 모친을 뵙고 온갖 이야기하던 끝에, 지금 시대는 차차 문명한 방면으로 변천하여 비록 여자라도 상당한 학문이 없으면 능히 가정을 보전치 못하는 관계며, 대성의 위인은 딴 배포가 있는 사람이라, 아무 지식도 없고 학문도 부족하여 다만 안방이나 지키는 옛적 시대 신부와는 절대적 배필 되기 어렵고, 적이 보통지식과 보통학문이나마 대강 알아서 가히 인류에 참여할 만한 신부라야만 의지하여 부부가 될 것이 대성의 소원이라는 말로 일장 설명을 통창(조리가 분명하고 밝음)하게 하니, 그 유모는 부인이 신용하는 사람일 뿐 아니라 언론이 대단히 정대하고 유리한 고료 부인은 그 말을 그럴 듯이 여겨 듣는지라 유모가 재미있는 말로 부인의 귀를 그만치 울려놓고, 그 이튿날 아침에는 경인선 철도를 타고 인천 만석동 자기 형님의 집을 갔더라,
그 형제는 어려서부터 우애가 자별하게 지내더니, 각각 출가한 후에는 비단 경향이 낙락할 뿐 아니라, 서로 빈한한 살림에 얽매여 잠시를 헤어나지 못하는 고로 서로 만나보기가 지극히 어려워, 십 년에 한 번이나 이십 년에 한 번 겨우 만나보거나 말거나 하는 터이라 여자의 형제라 하는 것은 원래 그러한 법인 고로, 비록 우애가 없는 형제일지라도 오래 그리다가 만나면 자연 반갑고 정답고 눈물 쥐역이나 흘리거든, 하물며 우애 있는 형제가 오래 생각하던 끝에 만난 것이리요! 이때 만석동 막바지 오막살이집에서 경자의 모친과 대성의 유모가 서로 붙들고 울며, 무한한 정회를 말 아니하는 속에 서로 표하는데 그 옆에서,
“아지머니, 안녕히 오셨습니까?”
하고 공손히 인사하는 경자의 일평생 신세를 판단하는 뜻까지 포함되었더라.
그 형제가 그같이 서로 붙들고 울다가 이끌고 방으로 들어가 그 사이 지내던 이야기를 정답게 하는 차에, 경자는 차와 과자를 들고 들어와 공손히 꿇어앉으며 차를 따라 권하는데, 의복은 비록 검소하게 입었으나 그 인물이든지 태도든지 행검이 가히 대성의 천생배필이라 할지라. 유모는 경자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애 경자야 네 나이 올에 몇 살이냐?”
“열여섯 살이올시다.”
“에그 세월이 쉽기도 하다 너 일곱 살 먹었을 때에 내가 한 번 와서 보았는데, 그때가 엊그제 같건마는 네가 벌써 시집을 가게 되었구나.”
하며 그 형님을 돌아보고 하는 말이,
“경자, 어디로 정혼이나 하셨습니까?”
물어보는 것은 차소위 점입가경이라.
형 “그렇게 용이히 정할 수가 있나? 그로해서 큰 걱정일세. 내 자식이랄 것 없이 저만하면 어디다가 내놓든지 과히 흉은 아니 잡힐 터인데, 저와 같은 사위를 구하기가 극난이야. 아우가 어디 중매할 데 있거든 속히 좀 하여주어.”
유 “글쎄, 신랑은 저기 훌륭한 신랑이 있지요마는, 경자의 마음에는 어떠한 신랑을 원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형 “그야 무슨, 경자의 마음인들 우리 마음이나 다를 데가 있겠나? 자네 눈에 가합하면 경자의 눈에도 물론 가합할 것이지, 대관절 신랑 재목이 어떠한 사람인가?”
유 “신랑이야 천생 경자의 배필이지요. 서울 계동 황참서의 아들인데, 기골이 헌앙하고 학문이 유여하며 겸하여 재산이 천석 추수는 되니, 그만하면 부자라고 할만도 하고, 당자의 심지로 말하면 제가 젖을 먹여 기른 사람이니까 자세히 알거니와, 대단히 인후하고 기걸하여 가히 남자라고 할 만한즉 신랑 재목은 훌륭하지요”
형 “응, 그 사람이 자네 젖 먹여 기른 사람이야? 그러면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혼처일세그려. 그렇지만 요새 혼인은 전과 달라 미상불 아까 자네 말한 바와 같이, 신랑신부가 서로 마음에 들지 아니하면 결혼할 수 없는 세태야. 이애 경자야 부끄러워할 것 없이 너가 말해라. 지금 아지머니 말한 곳이 어떠하냐?”
경자는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아니한다.
유 “경자야 너는 장차 조선의 모범될 부인이라. 전일의 옹졸한 풍속을 의지하여 저렇게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다. 너도 물론 짐작하려니와, 혼인이라 하는 것은 평생 관계가 달린 대사인즉, 신랑이 네 마음에 맞지 아니하면 못될 것이오. 네 입으로 허락지 아니하면 안 될 터이니, 너는 조그마한 부끄럼을 거리껴서 중대한 일에 범연히 하지 말고 가합하다든지 불합하다 네가 결정해서 말해라.”
경자가 그 말을 듣고 무한히 생각하다가 앵도 같은 입술을 열어 겨우 대답하는 말이,
“글쎄올시다 아지머니 말씀이 못 미더울 것은 없지마는.”
한 마디 하고 눈썹 위에 홍훈이 둘리며 또다시 아무 말 아니한다. 이때 유모는 경자 말을 알아듣고,
“옳지, 의당히 그러할 일이다. 아지머니 말을 못 믿을 것은 없지마는, 당사자 간에 서로 보지 않고는 못되겠다 하는 말이로구나. 신랑이나 신부나 그야말로 천생연분이다. 신랑도 역시 완고신부는 장가들기 싫고 제 눈으로 보아야만 백년의 중한 언약을 맺겠다 하여 그 부모가 정혼해 준 혼처를 파의까지 하였는데, 너를 어디서 그렇게 여러 번 보았는지 여학생 이야기만 나면 알지도 못하는 네 칭찬이 야단이란다.”
형 “신랑이 저애를 어찌 알고 칭찬을 하나? 아마 신문을 보고 아는 것일세. 저애 말이 신문에 몇 번 났더래.”
유 “아마 그런 게지요………형님, 그러면 저희끼리 한 번 만나보게 합시다. 형님께서 서울 구경도 한 번 못하셨을 터이요. 또한 우리 집도 와보지 못하셨으니 경자 데리고 서울 구경이나 가십시다. 근일은 일기도 화창하고 구경 다니기 대단히 좋아요”
형 “글쎄, 그래보세.”
그 형제는 이같이 수작한 후 며칠간 그곳에 유색하며 해색도 구경하고, 오랜 간만에 만난 정회도 말하다가 하루는 경자를 데리고 세 사람이 서울로 올라왔더라.
대성이가 그 유모를 보내고 성사가 되는지 못되는지 몰라 마음에 심조증이 나서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낮이면 그 유모 다녀오기를 고대고대하는 중 유모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고로 궁금한 마음이 더욱 심하여 날마다 유모의 집을 오륙차씩 가보는 터인데, 세상에 지극히 어려운 일은 사람 기다리는 것이라.
이같이 사오 일을 지내매 대성의 마음은 미칠 듯싶어 인천 차 도착할 시간이면 번번이 남대문정거장을 나가서 차에 내리는 여자는 면면히 상고하되, 그같이 고대하던 유모는 아니 오는지라. 나중에는 심술이 나며 심기가 타락하여 유모의 집이나 정거장에도 나갈 마음이 없어 자기 집 사랑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터에 하루는 안에서 유모의 음성이 나는지라, 마음에 어찌 반갑고 어찌 급하든지 신짝을 거꾸로 끌고 한달음에 안으로 들어가며 우선 유모의 얼
굴부터 살펴본다.
유모는 대성이가 급히 들어오는 모양을 보고 심중에 어찌 우습던지 빙글빙글 웃으며,
“그사이 여러 날 못 보아서 매우 보고 싶었지? 내 마음을 추측하면 가히 대성의 마음을 알 것이야 나는 그 동안에도 대성이가 어찌 보고 싶던지 못 견디겠어서 며칠간 더 있을 것도 못 있고 급히 올라왔지.”
대성이는 그 유모의 화려한 안색을 보고,
‘옳지, 마음대로 성사가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은 마음에 벙글벙글 웃으며 유모의 말대답도 미처 못 하는데, 대성의 모친은 두 사람의 심중에 딴 사실이 있는 줄은 모르고,
“대성이는 자네를 잠시만 못 보아도 미치려고 한다네. 자네 인천 간 동안에도 자네가 다녀왔는가 본다고 하루도 열두 번씩 자네 집을 갔다네. 내야 자네가 인천을 갔는지, 어디를 갔는지 알 수 있나? 대성이가 자네 집을 하도 자주 가기에 무엇하러 가느냐고 물은즉, 자네가 인천을 갔는데 그 동안 왔는지 몰라서 보러 간다고 하데그려. 그 자식은 자네에게 깊은 정이 들어서 오히려 친어미 나에게는 범연히 한다네.”
하며,
“하하하”
웃으매 세 사람이 모두 웃고 말았는데, 대성이는 하회를 듣기가 일분이 바빠서 유모에게 눈짓을 하여 사랑으로 달고 나가서 은근히 묻는 말이라
“그래, 대관절 목적하고 가신 일이 어찌 되었습니까? 저는 그 동안 어머니 기다리느라고 눈이 빠질 뻔하였소”
유모는 빙글빙글 웃으며,
“그 일이 여의치 못하게 되었다. 벌써 정혼한 곳이 있다더라”
대성이가 그 말을 듣더니 낙심천만하여,
“벌써 정혼을 했어요? 그래, 완정을 하였습더니까? 그러면 일 다 틀렸소구려.”
하며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다. 유모가 대성의 모양을 보매 속마음에 어찌 우습던지 간간대소를 하는데, 대성이는 그 유모가 웃는 양을 보고 마음에 의심이 생기며 언구럭을 부린다.
“어머니가 나를 속이시오구려. 그러시지 말고 어서 속시원히 말씀 좀 하시오. 나는 어머니 기다리기를 굿에 간 어머니 기다리듯 하였는데, 어머니는 내게 대하여 조롱을 하신단 말씀이요? 설령 그 신부가 정혼을 하였을지라도 어머니가 수단을 잘 부리면 될 것이 아닌가요? 속 답답한 사람을 대하여 어찌 그리 거만스럽게 하시오?”
유모는 노상 웃으며,
“그래, 그 신부가 그렇게 소원이야?”
대성 “아, 글쎄 나는 그 혼처가 틀리면 평생에 장가 아니 갈 터이야요”
유 “네 사정이 정 그러할진대 내가 어디까지 힘을 쓰든지 우겨볼 터이나 어려운 사정이 한두 가지가 아니로구나.”
대 “응 어려운 사정이 무엿이야요?”
유 “첫째는 친어머니께서 그렇게 지체 낮은 신부와 결혼을 하고자 하실 리가 없고, 둘째는 너는 비록 신부를 보았을지언정 신부도 또한 너를 보고 마음에 가합하여야 될 터이니, 신부가 너를 보고 마음에 상합할는지, 또는 신부는 비록 의향이 있어 허락한다 할지라도 천어머니께서 허락을 하실는지 두 가지에 한 가지만 틀리면 결코 못될 것인즉, 그 아니 어렵지 아니하냐?”
대 “허허허, 그것이 그리 어려울 것 무엇 있소? 신부가 나를 보자고 하면 오늘이라도 인천을 갈 터이요 신부가 만일 나를 보기만 하면 물론 눈에 들 터인즉 그는 염려할 것 없는 바이며, 우리 어머니께는 어머니가 수단을 잘― 부리면 두말할 것 없이 될 터이니, 어렵다고 하시지 말고 주선을 좀 잘― 하여보시오”
유 “이애, 그러나 내일 동물원 구경 아니 갈래? 우리 집에는 인천 손님이 두어 분 와서 구경을 갈 터인데, 너도 같이 가서 하루 소창(심심하거나 답답한 마음을 풀어 시원하게 함)이나 하였으면 좋겠다.”
대 “인천서 손님이 왔어요? 그 손님은 누구신가요?”
유모는 다시 한 번 웃으며,
“남의 집에 온 손님은 알아 무엇 하니? 차차 알면 알걸.”
대성이는 그 말에 짐작하는 바가 있었던지 입이 광우리만치 열리며,
“아 내야 어머니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할 터인데 좋은 구경 가자는 것을 아니 가겠습니까?”
유 “자, 그러면 어머니도 가시게 하지.”
대 “그는 어머니가 한 가지 가시자고 말씀을 여쭈시오구려.”
유모는 대성이와 이같이 수작을 하다가 안으로 들어가 대성의 친모를 보고 동물원 구경 가기를 약속한 후 그 이튿날 그 형의 모녀를 데리고 동물원을 갔는데, 대성이는 그 친모를 모시고 역시 동물원으로 갔더라.
동물원이라 하는 곳은 일기가 화창하고 백화가 난만한 때면 산보하는 사람, 소창하는 사람들이 어른 아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손목을 서로 잡고 간 동무도 서로 헤어지기 쉬운 곳이라 여간 주의치 아니하면 그곳으로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을 도저히 만나기 어려운 터이나, 대성의 유모는 대성의 모자를 동물원에서 만나기로 일단 목적하는 터이요, 대성이는 유모의 일행을 만나기로 일편 정신을 쓰는 바이라. 유모는 대성의 모자보다 먼저 동물원으로 들어가서 곳곳이 구경을 하면서 식물원을 향하여 가다가 연못가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대성의 모자 오기를 기다리는 터이요. 대성이는 그 모친을 모시고 역시 구경을 하여가며 유모의 일행을 살펴보는 터이더니, 마침내 연못 가에서 두 일행이 마주치니 유모는 대성이를 반갑게 맞고, 대성이는 유모를 반갑게 맞는 동시에, 대성의 눈동자를 깜짝놀래는 것은 그 유모의 옆에 앉은 경자이라 이때 대성의 마음에는 기쁜 생각, 다행한 생각 유모가 고마운 생각이 흉중에 가득한 중, 경자를 다시 볼수록 그 인물과 태도는 얼굴이 취하는 듯한지라 마주보기가 너무 면난하여 옆으로 슬쩍 돌아서고, 대성의 모친은 유모의 옆에 나란히 앉아 담배를 태우며 이야기를 하는데, 그 옆에 앉은 여학생을 보매 자기 마음에 매우 얌전하든지 유모에게 묻는 말이,
“저 젊은 댁네도 자네와 동행하고 온 인가?”
유 “네, 그렇습니다…………. 이애 경자야 인사 여쭈어라.”
하고 인사를 소개하며 겸하여 자기 형님까지 인사 소개를 한다.
“저애는 저 형의 딸 되는 색시오. 이분네는 제 형 되는 사람이올시다.”
하매 대성의 모친은 깜짝 놀라며,
“응, 그렇단 말이야! 여보 이 노인네, 처음 뵙소. 당신 아우님과는 수십 년 친할 뿐 아니라, 저 우리 자식을 젖을 먹여 기른 고로 정분이 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는 터이요마는, 당신을 이제야 만나기를 참 너무 늦은 일이오구려. 그러나 또한 치하할 일은 따님을 어찌 저렇게 얌전히 두었소? 그야말로 처음 보는 인물인걸.”
하며 경자를 다시 돌아보는데 경자는 주순(붉고 고운 입술)을 열어 인사를 한
다
“처음 뵙습니다. 지금 말씀을 듣자온즉 아지머니와 친절히 지내신다 하오니 대단히 고맙습니다.”
하는 말소리든지 온아한 태도가 대성의 모친의 눈에 욕심이 나도록 되어 칭찬이 연방 나온다.
“에그 그 색시 엄전도 하지. 이름은 무엇이고, 나인 몇 살인고?”
경 “네, 이름은 경자요˛ 나인 열아홉 살이올시다.”
대성의 모친은 다시 경자의 모친을 돌아보며,
“아이그 따님 잘 두셨소”
하며 연해 칭찬을 한다.
경자모친 “에그 그게 아무것도 모른답니다. 소위 학교 졸업이라고 하였으나, 사람이 태곳적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이같이 이야기를 하는 동시에 경자는 대성이를 자세히 보았는지 못 보았는지 시는 벌써 시계 짧은 바늘이 넉사자를 가리키니, 이 시는 동물원 문 닫는 시간이라. 두 일행이 서로 헤어져 각각 집으로 돌아갔더라.
대성의 유모는 경자에게 대성이도 선도 좀 보일 겸 대성의 모친에게 경자의 자랑도 좀 시킬 겸 그날 그와 같이 동물원 구경을 잘―하고 집으로 돌아가, 경자의 의사를 들어볼 양으로 한 마디 물어보는 말이라.
“이애 경자야 너 자세히 보았지? 그 노부인 모시고 왔던 사람이 대성이란다. 그래, 그 사람을 보니까 네 눈에 어떠하더냐?”
경자는 그 말을 듣더니 아무 말 없이 다만 주순 열어 방긋 한 번 웃는 동시에 두 뺨에 홍조가 오르며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는데, 이 때 경자의 모친은 자기 아우를 대하여 하는 말이,
“아니야 그는 경자에게 물을 것이 아니야 아무리 부모의 앞에 선들 제가 차마 가하니 부하니 할 리가 있나? 사람인즉 매우 가합하데.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 없이 그곳으로 정혼하여 주게. 그러나 그 집에서 우리 같이 지체 낮은 사람과 결혼을 할 리가 있다구?”
아우 “글쎄, 나도 하느니 걱정이 그 걱정이랍니다. 대성이로 말하면, 제가 먼저 원하는 바이니까 다시 할 말 없거니와, 대성의 부모로 말하면 아직까지도 완고사상을 버리지 못하여서, 만일 혼인 소개를 하다가 무안이나 아니 당할는지요?”
대성의 유모가 이같이 말하는 동시에 속마음에는 대단히 근심이 되어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한다.
‘내가 만일 혼인 성립을 못 시킬 것 같으면 대성의 낭패는 고사하고 무슨 낯으로 경자를 볼 수 있나? 대성의 친모가 경자를 보고 대단히 칭찬은 하였지만 하도 완고이라 양쪽지고 학교에 다니는 여자는 사람으로 알지 아니하니까, 그런 사람을 며느리 삼을 리가 있다구? 그중에 더구나 지체나 웬만해야지, 내가 만일 대성의 친모를 보고 혼인말을 냈다가 일도 되지 못하고 무안만 보면 그런 망신이 어디 있을까? 그런즉 어찌 하면 이 일이 되도록 할까? 암만해도 도리가 없는걸.’
이같이 궁구한 결과에 한 가지 신출귀몰한 계교를 생각하였더라.
그 계교는 어떠한 계교든지 그 이튿날 종일 주선을 하여놓고 하루는 대성의 집을 갔는데, 대성의 모친은 이때 누마루에 누워서 맑은 바람에 잠이 곤히 들었다가, 유모의 목소리를 듣고 일어 앉아 이야기를 한다. 물론 어떠한 부인네든지 심심한 판에 서로 만나기만 하띤 이야기가 웬게 그리 많은지 된소리 안 된 소리 해가 지는 줄을 모르는 법이라. 대성의 모친이 어찌 심심하던지 혼자 누워 낮잠을 자다가 유모를 만나서 심심파적을 하느라고 이말 저말 깨가 쏟아지게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중문간에서 장옷 자락이 넙푼하더니 평생 보지 못하던 젊은 여자가 들어와 마루 앞에 우뚝 서며,
“시주 좀 하십시오 새로 지핀 애동만신이올시다.”
그 젊은 여인은 유모의 조화 속으로 온 무당이언마는, 유모는 모르는 척하고 생시치미를 떼며 남보다 먼저 내달아 하는 말이,
“이 댁에는 시주가 무엇인지, 만신이 무엇인지 그런 것은 다 모르시는 댁이니 어서 다른 집에나 가보오.”
하며 주인을 위하는 체 무당을 괄대한다.
무당 “에그 그런 말씀 마십시오. 만신을 대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면 복을 받지 못하신답니다. 만신도 시주를 거두어다가 제낭탁을 하는 것이 아니오. 시주하신 여러 댁의 소원 성취를 발원한답니다. 시주를 하시면 쌀을 섬으로 하고 돈을 백으로 하실 게 아닌데 왜 그리 사위스러운 말씀을 하십니까?”
하더니 그 주인 부인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마 저 마님께서 주인마님이 되시지요? 만신이 아는 것은 변변치 못합니다마는, 마님께서 머지 아니하여 경사를 보시겠습니다.”
하며 묻지 아니한 말을 이와 같이 한다. 미신 좋아하는 부인네는 그런 말을 듣기가 무서운 법이라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듣더니 정신이 번쩍 나서 묻는 말이,
“응, 경사가 무슨 경사가 있겠나? 내 시주 많이 할 터이니 자세히 아는 대로 말하게.”
하며 그 무당의 앞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무당 “돌팔이 만신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오래지 아니하여 댁에 새 식구 한 분이 늘겠습니다. 마님께서 장성한 아드님이 계시면 며느님을 보실 격이올시다.”
부인 “응, 그리야? 그러지 아니하여도 지금 며느리를 보려고 구혼을 하는 중인데, 오래지 아니하여 좋은 혼처가 나서겠나?”
무당 “네, 이 달에 남편으로 정가성 가진 혼처가 우연히 나서면 천생연분이래 내외 해로하고 자손 창성하여 대단히 길하겠습니다. 그러나 잠깐 살격이 있어 혼인이 되기 가장 어렵겠는 걸이요. 만신의 집에 오셔서 살풀이를 하셨으면 아무 일 없이 그 혼사가 순성하겠습니다.”
부인 “살격이 무슨 살격이야?”
무당 “아드님 팔자에도 화살이 있어서 혼인할 때면 훼방을 하여서 살풀이를 아니하면 언제든지 혼인이 안 될 터이요. 설사 혼인을 한 대도 개개 불길하겠습니다. 그런즉 돈냥 쌀되 아끼시지 말고 오늘이라도 살풀이를 하십시오.”
부인은 원래 미신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그 말을 듣고는 깜짝 반해서,
“에그 그 만신 영하기도 하지! 어쩐지 혼인을 일러 거진 성사가 되다가는 파혼이 되고 말아 무슨 살격이든지 참 살격이 있어. 그런 게야 그 만신의 말이 꼭 맞는걸. 아, 그렇다는 것을 살풀이 좀 하기가 무엇 어려울 것 있나? 살풀이는 하라는 대로 오늘이라도 하려니와 혼처는 어떤 데가 연분이야?”
무당 “네, 혼처는 아까도 말씀하였거니와 남편으로 정씨성 가진 혼처가 길한 연분이올시다. 마님께서 만일 만신의 집으로 살풀이를 오실 것 같으면 다시 자세히 무꾸리를 하여드리지요”
부인 “응, 그러면 우리가 내일 만신의 집을 찾아갈 터이니 집을 좀 가르쳐주게.”
무당 “네, 만신의 집은 새문밖 월암동 성황당 밑집이올시다.”
부인은 대단히 기뻐하며,
“그러면 내일 찾아갈 것이니 부디 기다리게.”
하고 할멈을 불러 쌀 두 되를 갖다가 시주를 하니, 무당은 부디 찾아오시기를 바란다고 부탁하고 가고, 부인은 유모를 데리고 다시 이야기를 하는데, 이때는 그 무당 영하다는 이야기와 대성이 혼사에 대한 이야기로 주거니받거니 수작을 하는 끝에, 부인은 심지어 꿈 이야기까지 한다.
“여보게, 나는 아까 이상한 꿈도 꾸었지. 마음에 있으면 꿈에 보인다더니 그 말이 옳은 말이야 내가 아까 자네 오기 전에 마루에 누웠으려니까 혼곤히 잠이 오는데, 생각지도 아니한 대성이 혼인을 지낸다고 초례를 시키는데, 내가 무엇하러 초례청에를 갔던지 대성이와 초례하는 신부를 자세히 보니까 일전 동물원에서 보던 그 여학생이데그려. 그래서 ‘에그 이상도 하다 저 여학생하고 어떻게 정혼이 되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중 자네 목소리가 나 번쩍 깨니까 꿈일세그려. 내가 그때 그 학생을 보고 어찌 탐스럽던지, 나는 며느리를 얻거든 저러한 며느리를 얻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나더니, 아마 그런 꿈이 뀌었던 게야 꿈도 이상하지.”
대저 꿈이라 하는 것은 이왕 생각한 바에 의지하여 꿈이 되는 것이라 대성의 모친이 비록 완고일지라도 눈에 좋은 거야 어찌 모를 이치가 있으리오. 평일에는 여학생이라면 절증지(몹시 미워함)를 하던 부인이 비로소 경자 같은 인물에 여학생 복색을 단정하게 한 것을 보매 그 아름다운 태도가 눈동자를 놀래는 고로 속마음에 나도 저러한 며느리를 얻으리라 생각한 것이 그와 같이 꿈이 된 것인데, 유모는 그 말을 들으매 차소위 기화가거(좋은 기희를 놓치지 말아야 함을 이르는 말)라 그와 같이 묘한 기회를 타서 하는 말이,
“그참 이상도 합니다. 그러한 꿈을 꾸시자 무당이 와서 그런 말을 하니, 아마 쉽사리 정혼이 될라나 보외다. 그러나 그 꿈과 무당의 말이 모두 우연한 일이 아닌데요. 마님께서는 경자와 초례하는 꿈을 꾸시자 무당의 말은 남편으로 정가성 가진 혼처가 나서면 길하다고 하니, 꿈과 무당의 말이 거진 부합이 됩니다. 경자의 성이 정가요. 또한 집이 인천이니까 곧 여기서 남편이 아니오니까? 그렇기는 하나 댁에서 경자와 혼인이야 하시겠습니까? 경자가 신분이 상없는 사람은 아니지마는, 지체가 댁만은 못하니 마님께서 지체 낮은 며느리야 데려오시겠습니까?”
부인 “에그 이상해라. 그 학도 성이 정가야?”
하더니 담배를 떨어 담배를 다시 담아 물고 남산을 바라보며 정신없이 무슨 생각을 하다가
“여보게, 내일은 일찍이 좀 오게. 소일삼아 무당집에 구경이나 가세.”
이같이 이야기할 때에 삼사월 긴긴 해가 어연간 서산에 기울어진 고로 유모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더라.
그 이튿날은 언약한 바와 같이 대성의 모친과 유모는 새문밖 무당의 집을 찾아가니, 그 무당은 유모의 계교 속에서 노는 무당이라, 유모가 가르친 대로 하는 것이라. 범연히 할 리가 있으리요? 그러나 대성의 모친은 그런 줄을 전연히 모르고 우선 무꾸리를 한다, 복채를 두둑하게 일 원이나 내어놓으며 하는 말이,
“자―, 우리 아들 혼사에 대하여 우선 무꾸리 좀 자세히 하여보고 살풀이를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점에 나는 대로 하세. 복채는 특별히 놓는 것이니 정신을 써서 잘― 하여보게.”
무당은 소반에 쌀을 부어놓고 산을 본다. 무엇이라고 한참 지절거리며 소반에 쌀을 죽죽 끼얹어 보다가 점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마님이 비록 외아드님은 두셨으나, 다자손한 사람 부러울 것 없습니다. 장래에는 아드님 덕에 무한히 호강하실 팔자올시다. 그리고 아드님께서는 올에 나비가 꽃밭을 만난 격이올시다. 좋은 혼처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어 어디로 정할지 모르는 격이올시다. 그러나 팔자에 독한 살격이 있어서 혼인이 거진 되려면 훼살을 놓고 훼살을 놀아서 한 곳도 성사는 되지 못하는 것이, 마치 꽃밭에 앉은 나비가 광풍에 불려 앉으려 하다가 못 앉고 앉으려 하다가 못 앉는 격이올시다. 그런즉 살풀이만 하시고 보면 남편으로 우연히 혼처가 나서는데, 어제 말씀한 바와 같이 성은 정씨요 과수의 따님이요, 나인 열아홉 살이요, 인물은 일색이요. 이름은 구슬 같은 글자로 지었겠습니다. 만일 그 혼처를 놓치면 며느님을 얻으셔도 불길할 격이올시다.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나 점괘가 그렇게 나오니 마님 자량해 하십시오.”
어리석은 부인들은 이같이 허무한 일에 매양 속는 법이라.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듣고 월전의 대성의 혼사가 불성한 일을 생각하매 무당의 점이 신접을 한 듯 귀신이 곡하게 맞힐 사 아니라, 남으로 정씨가 연분이라는 말에, 아마 꿈에 보이던 인천 여학생이 정말 연분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나서,
‘옳지, 그 여학생의 이름이 경자인즉 구슬 같은 글자로 지었다는 말이구나.’
하고 짐작을 하였더라. 그런고로 그 무당이 천하에 없이 영한 무당으로 알고, 무당이 시키는 대로 모두 시행하여 떡도 하고, 과실도 사서 살풀이 한바탕을 웬만한 굿만치 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유모에게 경자의 근지를 자세히 물어보니, 유모야 그 말대답을 범연히 할 리가 있으리요? 그러한 결과로 대성의 소원이 성립되어 사주를 보내고 날 택일을 하니, 경자의 일평생 신세가 이로부터 판단이 되었더라.
성심소도에 금석을 가투(지극 정성으로 하는 말은 쇠나 돌도 뚫을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라고, 어떤 사람이든지 내가 이 일을 기어코 하리라 결심한 이상이면 무슨 일이든지 아니 되는 바가 없는 법이라. 항상 경자를 마음에 두고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자 하여 주야로 노심하며 백방으로 운동하던 대성이는 혼인날을 당하여 굉장한 연회를 배설하고 내외 빈객을 많이 청하여 화려한 식장에서 신혼예식을 거행하고, 동방화촉에 원앙의 꿈을 이루니, 그만하면 소원하던 바를 뜻대로 성취하였다 할지라. 그와 같이 소원 성취한 대성이는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여 얼굴에 항상 웃는 빛을 띄었더라.
그 내외의 정분으로 말하면, 일찍이 비익조(남녀 또는 부부 사이가 매우 좋음을 이르는 말)되지 못한 것이 한이라 다시 더할 말이 없거니와, 그 부인 경자로 말하면 천성이 원래 유순하고 학행이 또한 거룩하여 비록 그와 같이 다정한 내외간일지라도 극진히 공경하여 친압(버릇없이 너무 지나치게 친함)하지 아니하며, 그 부모를 효도로써 섬겨 부모의 마음을 항상 평화케 하매, 대성의 모친도 역시 만심환희하여 그 내외의 다정히 지내는 것을 지극히 기뻐하며 지극히 귀하게 여기더라.
세월은 흐르는 듯 삼복증염이 어느 겨를에 지나가고 일진서풍에 궂은 장마가 개이더니, 서산에 넘어가는 사양은 먼 산에 쟁쟁히 비치고, 녹음 속 매미소리는 쇄락한 산정마루에 가득하니, 그 산정은 대성의 집 후원이요, 대성의 부인 경자가 거처하는 처소이라 이때 대성의 내외는 이왕에 공부하던 책을 펴놓고 종일 복습하던 끝에 괴로운 장마가 개이고 신선한 매미소리에 새 정신이 번쩍 나서 책을 덮고 난간에 의지하여 우후 산야의 경색을 구경하다가, 맑고 그윽한 흥미를 이기지 못하여 대성이는 창가를 부르고 경자는 올캉(風琴)을 타며 한바탕 유쾌하게 노는데, 안방에서 낮잠 자던 대성의 모친은 창가와 풍금소리를 듣고 그 아들 내외의 귀한 생각이 더욱 새로워서 과자와 포도주를 친히 들고 산정을 올라오는지라. 경자는 풍금을 그치고 마주 나가 과자를 받아들고 들어오며,
“어머님, 과자는 웬 것을 가지고 오십니까?”
하는데 대성이는,
“어머니, 포도주는 저 먹으라고 가져오셨지요?”
하며 빙글빙글 웃는다.
모친 “오냐 너도 먹고 나도 먹고, 오늘은 가장 단란을 하자꾸나. 그러나 어서들 해라. 나는 종일 적적하던 판에 너희들의 풍금소리가 어찌 듣지 좋든지 나도 좀 들으러 왔다.”
이때 경자는 머리를 숙이고 빙글빙글 웃을 뿐인데, 대성이는 응석 비스름하게,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과자나 먹어가며 천천히 하지요”
하며 포도주를 따라 그 모친께 권한다.
“어머니, 먼저 잡수시오.”
그 모친을 술을 받아 마시며,
“이애 경자야 네 남편 술 따라주어라 너도 과자 좀 먹고.”
하는 말에 경자는 포도주병을 들고 이리 따르고 저리 따라 모자에게 권하니, 가정의 화기가 융융하여 웃고 말하는 소리가 황씨 일문의 행복을 발표하더라. 이때 아이종이 총총 올라오더니,
“영감께서 서방님 여쭈십니다. 마님 아씨 다 내려오시래요.”
대성의 모친은 그 말을 듣고,
“왜 내려오라고 하시더냐? 오래간만에 풍금소리 좀 들으려니까 공연히 훼방을 노시는구나. 그렇지만 어른이 내려오라고 하시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가보아야지.”
하고 대성의 내외를 앞세우고 내려갔더라.
대성의 부친 황참서는 비단 완고일 뿐 아니오 미련하고 어리석기가 짝이 없는 사람이라 조부모 덕분에 비록 재산은 요부하나 아무 사리를 모르는 고로 도시 치가할 줄을 알지 못하여 그 만가한 살림을 모두 부인이 주장하는 터이오. 대성의 학교 공부라든지 성취시킨 것이 모두 부인의 임의로 한 것이며, 황참서는 무언이 같이 안방에 들어앉아서 지어주는 옷이나 입고 밥이나 먹을 뿐이요, 벼슬이라는 차함(실제로 근무하지 않고 벼슬의 이름만 가지던 일) 탕건 하나 얻어 쓴 것도 역시 부인의 주선으로 된 것이라 이와 같이 못생긴 위인이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는지 대성이를 불러서 하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
“이애 대성아 너는 부른 것은 다른 일이 아니다. 너도 동경 가서 유학 좀 해보아야지, 사람이 우물 안 고기로 자라서는 아무 짝에 못쓰느니라. 남들은 동경 가서 대학교 졸업을 하고 와서 변호사를 다닌다, 병원을 낸다 하는데, 너는 장차 무엇에 쓰잔 말이냐? 하루 이틀 허송세월하지 말고 하루바삐 떠나거라.”
하고 그 앞에 섰는 경자를 쳐다보며,
“이애 며늘아, 그렇지 아니하냐? 내 말이 옳은 말이지?”
하더니 다시 부인을 바라보며,
“여보 대성이 학비나 많이 주어 일간 떠나게 하오. 나와 같이 완고샌님으로 한문자나 공부하고 안방에 들어앉았으면이어니와, 이왕 학교 공부를 하려면 동경 가서 대학교 졸업이나 해야 행세를 하지 않소? 다만 하루라도 지체할 것 없이 곧 떠나게 하오”
부인은 그 못난이가 그런 생각을 할 줄 아는 것이 하도 이상하여 하는 말이라.
“영감이 그런 말씀을 다 하시니 별일이오구려. 학교에 다녀서는 아무 소용없다고 항상 걱정을 하시더니 동경 유학은 어찌 보내시려오?”
황 “무슨 일이든지 아니하려면 고만두고, 하려거든 톡톡히 해야지, 반둥건둥하면 아무것도 되지 않소. 대성이가 비록 법률전문과 졸업은 하였다지만; 그 공부 가지고 행세할 수 있소? 두말 말고 내일이라도 떠나게 하오”
이때 대성이는 어떠한 생각이 있었던지,
“아버님 말씀대로 곧 떠나겠습니다. 제 마음에도 항상 동경유학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차마 부모의 슬하를 떠나기 싫어서 그런 말씀을 못하였더니, 지금은 제 처가 있사와 부모 봉양을 제나 다름없이 하겠은즉, 이제는 마음을 놓고 가기는 가겠습니다마는, 지금은 입학 시기가 아니라, 동경을 갈지라도 반년 동안은 여기 있으나 다름없이 낭도함을 면치 못하올 것이오니, 아직은 집에서 공부를 하다가 내년 춘기에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며 가기 싫어하는 눈치가 있다. 대성이가 그같이 가기 싫어하는 것은 입학 시기가 아닌 고로 미리 가는 것이 불가한 것도 역시 한 가지 사실이지마는, 그런 것도 아니오 가히 첫손가락을 꼽을 만한 사정은 실상 후원 산정을 떠나기 어려워서 그리 하는 것인데, 황참서는 그 말을 듣고 하는 말이,
“그렇지 않다. 입학 시기는 비록 내년 봄이지마는, 지금 미리 들어가서 어학도 공부하고 학교 정도도 살펴서 입학 준비를 먼저 하는 것이 좋지 아니하냐? 그런즉 딴말 말고 바삐 떠나거라.”
대성이는 그 부친이 별안간 유학을 가라 하는 것도 곡절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과연 집 떠나기가 싫어서 얼굴에 수색이 만면하여 하는 말이,
“입학 준비하자고 지금부터 갈 것은 없습니다. 어학으로 말하면 여기서 공부할지라도 넉넉할 것이요. 학교 정도로 말할지라도 여기서 능히 탐지할 수 있은즉 내년에 들어가도 늦지 않습니다.”
황참서가 그 말을 듣더니 화증을 벌컥 내고 손으로 책상을 치며 고성을 질러 하는 말이,
“좋은 일이나 악한 일이나 아비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방색(다른 사람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막음)이 무슨 방색이냐? 두말 말고 내일이라도 떠나게 해라”
하는지라, 대성이는 부친이 그같이 하는 자리에 다시 할 말이 없어,
“곧 떠나겠습니다.”
고 대답을 하였고, 대성의 모친은 그 외아들을 멀리 보내기가 대단히 섭섭하기는 하나 미상불 동경 같이 번화한 곳에 유학을 시키는 것도 역시 한 번 아니하지 못할 만한 일이라. 이와 같이 생각한 결과로 당장에 행장을 차려주어 불일내로 떠나게 하니, 이로부터 대성이는 하릴없이 경자를 이별하고 장차 동경 손이 될 모양이라. 결연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산정으로 물러가 아무 말 없이 난간 머리에 앉아서 유연히 먼 산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누가 보든지 근심수 자를 써붙인 듯한지라. 이때 경자는 대성의 눈치만 보다가 마음에 어찌 딱하던지 웃는 낯으로 묻는 말이,
“별안간 불평한 기색이 있으니 어디가 편지 아니하시오?”
대 “아 ㅡ니.”
경 “그러면 무슨 근심되는 일이 있나요?”
대 “아 ―니.”
경 “그러면 왜 아무 말씀도 아니하고 근심하는 모양으로 앉으셨소? 장차 동경을 가실 터이니까 부모의 슬하를 떠나기 어려워서 그리 하십니까?”
대 “아니야 그런 것도 아니야.”
경 “그러면 왜 그러셔요? 내게 말씀 못하실 게 무엇 있소?”
대 “근심하는 바는 없으나 차마 경자를 이별하기 섭섭해서.”
경자는 그 말을 듣고 발연히 변색을 하며 하는 말이,
“여보 그게 무슨 말씀이요? 그럴 것 같으면 어찌 장부라 할 수 있소? 부모의 명령을 받고 지중지귀한 공부를 하러 가는 자리에 일개 아녀자를 못 잊어 얼굴에 불쾌한 빛을 나타내니 그것은 가히 남아의 지기가 아니라 할 것이요, 또는 만일 동경을 가서라도 그러한 마음을 잊지 못하고 괴로이 생각을 할지면 공부에 방해가 적지 아니하리니, 공부를 독실히 못하는 날이면 그런 낭패가 어디 있소? 행여 그러한 망령된 마음 두지 마시고 공부할 생각을 그와 같이 하여 박사의 지위를 얻어가지고 돌아와서 이 사람과 대면하시기를 천만 번이나 축하하오며, 지금 하신 말씀은 결코 내가 평일에 바라던 바가 아니올시다.”
대성이가 그 말을 들으매 언사가 어찌 격절하던지 도리어 부끄러운 마음이 나는 고로 다시는 아무 말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더라.
“대성이가 아무리 집 떠나기 싫은들 부모의 명령이 그 같이 지중하고, 부인의 권고가 그 같이 간절하거든 어찌 피할 수 있으리요! 마침내 행장을 단속하여 동경으로 가는데, 그 부인 경자는 비록 말은 그리 하였으나 낭군을 멀리 작별하는 마당에 깊고 깊은 정분이야 어찌하리요! 그 남편 떠나는 날에 전송도 할 겸 근친도 할 겸 인천까지 따라 내려가서 팔판루에서 점심까지 같이 먹고 일본공원 분수탑 앞에 나와 앉으니, 이때는 정답고 사랑하는 대성의 내외가 서
로 작별하는 마당이라 팔미도 밖으로 막막무제한 해천을 바라보며 서로 이야기를 한다.
대 “해상의 경색이 대단히 좋지? 우리 내외의 정분은 저 물과 같이 깊고 저 바다와 같이 넓것다. 설령 저 바다가 변하여 상전이 될지라도 우리 내외의 정분은 변치 아니하렷다. 오늘날 작별에 내 마음을 진정치 못함은 단지 그 정분에 거리껴서 그러하오구려.”
경 “그렇기도 하지요마는, 이번 작별은 가히 유쾌한 작별이라 할만한 일이요 당신이 동경 가서 공부를 잘하고 보면 나는 박사의 부인 노릇을 할 터이요. 또는 다시 만날 날이 멀지 아니한즉 이만 일로 하여금 장부의 마음을 상한대서는 나는 도저히 불가한 일이라 생각하오.”
대 “옳소 옳소, 그는 옳은 말이오 장래를 생각하면 조급도 섭섭할 것 없어………할 것 없어. 내가 이번에 가면 공부는 힘써 할 터인즉, 좋은 공부 많이 하고 돌아오거든 우리 자동차 타고 이런 공원으로 재미있게 구경이나 다닙시다.”
하며 시계 내어보더니,
“에그 벌써 배 떠날 시간이 되었네. 자―, 그러면 어서 들어가오. 나는 지금 떠날 터이니 소식은 편지로 서로 알 것이요. 또는 부인이 어련히 할 것은 아니로되, 잠깐 부탁하는 바는 부모 봉양이나 잘하오.”
하고 해안을 향하여 나가는데, 이때 경자는 빈 공원에 홀로 서서 그 남편 가는 곳을 무연히 바라보니, 우뚝우뚝한 나무 그림자와 편편이 나는 물제비는 모두 경자의 남편 이별하는 정회를 돕는 듯하니라.
경자가 그 남편을 작별하고 자기 친가로 가서 그 모친을 뵈니, 그 모친은 외딸 경자를 금옥같이 길러서 시집을 보낸 후 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출가외인이라 자주 만나볼 수는 없고 다만 주야로 생각만 하던 차이라 그 모녀가 서로 만나매 얼마나 반갑고 얼마나 기쁘리요? 모녀가 마주앉아서 만단설화를 말하는데 경자는,
“어머니, 적적해서 그 동안 어찌 지내셨소? 저는 어머니 뵙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딸자식은 자식이랄 것 없어요.”
하며 그사이 오래 그리던 정회를 말하는데 그 모친은
“네 마음이 그러할 제 내 마음은 어떠하겠느냐? 보고 싶은 생각이야 잠시를 못 견딜 듯하지마는, 네나 내나 팔자를 잘못 타서 여자가 된 것을 어찌하겠느냐? 너는 아무쪼록 내 생각 말고 시집살이 잘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나 시부모가 과히 심하지나 않고 살림살이에 고된 일이나 없더냐? 나는 네 남편이 비범한 인물이기로 그 사람을 믿고 심려를 덜한다.”
하는지라, 경자는 본래 심지가 혼후한 여자인고로 시집이 비록 심할지라도 시체 지각없는 여자 같이 시집험담을 하거나 잘곰잘곰 눈물을 내어 그 모친의 심회를 불평하게 할 위인이 아니어든, 하물며 남편이 다시 없이 다정하고 시모가 지극히 사랑하니 어찌 사실대로 말하지 아니하리요. 그 모친의 묻는 말대답을 사실보다 몇 배 더하게 자랑하여 그 모친의 마음이 흡족하도록 위로하며, 남편이 동경으로 유학간 이야기를 하고, 그럭저럭 십여 일 지낸 후에, 풍속을 의지하여 떡을 한다, 엿을 곤다, 시부모의 옷을 한다 하여가지고 시집으로 돌아가니, 시부모는 이를 것 없이 반가워하는 중, 그 못생긴 시아버지는 평일보다 더욱 기뻐하며,
“너 왜 이제 왔느냐? 오래간만에 근친을 갔으니까 그렇겠지마는, 우리 내외는 너를 기다리느라고 눈이 짓무를 뻔하였다.”
하고 항상 사랑하는 시어머니에서 더 반가워하더라.
시부모의 귀함을 그와 같이 받는 경자의 마음도 역시 비할 데 없이 기뻐서, 그 시부모를 모시고 자기 남편 떠나던 말과 친정 모친도 잘 있는 이야기를 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하다가 밤이 되매 자기 거처하는 산정으로 올라가니, 시렁 위에 쌓여 있는 서적은 예를 의지하고 정원의 나무 그림자는 중중한데, 적적히 앉았으매 눈 속에는 남편의 얼굴이 사진을 박은 듯하고, 귀뿌리에는 모친의 음성이 유성기 같이 들려서 섭섭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난간을 의지하고 월색을 구경하는데, 화원 사이로 지팡이 소리가 득득 나더니, 뜰에 관 그림자가 어른어른하며 자기 시아버지가 올라오는지라 뜰 아래 내려서며 머리를 굽혀 인사를 하니 그 시아버지는
“이애, 네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더라. 이것은 아마 네게 오는 편지인가 보다.”
하며 편지 한 장을 내어준다 경자는 편지도 반갑거니와 그 시아버지가 손수 갖다 주는 것이 대단히 황감하여 두 손으로 얼른 받아들고,
“에그 하인해 보내시지, 아버님께서 손수 가지고 오셨습니까?”
하며 편지를 떼어보는데, 그 시아버지는 허허허 웃으며,
“나는 그애 편지를 보매 어찌 반갑던지 너를 어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가지고 왔다. 내가 네게 편지 좀 전하기로니 흉될 것 무엇 있느냐? 그런데 그애는 무사히 동경에 도착하고, 여관은 국정구가 어디인지 국정구 어느 집에 정하였다든가? 제 말은 내년 봄부터 학교에 입학하면, 사오 년 지내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였더라마는 내 마음에는 어느 때까지든지 제가 공부를 잘해서 학사나 박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이왕 멀리 가서 공부할 때에는 행세나 할만치 하고 나와야지, 유학합네 하고 근래 유학생들 같이 청보에 개똥을 싸가지고 나오면 무엇에 쓴단 말이냐?”
하고 이말 저말 귀둥대둥 잔말을 내어놓는데,
“너, 오늘부터 혼자 자기가 적적하겠구나. 요새는 경찰이 밝아서 도적이나 다른 염려는 없다마는 남자도 아니오 심지가 연약한 부녀로 어찌 휘휘한 마음이 없겠느냐? 내가 밤이면 온 집안을 두서너 번씩 순회는 하겠다마는 옛적 순라군 모양으로 밤새도록 돌아다닐 수야 있느냐 하하하.”
하는지라 경자는,
“관계치 않습니다. 아무 염려맙시오.”
하며 정중히 말하는데 그 시아버지는,
“그것은 네가 체면상으로 하는 말이지 어찌 관계치 않을 수 있으며, 또한 내 마음에 어찌 염려를 아니한다 하겠느냐? 그것이 한 걱정이 된다.”
이같이 씩둑꺽둑 잔말을 한참 하며 경자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고 앉았다가, 밤이 늦으매 자기 처소로 돌아가더라. 그 후부터는 밤이면 그 시아버지가 지팡이를 끌고 산정 근처로 몇 번씩 돌아다니기도 하고, 혹 산정마루에 와 앉아서 경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가고 하는데, 하루는 경자가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아니하여 누마루에 나와 교의에 의지하고 앉았으니, 교교한 달빛은 오동가지에 비치어 맑은 그늘이 뜰에 가득하고, 수수한 서풍은 대수풀을 흔들어 서늘한 기운이 사람의 몸에 침노하는데 즉즉한 버러지 소리는 늦은 가을을 불평히 여기는 듯 사람의 회포를 돋우는지라. 이때 경자의 마음에는 그 남편 생각이 간절하여,
‘에그 벌써 가을이 점점 늦어가고 차차 일기가 추워지니 우리 남편의 객고가 과연 어떠한고? 멀리 있는 이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깊은 근심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 도다!’
이러한 생각이 나서 정신없이 앉았다가 음악소리나 듣고 회포를 진정하리라 하여, 풍금을 열어놓고 용진곡 한바탕을 타는데, 자기 시아버지가 마루 끝에 와 앉으며,
“이애, 그 풍금소리가 듣기에 조선 풍류보다 좋다.”
하는지라, 경자는 풍금을 그치고 인사를 하니 그 시아버지는,
“어서 해라. 여기 앉아서 좀 듣다가 가겠다.”
하며 허허허 웃는 고晁 경자는 마지못하여 계속하는 하는데 그 시아버지는 슬그머니 마루 위로 올라오더니, 경자의 풍금 타는 곁에 와 서서 그 소리를 재미있게 듣다가 하는 말이,
“이애, 나도 그 풍금 타는 법 좀 가르쳐다오. 노래에 심심은 하고, 소일할 것이 있느냐? 풍금이나 배워가지고 재미를 붙이겠다.”
경자 “아는 대로는 말씀해 드리겠습니다마는, 졸지에는 배우시기 어렵습니 다.”
시부 “오냐, 한 술에 배부를 수 있느냐? 배우는 대로 날마다 가르쳐다오”
하더니 교의를 갖다가 경자의 옆에다 바싹 들여놓고 슬며시 걸터 앉으며,
“이것을 배우자면 먼저 무엇을 배우느냐? 설면히 하지 말고 자세히 좀 가르쳐다오”
하는 고로 경자는 미안함을 이기지 못하여 피하여 일어서니 그 시부는 염치 반 푼어치 없이,
“이애, 스스러워 할 것 없이 이리 와 앉아서 자세히 가르쳐다오. 아비 곁에 앉는 것이 어때서 그리하느냐?”
하며 허허 웃음을 내어놓는다. 경자는 하도 어이가 없어 아무 말 못하고 섰는데, 그 시부는 이면불한당(사리를 멀쩡히 알면서도 나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며느리 손목을 잡아당기며,
“이리 와 앉아라, 이리 와 앉아라. 아비가 오라면 오지 왜 그리 서어하게 하느냐 허허허!”
하고 불측한 행동을 한다. 경자는 어찌 기가 막히든지 손을 뿌리치며,
“이런 법이 없습니다.”
하고 정중히 말하나 그 시부는 더욱더욱 괴상한 행위가 나온다.
“법은 무슨 법이 없단 말이냐? 아비 앞에 앉아서 풍금 가르쳐달라는 것이 그리 틀릴 것 무엇 있니? 이리 와 앉아라, 이리 와 앉아”
하며 피해가는 며느리의 손목을 함부로 잡아당긴다.
대저 집안에 풍파가 나려면 별별 괴상한 일이 뜻밖에 생기는 법이라 그 황참서는 본래 어리석고 경계 흐리고 지각없는 인물로, 그 며느리 경자의 자색을 보고 일시에 마음이 변하여 그 아들 대성이를 동경 보낼 때부터 컴컴한 가슴 속에 금수 같은 생각이 있어 위선 그 아들부터 멀리 보내놓고, 차차 동정을 보아가며 어찌어찌 하리라 하,고 이때 이같은 행동을 하는 것인데, 그 현숙한 경자야 어찌 그런 꼴을 보리오. 얼굴에 정색을 띄고 준절히 하는 말이,
“아버님께서 어찌 예법을 모르시나이까? 앉으라고 하시면 말씀으로 하시는 것이 정당하거늘 어찌 며느리 몸에 손을 대시나이까?”
아무리 자식일지라도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은 만고에 없는 일이올시다.”
하며 손목을 뿌리치고 몸을 피하는데, 그 못된 황참서는 경자가 피하는 대로 쫓아다닌다. 그리하느라니 하나는 피하고 하나는 쫓아다니는 모양이, 누가 보면 하릴없이 서로 기롱하는 줄로 알겠더라.
이때 경자는 어찌 민망한지 어찌할 줄을 모르고 피해 다니는데, 이러할 즈음에 뜰 앞에서 마침 기침소리가 투어 번 난다. 황참서는 그와 같이 불법행동을 하다가 기침소리를 듣고 겁이 났던지 신발도 신을 새 없이 대문으로 도망을 하였는데, 마루로 올라오는 사람은 경자의 시어머니라 눈살에 불평한 기색을 띄고 경자를 한참 바라보더니,
“너 지금 무엇했니? 머리가 너분하게 흩어지도록.”
경자는 할 말이 없이 우두커니 섰다.
“네 지금 시아버지하고 무엇했느냐 말이야 왜 말 못하니? 내가 벌써 내 눈으로 본 것을 왜 말 못해?”
경자는 이때 발명도 할 수 없고 핑계도 할 수 없어 다만 울고 섰을 뿐이라.
“집안이 망하려면 별일이 다 생긴다. 내 그저 여학생이면 며느리를 아니 삼으려고 하였더니, 벌서 내 집이 망하려고 내 마음이 비뚜루 들어서 너 같은 며느리를 얻었구나………. 이년아, 어디 서방이 없어서 하필 시아비냐? 허, 그것 참 남부끄러운 일이다. 이탓저탓해 쓸데있느냐. 시아비인지, 황참서인지 그 늙은이 행세부터 틀렸지.”
하며 한숨 한 번을 땅이 꺼지도록 쉬고 돌아보고 내려가며,
“그 개 같은 인사가 남부끄러운 줄은 알았던가? 신발 신을 새도 없이 도망을 하였구먼.”
하고 그 신을 집어 들고 안방으로 내려갔더라.
그 황참서부인은 안방에 누웠다가 경자의 풍금소리를 듣고 마음이 어찌 상쾌하던지 그 소리를 들으러 올라오는 길에, 황참서와 경자가 서로 밀치고 당기며 허허허 웃는 소리를 의심 없이 수상하게 여기고 그리한 것인데, 경자의 분하고 원통한 마음은 염통을 째고 냉수로 씻어도 시원치 아니할 듯하여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중에, 아무리 생각하여도 애매한 말명을 할 도리가 없어 간이 타도록 근심을 하며 그 밤을 지냈더라.
대성의 모친은 그러한 광경을 보고 돌아와 생각한즉 그 일을 어찌 조처하면 좋을지 도저히 획책이 없는지라.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며 잠 한잠 못자고 그날 밤을 새우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경자를 불러서 이르는 말이라.
“이애 경자야 너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라 지식이 보통여자보다 다를 것이 아니냐? 그런즉 너는 가히 다른 여자의 모범이 될만한 자격이 있거늘 어찌하여 금수만 같지 못한 행동을 행하느냐? 이것은 너의 일신만 결딴날 일이 아니오 남의 집 일문을 망하게 함이니 내가 어찌 세상에 용납할 사람이겠느냐? 내가 너를 대하여 책망하는 것이 오히려 틀린 일이다마는, 남의 집을 어찌 이렇게도 망하는 법이 있느냐? 이러니저러니 기닿게 할 것 없다. 첫째는 내가 며느리 잘못 얻은 탓이요 둘째는 너의 시아버지 인사가 틀렸은 즉 시비곡직을 가릴 것이 없다. 너는 오늘로 네 집으로 돌아가 자결을 하든지 개가를 하든지 내 눈앞에 다시 보이지 마라.”
경자가 그 말을 들으매 자기는 아무 죄도 없고, 시아버지 틀리다고 발명할 수도 없는 터이요. 다만 천지가 아득하고 눈이 캄캄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겠는 중에도 애매히 그러한 누명을 쓰고 말 한 마디 못할 것 없어 듣기 좋은 말로 사실 이야기를 한다.
“어머니,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비록 미거하오나 어찌 그토록 하였을 길이 있사오리까? 어젯밤 일로 말하면, 아버님께서 풍금을 가르쳐달라고 가까이 앉으시기에, 저는 체면을 생각하고 얼마쯤 그렇지 아니한 말씀을 여쭌 일은 있습니다마는, 지금 어머님께서 지목하시는 바와 같이 그런 법은 없습니다. 어머님은 조금도 의심치 마시고 행여 그런 말씀 마시기를 바라나이다.”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들으매 자기 남편 황참서의 위인이 본래 체면을 모를 뿐 아니라 매사에 황탄한 작자인고로, 며느리 스스러운 줄도 모르고 풍금을 가르쳐달라다가 며느리에게 핀잔을 당한 것이요. 실상은 그렇지 아니한 듯싶어서,
“오냐, 그러면 그렇지. 네가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느냐? 너의 시아버지는 원래 지각이 충분치 못한 위인이니, 이 다음에는 그런 줄 알고 지내라. 나는 그러한 줄 모르고 너무 과도히 말을 하였구나. 에그 못생긴 인사도 다 있지. 응, 그러면 너는 가서 안심하고 있거라.”
하며 그 며느리를 위로하여 산정으로 보내,고 사랑에 있는 자기 남편을 청하여다 앉히고 수죄를 한다.
“여보 당신이 어쩌자고 이리 하시오? 사람이 못생겨도 분수가 있지, 며느리 스스러운 줄도 모른단 말이요? 나이 오십이 넘어 늙바탕에 들면 지각이 좀 나야지, 그리하고 어찌하잔 말이요P 어젯밤 일이 만일 소문날 것 같으면 외론 흉한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집안이 망할 것이오구려. 풍금을 가르쳐달랄 사람이 그렇게 없어서 며느리더러 가르쳐달란단 말이요? 이제부터는 비록 자식에게라도 좀 점잖이 굴어요.”
황참서가 그 말을 듣더니 세길 네길 뛰며,
“내가 지각없는 일이 무어야? 지금같이 개명 세상에 며느리더러 풍금 좀 가르쳐달라면 어떠해서 걱정이야? 집안이 망한단 말은 웬 말이야? 자기가 공연히 집안 망할 소리를 지어내면서, 누구더러 의론이 흉하니 집안이 망하느니 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대. 소갈지없는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하고 도리어 야단을 하는데, 황참서부인은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못하고 하인이 알까보아 겁을 벌벌 내며 그 남편을 좋은 말로 달래어 겨우 준좌(사태나 기세 따위가 진정됨)가 되었는지라 그 뒤에 다른 일만 없고 그럭저럭 지냈으면 아무 탈 없이 안정한 가청이 될 것인데, 집안에 풍파가 나려면 괴상한 일이 생기는 법이라. 잘한 체하고 반자가 얕다고 뛰던 황참서의 마음에는 어떠한 생각이 다시 났던지, 그날 종일 사랑에 드러누워 안방에도 들어오지 않고 오는 손을 사절하고, 화증이 대단히 난 모양이더니, 그날 밤중쯤 되어서 자기의 수하친병으로 부리는 하인 경천이를 불러 은근히 하는 말이,
“여보아라 경천아 너 새아씨께 가서 내가 좀 부른다고 여쭈어라.”
하인이야 상전이 심부름시키는 대로 할 뿐이라. 경천이는 황참서의 심부름으로 산정에 올라가서,
“영감께서 새아씨 사랑으로 잠깐 오시랍니다.”
하고 말을 전하니, 경자는 소심소심하는 중 또한 의심이 없이 아니하여 속마음으로,
‘시아버니께서 이 밤중에 부르기는 웬일이며, 또한 할 말이 있을 것 같으면 안방에 들어와 앉아서 계집하인을 시켜 부를 것이어늘, 남자하인으로 하여금 사랑으로 부르는 것이 대단히 수상치 아니한가, 대저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하며 곰곰 생각을 하다 못하여 핑계나 하여볼 양으로,
“이애, 내가 지금 별안간 복통이 나서 못 견디겠다. 조금 진정이 되면 곧 가서 뵐 터이니 가서 그대로 말씀 여쭈어라.”
하고 거짓 칭병을 하였더니, 황참서는 화증이 나서 하인을 두 번 세 번 보내며,
“아비가 부르는데 아니 오는 것이 무엇이냐? 죽을병이 들기 전에야 아비의 말을 거역한단 말이냐? 급히 이를 말이 있으니 냉큼 오라고 해라.”
하는 호령이 서리 같은지라. 경자의 짐작에도 정녕 무슨 변고가 또 있을 줄 알지마는, 부모가 부르는데 아니 갈 길이 없어,
‘오냐 내가 정신 차리기에 있을 것이지, 열 번 가기로 상관있으랴’
하고,
‘이번 가보아서 만일 문제가 빗나게 되면 시어머니를 모셔다놓고 담판을 하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랑으로 내려가서 방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마루 한구석에 조용히 섰는데, 황참서는 우선 허허허 웃으며 마루로 나오더니,
“이애 경천아 너는 고만 가거라.”
하며 하인을 물려보내고 하는 말이,
“애비가 부르는데 아니 온단 말이냐? 허허허.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 그러나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오늘 아침에 너의 어머니가 이러고저러고 하니 그게 다 무슨 소리냐? 대관절 이리 좀 들어오너라. 들어가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 좀 하자”
하더니 잡담 제하고 손목을 집하당긴다. 경자는 어찌 기가 막히던지,
“이런 법 없습니다. 놓고 말씀하십시오. 놓으셔요.”
하며 준절히 말하나 황참서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염치불고하고 방으로 들이끌며,
“아비가 들어오라는데 잔말이 무슨 잔말이냐? 이애, 너의 어머니는 내게다 의심을 두더구나. 이왕 의심을 받는 자리에 지목받기는 일반이지 별수 있느냐? 죄 없이 누명을 들으나, 죄 있어 지목을 받으나 못된 말 듣기는 마찬가지 아니냐.”
하는데 그 언어행동이 성한 사람이라 할 수 없는지라.
“아버님, 이게 웬일이십니까? 망령이시지. 이게 웬일이십니까? 제 말씀을 잠깐 들으십시오. 모든 동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하다 하는 것은 인륜이 분명한 까닭이니, 사람이 되어 만일 인륜에 득죄 할지면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 아버님께서 어찌 생각지 못하시고 감히 이런 일을 행코자 하십니까?”
하며 경자는 간절히 말하나 그 지경에 이르는 황참서야 어찌 그 말이 귀에 들어갈 리 있으리요
“흥! 그건 다 무슨 소리냐? 내 사람 노릇하려고 이런 말 하는 줄 아니? 나도 그런 줄은 대강 안다마는 누명 듣기는 일반이야.”
하며 서로 상지(서로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아니함)를 하는 판에 어디서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이놈아 이게 무슨 행위냐? 양반놈들은 모두 행세가 이 모양이냐? 우리 같은 개똥상놈일지라도 네 집 종 노릇은 할지언정 이런 개 같은 행위는 아니한다. 네가 이놈 대가리에 감투 뛰야기를 뒤집어쓰고 현숙한 며느님을 이같이 겁욕코자 하느냐? 이놈아,―이것 받아라. 나는 이 길로 네 집이 하직이다.”
하고 달려드는 사람은 그 집 하인 경천이라. 경천이는 영감 작자가 아닌 밤중에 며느리 부르는 것을 대단히 수상히 여기고 그 행색을 엿보다가 황참서의 행동이 어찌 흉악하던지 한 줄기 공분이 괴를 찌르고 일어나서 참다못하여 달려드는 것이라. 그같이 달려드는 곳에 번뜩하는 것은 육모몽둥이라 황참서의 머리를 보기 좋게 두어 번 갈기는데 황참서 눈에 불이 번쩍 나서,
“에구, 에구, 이게 웬일이야. 도적이 들었구나, 도적이야………
한 마디를 지르고 푹 고꾸라지는데, 맞은 자리에는 유혈이 임리(물이나 피 등으로 인해 흠뻑 젖어 뚝뚝 흘러 떨어지거나 흥건한 모양)하고, 다시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지라 경자는 어찌 황급하든지,
“이놈아 이게 무슨 짓이냐? 상전을 이런 법이 있느냐?”
하며 꾸짖는데 경천이는,
“상전도 잘못하면 이런 일을 당합니다. 아씨께서는 부디 만수무강합시사. 소인은 이 길로 댁 문전을 하직이올시다.”
하고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불렀더라. 이때 황참서부인은 안방에 누워서 그 남편의 미거한 것을 근심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별안간 사랑에서 왁자하는 소리가 나며,
“에구 에구!”
하는지라 깜짝 놀라 한걸음에 나가본즉 자기 남편은 유혈이 낭자하여 정신없이 엎드러졌고, 그 곁에는 며느리 경자가 섰는지라 어찌한 곡절을 몰라,
“이애, 이게 웬일이냐? 응, 이게 웬일이야? 이게 별안간 웬일이란 말이냐? 어서 말 좀 해라. 너의 시아버지는 왜 이 모양이 되었으며, 너는 왜 여기 와서 섰느냐? 대관절 이게 ―웬 까닭이냐?”
하며 묻는지라 경자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한참 주저주저 하다가,
“저도 웬일인지 모릅니다. 별안간 이상한 소리가 나기에 와본즉 이 지경이 되었습니다그려. 그런데 중문으로 달아나는 놈은 경천이야요”
대성의 모친이 그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옳다 그만하면 너가 말 아니하여도 내가 안다 네가 여기 와 선 것을 보고 너의 시아버지를 경천이가 이리하였단 말을 들은즉 가히 짐작할 일이다. 경천이는 비록 남의 집 하인 노릇은 할지언정, 천성이 본래 정직하고 의기가 있는 사람인즉, 그런 꼴을 보고 가만히 있었겠느냐? 그러나저러나 저 인물은 죽어도 싸지마는 저 모양으로 죽는 것이야 볼 수 있느냐? 우선 병원으로 보내고, 너는 옳고 그른 것을 말할 사람이 못되니, 어서 가서 일찍이 자거라”
하더니 급히 인력거를 불러 자기 남편을 태워서 병원으로 보내더라.
경자는 자기 처소로 돌아가 가만히 생각한즉,
‘잘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다시는 얼굴을 들고 사람을 볼 수가 없고, 만일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면 무슨 낯으로 대면을 하리.’
하는 생각이 나서 일단 세상을 잊을 생각뿐이요. 이다음에 발명할 기회를 기다리고자 하는 마음은 조금도 없어 자결을 하려고 수건으로 목을 매기까지 하였다가 차마 죽지 못하고 그 수건을 다시 끄른 것은, 자기 친어머니나 한 번 다시 보고 설운 사정이나 한 후에 어찌하든지 하리라 한 것이라. 이때 경자의 정형이 과연 어떠하리오.
대성의 모친은 그 밤으로 만지장서를 써서 그 아들 대성에게 부치고 그 이튿날 아침에 경자를 불러 하는 말이,
“이애 경자야, 말 들어라. 지금부터는 네가 내 집 사람이 아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옳고 그른 것을 말할 것 없고, 네가 내 집과 인연만 끊으면 고만인즉 기닿게 할 것 없다. 내가 벌써 네 남편에게 편지를 부쳤은즉, 답장 보나 아니 보나 오늘부터는 그 사람이 네 남편이 아니야. 한즉 너는 일찍 네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는지라, 그 말 듣는 경자의 가슴이 어떠하리오.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라 그러나 그 지경에 이르러 발명을 하면 쓸데 있으며, 아니 가겠다면 될 수 있으리오 가슴 속에는 평생에 풀지 못할 한을 품고 눈물을 뿌리며 인천 만석동 자기 친가를 향하여 갔더라.
머리 깨진 황참서는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하여 일주일이 못되어서 합창이 되었으나, 황참서의 병은 비단 머리 터진 것뿐이 아니오. 정신병을 겸하여 공연히 횡설수설하며 시룽시룽하는 거동이 심히 괴상한 고로, 의사가 진찰을 하여본즉 의심 없이 정신명 환자인지라. 그날로 즉시 정신병 환자 수용실에다가 두니, 황참서의 정신병으로 말하면 머리 터진 이후에 생긴 병이 아니오. 대성이 동경 보내기 전부터 시작을 하였으나 위인이 본래 어리석은 고로 그 집 사람들은 황참서가 정신병이 시초되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라. 대성이를 동경 보낼 때에도 학교라면 대기하던 사람이 어찌 유학 보낼 생각이 났으리오. 그것부터 자기 정신으로 한 일이 아니라 정신병이 시켜서 대성이를 동경 보낸 것이오. 또한 남의 부모가 되어 며느리에게 금수 같은 마음을 둘 사람이 누가 있으리오. 그것도 역시 정신병이 시킨 것이나 대성의 모친은 그런 줄은 모르고 백배무죄한 며느리 경자를 친정으로 쫓기까지 한 것이라.
그러나 대성의 모친은 그 남편의 정신병이 어찌 오래된 병인 줄 알리오. 그 풍파가 모두 그 병으로부터 원인된 줄은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병이 경천이놈에게 두골을 맞을 때에 뇌수가 상한 까닭으로 미친병이 된 줄만 짐작하여 경천이를 걸어서 경찰서에 고소까지 하였으나, 경천이는 벌써 멀리 달아난 사람이라 어디 가서 잡을 수는 없고 분한 마음은 비할 데가 없어, 그놈을 잡기만 하면 내 손으로 성명을 없애버리리라 하더라.
대성이는 경자를 이별하고 동경을 가서 국정구 반전정 망원관(望遠館)에 여관을 정하고 장차 대학교에 입학할 준비로 명치대학 예비과에 입학을 하였는데, 비록 공부하는 것도 좋거니와 경자의 생각이 아니날 때가 없어 조용히 앉았으면 경자가 곁에 와 섰는 듯, 귀에 들리는 소리가 모두 경자의 말소리 같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경자의 용모 같아 뇌수에 가득한 것이 다만 경자의 생각뿐이라. 낮이면 경자의 생각으로 해를 보내고 밤이면 경자의 꿈으로 밝히는 중인데,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와 조용히 앉았느라니까, 경자의 생각이 어찌 몹시 나던지 공부할 마음도 없어 정신 잃은 사람같이 난간에 의지하여 청천에 떠가는 구름을 유연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을 돌려서,
“에라, 이리하다가는 안 되겠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공부할 목적으로 온 것인데, 내가 만일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공부에 정성을 아니 쓸 것 같으면 무슨 면목으로 집에 돌아가 부모와 또한 경자를 보리오. 이 생각 저 생각 말고 공부를 힘써 하니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을 펴놓고 잠심하여 공부를 하는데, 이때 여중이 들어와 편지 한 장을 들이며,
“본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하는데, 대성이는 경자의 편지나 왔는가 하고 반갑게 받아본즉, 경자의 편지는 없고 자기 모친의 편지뿐이라 그 편지를 들고 혼잣말로,
“경자는 어째 편지도 한 자 아니하였노? 제가 만일 내가 저 생각하느니보다 반만치만 나를 생각할 것 같으면 어찌 편지 한 자를 아니하였으리! 에그 야속도 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아마 어디를 앓든지 무슨 일이 있기에 편지를 못하는 것이니, 성한 사람이야 편지를 아니할 리가 있나? 어머니 편지를 보면 알겠지.”
하며 그 모친의 편지를 떼어보니 편지 사연에 하였으되,
‘만리원로에 너를 보내고 무사히 도착하였는가 하여 지극히 염려하던 차에 편지 받아보니 반가운 마음 측량없다마늠 집안에는 그 사이 변괴가 있어 남부끄러운 말은 이루 다 할 수가 없다. 네가 멀리 있어 이 말을 들으면 오죽 놀라겠느냐마는, 차마 말을 아니할 수 없어 두어 자 기별하는 것이니, 너는 부디 놀라지 말고 너그럽게 생각하여 공부나 잘 하도록 하여라. 세상에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이루 측량할 수 없는 것이나, 어찌 경자의 마음이 그같이 부정할 줄이야 누가 알았느냐?’
대성이가 편지를 보다가 이 말에 다다라서는 얼굴빛이 변하며,
‘에구, 이게 웬 말씀인가? 경자가 무엇을 잘못하였기에 마음이 부정하다고 하셨노.’
하고 그 편지를 못 보고 우두커니 앉았다가 그 아래를 다시 보는데,
‘너는 경자 알기를 여중군자이나 다름없이 여겼으리라마는, 그런 인물에게 속는 것은 더욱 분한 일이 아니냐? 나도 역시 경자를 보고 숙덕이 그만하면 가히 어진 며느리가 되겠다 하였더니, 실상은 그렇지 못하니 가히 통곡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그 사람은 벌써 황천에 간 사람인즉.’
이 말에 이르러서는 정신이 아득하여 편지 글자가 깨알만하여 보이며, 가슴이 막혀 거의 기절을 할 지경이라. 손에 들었던 편지를 땅에 던지고 책상머리에 엎디어 정신을 진정하다가,
‘경자가 죽단 말이 웬말인고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대관절 무슨 까닭으로 죽었나? 편지를 마저 보겠다.’
하고 다시 그 아래를 계속하여 보니,
‘죄목을 장황히 말할 것은 없고 그 대강 사실만 말할 터이니, 이런 말을 듣더라도 너는 부디 타락심을 두지 말고 공부 잘할 생각이나 하여라. 내가 너의 혼인을 정할 때에 여학생이라면 대기를 하였더니, 어찌하여 여학생 며느리를 얻었던지 모르겠구나. 경자가 너 떠난 후 며칠 못되어서 경천이놈과 더러운 행실을 하다가 내게 발견된 바가 되어 경천이놈은 달아나고, 경자는 제 부끄럼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제 목숨을 제가 자처하였으니, 세상에 이런 변도 있느냐? 경자의 행위가 그토록 할 줄이야 어찌 꿈에나 생각하였으리! 집안이 결딴나려면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그런즉 이 지경된 일을 어찌할 수 있느냐? 그런 소문도 내지 않고 아는 듯 모르는 듯 경자의 장사까지 지냈는데, 너의 아버지께서는 그로 심화가 되어 병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너는 이 편지 보고 부디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잘하여가지고 나와서, 늙은 부모를 위로하게 하여라. 사나이가 세상에 나서 일평생을 지내자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느니라. 네가 공부만 잘하여 박사나 학사가 되어 나올 것 같으면 어디 신부 없어 장가 못 들겠느냐? 그런즉 부디 경자같이 더러운 인물 생각하지 말고 아무쪼록 공부 잘하여라. 네가 만일 이 편지 보고 집으로 돌아온다든지 하면 우리 모자간에 의절을 할 것이니, 너는 깊이 생각하여 공부를 하든지 말든지 네 마음대로 해라. 총총 이만 그치고 남은 말은 다음 편지에 하겠다.
년 월 일
모서’
라 하였더라.
대성의 모친이 이와 같이 거짓말로 대성이를 속인 것은 불가불 집안에 풍파 생긴 일을 통기 아니할 수 없고, 또는 경자와 인연을 끊어야 할 터인데, 만일 이실직고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금수의 행실이 있다 할 것 같으면 대성이가 부끄러운 마음에 어찌할는지 모를 것인 고로, 경천이놈과 추행이 있다 한 것이요 경자가 죽었다 한 것은 저희끼리 서로 통신이나 할 것 같으면 자기 편지가 거짓말이 되어 모자지간에도 신용을 아니할 터인 고로 경자는 죽었다 한 것이오. 또한 대성이가 그 편지를 보고 집으로 돌아올 것 같으면 비록 공부도 못할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불편한 일이 생길 터인 고로 ‘네가 만일 집으로 나오면 모자간에 의절을 하겠다’고 단언을 한 것이라. 대성이가 그 편지를 받아보매 어찌 기가 막히든지 정신을 잃고 앉았는 중에, 신세 생각이 나서 자탄을 하는 말이라.
“세상에 믿을 사람이 도무지 없구나. 나는 경자를 믿기를 태임태사의 후신인 줄 알았더니,'오늘날 이러한 변괴가 날 줄 뉘 알았으리! 그런즉 이 내 신세를 장차 어찌한단 말이냐? 세상에 기막히는 일도 있다. 그러나 우리 부모께서 그런 꼴을 보시고 오죽 화증이 나실라구? 내가 지금으로 떠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를 위로하고 싶다마는, 어머니 편지에도 오지 말라고 하셨거니와, 어찌 내가 면목을 들고 어찌 남을 대할 수 있나. 에라, 이 지경된 놈이 공부는 하여 무엇하겠느냐. 어머니께서는 타락심 두지 말고 공부 잘하라고 천번 만번 부탁을 하셨다마는, 마음에 있어야 공부도 하지, 글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공부가 되어야 아니하느냐. 내가 이 길로 떠나, 세계 각국 구경이나 하고 죽으리라”
대성이는 신세 한탄이 변하여 세계 각국 구경이 되더니, 잠시를 머무르지 못하고 그시로 발정을 한다. 일변 보이를 불러 숙박료 셈도 하고, 일변 행장도 수습하여 즉시 정거장으로 나가서 그 모친에게, 미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난다는 편지 한 장을 부치고 곧 횡빈(요코하마)행 열차를 타니, 대성이는 장차 세계 유람객이 될 모양이더라.
경자는 홍안박명을 한탄하며 자기 친가로 돌아가니, 그 모친은 아무 까닭 모르고 그 딸이 별안간 친정에 오는 것을 이상히 여겨,
“너 어찌 또 오느냐? 여자라 하는 것은 시집살이에 재미를 붙여야지. 친정을 자주 다녀서는 못쓴다. 네가 다녀간 지가 한 달이 못 되는데 그새 무엇하러 또 왔느냐?”
하며 묻는데, 경자는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어 다만 기둥을 안고 서서 흐르는 눈물을 금치 못할 뿐이라 그 모친이 경자의 눈물 흘리는 것을 보매 더욱 이상하여,
“너 울기는 왜 우느냐? 아마 네가 무엇을 잘못하고 시부모에게 쫓겨온 것이로구나. 너 무엇을 잘못하였느냐? 여자가 시집을 살자면 삼년 벙어리가 되어야 한다는데, 너는 내게 응석하던 버릇으로 시부모에게 불경히 하였나보구나 어째서 왔느냐? 말이나 시원히 하여라.”
경자가 겨우 하는 말이,
“잘못한 일이나 있으면 무엇을 한탄하리까마는, 팔자가 기박하니까 별일을 다 보겠어요”
하며 느껴가며 운다.
“너 쫓겨오기는 정녕 쫓겨왔구나. 어서 바른대로 말해라 네 시집에서 가라고 하더냐?”
“왜 말 아니하니? 너의 시어머니가 가라고 하더냐?”
경자는 마지못하여 대답 한 마디를 한다.
“네 ―.”
“네가 무엇을 대단히 잘못한 것이로구나. 여간 잘못하여서야 쫓기까지 할 리가 있느냐? 대저 남부끄러운 일이다. 계집이 시집을 못살고 쫓겨온 이상에야 그 신세 다 보았지, 장차 무엇을 한단 말이냐. 그러나 무엇을 잘못하고 쫓겨왔느냐? 말이나 좀 해라.”
경자는 비록 친부모일지라도 그 사실대로 차마 말할 수가 없어 주저주저하며 아무 말 못하다가,
“잘못한 일은 있으나 없으나 이 모양 되기는 일반인즉 잘잘못은 알아 무엇하십니까? 잘못한 일이나 있고 이 지경을 당하였으면 원통하지나 않겠어요.”
“그게 다 무슨 소리냐? 네가 잘못한 일이 없으면 어느 몹쓸 시집이 사람을 저 모양을 만든단 말이냐? 대관절 무슨 일이야? 어미에게 이야기 못할 것이 무엇 있어?”
“차차 아시지요. 그리 급하십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부모가 되어 자식이 저 모양된 것을 보고 어찌 궁금한 마음이 없단 말이냐? 어서 말해라.”
경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음반 말반 간신히 하는 말이,
“모두 시아버님 까닭이야요.”
“그래, 시아버지 까닭이면 네가 시아버지에게 잘못한 일이 있단 말이냐? 시아버지가 무단히 너를 쫓더란 말이냐?”
“차차 아시지요 차마 말할 수가 없어요.”
“이상도 하다. 어미에게 차마 못할 말이 무엇이야?”
“그런 게 아니라, 시어머니께서 시아버님을 의심하고 저를 쫓는답니다.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단 말씀이오?”
경자의 모친이 그 말을 듣더니 얼굴에 노기를 띠고 분함을 참지 못하니 벌벌 떨며 하는 말이,
“그게 다 어디 당한 말이냐? 그 집안 큰일 난 집안이로구나. 어느 못된 부모가 자식에게 더러운 마음을 두리라고 그 자식을 의심하여 친가로 쫓는단 말이냐? 허―, 그것참 이런 변괴가 어디 있어? 이것은 법사에 가서 재판이라도 할 일이로구나 그러나 이말 저말 다해 쓸데없다. 이것은 도시 너의 남편이 없는 까닭이다. 그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이런 일이 있을 리 있느냐? 그런즉 이제는 별 수 없다. 그런 무식한 것들과 이러니저러니 시비할 것도 없고 너의 남편 돌아오기나 기다려서 좋도록 조처하니만 같지 못하다. 어서 올라오너라.”
이때 경자도 역시 부끄럽고 분한 마음으로 할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자결이라도 하고 싶지마는,
‘내가 만일 죽고 볼 것 같으면 그 누명을 벗을 수가 없을 것이오. 또한 남편이 돌아오는 날이면 자기의 애매함을 알 것이니, 내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을지라도 마음을 썩이고 남편 돌아올 때를 기다리리라.’
하여 눈물을 거두고 그 모친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서 벼루를 내어놓고 원통한 사실로 편지를 써서 우선 그 남편 대성에게 부쳤더라.
경자가 그 남편에게 편지를 부치고 답장 오기를 고대고대하는데, 그같이 기다리는 답장은 소식이 묘묘하고, 무정한 세월은 자동차 바퀴 돌 듯 핑핑 돌아가니, 어언간 서리 찬 새벽하늘에 기러기소리가 나는 지라. 경자는 답장을 기다리다 못하여 일변으로 궁금한 생각도 나고, 일변으로 의심도 없지 아니하여 여러 가지로 마음이 산란하더니, 나중에는 야속한 생각이 장마에 샘솟듯 하며, 그 마음이 진하는 끝에는 자기 신세 한심한 생각이 나서 서글픈 마음을 스스로 진정치 못하고 때때로 막막한 해천을 바라보며 한숨으로 세월을 보내니, 경자의 불쌍한 줄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 누가 있으리오. 다만 자기와 자기 모친 두 사람뿐이라. 경자가 만일 그 가슴 속에 맺힌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생명을 하루도 부지할 수 없으나 육십 노모를 생각하여 차마 할 수 없는 고로 태산 같은 근심을 뇌속에만 넣어두고 가고 오는 세월을 하루 이틀 보내느라니, 그 사람의 정형이 과연 어떠하리오. 그러나 경자는 원래 천성이 단아한 여자인 고
로 그러한 수색을 외면에 나타내지 아니하고 그 모친을 지성으로 공궤하며 허구한 세월을 보내더니, 하루는 자기가 남편에게 부친 편지가 도로 반환이 되었는데, 피봉에 쓰기를 ‘영수인이 없어 전하지 못한다’ 하였는지라 그 편지가 오래간만에 반환된 것을 보매 궁금한 생각이 다시 나서,
‘에그 이게 웬 까닭인가? 영수인이 없어 편지를 전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우리 남편이 그사이 어디로 여관을 옮겼는가 집으로 돌아왔는가? 거처가 분명할지면 편지 못 전할 리가 없는데, 이것이 어찌된 곡절인고? 팔자가 기박한 사람의 일은 매사가 모두 이렇게 되나 에그 참 기막히는 일도 있다.’
하며 일변 서울 자기 이모집으로 편지를 부쳐 그 남편의 종적을 탐지하니, 그 이모는 기별하기를,
‘황씨의 집에 그러한 풍파가 생긴 후로는 무안하여 다시 가지도 못하거니와 대성의 소식은 본가에서도 알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하였는지라, 경자가 그 후부터는 근심이 진하여 심화가 나며 우연히 병이 들어서 점점 침중하여 가니, 그 병은 심화로부터 생긴 병인 고로 증세가 과히 급하지는 아니하나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점점 골수에 침입하여 음식이라고는 냉수밖에 먹는 것이 없고, 신체는 피골이 상련하여 그와 같이 어여쁘던 인물이 전 모양은 조금도 없는데, 한 해 두 해 지나 삼사 년이 되더니 병은 더욱더욱 침중하여 치료할 기망은 조금도 없는 중, 마음속에 항상 한 번만 다시 보기를 원하는 대성이는 그림자도 구경할 수 없는지라. 그 모양이 되어 가만히 생각한즉 자기 신세는 아무 여망이 없을뿐더러, 하루를 이 세상에 더 있으면 하루 고생이 더 될 것이요. 이틀을 이 세상에 더 있으면 이틀 고생이 더 되어 이 세상에 있는 날까지는 점점 고생만 할 터이라. 육십 노모를 두고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하직하는 것은 불효가 막심하다 할지나, 근심 설움이 뇌수에 젖어 아무
생각도 할 것 없이 단지 하루바삐 이 세상을 이별할 생각뿐이라. 그러하므로 하루는 뇌에 가득한 독한 마음을 차마 이기지 못하고 자기 생명을 자진할 작정으료 그 모친에게 일본공원으로 산보간다고 핑계를 하고 해안을 향하여 나가는데, 이때 경자의 가슴 속은 이루 어떻다고 형용할 수 없는 터이라 한 발을 내어놓다가 다시 그 모친을 돌아보니, 눈에는 피눈물이 나올 듯하여 억지로 참고 또 한 발을 내어놓다가 정신이 아득하여 대문 기둥을 붙들고 시름없이 섰기를 한동안 하니, 그 모친은 경자의 마음 속에 그러한 생각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고 경자의 척골(너무 슬퍼하여 몸이 비쩍 마르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남)된 것이 뼈가 아프도록 불쌍하여 목이 메어서 경자를 부르며,
“이애, 경자야 이애 경자야 저렇게 기운 없는 사람이 공원을 어찌 간단 말이냐? 의사의 말은 네 병이 신선한 공기가 약이라더라마는, 대문을 못 나가서 기력이 부치는 사람이 공원을 어찌 갈 수가 있느냐? 아서라, 이리 들어오너라. 산보도 성가시고, 공기도 성가시다. 다 고만두어라”
하는 말소리는 더욱 경자의 가슴을 써는 듯하여 차마 가고 싶지 아니하나 자기는 어느 때 죽든지 그 모친보다 먼저 죽어 가슴 속에 불을 묻기는 일반이라 이왕 결심한 바를 중지할 필요가 없다 하여 그 모친을 돌아보고,
“아니올시다, 관계치 않습니다 이왕 나선 길이니 잠깐 다녀오리다.”
하고 다시 공원을 향하여 가는데, 한 걸음 걷고 집 한 번 돌아보고, 두 걸음 걷고 바다 한 번 내다보니, 죽기로 결심한 경자가 무엇이 그리 어려우리요마는, 대저 사람이 이 세상을 한 번 이별하기도 지극히 애석할 뿐 아니라, 사람의 애정이라 하는 것은 어찌할 수없는 것이라 경자가 자기 신세는 비록 그와 같이 처량하게 되어 죽고 또 죽을지라도 그리 아까울 것이 없으나, 그 노모의 정형을 보고 죽을 일을 생각한즉 차마 발길이 아니 떨어져 종내 그리하는 것이라. 그와 같이 어려운 길을 몇 시간이나 갔든지 일본공원에 다다라 분수탑 앞에 앉으니, 그 남편이 동경 떠날 때에 그 자리에 마주앉아 서로 이야기하던 생각이 나며 신세 한탄이 저절로 다시 나서 무한히 탄식을 하다가 마침내 모진 마음이 극도에 달하여 손가락을 깨뜨려 혈서를 써서 그 시집으로 보내고, 자기는 그 모친의 만수를 축하한 후 시끼시마 해안에서 옥 같은 몸을 만경창파에 던진 것이라 슬프다, 경자의 일신이여! 그 같이 애절하는 모친을 이별하며, 또한 그같이 사랑하던 남편을 다시 못 보고 그 지경까지 하였으니, 이때 만일 경자를 구하는 사람이 없어 영원히 용궁으로 갈 것 같으면 그 애원하고 가련한 혼백이 어찌 천고에 흩어질 수 있으리요마는, 사람의 생명이라 하는 것은 천하에 지귀지중한 것이라. 그와 같이 액색한 때에도 요행으로 일선양맥이 회복하는 수도 없지 아니한 법이라. 경자의 일신이 물결에 떨어지는 소리가 ‘풍―덩’ 하며 놀란 파도가 ‘철썩철썩’ 해안을 때리자, 사면이 괴괴하여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더니 어디서 난데없는 배 한 척이 살 닫듯 들어오니 그것이 실로 경자의 일선양맥이더라.
그 배 한 척이 그같이 빨리 오다가 경자가 물결에 떠서 흑흑 느끼는 소리를 듣고,
“에그 여기 사람 빠졌다.”
하더니 급히 달려들어 경자를 건져서 뱃머리에 엎어놓고 저희끼리 하는 말이 귀둥대둥하는데,
“이애, 하이칼라로구나 이런 하이칼라가 무엇이 원통해서 바다에 빠졌어?”
“이놈아 남의 원통한 일은 알아서 무엇하니? 이 사람은 내가 먼저 건졌으니까 내가 데려가겠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경자의 용모를 자세자세 보다가
“에그 이 아씨가 이게 웬일인가?”
하며,
“에라, 잔소리를 마라. 이 아씨는 서울 양반댁 며느님이다. 너희들은 모르리라마는, 이 아씨는 지극히 불쌍한 이다. 여북해서 이 지경을 하셨느냐? 그러나 우리가 마침 이곳을 온 것이 지극히 다행한 일이로구나.”
하더니 경자의 몸을 흔들며,
“아씨 아씨, 정신 차리십시오 아씨께서 이게 웬일이십니까?”
하는데 그 옆에서 지껄이던 두 사람은,
“아따, 그놈 흉측도 하다 이놈아, 네가 그리하면 내가 속을 듯싶으냐? 암만해도 저 사람은 내가 데려갈 터이다.”
하며 농담 비스름하게 지껄일 즈음에 경자가 정신을 차리고, ‘아씨’ 부르는 사람을 한 번 돌아보더니, 별안간 깜짝 놀라며,
“에그 네가 누구냐? 경천이가 아니냐?”
하더니 다시는 아무 말 못하고 다만 두 눈에 눈물이 비 오듯 할 뿐이더라. 그 사람은 곧 황참서를 때리고 한 번 도망을 한 후에 다시는 종적이 없던 경천이니, 그 경천이는 황참서가 정신병으로 경자에게 그러한 해거를 하는 줄 모르고 공분이 상투 끝까지 치밀어서 황참서를 때리고 도망을 하는 길로 각처로 돌아다니며 노동생활을 하다가, 어찌어찌하여 인천 상선회사 화륜선 대붕환(大鵬丸) 보이가 되어 여러 해 해상생활을 하더니, 그날은 동지자 삼인이 작반하여 시끼시마로 술을 먹으러 오는 길에 마침 경자를 구한 것이라. 이때 경천이가 경자의 회생하는 것을 보더니 비절비절 울며 목이 메어 하는 말이,
“아씨, 이게 웬일이십니까? 이게 웬일이셔요? 아씨는 제, 소식을 모르셔도 저는 아씨 소식을 가끔 듣조왔습니다마는, 아씨가 지금은 비록 고생이 되실지라도 서방님만 오시면 춘풍화기가 다시 회복할 터인데, 왜 이 같이 망령된 생각을 하신단 말씀이오? 아씨야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무 때라도 발명할 날이 있을 것이어늘 왜 이런 생각을 하십니까?”
경자는 정신이 혼미하여 그 말대답도 아니하고 죽은 사람 같이 엎디었는지라. 경천이가 경자의 젖은 옷을 이귀저귀 쥐어짜서 등에다 들쳐 업고 만석동 친가로 가니, 이때 경자의 모친은 일본공원 일폭을 샅샅이 찾아다니다가 종시 경자의 종적을 모르고 집으로 돌아와 울고 앉은 판이라. 자기 생각에는 경자가 별 수 없이 자처한 사람으로 알아 애통함을 마지아니하며 정신없이 앉았는 차에, 마침 경자가 온몸에 물을 흘리고 어떠한 사람에게 업혀 오는 것을 보더니, 일변 기쁘고 일변 놀라와서 한걸음에 뛰어나가 경자를 붙들고 울며 하는 말이,
“에그 네가 끝에나 이 지경을 하였구나. 내 그저 이러할 줄 알았다. 이년아 이 몹쓸 년아, 늙은 어미를 두고 이게 무슨 몹쓸 짓이냐?”
하며 느껴가며 우는데, 경천이는 경자를 업어다가 내려놓고,
“마님, 소인 물러갑니다. 소인은 다른 놈이 아니오라. 본래 아씨댁 하인 경천이온데, 소인은 댁에 죄를 짓고 도망을 하였던 놈이올시다. 죄는 다른 죄가 아니라, 우리 댁 영감 황참서가 현숙하신 마나님에게 불의 행동을 하기에 소인이 어찌 분하던지 당돌히 영감을 한 번 해내고 그 길로 달아나서 사면팔방 다니다가 천행으로 오늘날 아씨를 구하였사오니, 소인 마음에 이같이 다행할 데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조례나 잘 하여드립시오.”
하는데, 경자의 모친이 그 말을 들은즉 그 사람은 비록 하천배일지언정 지극히 정직한 사람인 고료 마음에 비상히 탄복하여 감사한 치하를 무수히 하고 그 사람의 주소를 자세히 물은 후 술 한 잔을 먹여 보냈는데, 경자는 원래 신병이 침중한 사람으로 그 지경을 하였으니, 어찌 그 병이 더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해변에서 경천이에게 업혀온 후로 그날 밤새도록 아무 정신 모르고 앓을 뿐 아니오. 그 이튿날 아침부터 병증이 더욱 심하여 하릴없이 생명을 부지 못할 지경이라. 경자의 모친은 생각다 못하여 할 수 없이 경자를 인천병원에 입원을 시켰더라.
경자의 신세가 비록 그 지경이 되었을지라도 그 남편 대성이는 항상 마음속에 맺혀 있어 죽을 때까지는 대성이를 잊을 수 없는 터인데, 경자의 가슴에 그와 같이 맺혀 있는 대성이는 그 모친의 편지를 보고 세상만사가 모두 귀치아니하여 세계 만국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즉시 횡빈으로 나가 미국으로 가는 화륜선에 오른지라. 그러하므로 경자의 우체 편지도 전하지 못하고 본가에서도 소식을 모른 것인데, 대성이가 화증김에 떠나기는 하였으나, 급기야 미국 화성돈(워싱톤)을 가서 문명국의 성대한 풍물을 구경한즉 조선 사람의 우매한 한탄이 스스로 뇌수에 충만하여,
‘우리 조선 경성도 어찌하면 이와 같이 될꼬?’
하는 생각이 나며, 자기도 이왕 그러한 곳에 와서 문명지식을 품고 돌아가면 만분지일이라도 문명진화에 유조할까 하는 뜻이 있어, 곧 화성돈대학교 의과(醫科)에 입학하고 속마음에 작정하기를,
‘편작이나 화타가 되어 고국을 돌아가서 병든 동포를 건지고 고명한 의술을 후생에게 전하리라.’
하여 촌음을 아끼며 열심으로 공부를 하더라.
≪우리의 가정≫, 1914. 1. ~ 11.
-끝-
2016년 12월 13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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