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푸릇한 날, 화가 김종의 그림을 만났다. 그의 그림은 무연한 행인인 나의 손을 덥석 붙잡아 무릉도원으로 안내하겠다는 듯 화폭 속으로 이끌더니, 눈을 빨아들이고 종국에는 그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나의 영혼을 매료시켰다. 닭과 달걀의 논의가 아니더라도 화가 김종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된 듯한 환시의 착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은 작가가 시인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하여 시의 이미지에 몸이 내리면 그림이 태어나고, 그림이 몸을 일으켜 언어의 날개옷을 입으면 시로 환치되는 과정이 작가의 핏줄을 타고 순환하기 때문이리라.
모든 물상은 화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세포상태로 분해되고 해체된 다음 재구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작가에 의해 재창조된 파동은 제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은 본래의 파동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가령 무선방송에서 저주파의 신호가 고주파의 반송파((搬送波)에 중첩되었다가 수신할 때는 원상복귀 되듯이 감상자의 개인적 경험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새로운 美感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듯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화폭은 평면성을 탈피하고 반구상의, 4차원의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반수반인(半獸半人)인 스핑크스에서 우리는 신화나 전설을 꿈꾸게 된다. 그렇듯이 그의 반구상의 화면은 무량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바야흐로 작가의 감정이 그림을 타고 감상자의 마음으로 이입되는 것이다. 독일철학자 롯체의 말처럼 ‘美的 경험은 조화와 통일성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의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낯선 반구상의 구도가 마치 원초적 모습이었던 것처럼 친숙하게 감상자의 정서 속으로 다가온다. 시인 정중수의 표현처럼 ‘내 마음에 손을 집어넣는 그림’인 것이다.
그 도저한 상상의 바다에 일단 몰입되면 헤엄칠 생각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어느 찰나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떠올라 하늘의 젖가슴을 만지게 되고, 유유자적 떠가는 구름 위에서 모태의 양수에 잠겨있는 것처럼 편한 유영을 하게 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울림이 깊은 종소리에 영혼이 녹아들 듯 출렁이는 이미지의 역동성에 흡인되어 언어와 그림의 방식을 떠나 또 다른 차원으로 이입되는 시공의 파천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물아일체, 화아일체(畵我一體)가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대하면 태초에 그랬듯이 예술의 모든 장르가 한 탯줄의 살붙이임을, 춤이나 노래나 문학이나 그림이 한 몸인 것을 절로 알게 된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산이, 강이, 달이, 태양이, 꽃이, 소나무가 마음을 열어 말을 건넨다. 마음의 고막이 떨려 노래가 들리고, 그 흐드러진 곡조에 맞추어 어깨가 들썩인다. 동굴처럼 굽이굽이 휘감긴 마음의 여로에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구석구석 어루만지듯 흥이 일어난다.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일찍이 예지했기에 톨스토이는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의 척도를 ‘정서의 감염정도’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恨을 희망의 美感으로 승화시키다
색채가 화가로부터 선이라는 영매를 통해 형체를 받으면 마음이 깃들어 생명체가 되고 그 생명체 속에 인간의 영혼이 투영된다. 한 점의 좋은 그림이 그 자체로 창조물이 되는 것은 그 그림을 보는 이의 영혼의 눈을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름다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화가 본인이 파란만장한 질곡의 세월을 맨발로 건넌 순례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恨의 중심에 서있으면서도 恨의 나락으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恨을 생의 구심점으로 승화시켜 따뜻한 시선으로 녹여낸다. 그리고 그림 속에는 희망의 원심력을 펼쳐놓는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는 활기를 넘어선 生氣가 넘치고 감상자의 기분까지 들어 올려주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그래서 평론가 염창권도 “나는 그의 그림을 보기보다는 읽으면서 그의 평화로운 세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심중을 밝혔으리라.
모든 색이 아름답듯이 모든 사람이, 아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아름답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김종의 그림은 마치 手話처럼 또 다른 언어로 우리와 소통한다. 그래서인지 김종의 그림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보는 이의 상상력을 경계 없이 자극한다. 꽃이 아라베스크 춤사위로 발레를 하고 분기탱천한 수탉무리가 볏을 세워 당돌하게도 태양에의 역성혁명을 꿈꾼다. 보름날이면 대게들이 오종종 모여 주흥 도도한 어깨를 겯고 달구경을 하고, 강물은 여섯 개의 예쁜 가슴을 탐스럽게 출렁이며 흘러간다. 가까이 다가가 살포시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화가 황영성의 말처럼 ‘긴 이야기를 지켜보는 행복한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나누어 천지를 연 것처럼
담론을 즐기며 회합하던 산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서로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설악산은 품 넓은 바다에 빠져서 봉우리가 쑥쑥 자란다. 깊은 산속의 바위들은 바깥세상이 궁금하여 엉거주춤 목을 길게 빼고 궁금한 세상을 향하여 두리번거린다. 그림 속의 산으로 들어가 바위와 맞닥뜨려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 뒤 세상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하고 싶어 발가락이 간지러운 나무들은 옆지기와 뿌리가 엉기고 팔을 뻗어서 가지끼리 입을 맞추고 종단에는 핏줄을 열고 샴쌍둥이처럼 생명을 공유하게 된다.
작가와 감상자가 연리목처럼 한 몸이 되어 심장을 공유하고, 꽃과 향기를 공유한다. 피아(彼我) 고막의 동일한 떨림을 통하여 그들의 속삼임에 청각이 열린다. 그림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꽃으로 피어나고 꽃잎이 분분히 날린다. 그리하여 천지간이 꽃잎천지로 형상화되어 꽃잎 사이사이를 사물이 떠다닌다. 꽃잎은 그 자신이 아름다운 영혼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야래향처럼 칠흑어둠을 뚫고 다른 영혼의 후각세포를 흔들어준다. 그래서 작가 조정래는 그의 그림을 보고 “파격을 넘어 혁명적이다. 시인의 영혼이 포착해낸 회화적 필연성이 화가의 영혼으로 꽃피움하고 있다.”고 설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최근작 ‘만남’을 보면 우선 첫인상에는 화폭중심에 허공의 눈인 듯한 두 눈망울이 들어온다. 그러나 골똘히 들여다보면 한 쌍의 부리와 두 쌍의 날개가 허공을 감싸 안고 있다. 아하! 숨은 그림을 찾아냈을 때처럼 무릎을 치면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허공을 갈라놓은 척 하면서 기실은 서로의 입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광대무변의 허공에서 인연의 옷깃처럼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친불친(親不親)을 따지지 않고 더불어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의 다정다감한 심성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나무와 물과 산의 삼각 함수는 화가에게 숙명적인 몰입의 대상이다. 그들의 상생관계를 거쳐서 화폭 속의 사물은 태어나고, 자라고 마치나 강강수월래를 추듯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린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화가의 정신이 빙의된 산천초목이 마음을 열면 감상자의 마음도 그림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화폭 속의 피사체들은 독특한 개성미를 구가함으로써 끊임없이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개성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진리처럼 보편타당한 우주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아낸 색채의 마력(魔力)
평론가 리헌석은 일찍이 김종의 그림을 평하기를 ‘목숨의 소리가 색채로 거듭났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색(色)에도 희로애락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경이롭게 펼쳐 보인다. 똑같은 빨강도 서러운 빨강이 있고 오르가즘에 도달한 듯한 환희의 빨강이 있다. 생의 발자국을 뒤돌아보면 아무리 아팠던 상처도, 아무리 좋았던 황홀경도 기억의 가마솥에서 노릇노릇 구워져서 고소한 추억으로 정화된다. 그러하듯이 ‘색채는 모두 아름답다’는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미운 색채도 그림의 자궁인 그의 붓길을 돌아 나오면 첫 호흡의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고 새 생명의 오묘한 빛으로 거듭난다.
한편 화폭을 활기차게 넘나드는 색층의 광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마치 태초에 조물주가 빛과 어둠을 나누어 천지를 연 것처럼 선(線)이 안과 밖을 구분하여 그림의 천지를 열면 색채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분신술을 쓰듯이 메워 나간다. 분신술에 등장하는 사물은 복제품이 아니다. 한 개의 점도 똑같은 것이 없다. 똑같은 색상도 칠하는 순간의 작가의 마음과 붓놀림에 따라 울었다가 웃었다가 찡그렸다가 오른 무릎을 괴고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 화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림 속의 사물이 움직이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김종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이 한 편의 시처럼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마술을 부리듯 오만 갈래로 갈라지는 심중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의무봉같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그의 美感 속으로 홀려 들어가게 됨을 어쩌랴.
(태양을 들어올리는 사람들)
그림을 시작하면서 작가가 출사표로 던졌다는 ‘백치의 머리와 색맹의 눈으로’라는 표제를 음미해본다. 백치의 머리란 무엇인가. 갓 태어난 신생아의 뇌처럼 어떤 편견도 없는 원초적이고 순수한 생명성의 추구,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어쩌면 무모에 가까운, 그러기에 한없이 고적(孤寂)할 그만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였을 터이다.
한편 색맹의 눈은 어떤 시력인가. 그가 말하는 색맹이란 청홍색맹처럼 한두 가지 색을 구분 못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전색맹처럼 명암으로만 색의 순수성을 느끼고자 했을 것이다. 맹인이 점자책을 더듬어 읽듯이 청각과 촉감에만 의지하여 사물의 깊이를 파악하다보면 정상인에게서는 퇴화되어버린 미려한 五感이 열린다고 한다. 맹인이 수수만 번 넘어지고 깨진 피투성이 상처가 온몸에 비단구렁이의 무늬처럼 감길 때에야 비로소 암흑 속에 열리는 그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듯이 그의 오감도 그렇게 참담한 상처들을 앓고 난 후에야 그들을 버팀목삼아 환하게 열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오감이 더듬어낸 색채는 다양한 명줄들의 온갖 명암을 반사하는 풍부한 표정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얗게 길을 막아섰던 새벽안개가 걷히듯
또한 그의 작품전(백두대간의 생명미감전)의 주제인 [자궁에서 왕관까지]에서 ‘한라산 백록담이 자궁으로, 백두산 천지가 우리 민족의 머리 위에 씌워진 한없이 아름다운 왕관의 형상으로 내게 다가왔다’고 작가는 고백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속내를 살풋 감춘 말일 듯싶다. 아무튼 백두대간의 이미지를 그리 형상화시킨 것도 가히 천재적인 발상이지만, 나는 임의로 그 주제의 속뜻을 자궁은 화가 본인으로, 왕관은 그의 그림과 만나는 감상자들의 영혼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될 수많은 영혼들과의 대화를 상상하면서 섬김의 정신으로 작품을 완성했으리라.
자신의 자궁에서 빚어낸 그림들에게 젖을 먹여 키워낼 사람은 그림의 감상자들임을 작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다. 자신의 자식들을 양육할 양부모들에게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그는 노심초사 자신을 달구었으리라. 작가로부터 왕관을 받아쓰면서 어느 누가 그가 창조해낸 세포 하나, 붓이 걸어간 한 획, 한 줄기의 색층도 소홀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작가가 천지를 채색할 때 주로 붉은색을 쓰는 이유이다. 왜 작가의 눈에는 시퍼렇게 출렁이는 천지의 물빛이 핏빛 같은 선홍의 색채로 다가간 것일까? 화가의 시각적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은 무엇인가. 천지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국토의 왕관이다. 왕관이란 두건처럼 아무나 머리에 쉽게 뒤집어쓰는 물건이 아니다. 한 국가를 대표하고 백성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지존인 임금만이 쓸 수 있는 금빛 찬란한 상징물이다. 작가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민족의 수천 년의 역사와 애환을 회억하면서 물결치는 가슴으로 민족의 영지(靈池)인 천지의 머리에 핏빛 왕관을 씌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천지의 붉은 색층을 이윽히 들여다보면 뭔지 모를 비장함이 나의 가슴을 들썩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의 그림 속을 거니노라면 우리가 닮고자 했던 큰바위얼굴이, 우리가 찾고자 했던 무릉도원이, 길을 하얗게 막아섰던 새벽안개가 떠오르는 햇살에 말끔히 걷히듯 명징해진 우리들 마음속에 비쳐오는 또렷한 신천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무슨 복이 이리 많아 그의 그림을 만나게 되었고 그림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환상을 경험하게 된 것인가.
다음 작품전에 대한 그리움의 활시위가 팽팽하다
작가는 다음 작품전(2009.11.5-11 광주광역시 금호미술관 등)을 준비하면서 허공의 상차림에 끼어든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허공이 수족을 움직여 천지간에 조화를 부리는 한, 호기심에 달뜬 나의 시야는 광각화될 수밖에 없다. 허공은 불가사의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비누방울 같은 덩어리 덩어리로 바람도, 나무도, 바위도, 해와 달, 날아다니는 새무리까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항상 새로운 상을 차려낸다. 수십 억 인구 중에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날마다 떠오르는 해도 똑같은 빛이 아니다. 그래, 그것들을 나는 주체 못한 가재도구처럼 여기저기 흩트려 놓고 예술의 강가에 나와 배가 불심하게 물을 마시고 강물에 잠겨 숲을 짓고, 태양을 띄우고, 저마다의 기기묘묘한 심지에 불을 밝힌다. 상상력의 뭉게구름을 타고 주유천하하는 재미, 허공이 끄집어낸 것들을 빌어 쓰면서도 내 곳간에서 꺼내 쓰는 것처럼 자유롭게 내 화판 위에 처억 척 올려놓는다.” 작가의 辯이다. 시인 화가의 독특하면서도 섬세한 눈으로 담아낼 불가사의한 허공의 그 무량한 화폭을 향한 그리움의 활시위가 벌써부터 팽팽하다.
어느 푸릇한 날, 화가 김종의 그림을 만났다. 그의 그림은 무연한 행인인 나의 손을 덥석 붙잡아 무릉도원으로 안내하겠다는 듯 화폭 속으로 이끌더니, 눈을 빨아들이고 종국에는 그의 판타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나의 영혼을 매료시켰다. 닭과 달걀의 논의가 아니더라도 화가 김종의 그림을 보노라면 그림이 시가 되고 시가 그림이 된 듯한 환시의 착각에 빠지고 만다. 그것은 작가가 시인이기도 하고, 화가이기도 하여 시의 이미지에 몸이 내리면 그림이 태어나고, 그림이 몸을 일으켜 언어의 날개옷을 입으면 시로 환치되는 과정이 작가의 핏줄을 타고 순환하기 때문이리라.
모든 물상은 화가의 마음속에 들어가 세포상태로 분해되고 해체된 다음 재구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작가에 의해 재창조된 파동은 제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은 본래의 파동과 중첩되어 나타난다. 가령 무선방송에서 저주파의 신호가 고주파의 반송파((搬送波)에 중첩되었다가 수신할 때는 원상복귀 되듯이 감상자의 개인적 경험과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새로운 美感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듯 숙성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화폭은 평면성을 탈피하고 반구상의, 4차원의 시공간에서 자유로운 상상의 날개를 펴고 입체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반수반인(半獸半人)인 스핑크스에서 우리는 신화나 전설을 꿈꾸게 된다. 그렇듯이 그의 반구상의 화면은 무량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바야흐로 작가의 감정이 그림을 타고 감상자의 마음으로 이입되는 것이다. 독일철학자 롯체의 말처럼 ‘美的 경험은 조화와 통일성의 경험이라기보다는 감정이입의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낯선 반구상의 구도가 마치 원초적 모습이었던 것처럼 친숙하게 감상자의 정서 속으로 다가온다. 시인 정중수의 표현처럼 ‘내 마음에 손을 집어넣는 그림’인 것이다.
그 도저한 상상의 바다에 일단 몰입되면 헤엄칠 생각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된다. 어느 찰나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떠올라 하늘의 젖가슴을 만지게 되고, 유유자적 떠가는 구름 위에서 모태의 양수에 잠겨있는 것처럼 편한 유영을 하게 된다. 돈오돈수(頓悟頓修)란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울림이 깊은 종소리에 영혼이 녹아들 듯 출렁이는 이미지의 역동성에 흡인되어 언어와 그림의 방식을 떠나 또 다른 차원으로 이입되는 시공의 파천황을 경험하게 된다. 그야말로 물아일체, 화아일체(畵我一體)가 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을 대하면 태초에 그랬듯이 예술의 모든 장르가 한 탯줄의 살붙이임을, 춤이나 노래나 문학이나 그림이 한 몸인 것을 절로 알게 된다.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산이, 강이, 달이, 태양이, 꽃이, 소나무가 마음을 열어 말을 건넨다. 마음의 고막이 떨려 노래가 들리고, 그 흐드러진 곡조에 맞추어 어깨가 들썩인다. 동굴처럼 굽이굽이 휘감긴 마음의 여로에도 회오리바람에 날리는 흙먼지처럼 구석구석 어루만지듯 흥이 일어난다.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일찍이 예지했기에 톨스토이는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의 척도를 ‘정서의 감염정도’로 삼았던 것이 아닐까.
恨을 희망의 美感으로 승화시키다
색채가 화가로부터 선이라는 영매를 통해 형체를 받으면 마음이 깃들어 생명체가 되고 그 생명체 속에 인간의 영혼이 투영된다. 한 점의 좋은 그림이 그 자체로 창조물이 되는 것은 그 그림을 보는 이의 영혼의 눈을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이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름다리가 되는 것은 어쩌면 화가 본인이 파란만장한 질곡의 세월을 맨발로 건넌 순례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는 恨의 중심에 서있으면서도 恨의 나락으로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 자신의 恨을 생의 구심점으로 승화시켜 따뜻한 시선으로 녹여낸다. 그리고 그림 속에는 희망의 원심력을 펼쳐놓는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에는 활기를 넘어선 生氣가 넘치고 감상자의 기분까지 들어 올려주는 마술을 부리게 된다. 그래서 평론가 염창권도 “나는 그의 그림을 보기보다는 읽으면서 그의 평화로운 세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에 동참하는 것이다.”라고 심중을 밝혔으리라.
모든 색이 아름답듯이 모든 사람이, 아니 우주의 삼라만상이 모두 아름답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김종의 그림은 마치 手話처럼 또 다른 언어로 우리와 소통한다. 그래서인지 김종의 그림에는 무수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보는 이의 상상력을 경계 없이 자극한다. 꽃이 아라베스크 춤사위로 발레를 하고 분기탱천한 수탉무리가 볏을 세워 당돌하게도 태양에의 역성혁명을 꿈꾼다. 보름날이면 대게들이 오종종 모여 주흥 도도한 어깨를 겯고 달구경을 하고, 강물은 여섯 개의 예쁜 가슴을 탐스럽게 출렁이며 흘러간다. 가까이 다가가 살포시 어루만지고 싶어진다. 화가 황영성의 말처럼 ‘긴 이야기를 지켜보는 행복한 구경꾼’이 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을 나누어 천지를 연 것처럼
담론을 즐기며 회합하던 산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서로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설악산은 품 넓은 바다에 빠져서 봉우리가 쑥쑥 자란다. 깊은 산속의 바위들은 바깥세상이 궁금하여 엉거주춤 목을 길게 빼고 궁금한 세상을 향하여 두리번거린다. 그림 속의 산으로 들어가 바위와 맞닥뜨려 손을 맞잡고 악수를 나눈 뒤 세상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랑하고 싶어 발가락이 간지러운 나무들은 옆지기와 뿌리가 엉기고 팔을 뻗어서 가지끼리 입을 맞추고 종단에는 핏줄을 열고 샴쌍둥이처럼 생명을 공유하게 된다.
작가와 감상자가 연리목처럼 한 몸이 되어 심장을 공유하고, 꽃과 향기를 공유한다. 피아(彼我) 고막의 동일한 떨림을 통하여 그들의 속삼임에 청각이 열린다. 그림의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모두 꽃으로 피어나고 꽃잎이 분분히 날린다. 그리하여 천지간이 꽃잎천지로 형상화되어 꽃잎 사이사이를 사물이 떠다닌다. 꽃잎은 그 자신이 아름다운 영혼의 상징이다. 아름다운 영혼은 야래향처럼 칠흑어둠을 뚫고 다른 영혼의 후각세포를 흔들어준다. 그래서 작가 조정래는 그의 그림을 보고 “파격을 넘어 혁명적이다. 시인의 영혼이 포착해낸 회화적 필연성이 화가의 영혼으로 꽃피움하고 있다.”고 설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최근작 ‘만남’을 보면 우선 첫인상에는 화폭중심에 허공의 눈인 듯한 두 눈망울이 들어온다. 그러나 골똘히 들여다보면 한 쌍의 부리와 두 쌍의 날개가 허공을 감싸 안고 있다. 아하! 숨은 그림을 찾아냈을 때처럼 무릎을 치면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허공을 갈라놓은 척 하면서 기실은 서로의 입을 맞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광대무변의 허공에서 인연의 옷깃처럼 우리의 만남은 이루어진다. 친불친(親不親)을 따지지 않고 더불어 어울리기 좋아하는 그의 다정다감한 심성이 은유적으로 표현된 것이리라.
나무와 물과 산의 삼각 함수는 화가에게 숙명적인 몰입의 대상이다. 그들의 상생관계를 거쳐서 화폭 속의 사물은 태어나고, 자라고 마치나 강강수월래를 추듯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린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화가의 정신이 빙의된 산천초목이 마음을 열면 감상자의 마음도 그림 속으로 녹아 들어가게 된다. 화폭 속의 피사체들은 독특한 개성미를 구가함으로써 끊임없이 감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한편으로 가장 개성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진리처럼 보편타당한 우주적인 얼굴을 갖고 있다.
희로애락의 표정을 담아낸 색채의 마력(魔力)
평론가 리헌석은 일찍이 김종의 그림을 평하기를 ‘목숨의 소리가 색채로 거듭났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그의 그림은 색(色)에도 희로애락의 표정이 있다는 것을 경이롭게 펼쳐 보인다. 똑같은 빨강도 서러운 빨강이 있고 오르가즘에 도달한 듯한 환희의 빨강이 있다. 생의 발자국을 뒤돌아보면 아무리 아팠던 상처도, 아무리 좋았던 황홀경도 기억의 가마솥에서 노릇노릇 구워져서 고소한 추억으로 정화된다. 그러하듯이 ‘색채는 모두 아름답다’는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미운 색채도 그림의 자궁인 그의 붓길을 돌아 나오면 첫 호흡의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고 새 생명의 오묘한 빛으로 거듭난다.
한편 화폭을 활기차게 넘나드는 색층의 광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마치 태초에 조물주가 빛과 어둠을 나누어 천지를 연 것처럼 선(線)이 안과 밖을 구분하여 그림의 천지를 열면 색채들이 하늘과 땅 사이를 분신술을 쓰듯이 메워 나간다. 분신술에 등장하는 사물은 복제품이 아니다. 한 개의 점도 똑같은 것이 없다. 똑같은 색상도 칠하는 순간의 작가의 마음과 붓놀림에 따라 울었다가 웃었다가 찡그렸다가 오른 무릎을 괴고 앉아 명상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물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한다. 화폭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그림 속의 사물이 움직이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그러나 김종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이 한 편의 시처럼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마술을 부리듯 오만 갈래로 갈라지는 심중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의무봉같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그의 美感 속으로 홀려 들어가게 됨을 어쩌랴.
(태양을 들어올리는 사람들)
그림을 시작하면서 작가가 출사표로 던졌다는 ‘백치의 머리와 색맹의 눈으로’라는 표제를 음미해본다. 백치의 머리란 무엇인가. 갓 태어난 신생아의 뇌처럼 어떤 편견도 없는 원초적이고 순수한 생명성의 추구, 그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기존의 질서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겠다는 단호한, 어쩌면 무모에 가까운, 그러기에 한없이 고적(孤寂)할 그만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였을 터이다.
한편 색맹의 눈은 어떤 시력인가. 그가 말하는 색맹이란 청홍색맹처럼 한두 가지 색을 구분 못하는 차원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아마도 전색맹처럼 명암으로만 색의 순수성을 느끼고자 했을 것이다. 맹인이 점자책을 더듬어 읽듯이 청각과 촉감에만 의지하여 사물의 깊이를 파악하다보면 정상인에게서는 퇴화되어버린 미려한 五感이 열린다고 한다. 맹인이 수수만 번 넘어지고 깨진 피투성이 상처가 온몸에 비단구렁이의 무늬처럼 감길 때에야 비로소 암흑 속에 열리는 그 자신만의 길을 찾아내듯이 그의 오감도 그렇게 참담한 상처들을 앓고 난 후에야 그들을 버팀목삼아 환하게 열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오감이 더듬어낸 색채는 다양한 명줄들의 온갖 명암을 반사하는 풍부한 표정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하얗게 길을 막아섰던 새벽안개가 걷히듯
또한 그의 작품전(백두대간의 생명미감전)의 주제인 [자궁에서 왕관까지]에서 ‘한라산 백록담이 자궁으로, 백두산 천지가 우리 민족의 머리 위에 씌워진 한없이 아름다운 왕관의 형상으로 내게 다가왔다’고 작가는 고백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속내를 살풋 감춘 말일 듯싶다. 아무튼 백두대간의 이미지를 그리 형상화시킨 것도 가히 천재적인 발상이지만, 나는 임의로 그 주제의 속뜻을 자궁은 화가 본인으로, 왕관은 그의 그림과 만나는 감상자들의 영혼으로 생각해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만나게 될 수많은 영혼들과의 대화를 상상하면서 섬김의 정신으로 작품을 완성했으리라.
자신의 자궁에서 빚어낸 그림들에게 젖을 먹여 키워낼 사람은 그림의 감상자들임을 작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을 터이다. 자신의 자식들을 양육할 양부모들에게 왕관을 씌워주기 위해 그는 노심초사 자신을 달구었으리라. 작가로부터 왕관을 받아쓰면서 어느 누가 그가 창조해낸 세포 하나, 붓이 걸어간 한 획, 한 줄기의 색층도 소홀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것은 작가가 천지를 채색할 때 주로 붉은색을 쓰는 이유이다. 왜 작가의 눈에는 시퍼렇게 출렁이는 천지의 물빛이 핏빛 같은 선홍의 색채로 다가간 것일까? 화가의 시각적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에게 말하고자 함은 무엇인가. 천지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국토의 왕관이다. 왕관이란 두건처럼 아무나 머리에 쉽게 뒤집어쓰는 물건이 아니다. 한 국가를 대표하고 백성을 대변하는 그야말로 지존인 임금만이 쓸 수 있는 금빛 찬란한 상징물이다. 작가는 파란만장했던 우리 민족의 수천 년의 역사와 애환을 회억하면서 물결치는 가슴으로 민족의 영지(靈池)인 천지의 머리에 핏빛 왕관을 씌웠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천지의 붉은 색층을 이윽히 들여다보면 뭔지 모를 비장함이 나의 가슴을 들썩이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와 일심동체가 되어 그의 그림 속을 거니노라면 우리가 닮고자 했던 큰바위얼굴이, 우리가 찾고자 했던 무릉도원이, 길을 하얗게 막아섰던 새벽안개가 떠오르는 햇살에 말끔히 걷히듯 명징해진 우리들 마음속에 비쳐오는 또렷한 신천지를 느끼게 된다. 나는 무슨 복이 이리 많아 그의 그림을 만나게 되었고 그림이라는 또 다른 세계의 환상을 경험하게 된 것인가.
다음 작품전에 대한 그리움의 활시위가 팽팽하다
작가는 다음 작품전(2009.11.5-11 광주광역시 금호미술관 등)을 준비하면서 허공의 상차림에 끼어든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허공이 수족을 움직여 천지간에 조화를 부리는 한, 호기심에 달뜬 나의 시야는 광각화될 수밖에 없다. 허공은 불가사의한 주머니를 가지고 있다....... 비누방울 같은 덩어리 덩어리로 바람도, 나무도, 바위도, 해와 달, 날아다니는 새무리까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항상 새로운 상을 차려낸다. 수십 억 인구 중에 똑같은 얼굴이 없듯이 날마다 떠오르는 해도 똑같은 빛이 아니다. 그래, 그것들을 나는 주체 못한 가재도구처럼 여기저기 흩트려 놓고 예술의 강가에 나와 배가 불심하게 물을 마시고 강물에 잠겨 숲을 짓고, 태양을 띄우고, 저마다의 기기묘묘한 심지에 불을 밝힌다. 상상력의 뭉게구름을 타고 주유천하하는 재미, 허공이 끄집어낸 것들을 빌어 쓰면서도 내 곳간에서 꺼내 쓰는 것처럼 자유롭게 내 화판 위에 처억 척 올려놓는다.” 작가의 辯이다. 시인 화가의 독특하면서도 섬세한 눈으로 담아낼 불가사의한 허공의 그 무량한 화폭을 향한 그리움의 활시위가 벌써부터 팽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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