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박수근]
국민화가 박수근이 빨래터에서 만난 여인은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지금의 잣대로 보면 한창 나이였다. 지금은 국민화가로 추앙 받지만 당시만 해도 미군 장교를 상대로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야 했던 가난뱅이였다. 지난 4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의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50주기 기념특별전을 참관했다. 마침 이번 전시회는 중앙일보 창간 50주년 기념행사이기도 했다. 그 덕에 정용빈 DDP경영단 단장으로부터 친절한 설명을 듣는 행운도 누렸다. 혼자 듣고 흘려버리긴 아까워 기억나는 대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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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향은 강원도 양구다. 36살 때 6·25를 만나 급하게 피란을 떠나면서 가족과 헤어졌다. 그러다 극적으로 재회한 게 동대문구 창신동이었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이 창신동 시절(52~63) 완성된 건 이 때문이다. 창신동 집 마루가 그의 유일한 작업실이었다. 미군 장교가 그림을 보러 올 때면 온 식구가 옷을 깨끗이 차려 입고 깍듯이 맞았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박수근 뒤에 그의 대표작이 아무렇지 않게 놓여있다. (저 그림 중 한 점만 사놓았더라면) 그의 50주기 특별전 장소로 DDP가 선택된 까닭이기도 하다. DDP는 창신동 그의 집과 지척거리다. 이번 특별전이 ‘특별한’ 이유는 흩어져 있던 그의 대표작 50점을 처음 한 곳에 모았다는데 있다.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서도 전시회는 열렸지만 화랑들간 혹은 소장자간 의견 차로 대표작을 한 자리에 모으지 못했다.
전시장 안에 발을 들여놓으면 바닥에 있는 검은 점과 만난다. 점은 창신동 박수근의 집 자리라고 한다. 전시장의 동선은 달동네에 있었던 그의 집과 같은 높이의 등고선을 그대로 재현했다. 구불구불한 달동네 골목을 돌아 나오는듯한 분위기도 의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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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은 서양의 점묘화를 떠올린다. 선이 아니라 작은 점을 무수히 찍어 형상을 만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점묘화와는 전혀 다르다. 점을 찍은 게 아니라 물감을 수도 없이 덧칠했다. 불규칙하게 물감을 덕지덕지 바르면서 풍화에 마모돼 울퉁불퉁한 화강암 표면과 같은 질감을 재현했다. 정 단장은 “박수근은 생전에 우리나라 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 조각에서 한 없는 영감을 받았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했다”며 “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 질감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철저히 의도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오죽했으면 그의 호가 ‘미석(美石)’이었을까.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로 추앙 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철저하게 한국적인 화풍으로 한국적인 소재를 그렸다. 당시만 해도 국내 화단은 서양이나 일본에서 그림을 배워온 화가가 주류였다. 서양식 화풍과 소재가 대세를 이룬 건 당연했다. 박 단장은 “서양 화풍 일색이던 화단에 처음 한국적 화풍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겸제 정선에 비견된다”고 설명했다. 조선에선 대대로 중국 산수를 중국식으로 그려왔다. 그러다 겸제에 이르러 처음 한국 산수를 그만의 독창적 방식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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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이 ‘빨래터’다. 2007년 45억2000만원에 거래돼 국내 미술품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그러다 진품 논란이 벌어져 법정으로까지 갔다. 숱한 화제를 낳은 끝에 법원은 “진품으로 추정된다”는 애매모호한 판결을 내려 논란을 키우기도 했다. 이번 특별전에 전시된 작품은 진위 논란에 휩싸였던 작품이 아니라 또 다른 빨래터다. 작품이 더 큰 만큼 가격도 훨씬 비쌀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아직 거래가 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박수근에게 빨래터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부인 김복순을 만난 게 바로 빨래터였다고 한다. 빨래하는 부인의 모습에 홀딱 반해 평생의 반려자로 삼았다니 낭만적이면서도 정겹다. 빨래터는 당시 아낙네들의 사랑방이자 서민 생활의 핵이기도 했다. 그만큼 빨래하는 여인이 자주 등장한다.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독창적 기법_화강암 표면 같은 우툴두툴한 질감 속에 새긴 우리네 삶의 정경 -박수근, [농악], 1962년_하드보드에 유채, 59.3×12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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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박수근의 작품에선 남자를 찾아보기 어렵다. 남자는 노인 아니면 어린아이뿐이다. 그나마 ‘청소부’와 ‘농악’이란 작품에 남자 어른이 등장한다. 그런데 청소부의 남자는 쉬고 있고 농악에선 놀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아이를 돌보는 일은 대부분 여성이 맡고 있다. 1950~60년대 달동네의 모습을 희화적으로 포착해냈다. 그의 눈에 남자 어른은 늘 술 먹고 늘어져있거나 놀고 먹는 존재로 비쳐줬던 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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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의 그림에서 주인공은 배경과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서양화의 특징인 원근감은 무시되기 일쑤다. 자연이나 환경과 동화하는 걸 미덕으로 삼은 동양적 사고가 짙게 묻어난다. 그러면서 정적이다. 시장에서 뭔가를 팔고 있는 아낙네는 그의 그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그런데 늘 똑 같은 자세로 앉아있다. 그러나 그 속엔 정중동의 모습이 늘 숨어있다. 아래 그림에서도 두 노인과 세 소녀는 정적이다. 그러나 왼쪽 노인을 잘 보면 뭔가 말을 하고 있다. 소녀들도 마찬가지다. 이 그림의 구도도 재미있다. 아래는 노인이, 위에는 소녀들이 배치됐다. 아래는 지는 세대, 위는 피는 세대다. 노인은 두 명, 소녀는 세 명이다. 두 명이 훨씬 안정적이다. 지는 세대는 안정을 피는 세대는 역동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또 다른 천재화가 이중섭과는 판이한 화풍이다. 이중섭은 천재적인 감성을 일필휘지로 분출해냈다. 그의 대표작 ‘황소’를 보노라면 에너지와 힘이 느껴진다. 이와 달리 박수근의 그림은 정적이다. 끝임 없는 덧칠 작업에서 각고의 인내가 겹겹이 묻어난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화가의 화풍이 이처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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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시리즈는 박수근의 작품에서 또 하나의 고봉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나무엔 늘 잎이 없다. 그러나 죽은 나무가 아니라 봄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다. 지금은 헐벗고 굶주리지만 봄은 반드시 올 거라는 희망이 그 속에 담겨있는 건 아닐까. 대표작 ‘나무와 여인’엔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왼쪽 여인은 아이를 업고 있고 오른쪽 여인은 광주리를 이고 있다. 한쪽은 대를 이어가는 여인, 다른 쪽은 생계를 이어가는 여인이다. 세로로 뻗은 나무와 가로로 배치된 여인의 구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그의 그림엔 아내와 아이들이 모델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그의 대표작 ‘절구 찧는 여인’의 모델은 아내 김복순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내는 하루 종일 절구 앞에서 ‘벌’을 섰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절구는 이미 골동품이 됐지만 박수근은 절구를 찧는 한국 아낙의 모습을 후대에 남기고 싶어했다.
그림 아래 작은 사진은 아들 박성남의 어릴 적 모습이다.
6·25 때 헤어졌다 극적으로 다시 만난 뒤 다시는 헤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아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남겼다고 한다
천진난만한 아들의 얼굴에서 사무치는 부정이 느껴진다.
국민화가이긴 하지만 박수근도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동양적 사상을 고집했지만 딱 한 번 국전에 내기 위한 작품을 남겼다. ‘집(우물가)’란 작품이다. 박수근의 다른 작품과 달리 이 그림은 등장인물의 윤곽선이 뚜렷하다. 원근감도 두드러진다. 당시 화단을 지배하고 있었던 서양 화풍을 수용했다는 얘기다. 이 작품으로 박수근은 제2회 국선에서 특선을 차지한다.
이번 특별전에선 흔치 않은 박수근의 수채화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그가 수채화의 대가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새삼스러웠다.
50점이지만 가치로 따지면 18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더욱이 앞으로 박수근 특별전은 10년 단위로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대표작을 이번처럼 한 곳에 모으기도 어렵다. 어쩌면 우리 생에 마지막으로 누릴 호사가 아닐까. 언제 1800억원어치 그림을 한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으랴. 전시회는 6월 28일까지다
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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