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 목 : “영적 장자여! 성숙한 위로자가 되라!”
+ 본 문 : 욥 기 2장 11절 - 13절 (구약성경 762쪽)
11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12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13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아멘!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 “잘 되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면 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잘 됩니다.” “믿고 기도한 대로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관계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무슨 일에나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함으로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항상 험담과 비난과 깎아내리는 일을 잘 함으로, 인간관계를 허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위로자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비난자로 살아가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을 잘 하므로 사람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울적할 때 노래를 듣습니다. 찬송가가 아닌 옛날 노래로 위로를 받습니다.
한 번은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를 듣게 되었는데, 가사가 너무 좋아서 내릴 때가 되었는데도 안 내리고,
그 노래가 끝날 때까지 다 듣고야 내렸습니다. 곡은 기억 안 나지만 가사는 인터넷을 통해 알았습니다.
가수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목은 “사랑” 이라는 유행가입니다. 가사만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람아.
비 내리는 여름날엔 내 가슴은 우산이 되고. /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은 불이 되리라.
온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없는 내 여인아. / 잠시라도 떨어져선 못살 것 같은 내 사람아.
행여 당신 외로울 땐 내가 당신 친구가 되고. / 행여 당신 우울할 땐 내가 당신 웃음 주리라.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 / 보고 또 보고 또 쳐다봐도 싫지 않은 내 사람아.
여러분! 울적할 때는 가사가 좋은 세상 노래나, 곡조가 아름다운 세상 노래 한 곡만 들어도 큰 위로가 됩니다.
하물며 영의 노래인 하나님 찬양으로, 그리고 좋은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인 욥기서에 보면, 욥에게는 좋은 친구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큰 고난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각자 살던 지역에서 먼 곳 욥이 사는 곳에 찾아왔습니다.
한 친구의 이름은 욥이 사는 우스 땅에서 남쪽으로 약 150마일 떨어진 데만에서 사는 엘리바스입니다.
또 한 친구는 수아 사람 빌닷이라는 사람입니다. 그가 사는 수아는 유프라테스 강 중류 지역을 말합니다.
욥이 사는 우스 땅에서 동쪽으로 가면, 지금의 이라크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 수아라는 지방이 있습니다.
또 한 친구는 나아마 사람 소발입니다. 나아마는 아라비아 사막을 지나 지중해 서쪽에 있는 소도시입니다.
물론 이 세 친구는 욥의 고난을 다 이해하지 못한 면도 있었지만, 이만한 친구들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좋은 친구는 과연 어떤 친구입니까? 좋은 친구는 어려울 때 위로자가 되어 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그러면 욥의 세 친구는 어떤 친구였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 서로 좋은 위로와 격려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이 어렵고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찾아 주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이,
이 모든 재앙이 그에게 내렸다 함을 듣고, 각각 자기 지역에서부터 이르렀으니,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라. 그들이 욥을 위문하고 위로하려 하여 서로 약속하고 오더니”
욥의 세 친구들은 한 동네에 사는 친구들이 아닙니다. 200km 이상 떨어진 먼데 사는 친구들입니다.
지금처럼 전화니 핸드폰이 있던 시절도 아닙니다. 그런데 욥이 어려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걸 보아서 욥과 그의 친구들은 정기적으로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묻고, 교제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좋은 일이나 굳은 일이 있으면, 서로 만나서 도와주는 그런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욥이 어려운 일을 당했다는 소식에, 욥을 위로하기 위해서 같이 한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서, 친구의 고난의 현장에까지 달려와 함께 있어 주면서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이런 친구가 고난당한 자의 좋은 친구입니다. 고난당했을 때 달려와 함께 해주고, 위로해 주는 친구 말입니다.
성경에 좋은 친구의 예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을 빼 놓을 수가 없습니다.
사무엘상 18장 1절에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서로 연락되었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사랑하니라.” 아멘!
요나단은 다윗을 사랑했기에,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피하게 해서 생명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왕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다윗을 향한 요나단의 이런 우정은 보석처럼 빛나는 우정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의 우정을 노래하기를 “친구 요나단의 사랑이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왕이 된 후에, 그 우정을 저버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아 줍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나바와 바울의 우정도 빼놓을 수가 없는 우정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옛 친구들인 유대교 동료들에게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고향인 다소에 내려가 “주님은 나를 언제, 어떤 모양으로 쓰시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소에 있는 바울을 찾아가서 그를 안디옥으로 데리고 와서, 함께 동역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이 바울은 내가 보장한다. 그의 회심은 확실하다. 주님이 택한 그릇이다.” 변호하고 동역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친구는 예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의미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친구로 둔 사람입니다. 아멘입니까?
왜 예수님이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입니까? 예수님은 나보다 먼저 내 곁에 찾아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생각하신 분 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먼저 찾아 주셨습니다.
물론 나의 가족을 통해서 나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나의 친구를 통해서도 나에게 찾아와 만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있는 우물가에서 물을 얻기 위해 나온 여인을 찾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가서 ‘나를 따르라.’ 제자 삼으셨습니다.
뽕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삭개오야!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하겠다!” 하시며 찾아가 주셨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찾아 주시고, 만나 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그 때에도 찾아오셔서,
“사랑하는 내 아들아! 사랑하는 내 딸아! 울지 말라!” 하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언제나 고난 받는 우리의 삶의 현장 가운데,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해주시는 좋은 분입니다.
우리가 기뻐할 때는 함께 기뻐 웃어 주시고, 우리가 슬퍼 눈물 흘릴 때에는 함께 슬퍼하며 울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시며 위로하십니다.
둘째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이 당한 고난에 함께 동참하는 참 좋은 친구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말씀입니다. /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욥의 세 친구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병든 친구를 보는 순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7일 동안 욥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됩니다. 그리고는 욥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합니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훌륭한 위로자였습니다. 참된 위로는 고통당하는 자와 고통을 함께 느끼는 위로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은 편입니다. 국방도 그렇고 경제도 그렇습니다.
또 날이 갈수록 현대의학으로도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난치병이 언제 누구한테 기승을 부릴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지금 가치관이 몹시 흔들리는 혼미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비행 청소년이 많습니다.
방자하게 행동하는 자식들로 인해 남에게 말 못할 고민을 안고 고통하는 부모들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습니다.
노인문제도 여간 심각하지 않습니다. 노쇠한 노인들이 점점 뒷방으로 내몰리고,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욥의 고통과 같은 것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현재에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진실 된 마음으로 같이 아파해 주는 위로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욥처럼 이미 끝장 난 사람, 다시 일어설 가망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을 피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같이 울어 주고 같이 아파해 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까지 힘들어질까봐 외면하고 피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고자 할 때, 아무리 논리적으로 정당해도 감정과 감정이,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진정한 인간관계가 불가능하고 교회 나오게 하는 전도도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성경 지식으로 사람을 설득하려고 합니다. 내가 체험한 신앙체험과 간증으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 지식과 내가 체험한 신앙 간증이 믿지 않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그들은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자꾸 피합니다.
오히려 반감을 품게 합니다. “두고 봐라! 내가 믿는가! 나는 절대로 안 믿는다. 절대로 교회 안 간다.”
그러면서 마음 문을 닫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전도할 때 말다툼은 피하세요. 그리고 이기지 마세요.
그냥 지십시오. 양보하세요. 그리고 대신 그 마음을 얻고, 그 영혼을 얻기 위해서 마음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는 감정이입(empathy)이라고 합니다. 감정과 감정이 서로 상통하는 경지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면에서도 탁월한 위로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시더라.”(마 14:14)
우리 예수님께서는 고난당한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의 감정 속에 들어가셔서,
상한 감정과 아픈 감정과 슬픈 감정을 함께 나누시고, 위로하시고, 치료하시므로 진정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상한 감정과 아픈 감정과 슬픈 감정을 함께 나누시고,
위로자로 격려하여 주시고, 온전히 치료하여 주시는 우리의 진정한 친구 예수님이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욥의 세 친구는 욥이 당한 고난을 침묵으로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 “밤낮 칠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아멘!
지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참담한 고난입니다. 그래서 욥의 친구들은 찾아왔긴 했지만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비극 중의 비극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한 자식도 아니고 열 자식입니다.
거기에다가 재산 몽땅 잃었죠. 종들은 다 잡혀 갔죠. 자신은 악성 피부 종양으로 죽음 직전에 있습니다.
그런 친구에게 병문안 가서 해야 할 말이 있을까요? 바로 그런 때에 제일 좋은 위로가 침묵 위로입니다.
그래서 세 친구들은 고난당한 욥과 함께 밤낮 칠일 동안, 함께 땅에 앉았으나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아는 분들의 병문안 가서, 정말 말조심해야 합니다. 믿음 좋은 척 말하지 마십시오.
“회개 하십시오. 다 죄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 지금 병들어 입원해 있는 분에게 할 말이 아닙니다.
또는 지금 중병으로 수술실에 들어가는 분에게 “수술이 잘되기를 바랍니다만, 혹시 잘못 되었을 때,
천국에 갈 확신이 있습니까? 지금 천국에 들어갈 확신을 가지고 수술실에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무리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은 수술실에 들어가는 환자에게 할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큰 고난당하는 자 앞에서, 정죄하는 설교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로 말조심 하셔야 합니다.
참 좋은 친구가 되고, 참 좋은 위로자가 되려면, 함께 고난에 동참할 뿐, 말보다는 침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고난당하는 사람의 진정한 친구와 위로자가 되려면,
고난당하는 사람을 찾아가 만나주고, 고난에 함께 동참하고, 침묵으로 함께 있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네 번째로, 참 좋은 위로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자요, 고난당하는 자의 좋은 친구였던 의사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의 이름은 벤 카슨이라는 흑인 의사입니다. 현재 소아신경외과 분야에서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사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가난과 역경의 삶속에서 자라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처럼,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용기를 주었던 어머니의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아,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네가 예수님만 잘 믿는다면 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어.
주님이 너와 함께 계셔서 너를 도와주시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어려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라.”
벤 카슨은 33세에 미국 의학계의 최상위층인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 신경외과 주임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아들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의 말을 많이 해주었던 어머니 때문이요.
그 다음은 그 누구도 해낼 수 없었던 아주 어려운 많은 수술을, 그가 성공적으로 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너의 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그 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라.”
그리고 아들 벤 카슨은 그 어머니의 말씀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은 위대한 수술을 해냈습니다.
1987년 2월 2일, 서독 울름에 사는 빈데르라는 부인이 머리 뒷통수가 맞붙은 쌍둥이 사내아이를 낳았습니다.
몸통이 둘, 머리는 하나, 눈은 넷, 입과 코가 둘인 괴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기형아 쌍둥이였습니다.
몸과 팔다리는 각각 노는데, 머리 뒷통수가 붙어 있는 이 쌍둥이 아이의 경우가 학회에 보고되었지만,
어느 의사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이 아이가 곧 죽을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습니다.
이 소식이 벤 카슨에게 전해졌습니다. 카슨은 6개월 동안 그 아이를 검사한 다음 수술을 맡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쌍둥이를 붙들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손을 붙잡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저는 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리고는 1987년 9월 5일 아침 7시 15분에 수술을 시작하여, 22시간 동안 70명의 각 분야 전문의와 간호사와,
의료진이 동원되어 대수술을 집도했습니다. 수술을 마치고 카슨이 밖으로 나오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벤 카슨은 오히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우리 동료들과 함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나머지 일을 하나님 손에 맡기오니, 하나님의 선물들인 이 쌍둥이 아이들을 살려주시옵소서!”
얼마 후, 그 아이 둘이 회복되었을 때 다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어코 해내실 줄 믿었습니다.”
그가 학술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청중들은 ‘아멘, 아멘’ 했습니다. 학술발표회장은 카슨의 간증집회였습니다.
1991년 2월 2일 빈데르 씨로부터 벤 카슨은, 두 쌍둥이 아이의 4 번째 생일 초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초대장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37세의 나이에 세계 제일의 신경외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나 스스로 된 것인가? 오늘의 내가 된 것은 오직 내 안에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내 손은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니, 나는 어머니의 기도와,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 주시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그들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곁에는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위로자와 참 좋은 친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곁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 주고, 말없이 같이 있어 주므로 위로하고,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며,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지금 저와 여러분에게도 진정한 위로자와 참 좋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이유도 없이, 조건도 없이, 무조건 세상 끝 날까지 나를 계속 사랑해 줄 친구가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 있습니까? 그런 친구가 있다면 감사하세요.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런 친구를 달라고 기도하세요.
그런데 이런 참 좋은 친구는 진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야, 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아내가, 나의 남편이, 그리고 교회 안에 함께 더불어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님들이,
그리고 나의 셀 목장 가족들이 나의 친구요. 나의 위로자요. 내가 또 그들의 친구요. 위로자임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욥에게 좋은 친구를 주셨듯이, 저와 여러분에게도 둘러보면 좋은 친구들을 많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걸 믿으십시오.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요. 위로자는 우리 예수님임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와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고, 지금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또 다른 사람들을 찾아가 만나 위로하고 격려하는,
참 좋은 친구들이 되어 주시기를 우리의 친구와 위로자가 되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