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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수도회] 거룩한 파격을 사는 오늘의 복음사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에페 4,1-7.11-13
+ 복음 마태 9,9-13
성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 일하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 복음사가가 전하는
증언의 핵심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서가 서술하는 나자렛
예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주석 성경』 ‘마태오 복음서 입문’
참조)이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 사도는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다.
◈ 오늘의 묵상
마태오 사도에 대하여 복음이 전하는 내용은, 그가 세리였다는 사실과
세관에 앉아 있던 그를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가 일어나 세리직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마태오는 ‘주님의 은덕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리고 마태오가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든, 그 당시
세리는 공공연하게 독사와 같은 매국노로 지탄을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아 일하던 그런 부류의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부르신 것은 뜻밖의 선택이었습니다. 부르심을 먼저 받은 다른
사도들에게도 이 일은 언짢았을 것입니다. ‘저런 인간을 우리와 한 무리가
되게 하시다니.’ 자존심이 상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아마도 어부는 세리와,
세리는 어부와 어울리고 싶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 분이신 아버지 하느님, 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분이신 성령
안에서 어부도 세리도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이들
가운데에는 죄인도 있고 부족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자비를, 병든 이들을 고쳐 주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선포해야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나 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함께 일할 사람을 이런저런 조건으로 골라 뽑는
우리의 모습이 주님 앞에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인간적 조건과 자격이 잘
갖추어져 있을수록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체험하기가 더 힘들지
않을까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마태오는 본인이 저술한 마태오 복음에서 자신이
‘세리’였음을 고백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다고
확신하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자만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책을 느끼면서 절실하게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 매일 미사 -
◈ [서울]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저를 만나는 분들이 요즘 제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차장 신부님이
오셔서 좋겠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좋습니다. 천명에 달하는 예비
신학생들을 저 혼자의 힘으로 도와주기에 벅차기 때문입니다. 특히 일반,
고3 예비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고,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은 저보다는 차장 신부님께서 더 잘 하실 것 같기 때문입니다.
매월 있는 담임 부제님들과 조 담임 신학생들과의 만남도 제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품식 준비, 성소주일 행사도 더욱 알차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혼자 그리기에는 벅찬 그림을 차장 신부님과 함께 그려 보려고 합니다.
성소후원회가 없는 본당에 성소후원회가 조직 될 수 있도록 찾아가려고
합니다. 하루 피정, 강의, 미사를 준비해서 찾아가려고 합니다. 본당에서
원하면 언제든지 방문하려고 공문도 보내 드렸습니다. 매월 있는
성소후원회 미사를 위해서 소식지도 만들려고 합니다. 제가 묵상 글도
쓰고, 회원들의 글도 나누고, 행사의 사진도 나누고, 고마우신 분들에게
감사도 드리고, 새로운 소식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매월 지구장님들과
하루 만남의 날도 가지려고 합니다.
부제님들이 작성하던 매월 모임의 교재도 새롭게 만들려고 합니다. 햇살
청소년 사목센터와 연대해서 통합적인 교재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서울대교구에서 만들어지는 예비 신학생들을 위한 교재를 다른 교구와도
나누려고 합니다. 부제님들과 조 담임 신학생들의 부담을 줄이고, 내용은
더욱 알차게 만들려고 합니다.
10년 전,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주었던 ‘천년과 하루’와 같은 프로그램을
제작하려고 합니다. ‘사제양성 과정, 사제들의 사목현장,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목자’라는 주제로 다큐를 제작하려고 합니다. 예비자 교리 때 사용할
수도 있고, 주일학교 교리 시간에 사용할 수도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서품식에 오시는 분들에게 판매도 할 예정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줄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할 이들이
많아져서 좋은 날들이 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오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신 것은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큰 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계속 이어지는 한 결국 산은
걸림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은 박 노해 시인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박 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사랑운동을
몸에서 특별히 보살펴야하는 아프거나 약한 곳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제는 여기 오늘은 저기 70kg정의 몸이 뭐 그리 다양한지 그러네요.
가족이 많으면 바람 잘 날 없다 하듯 몸도 오래 되니 그러네요.
뇌가 몸의 아픈 곳을 특별히 관리하라고 자주 일깨우는 게 정상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큰 가족 살림은 불우한 자에게 더 신경 써야 되겠지요.
예수님은 오늘도 신앙인들과 함께 계시며 사랑운동을 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오 9,12)”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나를 따라라.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1-7.11-13
복음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9-13
크래시 배기지(Crash Baggage)라는 여행 가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방의 외부는 울퉁불퉁하게 되어 있어서 마치 손상된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낡은 가방처럼, 또 손상된 가방처럼 보이는데도 사람들은 이
가방을 선택합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새로 산 여행 가방이 여행 중에 이리저리 부딪혀서 패이게 되면 아주
속상하지요. 그런데 이 가방은 미리 손상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
부딪혀도 그렇게 속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크래시 배기지의
슬로건은 이것입니다.
“(주의 없이) 막 다루세요.”(Handle without care)
보통 주의사항으로 ‘주의해서 다루세요.’를 많이 보지요. 그런데 그런
주의사항과 정반대인 것입니다. 이 정반대의 생각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되었고, 많이 팔리는 이탈리아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생각의
전환이 이렇게 커다란 가치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바꾸어 생각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 때문이지요. 그러나 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지기 위해
고정관념에서 탈피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고정관념은 무엇일까요? 돈이 많아야 하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야 한다는 것 등의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다보니 늘 부족한 것투성입니다. 남들은 많이 가지고
있고, 나는 한 없이 부족하기만 한 것 같아서 세상의 불평등의 주인공으로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세상의 가치를 쫓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쫓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하다는 것을 많은 성인성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발견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역시 그 모습을
보여주지요. 그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따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편하고 쉬운 삶을 버리고,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는 생각의
전환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전환이 주님의 제자로 만들었고,
하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계속해서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과연 어떠할까요? 주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생각하기보다는, 어렵고 힘들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할 수 없습니다. 힘듭니다. 나중에 하겠습니다.”라는 말만을 내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제는 주님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생각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 안에서만이
참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의 전환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가진 것 없이 행복해지는 방법, 그건 참 간단하다. 행복을 찾기 위해
소매를 걷지 말고 무엇보다 욕심을 버릴 수 있다면 그만큼 행복을 담는
그릇은 커진다(김현태).
내 생각의 크기는?
일반 세일즈맨들의 평균 매출액보다 5배의 매출을 올리는 세일즈맨들을
따로 분리해서 그 비결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온 비결을
찾을 수가 있었지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의 크기(매출목표)가 일반
사람들보다 5배 크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의 크기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한계 지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계 짓는 이유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간절한
사람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데, 그 간절함이 없기에 ‘이 정도면
되었어.’라고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것이지요.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그 모습을 나의 것을
만들 수 없다면 답답하지 않습니까?
이는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의 실천에도 해당합니다.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간절함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내가 받을 사랑만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입구에 서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사람들은 다 웃으며 들어가고
있는데, 사랑의 실천이 부족해서 들어가지 못한다면 답답해하지
않을까요?
어제 은경축을 맞이하신 인천교구의 최경일(빈첸시오) 신부님이십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빠다킹 신부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홍)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마태 9,9)
예수님께서 나를부르시면 막상 "예"하며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같은 보잘것없는 죄인이 어떻게...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것저것 맡고있는 일이 많아서...
본당신부님이 이런저런 직책을 좀 맡아라 하면
10에 8-9명은 이런저런 핑게를 댑니다.
단체 임원으로 선출되어도 "나는 못한다"며
수락거부하거나 아예 선거일에 나타나지도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예" 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예" 했으면 임기동안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이니까요.
주님께서 나에게 뭔가를 맡기시려 한다면
이런저런 핑게를 대지말고 무조건 "예" 합시다.
그리고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봉사합시다.
임기를 마치면 또 하려는 욕심 부리지 말고 다른 사람이 하도록
내려놓고 물러나 뒤에서 도와주도록 합시다.
그래야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거룩한 파격을 사는 오늘의 복음사가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
마태 9,9-13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태 9,9)
거룩한 파격을 사는 오늘의 복음사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지요. 취향과 관심사, 재물과 권력, 성장 배경과
학벌 등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게 마련인 삶의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에 신경을 쓰고 연(緣)을
중시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거기에는 늘 각자의 이해관계와 미래에
대한 안전장치를 추구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차별과
소외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우리네 삶의 가치기준과는 전혀
다르지요.
오늘은 ‘복음사가’ 마태오보다 ‘복음의 사람’이 되어간 세리 마태오에
주목해봅니다. 카파르나움에서 태어난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
마태오는 세리로서 당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동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여 로마 총독에게 바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경멸하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인
세리와 관계를 맺는 것은 종교적인 금기였기에 종교생활에서 소외된
그들은 회개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습니다(루카 19,9-10).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을
뿐 아니라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로마 5,8).
예수님께서 ‘공적 죄인’인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물론 제자들에게까지도 충격적인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하시자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마태 9,9) ‘나를 따라라’ 하는 말씀은
제자단이나 권력에 복종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심에 가득찬
영의 눈으로 소외된 그를 바라보시고 내면의 변화에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렇게 그의 부르심은 직무보다는 복음이 되라는 근원적인 변화에로의
초대인 셈입니다.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경건하신 예수님께서 상것들을 받아들이시고
그들과 어울리신 처사는 수치스런 일이었습니다
(바빌론 탈무드,브라콧 43b). 그러니 마태오를 부르신 것은 인간의
좁디좁은 잣대를 뛰어넘는 ‘거룩한 파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파격적인
처신을 보고 그들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11,19)
라고 비아냥대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파격적인 행동방식이 우리가
극복하고 살아내야 하는 복음의 길이요, 행복의 길임을 알아채야
하겠지요.
폐쇄적인 잣대로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고,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여 차별하며 자기 기준과 취향에 맞는 이들끼리만 어울리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온갖 피조물, 무생물과 광물,
심지어 죽음까지도 동등한 형제 자매로 받아들였던 성 프란치스코의
울타리 없는 사랑이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의 부르심은 죄인인 세리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습니다. 부르심에 따라 나서는 마태오의 태도 또한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시자 “그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9,9). 엄청난
재물을 지녔고 재물에 따르는 권세를 누렸으며, 온갖 비난을 무시할
정도의 강한 자아를 지닌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루카 5,28)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될 수 없었겠지요. 그럼에도 ‘서슴없이’
따라 나선 그는 의인인양 살면서도 순간의 부르심을 알아차리지도
기꺼이 응답하지도 못하는 우리를 향한 강력한 채찍으로 다가옵니다.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지만, 죄를 짓고도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의인이라 여기며 잠든 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는 인식하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남의 죄보다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아파하며
자비를 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마태오는 사도 바오로처럼 ‘죄인
가운데서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라는 정직한 의식을 지녔기에
회개하였고 주님의 사랑 안에 일치되었던 것이겠지요.
죄지은 형제자매들을 단죄하고 잘못을 비난하면서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며
보여주신 한없는 자비심과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열어주시는 그
'거룩한 파격'을 살아내야겠습니다. 한편 죄인 취급을 받았음에도
부르시자 곧바로 “일어나 따랐던” 마태오의 회개를 향한 자발성과 명확한
자기인식을 배웠으면 합니다. 복음이 되어 복음을 썼던 또다른 복음사가로
사는 하루이길 희망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마태 9,9-13)
병든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무엇이 죄인지도 모르고 살아온 우리들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기쁨과 행복을 먼저 가르쳐주십니다.
삶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기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여겼던
우리의 거짓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삶이 슬픈 것은 진정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용하려하다가 서로가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에서 복음은 선포됩니다.
수 많은 잡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건 진실된 사랑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장애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사랑하게 하는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오늘 이순간 우리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기쁨을 아직 모르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함께하는 기쁨을 가르쳐주십니다.
복음은 함께하는 기쁜소식이며 사랑은 함께나누는 행복입니다.
"나를 따라라."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청주] 사랑의 의무|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9월21일 월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축일
(마태9,9-13)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사랑의 의무
예나 지금이나 천대 받고 따돌림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세리를 부정하게 돈거래 하는 사기꾼이나
탐욕스런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부르시고
그 집에서 함께 음식을 나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마태5,44-46).하신 말씀을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9,11)하며 비위에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9,1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매일 다짐하지만 흔들비쭉인 우리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주님이 계시니 행복합니다. 다윗이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
(2사무12,13). 하고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 용서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루옷을 걸치고 흙을 뒤집어쓴 채 단식하여(느헤9,1)
회개하였습니다. 요나도 죽음의 뱃속에서 살려달라 외쳤더니 그 호소를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습니다(요나2,3). 세리도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13)하고 기도했고, 자캐오는
주님의 부름을 받고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남을 속여
먹은 것에 대해서는 그 네 곱절을 갚아 주겠다고 말씀 드렸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는(루가19,8-9)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십자가위의
오른 쪽 죄수는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저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는
확답을 얻었습니다(루가23,43).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의사로서 다가 가셨고, 외적인 병을 치료하는
것을 뛰어 넘어 뿌리를 다스리셨습니다. 주님은 진정 회개하는 죄인에게
구원의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도 그분이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차별 없이 사랑해야겠습니다. 밉살스런
사람은 더 큰 사랑으로 더 많이 사랑해야 합니다. 보기 싫어도 그래도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로마13,8).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에페소서4,1-2) 최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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